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오래오래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46년 만에 다시 조우한 화가
김채현_춤비평가

영롱한 물방울,이라는 표현을 가끔씩 만난다. 영롱한 물방울... 썩 적절한 언어의 조합이 아닐까. 맑게 빛나는 물방울을 떠올리는 낱말로는 영롱(玲瓏)이 제격이다. 그 표현을 대하다 보면 일상에 그런 순간이 드물지 않다는 것을 새삼 감지하곤 한다. 영롱한 물방울, 그 앞에서 일 순간이나마 고요한 평안에 젖는다. 숲속에서 만나는 영롱한 물방울이 주변의 풍광, 신선한 산소의 숲 향기와 어우러져 그 아우라가 돋보였던 경험들마저 없지 않을 것이다. 영롱한 물방울을 평생 그린 화가가 있었다.

김창열, 물방울 화가. 영롱한 물방울들을 그의 전시회에서 내가 목격한 것은 1976년이었다. 나 말고도 우리 미술계가 그의 영롱한 물방울 화폭을 접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1929년생으로 1960년대 전반, 그러니까 그의 나이 30대 중반에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몇 년 체류 활동하다가 1969년부터 파리에 정착한 몇 해 후에 우연히 물방울의 강렬함에 이끌려 물방울 그리기에 몰두하여 프랑스 화단에 물방울 그림으로 알려진 김창열 화가, 그를 국내에서 소개한 것이 1976년이었던 것이다.




김창열 화가 전시회 팸플릿 표지 ⓒ김채현




내가 자료로 간직한 전시 팸플릿을 근래 다시 열어보니 그 전시는 그해 5월 열흘 동안 열렸다. 당시 경복궁 앞에 있은(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 현대화랑에서 열린 전시회 첫날 갔었고, 전시 팸플릿에는 화가에게서 직접 받았는지 그의 사인이 기재되어 있고 화가의 파리 거주 주소(~ 75006)도 자필로 적혀 있다.




김창열 화가 팸플릿 속표지, 전시회 개막 당일 받은 사인이 조그멓게 보인다 ⓒ김채현



김창열 화가 팸플릿 속표지(부분), 전시회 개막 당일 작가에게서 받은 사인이 아래에 조그멓게 보인다 ⓒ김채현




46년 전 그날 그 현장에서 본 물방울들은 지금껏 내 마음 속에 머물고 있었다. 물방울이라는 일상에서 너무도 흔한 물상(物象)을 그가 오브제로 형상화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서구에서 하이퍼리얼리즘이 화제가 되던 당시라 하더라도 하이퍼리얼리즘으로 그의 물방울 그림을 해석하는 것은 미진해 보였다. 게다가 그의 그림 속 물방울 자체에 우리의 정신이 동화되어야 할 것이라는 해석 또한 와닿지 않았다. 일상에서는 영롱한 물방울에 별 절차 없이 동화되기 십상인 데 비하여, 정작 그림 속 그 물방울들 앞에서는 감각의 기능을 정지하고 정신으로서 명상하듯 동화되어야 한다는 해석이 나에게는 물음표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 그 7년 후 1983년 국내에서 물방울을 주제로 다시 열은 그의 전시회를 계기로 나는 얼마간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전시 보도 기사에서 이런 내용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의 물방울은 육이오사변이란 역사성과 동양적 소재라는 복합적인 요소로 표현된다. 육이오 때 미처 피난길을 떠나지 못해 죽음의 현장에서 필연적으로 엄습하는 자의식, 그 표현 욕구가 엥포르멜이나 과다한 추상표현주의가 아닌 지극히 온건한 동양적 마티에르를 바탕으로 우러나오는 것은...” 여기서 화가의 물방울이 자신의 역사적 경험과 동양인의 관념, 이 두 가지와 연관된다는 것을 어림짐작하게 되었지만, 육이오의 죽음 현장과 결부한 소개는 더 이상의 구체적 설명이 없어 실감이 나기는 어려웠다. 그의 그림 속 물방울들은 다시 내 마음 안에서 물음표로 남게 되었다. 그후 우리 미술계에서 김창열이 겪은 실제 육이오 현장이 소개된 바가 있는지 나로선 알지 못한다.




