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윤푸름 〈정지... 없다〉
익숙지 않은 것으로 인도하는 발칙한 제안
김채현_춤비평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서울 동숭동)은 객석보다 무대가 몇 배 넓고 바닥과 벽면, 천장이 검정색으로 도색된 블랙박스다. 이 극장에 출입이 잦은 관객일지라도 극장 내부를 싹 벗겨 보이는 공연을 대할 경우는 거의 없다.
 이번 여름 어느날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 간 관객들은 공연 시작 전부터 노출된 무대를 대면하고 일단 착석하게 되었다(8월 5~6일). 일반적으로 극장에서 공연 장치를 설치하는 데 흔히 쓰이는 수직 리프팅 장비 2대가 조금은 육중한 형세로 무대 가장자리에 놓였다. 무대 가운데쯤에는 바닥의 트랩이 한 사람 정도 출입이 가능한 크기의 구멍이 뚫려진 모습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으며, 대형 송풍기 2대가 마주 보고 배치된 구조였다. 트랩 바로 앞쪽에 포그 머신이 덩그러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스탠딩 마이크도 두어 점 서 있다. 그 장비나 구조물 사이로 둥근 스툴들이 원형으로 배열되어 관객이 앉으면 객석 구실을 하게 된다. 평소의 계단식 객석은 싹 치워져 스툴에게 그 구실을 내맡긴 편이다.
 극장 건축물의 구조를 변경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대에 노출될 장비나 기물은 모두 관객의 시야 속으로 들어와서, 그 무대는 말하자면 감춤 없이 벗겨진 무대라 말함 직하다. 오늘날 하등 신기하지도 않을 이런 무대라지만, 좀 예외적으로 벗겨진 무대에서 진행될 상황에 관객들은 일말의 궁금증이 미리부터 없지 않았을 것이다.






윤푸름프로젝트그룹 〈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김채현




 공연 시작 전에 으레 들리는 극장의 사전 안내 멘트가 몇 소절 들릴 동안 출연자들이 순서를 바꿔가며 차례로 마이크 앞에 서 보였다. 곧 암전된 상태에서 무대 옆과 정면 출입구나 분장실이 어둠 속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낸다. 조명은 다시 객석 양쪽의 발코니를 느리게 비추며 이어서 천장의 그리드를 아주 진중하게 비추며 이동하고, 다시 무대에 배열된 그 장비나 구조물을 비추기를 반복한다. 좀 지루한 듯한 이 부분은 극장의 ‘물리적’ 구조(물)가 관객들을 에워싸고 있음을 각인시키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이어 출연자 셋이 장비와 구조물을 간략하게 조작하는 행위들을 해보이고 누구는 포그 머신을 작동시켜 포그를 뿜어낸다. 또 그들이 코로나 19 방역을 위해 극장 출입구에 설치된 체온감지기를 들고 각자 체온을 측정하자 정상, 비정상 체온을 알리는 멘트가 들려온다. 어쩌면 서로 연계가 약하고 참 뜬금없어 보이는 순간들이다. 무슨 뜻으로 이러는 걸까.
 출연진들은 어떤 묵계 속에서 등퇴장을 반복했지만, 자기들 사이의 관계를 알리지도 그 관계를 짐작할 만한 단서가 전혀 제시되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그들은 서로 간에 명시적인 소통이 없었고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배역이 맡겨진 등장인물도 아니었다. 그들은 평소 걸음으로 이동하며 등퇴장하였을 뿐 춤이라는 것을 의식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이 전개되던 중에 출연진 중에서 단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는 상태가 조금 길어졌지만 관객은 더 진행될 것을 기다리며 묵묵히 객석을 지키고 앉았는데, 하우스 가이드들이 공연이 끝났음을 알렸고, 관객은 ‘차분한 모습으로’ 퇴장들을 하였다. 이 공연의 긴 이름은 〈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였다.




