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해외춤기행
태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단상
서정록_춤이론

 

 우연한 기회에 올해부터 태국에 있는 대학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연구 분야인 동남아시아 지역의 여러 춤과 함께 태국의 전통 춤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관심 분야인 태국 궁중춤에 대한 연구를 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모으고 조사를 하던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태국 왕실의 각별한 관심과 보호 그리고 태국 사람들의 공연 예술 문화의 정체성과 자부심 그 자체인 궁중의 탈춤인 콘(Khon)이 본래 태국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은 당악(唐樂)과 고려악(高麗樂)으로 구성되어 있고 일본 고유의 작품은 찾기 어렵다는 사실에서 일본 왕실의 각별한 보호와 더불어 일본의 전통 공연 예술 문화에 정점이라 간주되는 일본의 궁중 음악과 춤인 가가쿠(雅樂)와 우선 흡사해 보인다. 게다가 양국의 궁중 공연 예술을 대하는 태도 또한 일견 닮아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본 글은 태국의 역사와 궁중 춤인 콘(Khon)의 간략한 조사를 통해 태국 역사와 문화의 특징에 대한 비판적 단상(斷想)을 적어보고자 한다.





 2014년 봄, 처음으로 태국에 왔을 때, 태국 관광청의 슬로건인 “The Land of Smile”이란 말이 참말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정말 태국 사람들의 미소에 감동했다. 지구상에 태국 사람처럼 잘 웃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타인에게 솔직함을 넘어서 종종 무례하기까지 한 한국 사람과 비교해 보면, 태국 사람들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일단 웃는다. 이제 이곳 생활이 겨우 반년을 조금 넘어 일반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경험에서 성을 내거나 눈을 부라리는 태국인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곧 이러한 미소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가지 간단한 개인적 경험을 예로 들자면, 거주 비자 신청을 위해 재직하고 있는 학교에 서류를 부탁하였는데, 한국에서는 1시간이면 될 것을 이곳에서는 무려 2달 반이 걸리었다. 당연히 성질 급한 한국인답게 매일 찾아가서 서류가 준비되었는지 문의하였지만, 돌아온 대답은 언제나 공손하게 “곧 됩니다.”이었다. 그것도 항상 아주 상냥한 미소와 함께…
 유사한 일들을 자주 겪게 되면서 이제는 그 상냥한 미소에 아주 환장을 한다. 이런 경험들은 일단 문화적인 차이에서 기인한 것 같다. 이곳의 느긋한 일 처리와 한국의 ‘빨리 빨리’ 문화는 시간 관념에서 확실히 차이가 있다. 이러한 시간 관념의 차이는, 태국만큼은 아니지만, 이전에 거주하였던 영국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발견할 수 있었는데, 영국에 있을 때도 그곳 행정이나 일 처리에서 제법 답답함을 느꼈었다. 그리고 영국의 늦은 일 처리가 영국 문화 속에 녹아있는 잦은 회의(會議)와 토론 문화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토론 문화는 의사 결정에 있어 합리적인 대신에 느릴 수밖에 없다. 늦은 일 처리에 대한 항의에 대응하는 자세에서 영국인과 태국인은 사뭇 다르다. 영국인들은 대부분 나름 논리적이지만 매우 단호하게 이유를 설명하는데 반하여, 태국 사람들은 뚜렷한 설명도 없고 그저 상냥한 미소만 있다. 한국인들이 급하긴 굉장히 급한 모양이다.
 이런 일들을 몇 차례 겪으며 태국의 문화를 이해해 볼 요량으로 나름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생각을 해 보기 시작하였다. 분명 이런 일 가운데 상대방도 계속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이 사실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결국 동료 태국인 교수에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농담 삼아 물어 보았는데, 태국에서 화나 짜증을 내는 것은 상당히 무례한 경우로 어떤 경우에도 일단 미소를 짓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또 이는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지만 혹 무례할지라도 정당하다면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 정신건강에는 더 도움이 될 터인데, 아무 저항이나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대신 미소로만 일관하는 태도는 솔직히 자학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일본에 연구차 있을 때 일본 사회에서 느낀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주지하듯이 세상에서 일본사람들처럼 친절한 사람들도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실 '혼내'(本音, 속마음)를 감추고 '다테마에'(建前, 겉치레 말)’로 일관하는 것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일본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다간 낭패하기 일쑤다. 물론 일본인은 '다테마에'(建前, 겉치레 말)’를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예절이라지만 …
 이쯤 되자 태국의 문화를 이해해 보려는 시도가 태국과 일본과의 비교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보니 태국이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 일본과 제법 유사한 점이 많다.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과 태국만이 식민지 지배를 겪은 경험이 없다는 점이 우선 찾아 볼 수 있는 공통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양국의 자부심도 대단하다. 또 다른 유사점으로 현재 태국과 이웃 국가와의 분쟁 형태도 들 수 있다.