김창열 작가 영화 전단 스캔본 ⓒ김채현




지난 9월 김창열 화가를 다큐로 소개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선 마음 먹고 보러 갔었다. 화가의 아들(김오안)과 1인이 공동 감독으로 제작했다 하였다. 화가의 바로 혈족이 만들었다 하니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에서 그가 왜 평생 물방울에 천착하였는지 알아차리기를 기대하며... 9월 하순 이른 낮 영화관 넓은 블랙박스 속에서 여남은 사람만 보였다. 영화는 다큐 자료를 활용하여 에세이 식으로 펼쳤다. 화가의 일대기를 정리한 다큐가 아니고 영상 에세이이며, 홍보 전단에도 시네마 에세이로 소개되었다.

평안도 맹산 출생으로 육이오 전쟁 훨씬 전에 서울로 남하하고, 어릴 때 그림 재주가 있었고, 친할아버지께 천자문을 익혔고, 북한에서 정권에 대한 불만을 우연히 적은 글을 몇 자 적었다가 낙인찍혔고, 16살에 엄청난 불안을 안고 삼팔선을 넘었고, 서울에서 그림을 수련했고, 육이오전쟁 때 미아리 고개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시신에서 잘려져 나간 머리들을 섬찍하게 목격했고, 포탄이 떨어지는 아수라장에서 바로 자기 앞의 사람이 쓰러졌고... 9년 동안 면벽 수행한 달마대사처럼 자신의 그림 화폭 앞에서 날마다 명상을 지속하고 노자의 무위를 가까이하며 거의 묵언 생활을 해오듯이 달마와 노자가 그의 의지처이고...

물방울이 화가 김창열에게 자신의 체험 즉 생과 직결된 것임을 〈물방울 그리는 남자〉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나로선 46년 동안 이어지던 궁금증이 비로소 이렇게 풀려나가기 시작하였다. 수만 개 그려져온 물방울의 그림들은 언뜻 고전적 기법의 추상화처럼 보이겠는데, 내적으로는 화가 김창열이 자기 주변에서 생명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자기 스스로 부른 레퀴엠이었고, 그에게는 평생의 처참한 트라우마를 다스릴 힐링과 테라피의 과정이었을 것이고,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어떤 추상은 필설이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그 진정, 진실을 담는다.




김창열 작가 팸플릿 속 작품(제목 없음) 스캔본 ⓒ김채현




다시 46년 전으로 거슬러간다. 그의 첫 물방울 전시가 있었던 1976년은 단적으로 유신시대로서 사람들이나 언론이나 북한 연관 사실을 가급적 말하지 않으려는 엄혹한 시대였다. 이번의 시네마 에세이에서 그는 평안도 맹산 출생으로 그곳은 북한의 풍산리 핵실험장과 가까운 곳이라 설명되었다. 그런 그가 소년 시절 그곳에서 남하하였다.

이번 시네마 에세이에 잠시 스쳐지나치면서 언급되듯이 김창열은 10대 후반에 서울 성북동에서 그림을 수련하였고, 내가 영화를 본 기억으로는 그가 누구에게서 그림을 수련했는지는 설명되지 않은 것 같다. 다른 자료에서 알고 보면, 화가 이쾌대가 월북하기 전에 김창열은 서울 성북동의 그에게서 수련하였다 한다. 이쾌대는 1950년 월북하다 체포되었으나 결국 남북포로 교환의 일환으로 북한으로 간 인물로 알려져 있다. 쾌대(快大)의 이름만큼이나 장쾌한 그의 그림은 러시아 사실주의 풍으로 그려져 보는 사람의 마음을 수시로 들끓게 하는 바가 있다. 이쾌대에게 그림을 수련한 김창열이 이쾌대를 어떻게 수용했는지 나로선 궁금한 바가 없지 않으며, 다만 그가 물방울을 레퀴엠 차원에서 추구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내 짐작이다. 북한에서 남하한 사실도 그럴지 모르지만 이쾌대와의 인연은 더욱 발설해서는 안 되는 금기(엄청난 금기!)였던 때가 그 시대였던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시대는 작품의 진실을 말하기를 버젓이 가로막고 있었다.(이쾌대는 남한에서 1988년 해금되었다.)




김창열 화가 전시회 팸플릿에서 발췌한 초상 사진 ⓒ김채현




처마에 맺힌 물방울, 풀섶 위에 아롱진 물방울, 과일을 덮은 물방울, 쟁반 바닥을 구르는 물방울 같은 특정한 물방울은 아니지만 김창열은 자신의 시선과 몸을 기울여 물방울을 형상화하였다. 그 영롱한 물방울이 비밀 아니 그 모든 것을 감추고 있다. 물방울은 말이 없다. 그림 바깥에서도 언제나 물방울은 말이 없다.
(- 김창열 작가는 2021년 연초 91세로 한국에서 타계하였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 ​​​​

2022. 10.
사진제공_김채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