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현대무용단_안애순 〈몸쓰다〉
저항하지 않는 춤의 무중력
김명현_춤비평가

지난 4월 1~3일, 국립현대무용단은 제2대 단장이었던 안애순 안무가의 신작 〈몸쓰다〉를 무대에 올렸다. 안애순 안무가가 예술감독으로 재직했던 2014~2016년 사이에 국립현대무용단은 1990년대 유럽에서 시작된 무용을 둘러싼 철학적, 정치적, 존재론적 담론들을 적극 수용하며 실험적 무용을 배양하는 기관으로서의 토대를 구축했다. ‘춤이 말하다’, ‘전통의 재발명’, ‘발화하는 몸’, ‘여전히 안무다’ 등의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K-Contemporary라는 출판물을 통해서 동시대 무용에 관한 유럽발 담론의 국내 수용과 함께 한국적 전개를 보다 폭넓게 논의했다. 그래서 국립현대무용단 무대에 다시 서는 안애순 안무가의 신작은 우리 무용계에서 진보적이라 할 만한 경향을 반영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국립현대무용단 안애순 〈몸쓰다〉 ©Aiden Hwang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공개된 〈몸쓰다〉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안무가에 따르면, “‘쓰다’는 사용한다는 의미와 기록한다는 의미를 모두 갖는데 ‘몸’이 각자의 경험, 역사 시간을 기록하고 이를 사용하여 새로운 상상을 펼쳐나간다는 의미로, 아카이브로서의 몸, 예언자로서의 몸이 시공간과 만나고 이를 파괴하고 재구축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국립현대무용단 블로그, 안무가 인터뷰)고 한다. 11명의 무용수(진안, 최민선, 조형준, 서일영, 강호정, 정재우, 박선화, 서보권, 박유라, 김도현, 도윤승)는 각기 창작하는 인물, 모방하는 인물, 친밀감과 애착의 인물, 문화적 인물, 슬픔과 불안을 가진 인물, 몸을 소진하는 인물 등으로 설정되었고, 이들의 몸은 또 기억의 공간, 감정의 공간, 반응의 공간, 욕망의 공간이 모인 하나의 집합적 장소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프로그램 북에 이런 내용은 없었다)




국립현대무용단 안애순 〈몸쓰다〉 ©Aiden Hwang




작품은 거대한 극장 공간 전체를 드러낸 채 빈 공간 속에서 절반으로 나뉜 앞의 공간과 뒤의 공간은 약간의 단차를 두어 서로 어긋난 공간 혹은 시간을 암시한다. 〈몸쓰다〉에서 두드러진 점 중에 하나는 공간의 이동이었다. 앞뒤로 나뉘어 단차를 만든 공간은 후반부에서는 위치가 교차하고, 직사각형의 공간이 좌우로 이동하거나, 공중으로 부양하고, 무대가 오른쪽, 왼쪽으로 회전하는 등 공간이 전후좌우는 물론 상하로 이동하면서 변화의 상황을 내포했다. 이것은 공간적 변화와 함께 선형적으로 흐를 뿐만 아니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시간을 스코어링 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국립현대무용단 안애순 〈몸쓰다〉 ©Aiden Hwang




〈몸쓰다〉의 시간은 빛이 번쩍하고 찰나적으로 발하는 빅뱅의 시간으로 시작한다. 지금, 여기를 관통하는 동시대라는 시간성을 의미하면서, 동시대의 영어 표현인 ‘컨템퍼러리’가 가진 모든 시간이 함께 거주하는 시간성을 의미하기 위해 빛의 명도와 채도사이에서 공간적으로 표현되었다고 생각된다. 검은 색과 흰색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색들의 변화를 통해 시간성을 드러내고자 했는데 무채색을 기본으로 빛의 삼원색을 드리운 셀룰로스가 무대의 중앙에 걸쳐지거나 양옆에 나타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무채색과 빛의 삼원색은 어떤 상황의 기원으로서 시간의 존재를 의미했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국립현대무용단 안애순 〈몸쓰다〉 ©Aiden Hwang




이렇게 만들어진 시공간, 그리고 그 시공간의 운동성과 관계하면서 상황을 지각하는 주체로서 몸을 등장시킨다. 안무가의 글에 쓰인 “... 본다는 것은 현재로서의 나로부터 되어질 바로서의 나로 이행한다. 몸이 행동한다. 몸은 상황에 놓여있다. ... 몸의 변형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는 문장들은 몸이 세계에의 존재로서 몸에의 존재인 세계와 서로의 구조를 주고받으면서 존재하는 가역성의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몸은 세계를 마주하여 세계와 관계하는 하나의 장소로서, 다시 세계에 의해 변형되면서 다시 세계를 변형시키는 필연적으로 동일한 존재자 양상을 가지는 몸-코기토다. 이러한 몸은 세계에 있어 하나의 사건이며, 세계도 몸에 있어 하나의 사건으로, 이 둘이 만나는 사건이 상황이다.