 태국과 캄보디아 간의 분쟁이 그 예이다. 이 분쟁에는 양국의 국경에 위치한 프레아비히어 사원을 둘러싼 영유권이 그 핵심이다. 캄보디아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식민지 시기를 틈타 일본이 한국의 영토인 독도를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 사원은 캄보디아의 전성기였던 크메르 제국(802~1431) 시대의 찬란한 역사를 보여주는 역사적 유물 중 하나로 태국의 소승불교와는 달리 크메르 제국의 종교였던 힌두교 사원이다. 사원을 둘러싼 분쟁은 1954년 프랑스에서 캄보디아가 독립하자 태국이 이 사원을 무력으로 점령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에 캄보디아는 즉시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였고, 재판소는 캄보디아에 속한다고 판결했다. 그렇지만 태국은 이 사원 주변의 영토의 경우는 판결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계속해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결국 이후 양쪽의 무력 충돌이 이어져 수십 명이 숨지고 수만 명이 피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점에서 태국과 캄보디아의 분쟁은 독도를 둘러싼 한-일 사이의 갈등보다 오히려 더 심하다고 하겠다.
 외국 저명한 동남아 역사가들의 연구를 통해 태국인과 그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의견들을 살펴보면, 여기서도 재미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영국의 동남아시아 역사가인 D. G. E. Hall의 경우, 태국 사람들을 평하면서, “놀라운 동화자(remarkable assimilators)”라는 표현을 하였다. 이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새로운 문화를 재빠르게 받아들이고 또 변화하는 정세에 기민하고 유연하게 적응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일본 문화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 “좋은 것은 기꺼이 취한다(良いとこ取り)”와 참 닮았다. 또 다른 동남아시아 역사가인 John F. Cady 역시 그의 책 『Southeast Asia: Its Historical Development』에서 태국인들을 "창조자라기보다는 훌륭한 차용자(better borrowers than creators)”라 평한 바 있다. 즉 그의 연구에 의하면, 태국 문화에 근간이 되는 것들 중 태국의 고유의 것 혹은 태국에서 유래한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실은 태국 사람들의 자국 문화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과 아름다운 휴양지 이외에도 무진장 볼거리가 넘쳐나는 관광의 대국으로 소문이 난 이 나라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오히려 태국의 문화는 이웃 국가인 캄보디아에서 국가의 기본이 되는 예술, 정치, 행정, 법 그리고 문자를 가져왔고, 현재 태국의 근본 사상이라 할 수 있는 소승불교의 경우 버마(미얀마)에서 전해졌다. 이러한 점은 일본의 근간을 이루는 전통 문화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전수 받았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자신에게 유익하고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은 부끄러워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베끼고 배워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이른바 ‘습합(習合) 문화’가 일본과 태국의 문화를 설명하는 키워드라 볼 수 있겠다.
 그러면 태국의 역사의 시작 부분으로 잠깐 살펴보자. 태국은 주변국인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그리고 버마에 비해 그 역사가 확실히 짧은 편이다. 태국이 동남아시아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는 13세기경으로 추정이 되는데, 많은 학자들은 태국인들이 본래 중국 남부에 거주하다가 12-13세기 몽골의 확장과 더불어 이를 피해 남하하여 오늘날의 태국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동남아시아에 정착하게 된 태국인들은 즉시 단일한 왕국을 세운 것이 아니고, 작은 집단들로 나뉘어 정착하였다.
