기획ㆍ특집

SIDance2013 제6회 공연저널리즘 서울포럼 발제문(1)
국제이동이 예술가 창작활동에 미치는 영향
도널드 후테라_영국 더 타임즈 저널리스트

 레지던스에 울리는 목소리들 
 

 이런 시나리오를 상상해보자. 나는 고국에서 인지도가 어느 정도 있는 무용가(혹은 다른 분야의 아티스트)이다. 창조적인 힘으로 어느 정도 나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있으며 국제적으로도 차차 그렇게 되어가고 있거나 이미 그런 식으로 인정을 받고 있을 수도 있다. 어느 날 전화 한 통이나 이메일이나, 나의 매니저, 혹은 나의 제작자에게 도착해 다른 나라에 있는 기관이나 단체와 공동작업을 만들어 보지 않겠냐는 초청을 전달한다. 아마 현지 아티스트나 학생, 성인들(셋 모두일 수도 있다)을 위한 수업 과 워크숍이 병행될 수도 있다. 혹은 내가 직접 이러한 프로젝트에 참여할 아티스트 공모를 보거나 듣게 됐을 수도 있다.
 세계경제의 불안정성과 이것이 재정적 지원에 미치는 영향과 상관없이, 또 어떤 변수를 고려하든 공연 예술계에서 국제 레지던시는 –즉,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조사하거나 그런 것을 빚어낼 수 있는 시간- 위와 같은 시나리오로 탄생하게 된다.
 이번 발제의 목적과 SPAC 포럼의 요청에 따라 나는 국제적 교류와 결부된 레지던스의 함의와 영향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언론 분야의 관찰자로서 주제를 가진 창작 레지던시, 특히 미들섹스 대학의 레스센(ResCen) 리서치 센터장인 크리스포터 배너만(Christopher Bannerman) 교수가 2009년부 터 아츠크로스(ArtsCross)라는 이름으로 베이징, 타이페이, 런던에서 기획한 레지던시 프로그램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무용가들 중 아츠크로스 참여여부에 상관없이 이들이 국제 레지던시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되어, 내가 ‘얕은 리서치’라고 부르는 리서치를 조금 진행해 보았다. 이메일을 통해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질문을 약 20명 내외의 안무가들에게 보낸 것이다.
 질문 1: 본인의 관점과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국제 창작 레지던시의 가치는 무엇인가?
 질문 2: 그러한 상황에서 이를테면 본인이나 본인의 단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 하는가?
 내가 받은 답변들 중에서 발췌, 편집하고 필요한 경우 맥락을 제공하거나 답변 내용에 담긴 관련 아이디어들을 살펴보기 위한 코멘트를 더하였다.
 쇼바나 제야싱(Shobana Jeyasingh)은 바라트나트얌(bharata natyam)이라는 인도의 고전무용을 공부하였지만 현재는 매우 컨템포러리한 안무가로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영국에서 활동하는 같은 세대의 안무가들을 대표하는 이들 중 하나이다. 그녀는 2009년 베이징에서 있었던 첫 아츠크로스에 참여하였다.
 이를 통해 그녀는 또한 다른 영국, 중국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무용아카데미의 상주 투어단체 멤버들을 위해 단편 무용작품에 대한 제작지원을 받았다. 그녀의 답변은 구체적으로 이때의 경험에 대 한 것이다.
 쇼바나는 베이징에서의 작업이 ‘최근 등장하는 슈퍼파워가 가진 완전히 다른 무용문화에 대한 통찰력’을 주었다고 말한다. ‘권력정치로서의 발레 역사…연습실에서 쉽게 보여지는 화합...춤은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안무는 언어적 예술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 안무가 ‘언어적 예술’이라는 정의에 주목해보자. 이는 어떤 예술적 교류에서든 소통이 필수적임을 암시하고 있다. 쇼바나가 지적하듯 ‘가끔은 고통스러울지라도 창조적 충돌’이 있다면 나는 그 중에 얼마나 많은 부분이 소통의 오류에 기인한 것일지 궁금해진다.
 그녀가 베이징으로 가져올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예를 들면 음악 등 미학에 있어서의 새로운 선택들…작업과 창작의 또다른 방식들…디스아포라적 사고’라고 말한다. 여기서 이 ‘디스아포라적 사고’가 가장 흥미로운데, 특히 남아시아 출신으로서 영국에 살고 있는 쇼바나 자신의 배경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점의 이중성, 혹은 그보다는 다중성으로 인해 –그것을 그녀의 개인적, 예술적 짐이라 부른다 할지라도- 그녀는 어떤 창조적 영역에서든 단일한 관점이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면에서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중적 관점은 직간접적으로 그녀와 리허설 디렉터 인 아바타라 아유소(Avatara Ayuso)가 중국에서 접한 무용수, 디자이너, 또 다른 동료들에게 전달되었음이 분명하다.
 쇼바나의 나이는 50대 중반이다. 스페인 출신의 아바타라는 현재 31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바타라와 잘 아는 사이이며 그녀의 작업을 선보이거나 창작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들이나 프로젝트들을 소개시켜주는 것으로나마 조심스럽게 멘토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영어식 표현으로 하자면 야심가(go-getter)라고 할 수 있는데, 역동적이고 결연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명석하고 능력과 확신이 넘치는 사람이지만 아바타라는 자신과 자신의 예술적 추진력이 진정성에서 온다고 설명한다. 전혀 무례하거나 무심하지 않으며, 이 점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 부족함없이 대처한다.

