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김경신 〈호모 루피엔스〉
인간의 자업자득, 디스토피아
김채현_춤비평가

인공지능이 대세인 시대에 로봇의 비중도 날로 높아지는 추세다. 로봇을 소재로 김경신이 〈호모 루피엔스〉에서 그려내는 세상은 한 마디로 잿빛 속의 암울을 방불케 한다. 〈호모 루피엔스〉는 그가 이전에 2019년 이래 〈호모 루덴스〉 〈호모 파베르〉로 연달아 발표해온 호모 3부작의 최종편이다. 이 3부작은 일테면 김경신 관점의 문명사적 인간론이라 하겠다. 그의 〈호모 루덴스〉는 인간의 유희 본능과 그것의 일상적 가치를 풀이하였고, 다음에 올린 〈호모 파베르〉에서는 도구를 만들어내는 끝에 인간이 급기야 인간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장치까지 만들어내는 인간의 욕망이 강하게 부각된다.

〈호모 파베르〉 끝부분에 복잡한 회로선들이 얼기설기 그대로 노출된 로봇이 마네킹 같이 등장하며, 〈호모 루피엔스〉에서도 엇비슷한 모양의 로봇이 등장함으로써 두 작품의 연결성은 명료하게 드러난다. 호모 루피엔스라는 말은 호모 루덴스와 사피엔스를 결합한 김경신 나름의 조어(造語)로서 그는 그것을 유희, 지식, 도구 등의 역량을 겸비한 인간이라 소개한다. 로봇이 인간을 대체해나가는 세상에서 인간이 로봇과 도구에 의해 지배되는 엽기적 상황도 자주 상정되는 오늘이다. 〈호모 루피엔스〉는 그런 로봇 존재들이 주체로서 서식하는 상황을 앞당겨 전망하는 김경신 스타일의 춤 서사이다(광주 아시아문화전당, 11월 13~14일).




언플러그드바디즈 〈호모 루피엔스〉 ⓒ김채현




〈호모 루피엔스〉 무대에 등장하는 모든 존재를 안무자는 휴먼 로봇이라 가정하였다. 즉 호모 루피엔스는 휴먼 로봇이다. 로봇이 인간과는 별개의 존재로 인식되는 것과는 달리 김경신의 휴먼 로봇은 인간의 복제판으로서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을 대변하는 존재로 보인다. 물론 지금 산업계에서는 사람과 닮고 일정 한도 내에서 알고리즘에 따라 능동적으로 수행하는 로봇으로서 휴먼 로봇이 여러 유형으로 개발되어 선보이곤 한다. 안무자가 제시하는 휴먼 로봇은 그러한 제한을 넘어 인간과 다름없는 활동상을 수행하고 인간처럼 진화하며 인간의 감정을 습득하고 궁극에는 인간 이상의 인간이기를 욕망하는 매우 복합적인 캐릭터이다. 그런 휴먼 로봇을 일컫는 호모 루피엔스라는 용어는, 과문의 탓인지, 들어본 바 없는 터에 호기심부터 촉발하는 일면이 있다.






언플러그드바디즈 〈호모 루피엔스〉 ⓒ김채현




〈호모 루피엔스〉의 세계에서 무채색 의상들을 걸친 호모 루피엔스들은 에너제틱하면서도 대체로 급박하게 움직여대는 모습들이다. 아시아문화전당의 대형 무대 공간은 다수의 테이블과 크고 작은 크기의 이동식 벽체를 기본으로 다양한 양상으로 조립 구성된다. 〈호모 파베르〉에서도 보았듯이 근래에 보아온 춤 무대들의 통상적 사례를 뛰어넘는 규모로서 무대를 대하는 안무자의 시야와 감각이 남다르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그 공간은 시종일관 매우 기계적이면서 삭막한 분위기를 벗어나지 않는 미로 같은 세상으로 구성되는데, 여기서 휴먼 로봇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지배하기 위해 이합집산하는 양상들을 쉴새 없이 이어간다. 그들이 실현하는 움직임의 강도는 그들이 처한 세상의 절박한 정도를 나타낼 것이다.




