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예술혼(藝術魂)은 어디서 배우나요?
이지현_춤비평가

 우리 춤계와 예술이 결별한지가 꽤 되나보다. 비평가 16년차이면서도 아직도 춤예술을 어떻게 정확히 정의할 수 있을까가 숙제인 나로서는 춤계와 그 근처에서 춤예술에 대한 수다, 논의, 논쟁 한 자락이라도 들리면 귀가 번쩍하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무용가들이 모인 자리나, 교수들이 모인 자리, 학생들이 모인 자리 등을 기웃거려 보지만 온통 신변잡기와 뒷담화 뿐인 듯 자발적이고 자생적인 춤에 대한, 춤예술에 대한 고민과 소통, 토론과 대화의 자리를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 공부가 직접 이루어지는 대학에서는 어떨까. 난 대학수업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춤이 예술입니까? 춤이 왜 예술이 됩니까?”라는 질문을 종종 던진다. 물론 답은 잘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하는 수업의 대부분이 비평관련 수업인데, 춤이 예술이어야 성립하는, 말하자면 춤이 예술일 수 있는 조건의 역사적 전개 속에서 미와 예술과 미적인 것에 대한 논의를 만나고 그것을 기초로 해야만 미적 판단이 중심이 되는 비평의 영토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춤이 예술이라는 토대 위에서 창작되고 공연되어야 그것을 비평하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비예술이든, 반예술이든 예술이 있어야 가능한 개념이므로)
 내가 앞의 질문을 던지는 또 하나의 동기는 현장 비평을 하면서 가장 난감하게 다가왔던 사실인데, 세부 장르를 총괄하여 전반적인 춤창작자(무용수, 안무가 포함)들이 자신이 예술가라는 자의식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현장에서 대학을 졸업 후 창작 현장에 나오는 창작자들의 경우 50여 명의 대학무용과 출신 중 한 학년에서 평균 5-10%가 생존하여 활동을 하게 된다고 볼 때 시간이 흐를수록 실력과 예술적 능력에서 한 차례 더 걸러져 상위 1-5%에 속하는 우수한 인재일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높은 학력과 활동력에도 불구하고 춤예술가로서의 자의식과 자부심, 그리고 나아가 자신의 예술론을 자기의 수준에서 말하는 걸 들을 수 없을 때 현장에서 느껴지는 당혹감은 실로 컸다.





 앞의 두 상황만을 정리해서 엮어보면 우리는 자기가 뭘 하는지, 뭘 해야 하는 지도 모르는, 자의식이나 견해가 없는 정신없는 창작자들이 만들어내는 공연을 핵심에 놓고 운영되는 분야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런 창작자들은 어디서 배출되는 것인가?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무용수와 안무가들은 모두 대학 무용과 출신이다. 춤이 실기 위주의 영역이기 때문에 사실 이론과 학문을 통해 분야에 접근하는 대학교육을 모두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대부분의 나라가 실기와 창작 전문학교를 통해 이들을 배출시키고 있는 현실에서 대부분 대학출신의 무용가들이 오히려 실기가 아닌 예술의 이론에 약하다는 건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바로 여기서 내가 지금 춤계 문제의 2대 근원(대학문제와 부패문제)이라고 주장하는 대학무용의 문제가 드러난다. 대학은 본래 춤예술에 대한 학문을 탐구하고 연구하는 기능을 주로 하는 곳인데 학생들의 수업은 60년대부터 현재까지 대부분이 이론과 실기가 분리된 속에서 실기 중심의 커리큘럼으로 짜여져 있어 무늬만 대학이고 내용은 실기중심 학교인 어정쩡한 양태를 갖고 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했음에도, 이론 수업이 전무한 상태도 아닌 상황에서 수업의 질과 내용은 실기교수 중심으로 가져가고 있어서 예술에 대한 기초지식도 갖지 못한 춤창작자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예술에 대한 견해가 없는 교수들이 견해없는 학생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학문적 훈련이 되지 않은 대학졸업생이 배출된다는 것은 거창한 이론 습득까지 바라지 않더라도 예술에 대한 기초지식을 포함하여 기초적인 비판적 사고능력, 어문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 등 무용실에서 훈련될 수 없는 중요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무용가들이 배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들은 이런 본연의 해야 할 공부를 해야 할 시간에 생존권을 쥐고 있는 교수님께 잘 보이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야 춤계에 발이라도 들여놓을 수 있는 절박하고도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다.