 아바타라는 2011년 타이페이에서의 아츠크로스에 초청되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중국 본토와 영국, 추가로 대만 출신의 안무가들 몇몇이 중국 및 대만 무용수들을 위한 단편 작품들을 만들었다. 나는 프로젝트가 제일 처음 시작되던 시기 1주일 가량 타이페이에 머물렀다. 가장 놀라웠던 점은 각 지역의 안무적인 대표성이 얼마나 강력하게 기능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아티스트들은 모두 베이징 무용아카데미라는 관료적 체계가 잡힌 거대한 구조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전부는 아니지만- 아이디어들의 꽤 많은 부분을 사전에 준비한 상태로 참여하였다. 반면 영국 아티스트들은 무엇을 만들 것인지 혹은 정해진 주제를 가지고 어떻게 구축해갈 것인가에 대한 아무런 사전인식이 없었다. 부분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와 영국에서 독립 아티스트로 활동한다는 점도 관련이 있을 듯하나, 유럽 혹은 서구의 공통된 가치관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대만 안무가들의 경우는 사전계획의 정도라든지 연습실에서 작업하는 방식 모두 전반적으로 중국과 영국 참여자들의 중간 정도에 위치하였다.
 이런 상이한 접근법을 언급하는 주된 이유는 창작 레지던시의 상대적 가치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마치 쌍방향 도로를 오가는 것처럼 전체 참여자들이 함께 어느 정도로 발견을 해가고 있는가, 그리고 이들이 꼭 그래야 하는가? 창작과정이라는 것이 도대체 얼마나 민주적이어야 하는가?

 어쨌든 내 두 질문에 대한 아바타라의 답변은 타이페이 아츠크로스에 대한 나의 관찰과 어느 정도 일치하였다. 그녀는 ‘중국의 무용수들은 주어진 것을 단지 재생산하는 데에 익숙해져있다’고 말한다. ‘대만 무용수들은 즉흥훈련이 훨씬 더 잘 되어있다. 하지만 영어를 하는 사람이 없어서 나의 주된 과제는 내 컨셉을 그들에게 전달함에 있어 훨씬 더 창의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창작작업시 과제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무용수들이 내가 보여주는 것을 카피하는 것이 아니라서- 나는 아이디어들을 전달하고 그들이 이것을 탐구해볼 수 있도록 통역자나 사전, 드로잉들을 활용해야 했다.’ 통역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자원활용에 능숙한 아바타라는 단순하면서도 독창적인 해결책을 생각해냈 다. 그녀는 ‘움직임의 구성을 전달하고 내게 필요한 것을 어떻겐가 만들어낼 수 있는 복잡한 사운드시 스템을 고안해냈다. 이 모든 것의 가치는 서로 다른 문화에서 온 두뇌들이 자신의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과제들에 반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유럽 무용수들의 레퍼런스는 없었다).’

