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추모기획_ 발레리노 이상만
창작과 교육을 통한 무한한 발레 사랑
김순정_성신여대교수. 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한국의 1세대 발레리노 이상만 선생이 1월 8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6세. 1948년 충북 괴산 생. 한양대 무용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 과정을 마치고 임성남발레단과 국립발레단 단원으로 활동했던 그는 1977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내셔널 발레 일리노이’에 입단, 외국 발레단에 진출한 최초의 국립발레단 남성 무용수가 됐다. 1985년 자신의 성을 딴 리발레단을 창단한 이후 <메밀꽃 필 무렵><무녀도> 등 한국 전통을 소재로 한 창작 발레를 무대에 올렸으며, 지난 12월에는 림프암 투병 중에도 춤을 추기 위해 항암제를 피하며 창작발레 <무상>을 안무했다. (편집자 주)


 

 

 

“이상만 선생님~”하고 길게 불러 본다.
 특유의 충청도 억양으로 “아유~ 김선생님” 하며 바로 대답을 하실 것만 같다. 이제는 듣고 싶어도 더 이상 들을 수가 없다.
 늘 후배들에게도 존댓말을 하시며 다정하게 대해주시던 고인의 선한 웃음이 그립다.
 그림은 그리움이라고 했나. 선생님은 발레연습을 하지 않을 때면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거나 작품의상을 만들곤 하셨다. 발레에 대한 그리움을 그렇게 풀곤 하셨을 거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지내시던 선생님은 누구에게도 외롭거나 약한 모습을 내비치지 않으셨다. 참으로 내면이 강하셨지만 심성은 여리고 정이 많으셨다.
 암에 걸려 투병 중이실 때는 머리카락이 다 빠지셨다. 곁에 있던 분들이 교회에 나가 기도하자고 말하자 “난 싫다 내 힘으로 이겨내겠다”며 한동안 산에 다니시더니 어느 순간 머리가 치렁치렁 돋아나고 깨끗하게 나으셨다. 그리고 더 열정적으로 발레에 매달리셨다.
 “난 매일 연습할 때가 가장 행복해. 안 그래요?” 하시던 선생님이셨다. 최근 암이 재발한 선생님은 공연에 심혈을 기울이던 중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영영 회복을 못하고 66세로 우리 곁을 떠나셨다. 선생님은 걷기만 하더라도 무대에 서고 싶다며 항암제 맞는 것도 거절하실 정도로 발레사랑이 지극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춤추며 가고 싶으셨던 거다.


 

 

 나에게 이상만 선생님의 첫 모습은 1970년대 중반 국립발레단 <지젤>에서의 알브레히트로 남아있다. 장충동 국립극장 지하 연습실에서, 예원학교를 다니던 중학생인 나는 <지젤>의 리허설을 꿈꾸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이상만 선생님의 꿈꾸듯 묘한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당시 진수인 선생님이 상대역 지젤을 맡으셨는데 실성해 쓰러져 숨을 거둔 지젤을 안고 슬퍼하던 알브레히트의 눈빛 말이다.
 또 하나 기억나는 공연은 <카르멘>이다. 검은 타이즈를 입고 조명아래에서 번민하는 돈 호세를 보여 준 이상만 선생님의 표현적인 몇몇 동작들은 아직도 선명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 후 한동안 국립극장 무대에서 이상만 선생님의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그 이유는 1977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3년의 공부를 마치고 일리노이국립발레단 단원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발레의 신흥 종주국으로 부상할 때였다. 이때가 바로 마카로바, 바리쉬니코프, 고두노프 등이 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하며 클래식발레의 정수를 보여주던 때가 아니던가. 이상만선생님은 그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뉴욕으로 가 어렵게 공연을 보고 왔다는 얘기를 하셨다. 그래서 첫 귀국공연 레퍼토리로 <파키타>를 올린 건지도 모른다.
 1985년 6월 내가 국립발레단원으로 활동하는 시절, 어느날 임성남단장님께서 리허설을 같이 보자고 하셔서 대극장으로 내려갔는데 어린 시절 내가 흠모하였던 이상만 선생님의 귀국공연이었다. 팜플렛 

사진에서 발레리노 이상만은 철길 위에서 Attitude 동작을 보이며 끝없이 펼치며 가고자 하는 그의 이상을 표현하고 있었다. <파키타>, <집시의 노래>, <그리그 피스>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 <집시의 노래>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또다시 선생은 한국무대에서 한동안 사라졌다가 1994년 <카르멘> 전막을 공연하면서 다시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도 꾸준히 안무가이자 무용수로 작품 활동을 하였으나 한국에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었다는 점은 실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간 외국에 나가 활동한 무용수들은 많이 있었어도 이상만 선생님처럼 안무가로 예술감독으로 활동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소중한 예술가를 그동안 한국의 춤계는 홀대를 해왔다. 국립발레단의 발레마스터로 초빙이 되었어야 마땅한데 그는 어디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했고, 가족들은 생계를 위해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결국 그는 홀로 남아 힘겹게 리(Lee)발레단을 이끌어올 수밖에 없었다.
 발레가 무엇인가? 개인의 힘으로 가능하기나 한 건가? 재원이 없이 버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몸으로 부딪치며 세상의 무관심에 정면으로 맞선 용기 있는 예술가였다.