언플러그드바디즈 〈호모 루피엔스〉 ⓒ김채현




작품 도입부에서 무대 중앙 바닥에 여러 개가 수직으로 놓인 은색의 철봉 막대기들이 반짝거리며 빛을 발한다. 핵연료봉 모양 같은 그것들은 일부의 인류가 유구하게 소중히 여겨온 그 태초의 빛을 보란 듯이 대체하려는가 싶게 로봇 세상의 열림을 시사한다. 그 빛 속에서 익명의 휴먼 로봇들이 동료 로봇들을 깨우고 자극함으로써 호모 루피엔스의 세계는 시작하고 작동한다. 작품 종지부에서는 앞서 언급된 복잡한 회로들이 그대로 노출된 로봇이 허공에 매달려 있다. 모두들 활동을 멈추고 잔해 같은 그 로봇을 멍하니 쳐다보는 장면에서는 로봇 세상의 기만성 또는 로봇 세상을 향한 허탈감이 환기되는데, 휴먼 로봇들의 지옥도를 벗어나야겠다는 모종의 메시지가 읽혀진다.






언플러그드바디즈 〈호모 루피엔스〉 ⓒ김채현




호모 루덴스와 호모 사피엔스의 복합체가 등장하는 〈호모 루피엔스〉에서는 루덴스 측면보다 사피엔스 측면이 도드라진 편이다. 루덴스 측면에서 놀이적인 정경들을 기대함 직하였으나 그런 순간들은 뚜렷하지 않으며, 전체적으로 냉혹하고 억압적이며 위태로운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작품 후반에 살색 레오타드를 걸친 몇 사람이 등장하여 로봇과는 대조적인 인간다움의 이미지를 의도한 듯하나 그 효과는 크지 않았다. 로봇 캐릭터들의 익명적이며 일률적인 동작들이 강하게 제시되는 가운데서도 방점이 찍혀 인상 깊게 수용되는 순간은 미흡하였다. 전반적으로 근원적이면서 포괄적인 관점이 주도하는 이 작품에서 부분들의 정교한 전달로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이런 점에서 서정적인 정감으로 큰 무대를 채워가며 휴먼 로봇들이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과정이 삽입됨 직하였다고 본다.

〈호모 루피엔스〉의 휴먼 로봇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지배와 피지배는 인간 사회의 권력 관계와 멀지 않고 오히려 빼닮은 편이다. 인간 사회가 로봇의 세계에서 재연되어야 한다는 철칙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안무자는 특히 빅브라더의 사회가 강하게 연상되는 분위기로 상황을 전개하였다. 여기서 인간은 자기 복제 로봇만 제작한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비틀어진 욕망까지 전수하였다. 인간중심주의의 참극이라고나 할까.






언플러그드바디즈 〈호모 루피엔스〉 ⓒ김채현




로봇의 세상이 도래하지 않았어도 로봇이 주도하는 세상에 대해 일찌감치 불안감이 상존하는 것이 현실이며, 〈호모 루피엔스〉는 이를 미리 감지하고 로봇 세상에 닥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디스토피아를 경고한다. 〈호모 루피엔스〉는 인간 욕망의 산물인 로봇들이 결국은 인간의 욕망과 오류를 답습하여 말하자면 인간이 인간을 삼킨다는 자업자득의 아이러니를 담았고, 관람자들이 욕망을 자제하며 인간을 다시 되돌아보도록 유도하였다. 아울러, AI가 인간의 경험과 직관을 넘어설 수 없다는 안이한 낙관론이나 로봇 유토피아론을 급정지시키면서 자신의 조어를 토대로 자기 식으로 담론을 전개하는 과단성을 〈호모 루피엔스〉는 제시하였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

2022. 1.
사진제공_김채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