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프랑스에서 보내는 엽서 3
지방 도시에서 높은 문화의식이 춤을 완성시키다
남영호_재불무용가

나는 자키타파넬 무용단에서 1992년부터 1998년 말까지 있었다. 자키타파넬무용단에 있으면서 잊을 수 없는 몇 가지를 얘기하고 싶다.

그동안, 5편의 새 작품 (〈Hors champ〉(1994), 〈Beau fixe〉(1995), 〈Des allures et des désir〉(1996), 〈tambour voilé〉(1997), 〈Azul〉(1998), 그리고 1편의 무용단 레퍼토리(〈Le cri du guetteur〉(1998)에 참여했었다.




 

자키타파넬무용단 〈Azul〉 포스터 ⓒMarc GINOT




자키타파넬무용단은 프랑스 여러 도시에서 레지던트 프로젝트가 많았다. 그래서, 내 아파트가 있어도 1년에 거의 5개월도 아파트에서 살지 않고 다른 도시의 레지던트로 떠났다. 그중, 프랑스 푸와티에(Poitier)라는 도시가 있는데, 작지만 문화적이고 평온한 그 도시에서의 레지던트 작업들을 잊을 수가 없다.

푸와티에는 도시는 작아도, 조그만 아마추어 무용단, 무용학교, 음악학교 등 여러 곳 의 예술학교와 단체들이 있었고, 많은 시민들이 몸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오픈 리허설에서도 적극적이고, 세심하게 춤을 보았고, 질문들도 다양하게 하였다.

이 도시에서 타파넬은 푸와티에 무용대학교와 Conservatoire 학생들에게 여러 차례 춤 워크숍과 감성 아틀리에를 제공하였다. 자키의 감성 아틀리에는 자주 눈을 가리고 하는 아틀리에가 많았다. 정상적인 사람이 눈을 가리게 되면, 당황스럽고 불안해 진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침착을 찾게 되고 더 평온해지며 자유로울 수 있다. 눈을 가리는 것과 눈을 감는 것은 다르다. 자키는 눈을 가리면서 학생들의 내면에 숨어있는 움직임의 열정들을 자극시키며 끄집어내었고, 학생들은 그런 자신들의 열정에 스스로 놀라면서도 감격해했다. 그 대학 무용교수는 타파넬의 여름 무용특강에 자주 참여하면서 자키의 교수법을 아주 진지하게 관찰하고 임했다.

푸와티에에서 지방 도시에서 느껴지는 아주 높은 문화 수준, 사람들의 춤에 대한 존중, 공연을 대하는 여유, 열린 정신, 호기심, 즐거운 질문들….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놀라게 했다. 어쩌면 모두 지방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 때문이리라. 연습 후 동네의 모로코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쿠스쿠스와 타진은 잊을 수가 없다. 프랑스에서 먹어본 제일 맛있었던 모로코 레스토랑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스스로 파리가 아닌 몽펠리에에서 춤 작업 한 것을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푸와티에오페라극장에서 내가 처음 함께 한 작품 〈Hors champ〉을 연습하였다. 그 작품은 앞글에서도 소개했듯이 라이브 음악으로 파리에서 현악기 3중주로 유명한 단체와 함께 협업하는 것이었다. 라이브 음악과의 연습은 길었고, 우리 무용수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음악가들과의 마찰도 있었고 공연이 걱정되기까지 했다.

마침내 공연 날, 무용수들은 너무 지쳐 당일 연습은 거의 하지 않았다. 나는 감기까지 걸려서 콧물을 훔치면서 춤을 추었다. 그 전날 리허설하면서 흘렸던 땀을 제대로 씻지 않고 바로 밖으로 나와 찬바람을 맞은
탓이었다.


근데, 공연이 시작되자 우리 무용수들은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움직이게 되었고, 그렇게 마찰이 많았던 라이브 음악과도 기적처럼 어우러지는데, 더 특이한 것은 관객들이 주는 에너지였다. 전 관객들이 몰입하면서 우리 공연을 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무대에서 공연이 끝나고 인사를 하는데 모든 관객들이 제자리에서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힘차게 쳐주었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무대 뒤로 들어갔는데, 계속 박수 소리가 그치지 않아 다시 나가서 또 인사를 하고, 관객 어느 누구도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일어나 계속 박수를 보냈다. 다시 인사하고 무대 뒤로 들어오는데 박수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3번째부터는 우리가 앵콜 인사를 몇 번 하는지 세었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모두 10번을 인사하러 무대에 섰었다. 나는 그 박수의 에너지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리허설 때의 무용수들 간의 기 싸움, 음악가들과 불협화음, 감기로 아팠던 몸, 안 좋았던 순간들이 일시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난 그 당시의 이 이색적인 경험을 잊지 못한다. 무대 위 무용수들과 음악의 하모니, 관객들까지… 절묘했다. 자키 타파넬도 우리에게 이런 경험은 무용단을 결성하고 처음이라고 했었다.

