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현대무용단 〈블랙박스〉, 이화석 댄스프로젝트 〈be friend〉
무대 위로 부른 과거의 흔적과 시간
권옥희_춤비평가

안무자의 지적, 문화적 토대가 그가 택한 춤의 소재와 무용수 그리고 무대디자인의 구조를 통해 이미지화 되는 춤의 장면들, 게다가 안무자가 곧 그 작품인 경우를 무대에서 보게 되는 일은 흥미롭다. 국립현대무용단 창단공연<블랙박스(Black Box)>(예술의 전당 토월극장,1월 29~30일)와 이화석의 댄스 프로젝트 ( 전북대학교 삼성문화회관 대공연장, 2010년 12월 7일). 오디션을 통해 뽑은 뛰어난 춤 기량과 신체조건이 빼어난 무용수들, 무엇보다 재정과 홍보 등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작업환경이 비교적 좋은 국립현대무용단과, 재정은 물론 국공립무용단보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고군분투하며 작품을 무대에 올려야 하는 개인무용단, 시작점이 다른 두 작품을 읽어본다.

먼저, 안무가 홍승엽의 <블랙 박스>를 살펴보기 앞서 국립현대무용단이 창단된 사실부터 짚어본다. 2010년 7월 28일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에 이어 마침내 국립현대무용단이 출범했다. 초대이사장인 김화숙 원광대교수는 "홍승엽 예술감독과 함께 힘을 합쳐 국립현대무용단을 최고 무용단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 무용단의 창단공연이 바로 <블랙박스>다. 기대심리가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안무가 홍승엽이 국립무용단과 예술감독 홍승엽으로 자리를 이동했다고 해서 갑자기 다른 이가 되는 것이 아니므로, 의미부여를 되도록 하지 않으려 했다. 다만 한 안무가가 지금껏 해왔던 작업의 성과로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이라는 자리에 있게 된 것이기에, 그 자리만큼의 기대를 가지고 극장을 찾았다.

야심찬 창단공연 작품 <블랙박스>는 '예술감독의 춤에 대한 철학과 역사적 궤적을' 과연 한 눈으로 더듬어 볼 수 있는 작품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이 이가 잘 맞는 톱니바퀴처럼 잘 엮이어 마치 원래 그런 모습인양 새롭게 태어난 작품'은 아니었다.

홍승엽은<빨간부처>에서 무용수들이 엉덩이 사이로 떨어뜨린 똥(진흙)으로 부처를 빚어대고, 그 부처를 짓 이겨 다시 똥으로 되돌리는 놀이에서 속(俗)과 성(聖)의 구분 없음을 모던하고 유쾌하게 푸는가 하면, <데자뷔>에서는 투명 아크릴판과 그 위에 그려지는 물고기 그림, 그 뒤에서 서거나 누워 움직이는 무용수들 위에서 흔들리는 조명이 빚어내는 효과로 시간이 물속을 유영하는, 완벽한 그림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2막 <병실에서>는 액자소설처럼 무대 위 무대, 세 면의 흰 벽 안에 갇힌 광택나는 검정색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꽃은... 피었습니까?!" "피..었..습..니다" 놀이를 혼자서 하듯 움직인다. 벽과 바닥에 붙어 느리게 움직이는 무용수들은 기이하고 아름답게 <에쿠우스>의 이미지를 추었는데, 그것은 매우 자폐적이었다. <고산묵월>과 <무선낭>에서 발목위로 올라간 검은 바지를 입은 무용수들은 빨강색 실뭉치를 서로 던지고 받으며 거미줄처럼 실뭉치에서 뽑혀 나오는 실로 서로를 묶는다. 마른 나무처럼 보이는 흰색의 구조물에 매달아 놓은 빨강색의 실꾸러미로 얽으면서 인연을 말하고 있다. 서로 얽힌 빨간색 실이 주는 팽팽한 긴장감은 욕망으로 얽힌 인연처럼 잘못 건드리면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리는 적외선이기도 하다. 서로 얽힌 실 지붕 위를 가로 질러 던진 또 다른 빨간 실 뭉치가 만들어내는 선은 그럼에도 잇고 살 수 밖에 없는 질긴 인연이기도 하다. 인연이 만든 역사, 스킨색 원타이즈 위에 그려진 덩굴그림들로 무용수들은 그대로 벽화가 되기도, 떨어져 나오면 시간이 되기도 한다. 벽화에 남은 시간은 오늘을 의미한다. 뒤 무대에 배경그림은 거대한 시간의 뿌리로 보인다. 푸르고 깊은 시간의 뿌리. 짧은 머리, 바지를 입은 무용수의 성정체성은? 여자처럼 보이지만인 남자다. 이 남자는 시간을 불러오고, 조작한다. 이는 다른 존재다. 성의 정체성은 중요하지 않다. 손목에 묶은 인연의 끈을 얽힌 실 지붕위로 던진다. 검은바지와 양말을 신은 무용수의 손목에 매달린 빨간 실타래. 과거의 시간을 불러오는 현대의 무당이다.

레퍼토리 8작품 중에서 고르고 솎아낸 장면으로 이어지는 120분간의 이미지 퍼레이드. 작품이 지나온 시간의 되새김질이 어느 순간부터 불편해진다. <고깔>에서의 무용수들은 작품을 채 이해하지 못한 듯 움직임들이 겉돌았고, 장을 연결하려는 시도로 거듭 등퇴장시킨 빨간 장미를 든 무용수의 배치도 '아담과 이브'의 느닷없는 영상에서 그 의미를 잃었다. 1막, 길게 이어지는 <데자뷔>에서 보여주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유사한 동작들의 서로 모방으로 산만했고, 2막 <벽오금학>의 늘어지며 반복되는 상호 카피한 움직임들은 지루했다. 자신의 작품에 한껏 취해있는 안무자의 내면이 쉽게 읽힌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새로운 대중에게 알리고픈 욕심에 우를 범했다. 잘 내려놓은 마음이 곧 부처다. 좀 힘을 뺐다면 더 좋았을 홍승엽의 역사가 아니었나 싶다.