 뒤늦게 동남아시아에 정착하게 된 태국인들 이다 보니, 이웃 민족에 비해 턱없이 짧은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아마도 이 때문에 태국인들은 일종의 역사에 대해 혹시 열등감을 지니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조심스럽게 든다. 예를 들면, 람캄행(Ramkhamhaeng) 대왕 비문에 대한 것이 그것이다. 태국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 받고 있는 13세기 태국 최초의 왕국인 수코타이의 제3대 왕이었던 람캄행에 대한 것이 그것이다. 람캄행은 외교, 군사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타이 문자를 만들어 종종 한국의 세종대왕에 비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행적과 관련된 문서 대부분이 1767년 버마의 침공으로 인해 소실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이유로 그의 업적은 전설적인 형태를 통해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19세기 람캄행 대왕 비문이 발견되면서,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재미난 사실은 이 비문의 발견자가 뮤지컬과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왕과 나(King and I)”로 인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몽꿋(Mongkut, 1804–1868) 이라고도 불리는 태국의 국왕 라마 4세가 승려 수행시절 발견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일본의 메이지 천황처럼 서양식 개혁과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룬 업적으로 태국의 역대 왕들 중 가장 위대한 왕 중 하나로 추앙받고 있다. 그런 그가 이 비문을 발견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극적(劇的)’이라 하겠다. 가장 오래된 태국의 역사와 문자를 간직한 이 비문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UNESCO Memory of the World)로 2003년 등재되어 태국인들의 자랑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비문의 상당부분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우선 이 비문과 교차검증을 할 만한 증거들이 없는데다가, 문장에서도 인칭이 변화한다거나 문체가 바뀐다거나 하는 점도 문제이다. 더욱 큰 문제는 문장들 중에는 영어식 문체의 영향을 받은 흔적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어 이 비석이 후대에 쓰여진 것이 아니냐는 강한 의혹이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 비문 전체에 대한 조작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의혹들은 전적으로 태국 밖에서의 의견이며, 태국 내에서는 위대한 왕에 대한 기록을 후대에 또 다른 위대한 왕이 발견한 사건 자체가 큰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태국 내에서는 감히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는커녕 언급조차 하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모습은 바로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 문제에 대한 논쟁과 유사한 점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고대 역사를 기록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일본서기』의 경우 많은 학자들은 일본 천황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 진 책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오래된 역사를 강조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 분명한 3세기에서 4세기 사이의 역사를 120년 끌어 올린 흔적이 보이는 이주갑인상(二周甲引上)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주체(主體)가 일본이 아니라 백제일 경우 더 정확해 보이는 사건들에 대한 기록들 그리고 조작의 정점인 임나일본부설 문제와 진구 황후의 신라 정벌 같은 황당한 사건의 기록 등등에서, 당시에 쓰여졌기에 위서(僞書)는 아니지만, 분명 이 책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람캄행 대왕 비문과 『일본서기』는 고대 역사에 대한 양국의 열등감의 표출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감출 수 없다.
 사실 이웃의 기록을 보면, 태국의 고대 역사를 간접적이나마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에 있는 여러 부조(浮彫)들을 보면 태국 군인들의 모습이 제법 보인다. 일예로 12세기 강력한 크메르 제국의 왕 수리야바르만 2세가 그의 숙적(宿敵)인 참파를 공격할 때, 캄보디아 병사들과 함께 태국의 병사들도 보이는데, 이는 당시 타이족이 크메르 제국의 부용국(附庸國)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태국을 지칭하는 용어로 현재까지도 종종 사용되는 “시암(Siam)”이라는 단어는 원래 캄보디아 언어로는 '검정색 혹은 갈색’의 의미로 ‘좀도둑'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는 일본의 옛이름인 왜(倭)의 본래 의미인 ‘난장이’를 연상하게 한다.
 아무튼 람캄행 대왕 사망 후 수코타이는 쇠퇴하고 남쪽에서 발흥한 아유타야가 태국 전역을 통일하였다. 그리고 마침 후계자 문제로 국가가 분열되어 극도로 쇠퇴하고 있던 크메르 제국을 아유타야는 줄기차게 공격하여, 결국 1431년에 아유타야는 크메르 제국의 당시 수도였던 시엠립(Siem Reap)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때 크메르의 수준 높은 궁정 문화도 약탈하였는데, 이때 많은 크메르 궁정에 있던 악사들과 무용가들도 함께 납치되었다. 이들이 태국 궁중에 와서 공연한 것이 바로 일종의 탈춤인 콘(Khon)이다. 이전까지 태국은 그들의 고대 역사와 마찬가지로 세련된 공연예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 그러나 태국의 공연예술이 크메르의 매우 정교하고 잘 다듬어진 공연예술을 약탈해 오는 순간 갑자기 그 수준이 높아지게 되었다.