그날의 기억은 오랫동안 우리들의 가슴을 울렸고, 벅차게 했다.




자키타파넬무용단 ⓒMarc GINOT



자키타파넬 사인




며칠 전 자키를 만나서 지금 무용단에 있었을 때를 기억하며 〈춤웹진〉에 기고한다고 했더니, 소중한 사진 한 장을 주었다. 자키타파넬무용단이 가장 풍성했던 기간에 찍었던 무용단 사진이다. 자키와 무용수 7명, 연수생 1명, 행정, 매니저, 회계.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에게 응대해줬던 그 진솔한 대화와 품위, 모든 것을 잊기 힘들다.




 

자키타파넬무용단 〈Beau fixe〉 리허설




두 번째로 참여했던 신작 〈Beaux fixe〉는 영화 음악을 갖고 영화 장면들을 연구하며 작업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예산이 많이 없어서 작품 제작 기간도 훨씬 짧았다. 그리고 의상과 신발, 소도구들도 우리가 여러 옷들을 직접 사서 의상 하시는 분이 수선해 주는 그런 식이었다. 무용수들은 무대에 나갈 때마다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무용수마다 의상이 3~4벌 있었는데, 아주 짧은 시간에 갈아입어야 해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무대에 4개의 문을 만들어 놓고, 그 안으로 나왔다가 들어가서는 정신없이 빨리 옷 바꿔 입고, 다른 캐릭터가 되어 아무 문제없이 아주 우아하게 다시 문을 열고 나가서 우아한 춤을 추는….




 

자키타파넬무용단 〈Beau fixe〉 ⓒMarc GINOT




정말 순간순간 영화의 한 장면을 찍는 느낌이었다. 그때 내가 검정 원피스에 10cm 높이 하이힐을 신고 춤을 열정적으로 추는 장면이 있는데, 운 좋게도 리허설과 공연 에서 단 한 번도 부상을 입지 않았다. 이 작품으로 우리는 프랑스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다 순회공연 했었고, 덕분에 프랑스의 많은 지방 도시들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작품으로 3주간 독일 7개 도시(쾰른, 스투트가르트, 본, 베를린, 하이델베르크, 아헨, 샤펠)를 순회공연 했는데, 공연 끝나고 당일 바로 그다음 도시로 떠나는, 차 안에서 잠을 자는 빡빡한 스케줄이었다. 아주 적은 예산으로 만든 이 작품을 장기간 공연하였다. 나는 98회까지 하였고, 후에 다른 무용수가 내가 했던 춤 을 익혀서 120회 넘게 한 것으로 안다.




독일 순회공연 당시




프랑스에는 근 10개 남짓 도시(지금은 20곳 정도)에 국립 명칭의 현대무용단이 있다. 난 자키타파넬무용단이 왜 국립 현대무용단이 안 되었는지 궁금했다. 작업의 난이도를 비롯해 즉흥, 연구, 감성교육, 무용단 운영 등 그 어떤 면에서도 다른 국립현대무용단에 비해서 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훨씬 효율적이고 이상적인 방식으로 운영한다고 생각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자키는 몽펠리에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고, 현지에 있는 무용단은 몽펠리에 국립현대무용단이 될 수 없었다. 물론 그 외 다른 이유들도 있었으리라. 자키타파넬의 예술철학은 그후 내가 무용단을 만들었을 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다음 글에서 나의 춤 작업에 영향을 준 두 번째 안무가 수잔버지무용단에서의 경험을 소개하고 싶다.

남영호

현대무용가. 1991년 프랑스에 간 이래 남쪽의 몽펠리에 지역을 중심으로 현대춤 활동을 해왔다. 2015년부터는 한국문화를 프랑스에 소개하는 축제인 '꼬레디시'를 매년 가을 주최하는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2021. 10.
사진제공_남영호, Marc GINOT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