국립현대무용단 안애순 〈몸쓰다〉 ©Aiden Hwang




이렇게 개념적으로, 기술적으로 견고하게 구축된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안에 사건으로 존재하는 몸과 세계의 관계는 비교적 단순한 몸짓을 반복적으로 드러낸다. 도입부에 등장하는 뒷걸음쳐 걷는 사람, 그의 뭔가 써내려가는 제스처, 이후에 한 명 두 명 등장하여 먼저 등장한 인물들의 행동을 따라하는 쓰기가 반복되고, 누군가 쓰러지면 함께 쓰러지며 모두다 엉덩이를 반복적으로 긁적인다. 이후 11명의 무용수가 각자의 위치에서 선보이는 동작들은 산만한 배치에 의해 각자의 개별성을 관객에게 인지시키지 못한다. 앞의 동작들이 원형으로서 후반에 다시 등장하면서 의미를 가질텐 데 개별 동작들이 인지되지 않는다. 그리고 공간은 계속 역동적으로 변화하는데 각각의 공간이 어떤 상황인지 관객들은 파악하기 힘들다. 따라서 그 위에서 펼쳐지는 동작들이 무엇을 의미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감각적으로 직관적으로 파악되지도 않는다.




국립현대무용단 안애순 〈몸쓰다〉 ©Aiden Hwang




푸른색 조명이 누워있는 사람들의 몸을 스캔하듯이 훑고 지나갈 때, 비로소 팬데믹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는 파악한다. 그리고 다시 쓰러지고 일어섰다가는 머리가 바닥에 닿게 깊숙이 숙이고 하체는 버티고 선 자세에서 쓰러지기를 반복하며 간신히 한 사람만 버텨내거나, 팔꿈치를 짚고 몸을 반쯤 세워 밀고 나오는 불편한 동작들이 어떤 상황을 마주하고 있는 것인지 도통 알 길이 없다. 누군가를 부여잡고 오열하거나, 갑자기 우스꽝스러운 움직임을 일으키는 양극성 장애를 가진 사람처럼 보이는 행동들, 누군가의 등에 올라타고, 놀라서 벌벌 떠는 행동들, 그리고 간헐적 발작을 통해서 긴장되는 상황과 그에 반응하는 몸의 수축이라는 반응적 코드를 읽어내긴 하지만 이 또한 메모된 노트를 보고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알게 된 것이다.

무대들이 높낮이를 이룬 가운데, 거대한 액자 프레임이 내려온다. 그리고 사람들은 짝을 이룬다. 비대면의 상황이 끝나고, 접촉의 상황이 시작되었다는 의미다. 이런 만남의 시간 속에서 서로의 멱살을 잡고 있는 남자들,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여자들,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남녀 그리고 그들의 무언가 욕망하거나 회상에 잠기는 동작들이 멜랑콜리하게 펼쳐진다. 이후에 극장은 하나의 공간이 된다. 거대한 하나의 전체로서 평평한 모습을 드러낸 바닥은 푸른 조명을 받아 광활해 보인다. 언뜻 스마트팜의 인공배양실 같은 분위기도 느껴진다. 여성 무용수들이 V자 대형으로 서있고 남성무용수들이 천천히 걸어나올 때, 박성연의 보컬로 “바람이 부네요”가 흐른다. 느리게 읊조려지는 가사가 시종일관 건조하게 진행되었던 무대에 부드러운 숨을 불어넣는다.




국립현대무용단 안애순 〈몸쓰다〉 ©Aiden Hwang




그런데 종반부에 박유라의 울음이 툭 튀어나온다. 이 울음은 모든 관객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기지만 도대체 왜 갑자기 우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사이키델릭한 조명 속에 자신의 몸에 가학적인 행동을 하는 조형준이 등장하고 그를 무대가 들어올린다. 블랙아웃된 무대에서 그의 몸은 저 홀로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가 혼자서 가학적 행동을 하고 부유하는지 의문스럽다. 마지막 장면에 무대의 맨 앞으로 흰색 막이 내려온다. 작은 문 정도의 구멍만 남긴 채 거대했던 공간은 폐쇄된다. 그리고 일렉트로 사운드가 크게 울리는 가운데 게이트의 앞에서 정재우가 홀로 움직인다. 흰색 막 위에는 TV의 화면조정 시간처럼 빨노파초의 선들만 서로 교차하면서 지나가고 흰 막 너머에서는 움직이는 무용수들의 실루엣으로 작품은 끝이 난다. 복잡하고 현란하다.






