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기술 〈넌댄스 댄스〉 〈이십삼각삼각〉
과학에게 물어본 예술은 더 정합적인가, 예술×기술 실험의 공회전
김명현_춤비평가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예술가 개인의 고유한 창의력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마저 과학기술과 결합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물론 이것은 사회를 앞서 나가는 예술가의 사명일 수도, 책무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국립현대무용단이 지난해 시작한 창작랩을 거쳐 처음으로 무대에 올린 〈넌댄스 댄스〉와 〈이십삼각삼각〉은 과학기술과 협업하는 우리 무용계의 현주소를 말해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넌댄스 댄스〉는 인공지능(AI)이 춤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춤을 찾는 작업이고(9월 16~18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이십삼각삼각〉은 가상현실(VR) 기술을 활용하여 고독한 개인의 시간과 공간을 연결해 고독이 고립이 되지 않을 방법을 찾는 작업이다(9월 22~25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기술 〈넌댄스 댄스〉 ⓒ)KNCDC/Aiden Hwang




먼저 〈넌댄스 댄스〉는 미디어 아티스트 신승백과 김용훈, 안무가/퍼포머로 정지혜, 강성룡이 참여했다. 무대 위에 흰색의 큐브를 다시 만들고 객석의 중앙에 두 개의 카메라 눈이 달린 AI를 놓아두었다. AI는 관객이 입장하는 동안 주변의 사물을 인식하여 말을 한다. 아키텍처 84, 빌딩 48, 데이라이팅 42, 스트럭처 84, 다크네스 54, 윈도우 42, 일렉트로닉 인스트루먼트 47 식이다. 퍼포머들은 한 명씩 등장하여 무대의 중앙에서 팔을 높이 올리거나 사선으로 내리거나 한 걸음을 옮기는 등 단절적인 동작을 보여준다. 그러면 인공지능은 그것을 “댄스 40퍼센트” 혹은 “댄스 70퍼센트”라고 인식한다. 움직임은 대체로 운동성이 발생할 때에 AI에 의해 40~70 퍼센트 사이에서 말해진다.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기술 〈넌댄스 댄스〉 ⓒ)KNCDC/Aiden Hwang




퍼포머들이 천천히 움직여 다니다 보면 AI가 ’넌댄스‘라고 인식하는 구간이 생긴다. 그러면 그곳에 표시를 하고 퇴장한다. 반복적으로 AI가 ’넌댄스‘라고 인식하는 구간을 표시한다. AI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있고, 흰 막을 걷고 검은 막을 드리웠을 때에도 AI는 움직임을 인식하기 어려워한다. AI가 춤을 인식하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탐색작업이 끝난 후, 퍼포머들의 단절적인 움직임은 점점 빨라지면 하나의 움직임 시퀀스를 이루고 그것은 점점 춤처럼 되어간다. 그러면서 조명과 암전의 반복이 시작된다. AI가 움직임을 인식하는 시간차를 이용하여 AI가 미처 인식하기 전에 암전이 된다. 무대 중앙에서는 겨우 2~3초, 사각지대에서 5초 이상 조명이 밝혀지고 움직임이 격해지고 빨라질수록 조명과 암전의 교차도 많아진다. AI는 침묵 속에 놓인다. 퍼포머들의 격렬한 움직임은 잠깐 동안의 조명 아래에서만 인식되고 관객들은 그 사이의 움직임을 상상한다.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기술 〈넌댄스 댄스〉 ⓒ)KNCDC/Aiden Hwang




이것은 춤인가? 춤을 이해하는 데에는 상상력이 필요하지만, AI가 인식하지 못하도록 빛을 조작하는 것은 춤을 만들기 위함인가 아니면 그저 AI를 침묵시키기 위함인가. 그리고 AI가 “넌댄스”라고 인식하지 못하면 그것은 춤이 되는가. “춤성”에 대한 질문은 벌써 수 십 년간 무용계가 지속적으로 던져 온 질문이다. 그리고 무용은 이미 인간의 모든 움직임을 춤으로 이해한다. 그런데도 AI에게 춤을 묻는 것은 AI의 춤의 인식 능력을 실험하기 위함인가? 그렇다면 관객에게도 AI가 춤을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하는지를 보여주었어야 했다. 개별적인 춤 작품을 인식할 수 있는지, 혹은 민속춤이든, 스포츠댄스 등 춤의 장르를 인식할 수 있는지.

