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홍은예술창작센터〈운동장〉 태업 퍼포먼스를 보며
태업이 관객과의 약속보다 더 중요한가?
방희망_춤비평가

12월 1일 발행된 <춤웹진> 12월호에 게재된 시평 "<운동장> 태업 퍼포먼스를 보며 -태업이 관객과의 약속보다 더 중요한가"에 대해 홍은창작센터로부터 보내온 메일에 대해 방희망 필자가 보내 온 글을 원문에 이어 함께 게재했다. (편집자 주)




 홍은예술창작센터에서 2014 입주예술가 창작발표회로 마련한 프로그램의 전체 제목은 ‘모모(某某)한 예술-예술을 향한 10개의 움직임’(2014년 10월 10일-2015년 4월 19일)이다.
 홍은예술창작센터의 인터넷 사이트(http://cafe.naver.com/hongeun2011)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번 프로그램은 이전처럼 주최 측에서 프로젝트의 대주제를 제시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고 예술가 스스로 자신들의 작업을 대표하는 수식어를 찾아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획하면서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단어로 ‘모모’(某某)를 붙였다고 한다. 아무 모(某) 자가 아무, 어느, 아무개, 어느 것, 어느 곳 등의 뜻을 가지고 있듯이 비워둔 상태로, 예술가들이 나머지 의미를 채워 완성하길 의도한 것이다.
 지난 10월 10일 첫 테이프를 끊은 고블린파티와 양길호의 공연은 무대를 홍은예술창작센터 야외 공간으로 끌고 나왔다는 것 외엔 지금까지의 춤 공연들과 크게 다를 바 없어보였다.
 그런데 세 번째 발표로 예정되었던 정세영의 <운동장>은 원래 11월 초만 해도 홍은예술창작센터 무용연습실에서 공연할 것으로 홍보되었으나, 공연일자(11월 21-22일)를 일주일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공연 <운동장> 페이스북에 확정된 포스터가 올라온 날짜는 11월 17일, 홍은창작예술센터 홈페이지에는 11월 18일) ‘예술가의 파업’ 내지 ‘예술가의 태업’으로 급격한 방향선회를 했다.





 존 레넌과 오노 요코가 7일간 침대 위에서 생활하며 평화를 주장했던 행위예술 〈Bed in〉, Tehching Hsieh와 린다 몬타노가 서로를 1년간 끈으로 묶어 생활했던 〈Art/Life one year performance〉의 사진을 아래위로 병치한 포스터에는 ‘작품의 완성과 발표를 향한 창작자의 질주하는 목표 지향적 속도에 반(反)하는 7일간의 태업을 하겠다’는 공고문이 있었지만, 사실 ‘태업’을 내건 퍼포먼스는 이전에 경험한 적이 없었으므로 막상 현장에 도착했을 때의 당혹스러움은 상상 이상이었다.
 예정된 공연은 예술가, 기획자, 관객 등과의 토론회로 바꾸고 대신 일정 앞뒤(11월 17일-23일)의 기간 동안 정세영, 이민경 두 예술가가 세미나실을 점거(!)하면서 방문객을 맞고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확장한 형태였다.
 홍은창작예술센터 세미나실 한켠에 갖다놓은 간이침대와 그마저도 파업을 선언하듯 벽에서 떨어져 덜렁거리는 포스터, 태업 결정을 보고하는 두 예술가의 전혀 연습되지 않은 발언까지, 아무리 행위예술과 일상의 경계가 무너진 지 오래라 해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필자가 참여한 11월 22일 토론회의 절정은 원래 이 태업을 지지하는 두 번째 기조연설을 맡은 큐레이터 김해주 씨가 자신 역시 태업하기로 했다며 메시지를 보내와 다른 사람이 대신 낭독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녀가 당일 새벽부터 빡빡하게 진행된 자신의 스케줄, 그로 인한 피로감, 불안과 짜증, 분노 등을 돌아보며 자신만의 시간을 가져야 할 타당한 이유를 또박또박 차분히 설명할 때, 귀한 토요일 저녁 시간 먼 곳까지 찾아가 앉아있는 내 자신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잠시 들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게 될 만큼의 설득력은 있었다.
 예술계에서 각자 숨 가쁘게 살아온 큐레이터 김정현, 김해주, 무용가 송주원 세 사람의 기조연설은 책임감이나 현실적인 문제를 들어 이번 태업에 완벽하게 공감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중요하게 생각해 볼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찬성한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어진 소규모의 모둠 토론 자리에서 정세영 작가로부터 공연 내용이 이렇게 결정된 것은 열흘 쯤 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작가 본인이 올해 들어 한 달에 한두 편씩의 작품을 연속으로 작업하게 되면서 심리적인 압박감을 느낀 개인적인 사유도 크겠지만, 1년 단위로 바뀌는 홍은예술창작센터 입주예술가들의 창작발표회가 내외부적으로 지원의 성과를 1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나름 중요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열흘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컨셉트를 바꿀 만큼 상황 자체가, 공연을 준비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기획팀에 확인한 바로는 실제 공연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제작비 지원은 없었다고 하지만, 홍은예술창작센터가 서울시와 서울문화재단이 지원하고 운영하는 공공 기관임을 생각할 때 참여 예술가들이 보다 신중하게 접근할 책임이 있었다고 본다.