<에쿠우스> <아Q> <벽오금학도> 등의 작품을 보자면 문학작품에서 얻은 모티브로 자신의 정체성을 더해 또 다른 독창적인 원본을 만들어 내는 데 홍승엽은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인문학적 소양과 깊이 또한 짐작할 수 있다. 해서 난해한(?) 현대무용이지만 그의 작품은 처음 보거나, 춤을 모르는 이가 봐도 모던하고 세련된 아름다움과 위트, 간간이 철학도 탑재된 흥미로운 춤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하지만 아름다운 색채의 나열만으로 예술적 가치가 있는 그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껏 해 온 작업의 성과를 너무 믿고 방심하였던 것은 아닌가 싶다. 안무자의 철학이 부재한, 작품의 부분만을 오려내 엮는 것은 무의미하고 위험하다. 또 하나, 전작들에 비해 최근작으로 올수록 유사한 태와 꼴의 교차모방이 잦고, 설명이 길어 작품을 보는 재미가 덜하다. 다음 작품에서 상쇄되길 바란다.

〈be friend〉​의 안무자 이화석은 대구예술대에서 전북대학교로 자리를 옮긴 지 채 2년이 되지 않는다. 이번 에서는 이전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창과 구음 등 우리소리가 비중 있게 녹아있는 있는 점에 눈길이 갔다. 몸의 이동을 통해 새로 형성된 문화의 이식으로 보인다. 자연스레 스민 것인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옮겨 심은 나무가 새로운 토양에 튼튼한 뿌리를 내리기 위해 나무 몸살을 하듯, 이화석은 새로운 자리에서 자신의 춤언어를 아프게 다지는 중이다. 


이 작품은 안무자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자신을 해체 재조립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춤으로 풀어놓는다. 막이 오르자 무대에서 객석 쪽으로 한 가운데 길이 길게 나있는 것이 보인다. 이화석이 팔을 내려 손을 무대바닥에 댄 채 천천히 걸어 나와 중앙에 놓인 회전의자 위에 앉는다. 뒤로 몸을 젖히며 반쯤 누운 채 빙글, 의자를 돌린다. 순식간에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 간 이화석의 춤은 마리오네트의 그것과 닮았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조정당하는 춤. 그가 반추하는 과거의 시간은 빈번하게 분절되고 갇힌 듯 자유롭지 않다. 의자에서 내려와 쪼그려 앉은 채 손을 떨며 낸 시간의 조각들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신경을 긁는다. 다시 올라가 의자위에 웅크리자 깡마르고 얇은 몸은 어린아이의 몸처럼 보인다. '꿈이로다' '흘러.. 간다' 등의 거듭되는 우리소리의 가사와 구음. 의자를 안고 고요히 한 쪽 다리를 높게 드는가 하면 움직임 없이 자신을 들여다 보다 마치 시간의 터널을 빠져나가 듯 걸어 나왔던 길을 따라 다시 들어서면, 12개의 등이 높은 검은 색 의자가 밀고 들어온 군무는 의자를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힘겨루기를 한다. 이화석은 무용수들의 남녀 성의 정체성을 확연하게 나눈다. 의자위로 아래로 서로 자리 이동을 거듭하며 춤으로 갈등을 반복한다. 조명의 플래쉬 효과가 반목의 상황을 극대화 시킨다. 무대 안쪽으로 한 줄, 또는 객석쪽으로 나란히 두 줄 등 끊임없이 의자의 배치를 달리하며 추는 춤의 이미지는 어둡지만 의도는 분명히 보였다. 여성무용수들의 군무와 치마 입은 남자무용수들의 에너지와 선에서 대구 춤의 색이 선명하게 묻어난다. 다시 무대에 나온 이화석이 메고 있는 빈 캐리어는 그의 내면이고 현실이다. 캐리어를 멘 채 추는 춤은 힘들어 보였다. 캐리어는 그의 등을 사정없이 누르고 손발을 묶는다. 춤을 멈추지 않으면 캐리어는 그를 무대바닥에 내팽개칠 것이다. 현실이 버거운 그의 춤은 힘을 잃고 느슨해진다. 메고 있는 캐리어가 변하지 않기에, 그것이 설령 천사의 날개라 할지라도 벗어 던지는 수밖에 없다. 등에서 캐리어가 내려지자 뒤 무대 막 그림이 흰 화선지에 먹이 번지듯 느린 그림으로 찢어진다. 이미지가 선(禪)적이다. 이상훈은 안무자의 의도를 잘 파악한 듯 성숙하고 움직임이 좋은 춤을 보여준다. 웅크리고 있는 남자 주위로 구경하듯 배회하는 남자들. 아름답고 깊어 보이는 숲, 이화석은 천천히 숲을 향해 걷는다. 조명으로 뒤 무대 막에 생긴 숲은 더 깊어 보였고, 시간과 장소의 변환 등도 잘 살려냈다. 남자들이 가진 일상의 고뇌와 무게를 긍정적 에너지와 부정적 에너지의 춤 배틀 형식으로 비교적 잘 풀어낸 작품이었다. 창작 작업의 모든 지난한 과정을 거의 안무자가 혼자 해내는 독립 무용단과 무용수들의 노고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특히 지방에서 어려운 작업을 하고 있는 그들의 건투를 빈다.

2011. 05.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