 크메르 제국의 경우 종교에서뿐 아니라 사상 예술 등 다양한 방면에서 인도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것은 놀랍게도 태국의 궁중춤인 콘(Khon)에서 잘 들어난다. 콘(Khon)의 토대가 되는 이야기는 고대 인도의 유명한 대서사시인 '라마야나(Ramayana)'이다.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이 서사시는 주인공인 라마의 모험을 그리고 있다. 특이한 점은 이 서사시가 태국의 종교인 소승불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크메르의 종교였던 힌두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래 버마에서 전래된 태국 불교는 나중에 스리랑카에 직접 학자와 승려들을 파견하여 그곳의 불교를 배워오기에 힘을 썼는데, 이 불교는 주로 고대 인도의 민중 언어인 팔리어를 기본으로 하고 있어, 당시 바라문들이 쓰던 귀족어인 산스트리트어와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내용이나 배경에서 초기의 콘(Khon)은 크메르 문명의 정수이지 타이 문화와는 상당히 이질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콘(Khon)이 태국의 춤이 라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태국에서는 ‘라마야나’를 ‘라마끼엔’이라 타이 식으로 번안하여 부르고 있는데, 아유타야 시대부터 시대상황에 맞게 변형을 거듭하며 현지화하여 분명 태국 문화의 정수가 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현재 태국에서 콘(Khon)에 대한 해석이다. 현재 콘은 태국 궁중 예술의 정수로 왕실은 물론 일반인들과 관광객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콘을 소개할 때 거의 캄보디아에서 유래하였다는 사실을 정확히 밝히고 있는 경우는 드물고 마치 인도에서 직접 유래한 것처럼 소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점은 일본의 몇몇 학자들이 가가쿠에서 한국과 관련한 내용들을 침묵하고 외면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렇지만 가가쿠에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고마가쿠(高麗樂)라는 장르가 엄연히 존재하다 보니, 한국에서의 유래를 완전하게 배제할 수 없다. 태국과 캄보디아의 경우처럼 약탈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이 경우 여전히 몇몇 일본 학자들은 이를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발해에서 근거도 없이(『일본서기』의 기록에만 의존하여) 조공을 바친 것으로 종종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상당수의 일본의 연구가들은 가가쿠가 중국과 아시아 대륙에서 전래되어왔다는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얼버무리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일본이나 태국의 경우 바로 이웃 국가인 한국이나 캄보디아 보다는 그래도 좀 더 멀리 떨어져 있고 큰 나라로 알려진 중국이나 인도에서 자신들의 문화의 정수가 유래되었다고 얼버무리는 태도 또한 양국이 많이 닮아있는 것 같다. 이러한 역사와 문화에 대한 애매한 태도는 혹 이웃 국가에 대한 고대 역사에 단순히 문화적 열등감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사례는 사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세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긴 하다.
 물론 그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될 수 있지만, 또 다른 관점 즉 양국 모두 왕실의 권위가 절대적이라는 것에서 혹시 그 원인을 찾아 볼 수도 있는 것 같다. 일본의 경우는 우선 미루어두고서라도 태국에서 생불(生佛)이라 추앙받는 국왕 권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일례로 2006년 태국 국민의 절대적인 충성과 존경을 받고 있는 태국 국왕의 초상화에 장난 삼아 검은색 페인트로 먹칠한 한 스위스 남성이 체포되어 10년의 징역형을 받은 경우도 있다. 물론 나중에 국제 사회의 압력으로 사면되어 추방되었지만, 이러한 사건은 태국에서 국왕의 권위가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러한 권위는 상징으로만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법으로도 정해져 있어 그 위력을 실감케 한다. 이러한 사정은 일본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태국과 같이 물리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훨씬 교묘하게 왕실의 권위는 사회 곳곳에 침투해 있다.