 사실 속도와 경쟁의 무한 전쟁에 내몰리며 고통 받는 것은 현대 도시 문명 속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고민거리이고, 긴 안목으로 내다보고 풀어야 할 숙제이다. 더구나 무용처럼 공동작업인 분야는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권한을 예술가 본인이 갖기가 쉽지 않다.
 노동자로서의 예술가를 생각하게 했다는 점에서 이번 작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만 먹으면 파업을 창작과 퍼포먼스라 ‘포장’할 수 있는 이런 방식의 접근이 매일같이 산업현장에서 땀 흘리는 ‘피고용자’인 노동자와 예술가를 오히려 분리시키고 괴리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아닐지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정세영, 이민경 두 예술가가 이 문제의식을 작품발표회를 통해 공공연하게 선언할 만큼 정말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면, 며칠간의 신기루와 같은 작업으로 공중분해 되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제대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으로 재생산할 수 있게 꾸준히 붙잡고 가야 바람직하다.
 한편으로는 신작 발표의 압박을 이번처럼 태업으로 솔직하게 토로한 것이 더 낫겠다는 웃지 못 할 면모도 있었다.




 예술가의 양심은 어디까지?
 비슷한 작품이 제목과 안무자만 바뀐 채 마치 다른 작품처럼 둔갑하기도

 앞서 이루어진 10월 10일의 발표회에서 고블린파티는 이전에 발표했던 임진호 안무의 〈I GO〉를 공동안무로 개념을 확장해서 내놓았다. 8월에 있었던 국립현대무용단의 ‘전통의 재발명전’에서 같은 단체가 선보인 <혼구녕>은 〈I GO〉와 외연은 사뭇 달랐지만 같은 주제로 관통하는 쌍생아 같은 작품이었지만, 양길호의 작품 중 두 번째 <대화>는 올봄 제9회 피지컬씨어터 페스티벌에서 경쟁작으로 참여했던 박성율의 <사물의 본질>을 거의 동일한 출연진(양길호, 박성율, 이형우, 김수진)과 함께 제목만 바꾼 것으로 보인다.
 고블린파티의 지경민은 발표회를 앞둔 인터뷰에서 오랜 기간 〈I GO〉를 4가지 버전으로 발전시켜 오면서 딜레마와 매너리즘에 빠지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이번 발표를 마지막으로 마무리한다고 말하였다.
 애착이 가는 작품을 숙성, 발전시키는 것은 예술가가 당연히 할 일이고 바뀌는 공연장소와 관객의 반응에 따라 작품의 생명력이 좌우되는 것은 공연예술이 가진 숙명이겠지만, 비슷비슷한 작품들을 진행시키며 붙들고 있는 것 또한 예술가의 태업이 아닐까?
 양길호의 경우는 안무가가 박성율이라는 것을 밝히긴 했지만 제목을 바꾸어 다른 작품인 것처럼 관객의 눈을 가렸다는 점이 영 개운하지 않다. 이 팀은 피지컬씨어터 페스티벌에서도 안무자의 이름만 달리한 채 초청공연과 경쟁공연을 같이 소화한 전력이 있다. 비록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조항은 없을지라도, 제도나 지켜보는 눈의 허술함을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필자의 지나친 판단일까?
 눈이 번쩍 뜨이게 참신한 작품을 만나는 것은 어렵더라도 관객에게 정직하고 성실하게 다가오는 예술가의 맨 얼굴을 만나는 것까지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되묻게 하는, 홍은예술창작센터의 창작발표회 단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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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예술창작센터 <운동장> 태업 퍼포먼스를 보며’ 두 번째 글