 3명으로 이뤄진 콜렉티브 도그 케널 힐 프로젝트(Dog Kennel Hill Project)의 창단멤버인 레이첼 로페즈 다 라 니에타(Rachel Lopez da la Nieta)는 작년 11월에 베이징에서 있었던 아츠크로스에 참여하였다. 타이페이의 모델을 기반으로 하여 마찬가지로 대만, 중국 본토, 영국의 안무가들이 참여하였다. 레이첼은 자기 단체의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교묘하게 전복적이고 급진적인 공연을 만드는 예술가이다. 그녀가 베이징에서 만든 단편작품은 프로그램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였다. 그 녀는 중국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예술적] 실천이 전반적으로 한 사람의 자아의 확장인 것처럼 생소한 환경에서 주어진 [작품 창작의] 기회는 정말 나 자신을 시험하고 나의 실천을 굳건히 하는 기회를 주었다. 동양적 철학과 실천에 크게 영향을 받은 서구인으로서, 나는 내가 초대된 문화를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도 기쁘게 생각했다. 나는 중국에 굉장히 살아있는 신체적 문화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사람들이 건강이나 웰빙을 목적으로 움직임을 어느 정도까지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는지는 알지 못했는데, 말 그대로 모두가 이를 활용하고 있었다 - 택시기사에서부터 길을 거꾸로 걷는 할머니까지. 공원에서는 여러 가지 정교한 무술들을 춤추고 체화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 점에서 나는 매우 설렜지만 한편 나의 문화에서는 신체와 정신이 분리되어있다는 사실이 슬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 내가 베이징에서 함께 작업한 무용수들이나 춤의 방향과 발전, 그리고 그들이 어디에 가치를 두고 있는지에 대해 성찰해보게 되었다.’

 레이첼은 베이징에서 보낸 시간을 ‘신뢰를 찾아가는 깊은 과정...무용수들이 생소한 과정들을 믿는 것... 그리고 말 그대로 좋든 나쁘든 서로의 역사와 문화가 갖는 가치와 무게를 깨닫고 이에 상관없이, 이를 넘어 [작업을]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 내가 보기에 이 말에 담긴 중요한 생각들은 문화적 가치에 대한 인식, 그리고 무엇보다 ‘생소한 과정에 대한 믿음’과 관련되어 있다.

 2013년 여름, 아츠크로스는 드디어 영국에서 세 지역(영국, 대만, 중국 본토)에서 온 무용수 및 안무가들과 함께 했다. 그 중 런던에서 활동하는 댐 반 후인(Dam Van Huynh)이 있었다. 나를 포함하여 20명 가량의 학자 및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더 플레이스(The Place)의 무용 연습실들에서 창작과 정중에 있는 작업을 볼 수 있었다. 댐은 이 경험을 금붕어 어항 안에 있는 것에 비유했는데 일리가 있는 표현이었다. 그는 ‘동물원 같은 분위기’라고 말하면서 ‘이 말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형태를 말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모든 아티스트들과 참가자들의 생생하고 활기찬 흥분이 멋지게 넘치는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가 지적하듯 그 활기를 넘어 즉흥의 여지, 그리고 그의 안에 보다 더 의미있는 것에 대한 욕구가 있었다. ‘나의 체험을 돌이켜보니 내게 다가왔던 가장 큰 걱정은 내가 다른 나라에서 온 아티스트들을 알아간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분명 시간제약이나 각자의 목표에 대한 집중 등 많은 변수가 있었다. 결국에 가서는 예의를 갖추고 표면적이었던 회의 이상으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 나를 포함해 모두가 너무 예의를 갖춘 것이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보다 깊은 소 통을 위해] 몇 번 시도를 해보았지만 언어장벽이 매우 커서 타 안무가들과의 대화가 전체적으로 표면 을 훑기만 한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댐이 연습실에서 적은 수의 무용수들과 작업을 했던 것은 훨씬 풍요로운 영역이었다. 이는 ‘모든 마 법이 벌어진 곳이었다. 본능을 그 바탕에 두고 천천히 서로 다른 개성들이 열리기 시작한 것, 초반의 부드러운 예절과 더불어 진정으로 자아를 드러내기 전에 무용수들이 서로를 -그리고 스스로를- 싫어 할 정도까지 몰고 갔던 답답함. 그 공간에서 이 모든 것이 뒤섞이고 우러나오게 되고, 그리고 진짜가 되었다. 인간적인 예술형식으로서 춤은 보다 열린 나눔이 진정으로 벌어지기 전 이런 다양한 전개과정을 필요로 한다.’