그런 과정도 없이 무균 실험실처럼 무대를 만들고 시약 테스트를 하듯 하나하나 샘플을 던지는 방식의 무대에서 팔 하나를 올리거나 내리고 다리 한 쪽을 길게 뻗는 동작들에 대하여 AI가 내놓은 ’댄스 60퍼센트‘는 춤에 대한 인식으로서 적확한가? 그렇다면 ’댄스 50퍼센트‘는 ’넌댄스‘인가 ’댄스인가? 그리고 60퍼센트의 춤은 40퍼센트의 춤보다 더 춤인가? 혹은 더 우월한 춤인가? AI가 인식하지 못하는 춤을 찾겠다는 발상은 터무니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를 위해 암전이라는 기술적 조작을 이용한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AI가 입을 다물기만 하면 춤이 된다는 발상이 아닌가. 이는 실험을 위한 실험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이것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예술×기술의 융합에서 과학으로부터의 질문이 우선시되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생각한다. 예술을 과학에게 물어보면 더 정합적인 예술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국립현대무용단이 이 공연을 앞두고 진행했던 토크(9월 3일, 플랫폼엘)의 진행자였던 유튜브 채널 〈안될 과학〉의 크리에이터 궤도가 김용훈에게 했던 질문, “걷는 것도 춤이 되나요?”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 지점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실험을 위한 실험이라는 공회전을 줄이기 위해서는 창작자들이 가진 질문이 현시점의 ‘예술’에 있어서 얼마나 유효한 질문인가를 먼저 검토해야 한다.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기술 〈이십삼각삼각〉 ⓒ)KNCDC/Aiden Hwang




〈이십삼각삼각〉은 VR 오큘러스를 쓰고 시각적 그래픽으로 경험하는 가상현실의 세계를 이용한 작업이다. 이 작품의 대표 예술가인 송주원은 장소특정적 공연에 있어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에 내심 새로운 극장성, 새로운 장소성의 공연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즉 포스트 시어터로서 VR에 기반한 가상 극장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심삼각삼각〉은 지금까지의 VR 체험에서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이것이 기술적 한계인지, 예술적 디자인의 문제인지는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낮게 조명을 매달아 천장을 낮춘 세종문화회관의 S씨어터에 들어서면 관객들은 띄엄띄엄 서 있도록 요구된다. 곧이어 8명의 무용수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공간을 돌면서 특정 위치에서 포즈를 취하고 멈춤한다. 그렇게 10여분이 지나면 VR 기기를 들고 보조진행자들이 등장한다. 눈가리개와 VR 오큘러스를 쓰고 나면 관객은 지정된 자리에서 서서 약 30분 가까이 환상적인 그래픽의 세계를 만난다. 작은 원룸 자취방에서 시작하여 주변의 사물을 터치하면 넓은 바닷가 기암 계곡으로 새로운 장소들이 펼쳐진다. 각 장소마다 한 명의 무용수가 나타나고 관객은 때론 거인이 되기도, 소인이 되기도 하면서 무용수의 움직임을 홀로 지켜본다. 전통적 극장 체험과는 확실히 다른 경험을 한다.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기술 〈이십삼각삼각〉 ⓒ)KNCDC/Aiden Hwang




총8개의 장소로 구성된 VR의 세계에서 몇 번의 장소이동을 경험하는지는 관객마다 다르다. 어쨌거나 시간이 되면 다시 보조진행자들이 등장해 기기를 거둬가고 무용수들은 관객을 3개의 그룹으로 나뉜 극장의 어느 곳인가로 데려간다. 그렇게 관객이 다 착석하면 무용수들의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솔로로, 듀엣으로, 그룹으로 모였다 흩어지며 여느 극장 공연과 다를 바 없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무대가 사라진 공간에서 관객과 무용수가 마주 보는 방식이 아니라 함께 공존하는 방식으로 있을 뿐이다. 마지막에 다시 무용수들이 관객을 무대 중앙으로 불러낸다. 무용수들은 다 드러눕고 관객들이 하나둘 따라서 누우면 공연은 끝이 난다.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기술 〈이십삼각삼각〉 ⓒ)KNCDC/Aiden Hwang