윤푸름프로젝트그룹 〈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김채현




 출연진의 배역도 정체성도 불투명하고 움직임마저 주시할 만한 특이성이 없던 상황에서 퇴장해야 하는 관객은 어떤 심경이었을까. 관객에 따라서는 허탈해했을 수도 있었을 법하고, 그것은 일종의 무력감 같은 것이었을 듯하다. 심지어는 발칙하다는 인상마저 가졌을지도 모른다. 다 납득할 만한 일이다.
 출연진들 사이에 별다른 사건, 에피소드도 없었던 중에서도 무대에서는 사실상 일들이 있었다. 극장 구조물의 벽면과 천장, 극장의 사전 안내 멘트, 마이크, 암전과 조명, 무대 옆과 정면의 출입구나 분장실, 스툴 객석과 사람들, 양쪽의 발코니, 천장의 그리드, 무대에 배열된 장비나 구조물들, 체온감지기와 그 멘트 등등 속에서 출연진들이 모습을 드러내어 내왕하지 않았는가. 공연장으로서 극장은 으레 무대에서 그 무엇이 행해지게끔 무대 여건을 갖춘 곳으로 인식된다. 극장 무대에서 ‘으레 행해지는 그런 것’이 부재한 이 작품에서는 알고 보면 많은 것이 존재하였다. 평소 공연과 무대의 주체라 여겨지지 않던 물체나 구조물들이 관객의 시야를 채웠고 출연진은 그것들과 뒤섞였다. 〈정지... 없다〉에서 있었던 일은 이것이다. 심지어는 한쪽의 송풍기가 돌아가자 맞은 쪽 송풍기도 서서히 돌아가며 서로 소통하는 듯한 감을 준다.






윤푸름프로젝트그룹 〈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김채현




 〈정지... 없다〉에서 초점은 극장이며, 여기서 극장은 일종의 주체로 부각된다. 출연진은 극장의 주체라는 지위에서 일단 물러서서 장치나 구조물 등속의 객체들과 엇비슷한 부류가 되며 관객 역시 이 모든 것들과 한 무리를 이루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극장에서 출연자나 관객이 중심 주체로서 주도권을 행사하던 관행이 깨뜨려지면서 극장을 구성하는 물리적 객체들이 부각되고, 이로써 이른바 인간중심주의도 정지되었다고 하겠다. 마지막에 커튼콜이 없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퍽 자연스런 일이다.
 무대나 극장에서 사고가 날 때 말고는, 그리고 극장 투어를 하거나 극장 정비를 할 때가 아니라면 평상시에 무대 설치에 동원되는 장비나 극장 구조물이 도드라져 보이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것들은 가급적 은폐되거나 이면으로 물러나야 마땅하다. 〈정지... 없다〉는 의도적으로 그것들을 전면에 배치하였고, 그에 부응하여 출연진의 역할은 의도적으로 매우 축소되었다.




윤푸름프로젝트그룹 〈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김채현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는 이 시대에 생태계가 교란되자(즉, 자연물리가 준동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세상 사람들은 자연물리(自然物理)와 물질의 위력을 절감하고 있다. 그 이전에는 제 아무리 자연물리·물질이라 하여도 그것은 인간의 생각대로 좌우되는 대상물로서의 비주체로 인식되기 일쑤였던 것이다. 인간의 개념, 생각, 믿음, 이데올로기 같은 관념에 절대권을 부여하던 인간중심주의는 이제 팬데믹 시대에 일반 여론의 도마에 본격적으로 올려지고 있다. 인간중심주의의 폐단이 근현대 문명을 주도한, 그리하여 파탄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은 것 같은 주체/객체의 이항 대립적 구도로 해결되기는 어렵다는 경고가 도처에서 들려오고 있다.
 인간(주체)의 인식 활동이 주변 자연이나 장비, 기계(객체)를 매개로 이뤄진다는 원론적인 지적이 목소리를 드높이는 오늘이다. 이에 따라 예술이 자연물리·물질과 어떤 동반 관계를 가져야 하고 예술의 형상화 작업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도 무성하다. 〈정지... 없다〉에서 안무자는 ‘공간은 기계들이 생산하는, 기계들 또는 노드들을 잇는 경로들의 네트워크’라는 레비 브라이언트의 생각을 인용한다. 브라이언트는 기계지향 존재론을 바탕으로 포스트휴머니즘 계열의 해방적 정치 이론을 펼쳐왔었다. 이에 착안하여 안무자는 극장은 인간과 예술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객체들의 운동으로 구성되는 불안정한 공간으로 해석해 보인다. 인간중심주의를 탈피하여 주변 환경과 물건 등속의 객체에도 나름의 역능(力能)을 인정하자는 브라이언트의 관점은 제목 〈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에도 반영되었다.
 윤푸름이 안무한 〈정지... 없다〉는 춤 무대에서 기존 주체/객체의 관행을 정지시켰다. 평자로서는 이번 공연에서 강렬한 느낌을 받은 것은 아니었고, 또한 바닥에 흩어진 물리적 장비와 관객과 출연자들 그리고 물리적 구조물들을 연계시키는 방법에 따라 관객이 탈인간중심주의를 수용하는 정도는 달라질 것이다. 〈정지... 없다〉에서 관심을 갖고 주목할 것은 아직은 매우 낯설은 탈인간중심주의이며, 춤의 의도적인 부재를 통해 춤을 근원에서 다시 생각하도록 제안하는 그 점에서 〈정지... 없다〉는 상당히 시사적이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

2021. 9.
사진제공_김채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