 댐은 아츠크로스의 경험에 대해 ‘다른 배경에서 온 아티스트들 간의 잠재적 교류는 [어떤] 최종 결과 물보다도 흥미롭고 설렜다. 하지만 그러한 대화에는 시간이 걸린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면 나는 참여한 다양한 아티스트 및 학자들과 더 자주 식사를 할 것이다. 같이 웃고, 공감 혹은 반대하고, 혹은 단지 벽이 조금만 더 무너져 반대편을 좀 더 잘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같은 분위기를 공유한다든지 말이다.’

 그가 최근 2년간 홍콩공연예술아카데미의 상주 아티스트로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이는 매 우 가치있는 경험이었다. 그는 ‘개인적인 측면에서 이 경험은 나의 아시아적 뿌리에 대한 감각을 일깨 워주었다. 베트남 남부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서 자란 나는 미국 문화와 가치관 속에서 성장했다. 나는 아시아에서 그것이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영적이든, 다른 버전의 나를 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다양한 버전의 나에 대한 가치와 인식을 깊게 느꼈었다. 마치 내가 나인 것이 괜찮다는 듯이.’

 댐은 국제 레지던시에 참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무엇보다 어떤 느낌인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사건이나 활동을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고, 숨쉴 수 있다는 감각이 이 체험을 강화시킨다’고 그는 말한다. ‘완전히 몰입돼 있다는 느낌이 몸 속 깊이 세포에까지 스며들고 이것이 다시 나의 존재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창조적으로 배우고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는 정도의 상황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그는 조심스럽다. 댐은 홍콩에 있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장벽이 있었다고 말한다. ‘무용이나 움직임에 대한 추상적인 생각들을 보다 깊게 표현하고 나누는 것이 항상 큰 도전이었다. 내가 말하는 것이 결코 완벽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항상 들었고 반대로 나도 다른 사람의 생각을 온전히 다 이해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마치 우리가 전체 그림은 결코 볼 수 없는 상태에서 타인과 소통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역시 문제라기보다는 도전이었다. 소통과 관계된 대부분의 체험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항상 완전한 그림을 이해한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정말 중요했던 것은 같은 공간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였다. 전체적 으로 긴 침묵으로 찬 미소라든지 쏟아져나오는 언어적 묘사들이 많았다.

 댐은 ‘나에게 익숙한 공간을 벗어난 창작 레지던시는 궁극적으로 나의 감각들이 한꺼번에 진동하고 흔들릴 수 있게 해준다. 좋고 나쁨? 아마 개개인에 달린 거겠지만 내게는 분명 필요한 흔들림이었다’고 요약한다. 

자료제공_ 서울세계무용축제 

도널드 후테라(Donald HUTERA)
미국 미네소타주 출생, 1997년부터 뉴옥타임스, 로스앤젤러스 타임스, 시카고 트리뷴 등 미국 유력지에서 무용평론가로 활동하다가 1980년대 초반 영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입지를 굳혔다. 타임스, 타임아웃, 댄스유럽, 댄스나우 및 엄브렐러 등 각종 무용전문지, 영국 커뮤니티댄스재단이 발행하는 애니메이티드 매거진 및 무용계 웹사이트에 기고하고 있으며 새들러스 웰스, 로열 내셔널 시어터, 바비칸 센터 등 영국 내 주용 극장 프로그램 제작책자 제작 및 집필에도 관여했다. 또한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 출연과 함께 사우스 뱅크 센터, 런던 시티 대학, 바비칸 센터, 새들러즈 웰스, 라반 센터, 유네스코 후원 세계예술총회, 댄스 엄브렐러 등 수많은 행사와 우관기관에서 강연•사회•참관자로 초청되는 등 무용 전반에 걸쳐 그가 목소리를 내지 않은 곳이 드물 정도이다. 「댄스 핸드북(앨런 로버트슨 공저」 저자로  「체임버스 인명사전」 「50인의 현대안무가」 「세계현대무용사전」 출판에도 관여했으며, 2003년과 2004년 무용의 대안적 제작법을 모색하는 연구집단 '가디언스 오브 다웃(GoD)'위촉으로 <스캐리 그랜트> <방해 받는 안무> 를 제작했다. 그의 가장 최근 안무 프로젝트인 Finger Dances를 더욱 발전시켜 최근 Touch Wood 시즌에 참가해 더 플레이스(The Place)에서 소개하기도 했다. 
2013. 1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