<메밀꽃 필 무렵> <밀양아리랑> <무녀도> 등 10편이 넘는 창작발레 공연
 

 내가 주역무용수로 활동할 당시 국립발레단은 매년 창작발레를 공연해야만 했다. 정부의 방침이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배비장>(1984), <처용>(1985), <춘향의 사랑>(1986), <고려애가>(1990) 등의 창작발레 레퍼토리들이 축적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한국적 발레의 창조에 목말랐던 이상만선생의 기여가 있었다면 이들 작품 외에도 더 많은 작품들이 국립발레단의 보유자산이 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어쨌건 1997년부터 2012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개인발레단이 <메밀꽃 필 무렵> <밀양아리랑> <무녀도> <아리랑> <오델로> <금시조> <춘향 어디로 갈거나> <춘향> <황토길> <바람의 화원> <김삿갓> <화원> <무상>등의 대작을 만들어왔다는 것은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젠가 이상만 선생님의 작품을 보러 서강대 메리홀에 갔었는데 오래 전 은퇴한 발레단 대선배님들을 만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상만 선생님의 안무력을 높이 사고 있었다. 나 역시 그날 공연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던 차였다. 음악과 어우러지는 섬세한 움직임에 대한 미세한 감각이 나를 일깨웠고, 바로 나는 선생님께 학생들을 위한 작품안무를 부탁드렸다.
 2011년 가을 <코펠리아>를 안무해주시기 위해 학교로 오시던 선생님의 활기 넘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경기도 수지에 있는 집에서 미아동까지 지친 기색도 없이 오가면서도 열의를 갖고 작품을 만드셨고 학생들과의 소통 또한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놀랄 정도였다. 격의 없는 대화와 꾸밈없는 선생님의 모습에 모두들 행복해했다.
 기량이 처지는 학생들이 못내 걸린다면서 한 씬을 특별히 만들어 그 학생들을 무대에 세워주셨고 그 학생들은 그 고마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는 훌륭한 교육자로서 선생님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주역들의 의상은 직접 만들어 입히셨는데 색상과 디자인감각에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무책임한 매스컴에서 흘러나오는 터무니없는 빈 말과 화려함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선생의 작품들을 구식이라 폄하하였다. 평생을 자신과 힘겹게 싸워 온 이의 말은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상만 선생님은 그러나 주저하고 원망하는 대신에 단원들의 주기적인 연습을 통해 늘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느라 바쁘고 활력이 넘쳤으며 웬만한건 웃어 넘겼다.
 2013년 그의 마지막 작품인 <무상>에는 나도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다. “김선생, 이 음악 좀 들어봐요. 이 음악에 김선생이 춤추는 걸 구상했어. 아주 멋있는 장면이 될 거예요” 그런데 “2시간을 하려고 했는데 한시간으로 줄이라고 해서 김선생 나오는 장면이 없어지게 되었어요”하며 미안해 하셨다. 대신 성신여대 학생들 중 자발적으로 하고 싶다는 학생 위주로 8명을 보내 선생님의 <무상>공연에 참가하게 했다.
 처음에는 “옛날 스타일 같아요” 하던 학생들이 언제부턴가 진지하게 공연연습에 임하고 있었다. 병원 무균실에서 링거를 맞고 나서 연습실로 와서 안무하고 연습시키는 이상만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학생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예술가의 정신을 보기 시작한 것이리라. 면담하는 중에 한 학생은 선생님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나 역시 눈물을 흘리며 함께 울었던 적도 있었다. 얼마나 발레를 사랑하면 저렇게 하실 수 있을까? 모두들 감동을 받고 마음의 눈을 뜨게 된 것이었다. 예상치 않은 일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힘으로 생의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선생님은 누운 채로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신 뒤 회복을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나셨다.
 “인생 뭐있어요? 오늘하루 신나게 열심히 뛰면 되지!“ 전화 멀리 무균실에 계시던 선생님과 주고받던 말들이 떠오른다. ”이렇게 누워있으려니까 더 춤을 추고 싶어요, 김선생! 계속 추세요.“
 선생님 이젠 돈 걱정 마시고 만들고 싶은 작품 많이 만들고 매일 바를 잡고 행복하게 연습하세요. 언제나처럼 만면에 웃음을 담고 말이예요.
 “아시죠? 제겐 늘 청년 이상만 발레리노로 남아 계시다는걸요. 맨 처음 제가 만난 알브레히트로 말이죠.”


 

 

 

2014. 0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