 국가의 통합을 위해 절대적인 왕의 권위가 필요한 것은 태국이나 일본이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영국의 경우도 여왕이 국가의 수장으로써 국가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이들 두 나라와 사정이 같아 보인다. 그렇지만 영국의 경우 왕권이 일종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 반대에 위치해 있는 상징적 의미도 있어 도전과 투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들 나라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사례가 바로 해마다 있는 '여왕의 연설(Queen‘s Speech)' 행사이다. 여왕은 매년 가을 의회 회기 개막에 맞춰 의회가 앞으로 처리할 입법안들을 발표하는 의회 개원연설을 하게 된다. 여왕은 당연히 연설할 내용을 사전에 의회와 협의한다. 여왕이 의회로 행차할 때 화려한 복장을 한 호위대를 대동하고 네 마리의 백마가 끄는 멋진 마차를 타고 버킹엄궁에서 의사당으로 향하는데 이 행렬은 화려한 볼거리다. 여기까지는 영국도 태국이나 일본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렇지만 영국의 경우 이 화려한 예식이 단순히 왕실의 권위를 보여주는 것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것은 '여왕의 연설' 예식에 있어 가장 유명한 전통 중 하나는 '여왕이 의사당에 가 있는 동안 하원의원 한 명은 버킹엄 궁에 ‘인질(Hostage Member of Parliament)’로 잡혀 있는 것이다. 현재는 오래된 예식으로 인질로 잡혀 있는 의원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하지만, 본래 이 전통은 입헌 군주제가 확립되기 전 왕과 의회가 서로 치열하게 대립하던 찰스 1세(1600–1649) 때, 의회에서 왕이 자신의 궁으로 안전한 귀환을 보장받기 위해 시작된 제법 살벌한 내력이 있다. 결국 당시 의회와 대립하던 찰스 1세는 청교도 혁명(혹은 영국 내전)을 통해 결국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여왕의 연설’ 행사 속 여러 가지 예식들은 당시 의회와 왕권의 대립을 잘 보여주는 여러 사소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행동들이 전통으로 이어져 그대로 현재까지 내려져 온 것이다. 즉 이 예식은 과거 왕권과 의회의 긴장감을 연출하여 영국인들에게 현재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왕을 비롯한 기득권에 대한 피의 투쟁을 통해 쟁취한 것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점에서 영국에서의 왕의 권위와 태국이나 일본에서의 왕의 권위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나라들 모두 왕의 존재를 통해 국가의 통합을 이루는 것은 유사하지만, 태국이나 일본은 영국과는 달리, 왕은 생불(生佛)이거나 혹은 인간 신(神)으로 경외와 복종의 대상일 뿐 어떠한 비판도 하락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경직되고 엄숙한 왕권의 신격화가 왕의 절대적 권위를 믿는 순결한 믿음을 강조하는 쪽으로 발전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러한 엄숙하고 신격화된 왕권은 진실이나 진리보다도 앞선다. 왕의 권위를 위해서라면 역사를 왜곡하는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본의 경우 위안부 문제, 야스쿠니 신사 문제 역사 왜곡의 문제, 독도 문제 등등 현대 일본 사회의 문제들과 금기들의 가장 근본에는 천황제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신성하고 존엄한 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궁중 춤과 음악은 바로 국왕의 권위 그 자체이다. 이에 대해 어떠한 외부적인 요인이 개입되어서는 안 되며 오로지 순결만이 요구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한국에서 군사정부 시절 모든 가치 앞에 애국, 애족을 앞세우며 결국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러한 관점은 그러나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새로운 문화를 재빠르게 받아들이고 또 변화하는 정세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태국인이나 일본인과는 참으로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이러한 특징 때문에 오히려 문화와 전통의 창조자만이 누릴 수 있는 느긋함이 이들에는 부재하여, 이에 대한 욕구가 문화와 전통의 상징으로서 왕의 권위로 모아졌을 수 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비합리적 권위에 저항하고 자유를 쟁취하려는 합리적인 주체의 성립과정 없이 만들어진 태국과 일본의 근대화로 인해 아직까지도 태국과 일본은 문화와 역사에 있어 이런 기괴한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2015. 0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