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에세이_ 뜰을 거닐면서(17)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이순열_춤비평가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5월, 우리 집 조그만 뜰에도 나뭇가지마다 무성한 잎들이 화사한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너울거린다. 허나 그 잎들도 조만간 낙엽으로 흩날릴 것이다. 어찌 나뭇잎이나 풀과 꽃 뿐이랴. 영고성쇠란 만물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아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리니.
   (베드로전서 1장 24절)


 ‘모든 육체는 풀과 같다’지만 인간과는 다른 점이 많다. 우선 풀과 꽃은 시들어가는 것을 피하려 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피라미드를 구축해서 불멸을 탐하려고도 하지 않고 묘비명 따위로 그 흔적을 남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인간은 그리도 요란스러운가. 한 줌의 흙이 되고 재가 되면 모두 똑같아지는데(Aequat omnes cinis.───Seneca) 왜 그리 목에 힘줄이 뻗히고 죽어서조차 탐욕을 버리지 못한 채 묘비명을 남기고 그도 모자라, 더러는 미라로 굳어 흉물스런 백골을 남기려 하는가?  

먼 옛날에서 온 나그네 만났더니
그가 이르기를
몸통 없는 거대한 돌다리 두개
사막에 딩굴고 있었다네.
가까운 곳 모래 위에는 망가진 얼굴 반쯤 묻혀 있었고
냉기서린 오만한 위세로 범벅된 그 조소(嘲笑)를 보면
조각가가 그의 격정을
제대로 파악했음을 짐작케 한다고.
그 탐욕스런 격정은
온 몸이 조각조각 흩어진 지금도 그 기운이 가시지 않고
맥박 치는 손과 피 끓는 심장이
생명 없는 물체에 서려 있었다고.
그 좌대에는 이런 비문이 새겨있었다.

내 이름은 오지만디아스, 왕중의 왕이니라.
젠체하는 군주들이여,
내 위업을 보라. 그리고 절망하라.

그 밖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느니
삭아가는 그 거대한 잔해 주변에는
가없이 뻗은 허허한 공간에
적적하고 밋밋한 사막이 멀리 뻗어 있을 뿐.


(I met a traveller from an ancient land
Who said: Two vast and trunkless legs of stone
Stand in the desert. Near them, on the sand
Half sunk, a shattered visage lies, whose frown
And wrinkled lips and sneer of cold command
Tell that its sculptor well those passions read
Which yet survive, stampted on these lifeless things
The hands that mocked them and the heart that fed:
And on the pedestal these words appear:

My name is Ozymandias, King of Kings.
Look on my works, ye Mighty and despair

Nothing beside remains. Round the decay
Of that colossal wreck, boundless and bare
The lone and level sands stretch far away.)

───P. B Shelley : Ozymandias

 

 



 쉘리(P. B Shelley)의 시 「오지만디아스」는 거품처럼 허물어지는 휴브리스(hybris)의 종말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제왕들은 얼마나 오만하게, 얼마나 우쭐거리면서 살아왔던가. 그래서 데르자빈(Gavrila Romanovich Derzhavin: 1743-1816)은 ‘제왕들이여 그대들은 권력의 화신 아닌가’고 묻지 않았던가. 오지만디아스는 그런 제왕들에게조차 이렇게 호령하고 있다. ‘네까짓것들이 제왕이라 뻐겨본들 어찌 나와 견주랴. 내가 이룩한 업적을 보라. 그리고 절망하라’고. 오만의 극치이다.
 그러나 아무리 우쭐거려본들, 아무리 거대한 석상을 세워 자신의 불멸성을 볼성 사납게 뻐겨보려한들, 세월의 아가리속에서 그의 석상은 조각 조각 흩어져 사막에 딩굴뿐이다.
 그래서 온갖 권력을 그 손아귀에 거머 쥐었다고 자처했던 솔로몬의 입에서 조차 이런 탄식이 흘러나오지 않았던가: “헛되고 헛되느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우리의 선행자(先行者)들, 그들은 모두 어디 있는가” (Ubi sunt qui ante no fuerunt)
 ───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무덤으로 간다. 

황제들이여, 당신들은 권력의 신 아닌가.....
시든 잎이 나무에서 떨어지듯
당신도 똑같이.
당신의 마지막 노예가 죽을 운명이듯 당신도 그렇게.
            데르자빈 : 조수관 역
 

 미천한 신분에서 변신을 거듭하여 에까떼리나 여황 밑에서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온갖 고난과 수모를 거처 영광의 술잔을 만끽하기도 했던 데르자빈, 그가 마침내 깨달았던 것은 황제도 노예도 그 종착역은 예외없이 ‘죽음’이라는 것이었다. “꿈처럼 아름다운 곳, 아르카디아에도 나(죽음)는 있느니.” (Et Arcadia ego.) ─── 죽음은 무소부재(無所不在), 도처에 있다.

 ‘나 또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Vado mori)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곧잘 잊어버린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쩌다 말등에 올라탔다고 해서 어찌 벨레로폰(Bellerophon)처럼 볼성 사납게 우쭐거리랴, 그러다가도 추락과 죽음이 눈앞에 닥칠 때에라야 새파래진다.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왜 인간은 죽음 앞에서 휘청거리고 때로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비굴함을 들어내기도 하는 것일까? 햄릿의 고뇌처럼 ‘죽는다는 것은 잠자는 것과 같고, 그 잠속에서 이따금 꿈을 꾸기도 하겠지만, 삶의 사슬을 끊어 버렸을 때, 어떤 꿈을 꾸게 될지’ 몰라서일까. 

저녁 종은 하루의 종말을 알리는 만종(晩鐘)을 울리고
(The curfew tolls the knell of a parting day)


 그레이(Thomas Gray)의 「시골 묘지에서 쓴 비가」(Elegy written in a Country Churchyard)는 그런 우울한 톤으로 시작된다. 허나 저녁 종이 울린다면 아침 종인들 왜 울리지 않으랴. 하루하루가 나날이 죽어간다 해도 아침 해와 함께 내일은 나날이 부활하지 않는가.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는 유독 뭇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그림 한 폭이 걸려있다. 그 그림속에서 사냥꾼 케팔루스(Cephalus)는 사슴으로 잘못알고 자신이 쏜 화살을 맞고 숨진 아내 프로크리스(Procris)를 통곡하면서 어루만지고 있다.
 그런데 얼어붙었던 땅, 시들었던 대지에서는 프로크리스의 피가 떨어진 곳에 새싹이 눈부시게 돋아나고 있다. 죽음이 삶으로 회귀하는 우로보로슈(uroboroc)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 소생의 신화는 케팔루스와 함께 프로크리스의 안식을 기원하는 적갈색의 개(rubedo의 상징)가 창조한 연금술의 기적, 형설(螢雪)의 적공(積功)을 거쳐 얻은 루베도의 기적이다.
 죽지 않은 채 죽어있는 사람들, 숨 쉬는 시체로 겉만 살고 있는 사람인들 얼마나 많은가. 어제 죽었던 하루의 시체, 그 잠의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눈부신 햇살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그 눈부신 햇살을 좀 더 깊이 음미하기 위해, 수많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조만간 막이 내릴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예술의 술잔을 소중하게 어루만지고 또 다시 삶의 축제를 준비해가야 하리라.

주: Ozymandias는 에짚트의 “파라오” RamessesⅡ세 (1303BC-1213BC)의 그리스식 표기. 

2014. 06.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