방희망_춤비평가


 <춤웹진> 12월호(제64호)에 필자의 시평 ‘홍은예술창작센터 <운동장> 태업 퍼포먼스를 보며’ 가 게재된 뒤, 홍은예술창작센터 최재훈 매니저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그는 홍은예술창작센터가 ‘늘 완성된 결과물만을 원하는 공연예술계에서 실험의 과정과 그 과정의 공유를 통한 완성된 작품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교두보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민의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공공기관의 역할만을 강조하기 보다는 예술가의 창작 산실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 센터의 조금 더 큰 목표’라는 점을 피력하였다.
 기획자의 입장에서 입주 작가들과 고민을 나누고 머리를 맞대고 애써 올린 작품이 관객과 평단에 성급하게 오독(誤讀)될까 우려하는 책임감과 세심함이 보여 한편으로 다행스럽다는 판단이 들면서도, 필자 또한 오해의 간격을 줄이기 위해 지난 번 시평에 썼던 글을 조금 더 보완하는 차원에서 덧붙이고자 한다.
 필자의 글 중 홍은예술창작센터 측에서 특히 불편하게 받아들였다고 짐작되는 부분은 글의 후반부, 10월 10일 고블린파티와 양길호의 공연에 대해 언급한 것들이다. 필자는 2014년도 창작발표회의 첫 문을 연 공연에서 고블린파티의 〈I GO〉와 같이 익히 알려진 기존작품이 올라갔다는 것을 ‘무조건 신작 발표를 했어야 하는데 그것을 게을리 하였다’는 취지로 거론한 것이 아니다.
 본래 리뷰의 대상이었던 정세영과 이민경의 <운동장> 태업 퍼포먼스 현장에서, 작가들이 의도한 만큼의 진지한 인상을 받지 못하고 온 점은 아쉬웠으나 한편으로 그 고민의 무게가 정당하다면 같은 작품을 4번 발전시켜 마무리하는 차원으로 올린 고블린파티의 선택도 연장선상에서 한 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정세영과 이민경이 속도지향적, 성과지향적인 사회에 제동을 거는 운동에 대한 사유를 ‘태업’이라는 퍼포먼스로 풀어내기로 결정하였을 때, 이를테면 그들의 이전 작품 중에서 그것을 투영하여 숙성시킬 소재는 없었던 것인지 방향을 바꿔 질문을 던지는 것도 가능하다(물론 이것은 <운동장> 퍼포먼스가 결국 시간에 쫓겨 충분한 준비기간을 갖지 못하고 성급히 올려진 것 같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왕 ‘태업’이 퍼포먼스의 주제로 대두된 이상, 예술가에게 있어 진정한 태업이 외적인 활동의 게으름을 뜻하는 것인지 자기 성찰의 게으름을 뜻하는 것인지, 과작(寡作)이나 다작으로써 태업을 논할 수 있는 것인지, 우리는 도처에 질문을 던져볼 수 있지 않겠는가?
 고블린파티는 구성원의 직업적 특질로 인해 ‘죽음’이라는 화두를 연속적으로 품고 가는 것이 정체성이자 매력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한계일 수 있다. 또한 홍은예술창작센터가 올해의 창작발표회 테마를 ‘모모한 예술’로 잡으면서 예술가들의 자율에 맡기는 것은 긍정적이나, 대부분 새로운 시도로 구성된 나머지 공연들과 달리 고블린파티의 공연에서는 기존 작품을 선보이게 되었으니 그 테두리를 너무 느슨하게 잡았던 것은 아닌지 되묻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양길호를 언급한 것은 경우가 좀 다르다. 최재훈 매니저는 메일에서 ‘양길호의 작품이 팸스 초이스로 선정되어 해외 프리젠터들에게 공개됨과 동시에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공개하기로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던 작품이며, 공연 당일 작품을 처음 접한 시민들의 만족도도 높은 편이었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필자가 지적한 부분에 맞는 답이 아니다. 필자는 지난 시평 글을 준비하며 홍은예술창작센터 홈페이지의 공연 실황 사진자료를 보다가, 양길호의 공연에서 올려진 협력예술가 박성율의 <대화>가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음, 그 소리들을 수집하여 하나의 음악처럼 만들어 배경화 했다는 작품의 테마와 실제 공연에 사용된 오브제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올 6월 피지컬 씨어터 페스티벌에서 선보였던 박성율의 <사물의 본질>과 동일한 작품이라 보았다.
 보통 안무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발전시켜 나갈 때, 제목을 같게 두거나 아니면 버전을 업그레이드 하였다는 것을 연상시킬 정도의 변화만 주는 선에서 유지한다. 이번 경우에는 작품이 공연되었던 내력도 뚜렷하게 밝히지 않고 제목마저 달리하였기 때문에 신작이 아님에도 신작처럼 선보이게 된 것이 아닌지 살피게 되었다. 피지컬 씨어터 페스티벌 당시에도 양길호의 팀은 동일한 구성원으로 안무가만 달리한 채 초청 공연과 경연을 함께 참가하여 눈에 띄었던 터였다. 지원금이 걸린 행사에 자주 선정되는 젊은 작가들이 보다 투명하게 행동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필자의 시평으로 인해 의욕적으로 선보이고 있는 홍은예술창작센터의 다른 활동들이 부정적으로 비쳐질 수 있는 오해를 불러온 것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2014. 12.
사진제공_홍은예술창작센터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