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해외춤기행_이베리안 반도의 한국 무용가들
공연과 리서치를 통한 국제교류
곽아람_국제무용협회 한국본부 국제교류팀장

 7월 삼주 동안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보냈습니다. 한국 무용가들이 마드리드·바르셀로나·사라고사·빌바오·오우렌세 등 스페인 5개 도시에서 공연을 펼쳤고, 리스본에서는 한국-포르투갈 젊은 무용가들의 워크숍 익스체인지가 있었습니다.
 이 일들을 주선했던 국제무용협회(CID-UNESCO) 한국본부는 스태프 3명이 지역을 나누어 무용가들과 함께했는데, 저는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그리고 리스본을 맡았습니다. 더운 날씨에 고생도 많았지만 그런대로 적당한 여유와 느긋함으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저도 모르는 사이 남유럽 특유의 기질을 닮아갔던 덕분인 것 같습니다.





 마드리드 프린지 페스티벌 (www.madridfringe.com)은 7월 3일부터 25일까지 요 몇 년 사이 현지인들의 핫플레이스로 자리잡은 마따데로 마드리드-현대예술센터(Matadero Madrid-Contemporary Art Center)에서 펼쳐졌습니다. 이름에서 금방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이곳은 과거 가축 도살장이었습니다. 도살장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만큼 매우 현대적이고 세련된 공간으로 탈바꿈한 마따데로는 공연, 영화, 음악, 디자인, 건축 그리고 도시계획 등 여러 장르 예술가들의 작업이 이루어지고 소개되는 곳이었습니다. 아마도 프린지의 기본 정신과 방향이 이 공간이 추구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도전과 실험, 그리고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과 통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마드리드 프린지에서는 7월 11-12일 안무가 이윤정의 <더 듀엣(The Duet)>과 최영현의 <나는 아니다(Not I)> 두 작품이 더블빌로 소개됐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해외에서 만난 기술 스태프 중 가장 깐깐하고 세심한 기술행정 담당 니꼴라스 덕분에 부족한 준비시간과 쉽지 않은 현장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2회의 공연은 모두 성공적이었습니다.





 가끔 해외에서 우리와는 다른 극장 고용조건 때문에 당황할 때가 있는데 마드리드 프린지는 주말에는 아무리 공연이 많아도 일정 인원 이상의 임시 스태프를 고용할 수 없다거나 극장의 공식 스태프는 무대작업 시 관객에게 노출될 수 없다는 등(하여 인터미션이 아닌 짧은 무대전환 때 크루가 여러 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연자나 투어 매니저가 직접 무대전환 작업에 투입되기도 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해 저를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이럴 땐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때론 헝그리하게’라는 프린지 정신에 따라 행동하는 수밖에요.
 어쨌거나 밀도있게 전달되는 관객들의 박수소리, 몇몇 무용 관계자들의 적극적인 코멘트, 그리고 눈물을 훔치면서 기립박수를 보내주는 나이 지긋한 할머니 관객의 모습에서도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최영현 안무가의 작품을 본 한 프랑스 축제 프로그래머가 즉석에서 초청을 했으니, 기획자의 보람이란 이런 게 아닐까요?


 이에 앞서 7월 10일 마드리드 근교의 평화로운 소도시 또레로도네스(Torrelodones)에서는 시가 올해 창설한 헤스토무용축제(GESTO Dance Festival)에서 안성수픽업그룹이 단독 공연을 가졌습니다. 이 도시는 마드리드 근교 부촌 중 하나로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와 문화예술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지원 속에 자체적인 문화예술교육과 크고 작은 축제 등 다양한 움직임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곳입니다.
 라룸베단사(La Rumbe Danza) 무용단의 예술감독이자 스페인무용협회장을 지낸 후안 데 또레스(Juan de Torres)가 이끄는 이 무용축제는 스페인 무용단 셋과 함께 안성수픽업그룹을 초청해 아담하고 내실있는 출범무대를 마련했습니다. 원래 국내팀으로만 꾸미려던 프로그램에 한국팀을 초청해준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그는 또레로도네스시의 협력 예술가로 위촉되어 어린이 청소년을 비롯한 시민들을 위한 공연과 워크숍, 교육 프로그램 등을 추진하고 있는데 시 차원에서도 향후 이 페스티벌을 지역의 대표 예술축제로 키워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밤 9시가 되어도 도시의 열기는 쉬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몇 주째 이어진 이상고온은 공연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스페인 야외 축제들에서는 나이 지긋한 동네 어르신들부터 뭣 모르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그리고 늑대인지 개인지 구분하기 힘든 덩치 커다란 애완동물들이 어김없이 한쪽 구석을 차지합니다. 지나가다 들른 사람들, 이미 도시에서 소개하는 다양한 공연들 덕분에 일정 수준 이상의 눈높이가 생긴 사람들에게 이르기까지 그 모습들도 참 다양합니다.
 안성수픽업그룹은 팝, 디스코, 펑키 등 다양한 음악을 통해 몸의 변주를 표현한 <몸의 협주곡>과 <전통의 재구성(뱃노래편)> 솔로 공연을 선보였습니다. 한국 음악의 전통적 색채와 이주희 무용수 특유의 당찬 에너지, 그리고 25분간 쉼없이 흐르는 안성수 안무가 특유의 움직임이 다채롭게 펼쳐졌던 뜨거운 무대였습니다.