 2000년 이후 춤계가 “대학-기반”의 구조에서 “국가적 공공 지원-기반”의 구조로 변동하고 있는 가운데 대학교수의 위세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변화라고 볼 수 있으나 아직 사람들의 의식은 그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과거의 습성과 풍토는 그대로인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교수 정체성이 없는 교수들이 하는 낮은 수준의 대학 수업의 질은 무엇보다 제대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면에서 가장 폐해가 큰데, 그 교수들이 추천하는 강사들 역시 실력이나 컨텐츠로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1강좌 당 얼마의 돈으로 시세가 잡혀있는 비용을 상납하고 수업을 얻거나 그런 상납이 가능한 위치까지 가기 위해 여타의 비용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고 보면 교수나 강사의 수업의 질은 보나마나 한 것일 것이다.
 최근 한예종에서 발생한 교수임용과 관련된 해임, 구속사태는 실기대학임에도 대학교육의 병폐가 그대로 혹은 더 심하게 자행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해야 할 것을 예술이라고 생각하고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도전을 예술가의 운명으로 아는 예술가가 지금의 교육구조에서 배출되는 것은 어렵다. 잘해 봤자 자기가 익히 본 교수를 흉내 내는 것이고 그들이 가르쳐 준 것 안에는 알맹이 없는 예술을 하고도 예술가나 교수로 인정받기 위해 무엇을 돈으로 사야하는 것인지에 대한 것은 빠짐없이 들어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춤은 사라지지만, 공연 팜플렛을 어떻게 하면 그럴 듯하게 만들어 남길 것인지, 비평가로부터 어떻게 좋은 평을 받을 수 있는지, 지원금 심사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등 유형의 결과에 집착하고 춤예술의 실제와는 동떨어진 그것들을 만들고 보유하는 것에 대한 전수는 프로급이라고 할 수 있다.
 춤창작자들이 20대 중 후반에 이르러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 그들이 무용계에서 만나는 새로운 스승들과 직업상 선배와 상사들에게 적응해야 하는 일은 대학에서와 그다지 다르지는 않지만 카르텔 구조와 먹이사슬의 실태에서 보다 전문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용인들끼리의 먹이사슬에서 오가는 것이 돈뿐만이 아니라는 것은 몇 해 전 소송과 맞고소로 이어졌던 권력형 동성간 성스캔들 사건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공적 지원금 정산에 크고 작은 횡령식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기본사양에 속한다. 그러나 그런 크고 작은 비리들이 공적 지원금과 얽혀있음에도 관용의 폭이 넉넉한 이유는 행정 관리자들과 알게 모르게 연결된 어떤 구조 때문일 것이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무용계의 어른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사람들은 나이와 경륜의 켜를 가진 실제 예술가 어른들일 것이고, 거기에 사회에서 존경받아야 하는 대학교수, 국공립 무용단 예술과 경영책임자 그리고 비평가 등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 경악스럽게도 외부에서도 알만한 유명한 무용계 어른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사회적으로 형(刑)을 선고 받은 사람들이 꽤 된다. 지금도 감옥에 있는 사람도 있고, 형을 채우고 나와 재기를 꿈꾸는 사람도 있고, 또 곧 들어갈 사람도 있고...
 춤창작자들은 이런 열악하고도 혼탁한 환경에서 자라난다. 대학에서 이론으로도, 책으로도 배울 수 없는 춤예술의 정체는 배우지 않아서 수많은 등록금을 내고도 제대로 알기가 어렵고, 사회에서 범죄라고 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가르치고 실행해 보이는 어른이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범죄 불감증과 더불어 완전히 실종된다. 공교롭게도 그런 어른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은 자기도취와 뻔뻔스러움과 수치심을 모르고 계속 무대에 오르고 춤을 추고 구술을 통해 자기도취적인 기록을 남기고,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 만들기 사업에 많은 돈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인데, 그런 행동은 후배들에게 그 모든 행동을 전수하고 학습시킨다. 부패를 중심으로 서로 미화시키며 얽히는 군무에 어른부터 젊은 세대까지 몸을 뒤섞고 있다.
 그들 냄새나는 군무 틈에서 실종된 춤의 혼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2015. 09.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