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y

최지연 박호빈 원일 그리고 김혜숙 〈2017 야만(野蠻)/샤만(Shaman)〉 작업기
대칭과 비대칭, 영성(靈性)과 인성(人性)의 회복
박호빈_안무가
 송파 가락로89, 광동빌딩.
 지하로 향하는 계단에 이미 전등불이 비스듬히 켜져 있었다. 연습실 플로어까지는 3개의 철문을 지나야하는데 습기 때문에 첫 번째 문은 항상 열어 놓는다. 계단에 불이 켜져 있다는 것은 이미 게스트들이 들어와 있다는 뜻이다. 두 번째 철문을 통과하면서 신발을 보니 한 명만 와있다. 평상시 사람에 대하여 디테일이 떨어져 누구의 것인지 무관심하다. 어차피 세 번째 철문을 통과하면 알게 될 것인데…
 환하게 나를 맞이한 사람은 다름 아닌 최지연 선생이다. 항상 환하게 웃는 모습은 변함이 없다. 하긴 20여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그녀의 눈빛은 그녀의 열정만큼이나 변함이 없다. ‘참, 아름다운 사람이다.’ 난 늘 습관적으로 “커피?” 하면서 의향을 묻는다. 커피 마니아는 아니지만 작업을 함께하는 사람들한테는 대접 아닌 대접을 한다. 나름 손수 내린 드립커피이다. 인도에서 가져온 아쌈 홍차도 있는데 이놈은 인기가 없다. 이윽고 특별출연하는 김혜숙씨가 특별히 종이컵을 사들고 왔다. 그러고 보니 커피를 준비하면서 컵을 깜박하고 있었다. 역시 앙상블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늘 비슷한 풍경이지만 혜숙과 내가 몸을 풀고 있으면 지연쌤은 벌써부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미 집에서 생각하고 온 동작이 있나보다. 작년 초연을 준비할 때도 비슷한 풍경이었다.
 “음악 좀 틀께요?! ”하고 바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최지연의 춤은 그 발원지를 샘물이 흐르는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는 20여년이 지나도록 가장 맑고 투명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 진원의 끝을 알 수 없는 샘물은 춤으로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계곡과 계곡을, 바위와 바위를 감돌아들고 풀돌아드는 유연성과 미끄러질 듯이 내뱉치는 자잘한 리듬은 어느덧, 용추폭포처럼 2단으로 내리치는 시원한 춤사위로 그 무게와 위용을 드러내는 듯싶더니 하얀 포말과 함께 평정심을 되찾듯, 호흡을 멈춰 세우는 심연의 세계로 이끈다.
 그런 그녀와의 작품에 접근하는 방식은 서로가 너무 상반적이다. 최지연 선생은 항상 자기중심으로부터 출발해서 전체를 구성하는 타입이라면 나라는 놈은 전체적인 윤곽이 잡히지 않으면 꼼짝도 않는다. 그녀가 나전칠기 자개장을 만들 듯, 한 조각 한 조각 붙여 들어가는 장인정신이 몸에 밴 춤꾼이라면, 난 설계도면과 스케치를 이리저리 그려나가는 건축가형 사이비 춤꾼이다. 이렇게 우리의 작업은 초반은 더디고 지루하게 지나갔지만 어느덧, 나는 집의 구조를 다 지어갔고 그녀는 인테리어를 끝마친 시기가 왔다. 이것이 〈야만(野蠻)/샤만(Shaman)〉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2016년 1월 어느 날, 밖은 휑한 느낌이 날 정도로 추웠지만 와우산 중턱 어느 드립전문 카페에서는 세 사람이 모여 작당을 하고 있었다. 최지연 선생이 콜라보 작업을 나에게 제안했고 오래전부터 잘 아는 형, 무용연출가 겸 작가인 이재환 형이 자리를 함께했다. 커피향이 제법 깊게 베인 카페는 우리들의 작당을 한껏 흥분시키기 충분했다. 그가 테이블위에 올려놓은 두 개의 제목 중 하나가 유독 마음을 빼앗았다.
 “야만(野蠻)샤만(Shaman)”
 기가 막힌 제목이다. 라임(Rhyme)이 자연스럽다. 야만샤만. 역시 동물적인 감각이 있는 형이다. 나도 작명에는 일가견이 있는데 한 수 위다. 곧 이어서 시구(詩句)로 이루어진 대본을 건네주었는데 제목만큼이나 강렬한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표현들이 많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한 쪽 가슴이 답답했다. 각자가 생각하는 ‘야만’, ‘샤만’에 관한 통찰 아닌 통찰, 혹은 해석에 관한 두서없는 공방이 장시간 이루어지면서 난 네이버 녹색박스에 검색어를 치고 리서치를 하던 중, 우연히, 나자카와 신이치라는 일본 인류학자의 『곰에서 왕으로: 국가, 그리고 야만의 탄생』이라는 저서에 관한 서머리를 읽는 순간에 “이거다!!!” 라며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사실, 내 작품의 핵심주제는 대부분 현대인 속에 파묻혀 있는 신화적 요소를 추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의 정신이상병리학과 만나지고 있었지만...