국립현대무용단 안애순 〈몸쓰다〉 ©Aiden Hwang




〈몸쓰다〉에서 운동성에 의해서만 이동하는 시공간은 몸과 관계 맺는 세계 구조로서의 컨텍스트를 구축하지 못했다. 그리고 몸은 맥락을 결여한 시공간에서 세계구조와 관계하는 지각의 주체로서 변형의 힘을 드러내지 못하고, 몸짓은 유(類)와 종(種)을 구축하여 의미의 질서를 이루지 못한다. 관객을 설득하고자 하는 과정 없이 안무가가 설정한 상황만 나열되는 가운데 개별적 몸에서 파생된 자의성의 기호가 필연성의 기호로 나아가지 못하는 탓이다. 마치 여러 개의 라디오 채널이 제각각 떠들어대는 것처럼 11명의 무용수가 쏟아내는 기호는 다른 기호와의 차이 속에서 의미가 변형되거나, 덧씌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의미해졌고, 무용수의 몸이 발화하는 감각은 소실되었다.

더 큰 문제는 안무가 스스로의 비평적 주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몸의 변형’은 안무가의 비평적 개념으로서 제시될 수 있었고, 제시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외부세계와 소통하며 변형되는, 또 세계를 변형시키는 힘으로서의 메타미디어인 몸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마주하여,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변형되었는지, 왜 그렇게 변형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에 저항하는 주체성은 무엇인지에 대한 설득이 부족했다. 저항하는 몸에 대한 철학과 함께 몸에 대한 정치적 재구성을 가능케 하는 개념의 생산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순응하는 몸에서 저항하는 몸을 찾는다”는 안무가의 말대로 저항적 주체로서의 몸에 대한 사유가 더 필요했을 텐 데 순응과 저항 사이를 오가는 몸의 주체성이 서로 호환되기 힘든 개념들 사이에서 추상적으로 부유했기 때문일 것이다.

구체성을 상실한 배경에는 운동성만으로 변화를 드러내는 공간과 간략한 조명으로 상황을 묘사하는 미니멀리즘적 스타일의 추구가 있다고 생각된다. 60년대에 미국에서 시작된 미니멀리즘 예술은 기존의 예술 관념과 관습적 제작 방식을 거부하는 저항의 행동이었다. 90년대에 유럽무용에 수용된 미니멀리즘도 80년대의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하에서 거대 자본에 기반한 예술생산 체제와 제도에 대한 비평으로서 수용된 것이다. 미니멀리즘이 스타일이 아니라 비평이자 정치적 행동으로서 실천되었다는 의미다. 제작 크레딧에 등장하는 총52개 단체와 개인의 이름을 배경으로 하는 거대 블록버스터인 〈몸쓰다〉에서 개념미술이나 소위 개념무용이라 불리는 작업들이 가졌던 반성적 의식과 비평적 발화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예술이 풍성한 철학적 텍스트를 필요로 하는 건 시적 언어가 수행할 수 없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언어적 기능을 통해서 사회에 대한 비평이든, 무용의 매체성에 대한 비평이든 비평적 실천을 수행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풍성한 텍스트에 비례하지 못하는 빈약한 퍼포먼스는 수많은 현대예술 작품이 드러내는, 오히려 현대예술의 특징이라고도 할 현상이다. 그러나 수행적 퍼포먼스들이 드러내는 발화문과 수행 사이의 이 심각한 괴리는 예술작품의 재료가 되는 것을 예술가의 주제의식에 결합시키는 형질변형 공식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개념적으로 유창한 텍스트만 있을 뿐, 방법적으로 특화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퍼포먼스 이론의 수용이든, 언어이론의 수용이든, 사회과학 이론의 수용이든, 혹은 고유한 방법론의 개발이든 예술가만의 방법론을 명확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국립’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우는 예술 단체가 지향해야 하고 모범적으로 제안해야 하는 덕목이다.

김명현 

학부에서는 한국무용을, 석사과정에서는 예술경영을, 박사과정에서는 문화콘텐츠를 전공했다. 무용 작품의 기획에서부터 제작, 생산, 유통, 비평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서의 언어의 작동에 관심이 있다. 팟캐스트 플랫폼 네이버 오디오 클립에서 〈심플리 댄스〉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

2022. 5.
사진제공_국립현대무용단, Aiden Hwang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