〈이십삼각삼각〉은 고독한 개인이 고립되지 않을 방법을 찾는 작업이라 밝혔다. 그래서 관객과 무용수가 공현존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디자인한 듯하다. 그러나 관객에게는 가상현실에서의 리얼한 몸적 체험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VR 기술이 지향하는 바도, 관객의 체험이 목표하는 바도 새로운 감각의 현전이기 때문이다. 현재 가상현실 기술은 사용자들(주로 게임 유저들)에게 아주 디테일한 감각의 차이를 제공한다. 시각적 몰입의 경험뿐만 아니라 몸의 증강이나 변형을 경험하는 지점에까지 와있다.

이런 와중에 제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서 30분 가까이 시각적 환상만을 경험할 뿐인 VR 체험은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라이브 퍼포먼스가 펼쳐질 때에도 그 두 세계의 간극의 차가 적어서인지 두 세계를 완전히 다른 감각으로 인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왜 좀 더 가상현실을 밀고 나아가 새로운 극장으로서의 장소성을 제안하지 못했을까 궁금할 뿐이었다. 그것은 내가 온갖 극장적 경험에 익숙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VR 기술의 덕목인 새로운 감각을 제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감각적 재연결과 지각적 적응을 통한 새로운 인지적 여정’을 설계하는 데 실패한 까닭이다.(예술×기술: 이슈와 담론, p.71)

국립현대무용단은 예술×기술 프로젝트에 상당한 공을 들인 줄로 안다. 오랜 기간 리서치를 진행했고, 작품 제작에 있어서는 예술가와 과학자들을 매개할 협력 프로듀서들을 매칭했다. 관객들을 위해서는 앞서 언급했듯이 인기 유튜브 채널 〈안될과학〉의 진행자 궤도와 약을 초청하여 과학기술의 현재와 예술과의 접목 현상을 짚어보는 시간도 마련했다. 또, 〈예술×기술: 이슈와 담론〉이라는 관련 서적도 출판하여 배포하는 등 (무용)예술과 기술의 만남이 멀고 먼 길이라는 것을 알고 이 간극을 조금이나마 줄이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댄스 댄스〉와 〈이십삼각삼각〉의 실험은 공회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예술적 디자인의 실패(?) 혹은 기술적 제한이 예산의 문제 때문이라면 매우 안타깝다. 국립현대무용단의 예산 쪼개기 문제는 심각하다. 비단 국립현대무용단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누구도 책임지기 싫어하는 현실 속에서 거대 예산을 집행하는 부담 때문에 적당한 타협점을 찾는 실험은 실패를 위한 실패만 남긴다. 실패 자체는 나쁘지 않다. 예술적으로 한 걸음이라도 나아간다면.

협력 프로듀서로 참여한 이의 말을 들으니 창·제작자들 사이에서의 갈등도 컸다고 한다. 그래서 작품이라는 결과물보다는 서로의 장(field)을 이해하는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 우선이라는 제안도 나왔다고 한다. 필요한 제스처이겠다. 국립현대무용단의 예술×기술은 중요한 프로젝트이고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이든 예술을 위한 기술이라는 전제는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만이 기술의 새로운 유용성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김명현 

학부에서는 한국무용을, 석사과정에서는 예술경영을, 박사과정에서는 문화콘텐츠를 전공했다. 무용 작품의 기획에서부터 제작, 생산, 유통, 비평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서의 언어의 작동에 관심이 있다. 팟캐스트 플랫폼 네이버 오디오 클립에서 〈심플리 댄스〉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

2022. 10.
사진제공_KNCDC/Aiden Hwang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