 젊어 소싯적 한 때는 신화와 샤먼, 그리고 심리학에 푹 빠져있던 시절이 있었는데 샤먼에 관해서는 주로 엘리아데나 조셉 캠벨의 저서가 흥미를 끌었다. 하지만 그 때는 인문적 지식을 쌓는 것에 불과했다면 나자카와 신이치는 ‘대칭적 관계’라는 그만의 해석이 공감되어 내 마음을 강하게 흔들었다.
 저서에 따르면, 선사先史인들은 사냥으로 곰을 잡을 때 의례를 치렀고 살(고기)을 취한 다음엔 뼈와 가죽뿐 아니라, 머리까지 아주 신성하게 다루었다. 선사先史인들은 곰이 자기와 친구이자 가족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곰이 자기의 몸을 친구인 인간에게 증여하여 인간을 살게끔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곰을 잡을 때도 가장 엉성한 도구로 잡으며, 필요한 만큼만 잡고, 잡고 나서도 최고의 예우를 해서 죽음 의식을 치루는 ‘대칭적 관계’ 즉 공존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 중간 매개자가 다름 아닌 샤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칭적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날카로운 칼과 같은 무기의 발달로 기술과 문명이 형성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권력이란 거대한 이름하에 자연과 동물을 정복과 도륙의 대상으로 변질시킨 ‘비대칭 관계’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그는 여기서 ‘국가’란 인류가 초래한 이기심의 산물로 규정하며 곧 그것이 야만의 탄생임을 직시하고 있다. 샤만은 제의를 통해서 동물과의 사이에 상실된 유대관계를 회복하고, ‘자연의 힘’의 비밀에 접근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런 관계는 깨지고 말았다. ‘문화’는 본래 ‘자연’과의 대칭적인 관계를 유지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갖는데, 지금은 그 균형을 상실한 ‘문명’으로 변했고 동시에 ‘문명’과 ‘야만’의 차이도 의식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현대사회에서의 자연에 대한, 인간에 대한 비대칭 관계란 너무 극명한 문제이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야만(野蠻)샤만(Shaman)〉은 이런 우리 주변에서 무의식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대칭, 비대칭의 상관관계를 통찰한 자기반성과 치유의 과정을 담고 있다. 즉, 작품을 통해 우리가 잃고 있는 영성(靈性)과 인성(人性)에 관한 회복과 유희적 광란에 대한 슬픔을 애도하려는 것이다.
 야만적이란 무엇이고 샤만이란 누구인지에 대해 묻는 형식으로 말이다.
 특별 출연한 김혜숙 샤만은 영적으로 무르익은 신성체가 다 되었다. 모든 사람들을 다 끌어안을 수 있는 몸의 이완성은 상처받은 모든 이의 피난처가 될 듯한 포스가 있다.
 원일은 퍼포먼스가 가능한, 몇 안 되는 음악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만큼 다양한 타악의 리듬을 섭렵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이미 나자카와 신이치의 『곰에서 왕으로: 국가, 그리고 야만의 탄생』을 꿰고 있었고 그 역시 그의 음악으로 샤만의 대칭성을 복원시키고 있었다.




 우리는 미래의 후손을 위한다면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봐야한다. 자연은 대칭성에 대한 강력한 복원성을 갖고 있다. 인간에 의한 작금의 비대칭 관계는 그 복원성으로 인해 언젠가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상상하기 힘들고 감당하기에 어려울 것이다.
 길을 걷다가 콘크리트 사이를 비집고 태어난 한 송이 민들레꽃을 보며, 잠시 영화 〈툼레이더〉의 촬영지였던 캄보디아 타프롬 사원이 스펑나무(뱅골보리수)의 거대한 뿌리에 휘감겨 뒤엉킨 채 폐허가 된 우리의 미래를 상상해 본다.
 이미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의 한 점 위에서… 
박호빈
안무가. 댄스컴퍼니 조박, 댄스씨어터 까두로 거듭 나면서 나름 체계적인 제작시스템을 구축하였으나 운영난으로 2여년 휴식기 끝에 결국 폐업, 전문무용수와 안무가의 권익보호와 복지개선을 위해 노력해오고 있다. 새로운 공연예술미학과 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제로포인트모션(Zero Point Motion)-영점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2017. 07.
사진제공_Zero Point Motion/박상윤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