 마드리드에 머무는 동안 접했던, 우리와 비슷한 것 같아 슬프기도 하고 위안이 되기도 했던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마드리드 현대무용축제(FIMAD, Festival Internacional Madrid en Danza)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하고 오래된 축제 중 하나입니다.
 올해 11월 이미 한국팀 초청이 확정되었고 세부사항 논의를 위한 미팅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예술감독 아나 까보(Ana Cabo)는 그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며 작금의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토로합니다. 올 6월 마드리드 시장이 바뀌면서 모든 문화예술정책, 행사, 공연 등에 대한 실무가 한 달 째 중단 상태라는 것입니다.
 문화예술 정책과 예산은 어느 나라를 망라하고 정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그래도 예정된 사항을 모조리 보류하라는 건 지나친 일이 아닌지... 수많은 문의전화에도 “죄송합니다. 지금은 어떤 대답도 드릴 수 없습니다. 업무가 정상화되면 다시 연락주세요. 언제 정상화되냐구요? 아무도 모릅니다…”라고 대답하는 게 그들의 최선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나 까보 역시 프로그래밍을 위해 한참 실무적인 논의를 진행해야 하는 이 때 모든 실무가 중단되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책 방향만 결정되면 일은 금세 정상화될 수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우리를 안심시키는 그녀의 입술에서도 왠지 확신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여기도 비슷하네, 아니 어쩌면 한국보다 더하네…”라는 자조적이고 씁쓸한 내 반응에 그녀 역시 한숨만 쉽니다.


 성격은 조금 다르지만 이와 상반된 밝고 긍정적인 사례는 마드리드 근교 꼬슬라다(Coslada)입니다. 내년 상반기 개관을 목표로 성대하게 지어지는 시립 안또니오 로뻬스 극장 건설 현장. 당대의 유명 조각가 안또니오 로뻬스의 <꼬슬라다의 여인(Mujer de Coslada)> 조각상과 마주보고 있는 이 곳은 800석 규모의 극장과 크고 작은 스튜디오, 갤러리, 도서관 등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를 안내하는 시 담당직원의 열의와 그들이 펼쳐 보이는 향후 몇 년간의 청사진이 마드리드의 그것과는 또 너무 다름에 다시 한 번 정치와 문화예술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습니다.
 다음 목적지는 바르셀로나의 그렉 페스티벌이었습니다. 작년 안수영컴퍼니에 이어 올해도 한국특집 무대를 마련한 그렉 페스티벌은 여전히 다채롭고 생동감이 넘쳤습니다. 최영현의 솔로 공연을 시작으로 안성수픽업그룹의 섬세하고 다채로운 안무, 그리고 단순명료한 콘셉트와 특유의 역동성으로 어딜 가나 환호를 받는 시나브로 가슴에(안무자 이재영)까지.
 세 작품의 구성과 다양함에 관객들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바르셀로나는 현대무용이 매우 강한 곳입니다. 스페인 유일의 본격적 무용제작극장으로 평가받는 꽃시장극장(Mercat de les Flors)도 이 곳에 있고, 실제로 국제무대에서 스페인을 대표하는 현대무용가들은 상당수가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하는 까딸루냐 출신들입니다. 이런 바르셀로나의 권위있는 축제에 한국 무용가들이 정기적으로 초대받는다는 것은 한국무용의 국제적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내년에도 한국 무용가의 무대가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지난 해 까몽이스협회의 지원으로 한국-포르투갈 댄스 리서치가 시댄스 기간에 진행된 바 있습니다. 젊은 무용가 셋이 서울을 방문, 한국 무용가들과 안무교환 워크숍에 참여해 3일간 각자의 움직임과 창작 메소드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동안 포르투갈 현대무용 작품이 시댄스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적은 있었으나 이렇게 양국의 젊은 안무가들이 대면 교류를 갖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올해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후원으로 리스본에서 두 번째 댄스 리서치 심화 과정이 진행되었습니다. 작년에 이어 뻬드루 깔, 다비드 마르께스가 참가했고, 아쉽게도 브루노 알렉산드레는 건강문제로 참가를 포기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작년의 멤버들인 이윤정, 최영현, 고지혜, 그리고 그녀의 파트너인 케이 파트루(Kay Patru)가 그대로 함께 했습니다. 멘토 역으로 참관한 포르투갈 현대무용의 대모 올가 호리즈의 조언과 시범이 양국 젊은 무용가들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1차 리서치를 통해 서로의 관심사가 무엇이지 어떤 작업을 해왔는지 이미 알고 있는 참가자들이라 처음은 지난 리서치 이후 어떤 성과들이 있었는지, 구체적인 공연과 사례, 실패와 성공에 관련한 에피소드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어떠한 결과물에 대한 압박 없이 서로의 창작 과정을 나누고 몸 그리고 움직임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서로의 몸을 통해 실험하고 시도하는 그 과정들이 이 여섯 명의 창작자들에게 보다 큰 자유를 준 것 같았습니다.
 다음 작업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을 얻게 되었다는 안무가 이윤정, 평소 자신들의 메소드 틀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한계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는 고지혜와 케이, 다른 안무가들에게 움직임의 새로운 영감을 준 최영현. 그리고 학구적인 방식의 창작과정을 공유하며 자신의 다음 작업에 대한 의구심을 함께 고민하는 다비드. 작년에 이어 좀 더 즉흥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모두를 숨죽이게 했던 뻬드루 깔. 무엇보다 연륜과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예술가의 직관, 여전히 건재한 창작자로서 예민함을 잃지 않았던 올가 호리즈에게 이르기까지.





 이들이 보여준 나흘간의 리서치 과정은 참 다른 여섯의 춤에 대한 참 같은 열정을 유감없이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And Next를 고민했습니다. 각자의 작업, 다음의 만남, 그리고 여전한 가능성.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보낸 3주간의 뜨거운 여름. 그 열정으로 계속적으로 도약 할 한국 무용가들의 내년을 또 기대해봅니다.

2015. 09.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