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2019 서울세계무용축제 폭력특집
폭력 주제에 부합한 기획이었는가
  • 일    시
    2019년 10월 19일(토) 오후 7시
  • 장    소
    아카데미아 인(서울 동교동)
  • 참석자
    김채현 · 김혜라 · 김현진 · 김인아




― 문명이 진화할수록 오히려 폭력이 심화되는 시대다. 아이러니다. 폭력을 주제로 하여 하나의 춤제전을 기획한 올해 서울세계무용축제(이하 시댄스)의 시각은 시의적절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우리 춤계에 이런 기획이 많았을 법도 하였는데 그렇지 않은 것은 한계를 나타낸다. 아무튼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른 때 아니겠는가. 사회적 주제, 인간이 직면하는 주제를 해외에서 어떻게 춤으로 반영하는지 좀 가까이서 보게 된 기회였다. 시댄스에서는 이번에 몇 작품을 폭력 주제에 맞춰 따로 설정하였다. 이들 가운데 우선 인상적이었던 작품부터 소개해보도록 하자.




울티마 베스 <덫의 도시>ⓒCreamart/SIDance2019




― 개막작 울티마 베스의 〈덫의 도시〉가 인상적이었다. 안무자가 영상을 중심으로 한 다원 매체로 접근하고 있고, 정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내용에서 일단 폭력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주제에 적합한 오프닝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불평등한 사회, 통합적 인간관계, 억압의 현실을 이야기하며 결국 폭력이라는 것이 문화의 탐욕인지 아니면 인간의 본성인지,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했다. 그리고 영상과 현실이 계속 줌인-아웃되면서 집중력 있게 제시했다. 내러티브, 몸으로 표현하는 거친 감정을 통해 안무자가 주고자 했던 메시지가 잘 드러났다. 여러 메타포들이 많은 질문을 던진 것 같다. 마지막에 싱크홀, 독수리와 같은 메타포들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대신화를 갖고 작품화하였다는데 권력관계의 갈등, 제도, 폭력 억압의 현실을 인지할 수 있는 구조, 내용, 스토리 라인, 신체 표현이 가장 시댄스가 얘기하는 폭력이라는 주제의 작품으로 적절했다.

― 2017년 독일 ‘탄츠메세’에서 빔 반데케이부스의 작품을 보았다. 영상, 대사 등을 매개로 지속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데, 안무자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여러 매체를 이용해 전달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는 듯하다. 처음에는 춤의 과도한 실현내지는 집착을 버린 이런 다매체의 접근에 당황스러웠지만 몇 번 보고나니 춤이라기보다는 퍼포먼스로 보면서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말과 영상, 신체표현과 드라마투르그 등 여러 매체를 사용해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면서 대중이 봤을 때에도 흥미로울 수 있겠다.

― 폭력특집으로 분류되지 않았지만 로베르토 카스텔로의 〈우리는 밤에 방황하고 불로 소멸한다〉를 흥미롭게 보았다. 빛으로 무대 공간을 분할하고, ‘dark & light’라는 지속적인 구호에 맞춰 빛이 비추는 공간으로 무용수들이 순간 이동하며 만들어내는 몽타쥬 기법이 세련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빛의 질감, 크기, 구역에 따라서 움직임의 형태와 역동성도 바뀌는데, 그 움직임은 미세하지만 끊임없이 모터를 장착한 기계처럼 반복적이며 단순하다. 그러면서도 사운드의 증폭에 따라 움직임의 형태와 역동성이 음악의 크레셴도처럼 발전하고, 얼굴표정도 뒤틀리는 등 구체적 상황들에 도달한다. 도입부에는 무용수들이 고개와 어깨를 떨군 좀비와 같은 움직임이었다면, 메트로놈 사운드에 맞춰 반복적으로 움직이면서 빛의 각도와 여러 공간 구역에 따라 서로의 몸을 탐했다가 옥신각신 레이스를 펼치기도 하고, 올라타고 끌어당기기며 울고 웃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는 등 사람들의 여러가지 욕망과 폭력적 감정의 증폭을 이미지적으로 드러냈다. 이는 마치 사회 시스템에 의해 통제되고 억압되는 무기력한 인간들을 그리는 듯했다. 분할된 빛의 공간이 도시의 폐쇄적 공간이자 우리의 욕망을 드러내는 거울이라면, ‘light and dark’의 신호음은 우리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비가시적인 사회 시스템인 듯했다.
폭력이라는 것이 우리 삶속에 잠재돼 있다가 불현 듯 드러나듯, 그 잠재된 폭력이 드러나고 느껴지는 순간을 스틸 이미지로 빛과 어둠의 시간차를 두고 잘 보여준 작품이다. 폭력으로 분류해놓지 않았지만 폭력을 느낄 수 있는 소지가 많았던 작품이다.




ALDES/로베르토 카스텔로 <우리는 밤에 방황하고 불로 소멸한다> ⓒCreamart/SIDance2019




― 기묘하고 특이했던 작품으로 스발바르컴퍼니 〈All Genius All Idiot〉을 꼽고 싶다. 차이니스 폴, 줄 곡예, 신체 피라미드, 몸으로 징검다리를 놓아 이동하는 등 다양한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이 보였다. 서커스의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춤축제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점이 좋았다. 그 안에 캐릭터가 녹아들어 단순히 스펙터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컨템퍼러리 서커스를 제시했다.
퍼포머들은 제목 그대로 바보처럼 엉뚱하게 행동했으나 역설적으로 완전한 천재 같아 보였다. 이들은 양면성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문명과 야만, 동물과 인간, 현실과 비현실 또는 초현실, 젠더의 이야기를 쾌락적으로 환기하여 우리가 흔히 보지 못했던 새로운 정서를 느끼게끔 했다.

― 기타리스트가 사슴뿔을 착장하고 있는데 표면적으로는 자연물, 야생, 동물, Idiot(바보)을 나타내지만 그것이 거꾸로 천재, 예언자 아니면 권력자 역할을 상징한 것인가 하는 짐작이 들었다.

― 퍼포머들이 제시하는 다중적 의미와 복합적 구조를 조금 더 이해하고 싶어 관객과의 대화를 들었다. 사슴뿔은 어떻게 사용하게 되었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 객석으로부터 질문이 나왔는데, 우연히 집주인이 가지고 있는 걸 발견하고 마음에 들어 구입하게 되었고, 그것을 이번에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됐다고 했다. 네 명이 한 숙소에 살면서 생활과 창작을 구분 지을 수 없는 방식으로 살고 있었다. 스토리 구성이나 여러 도구, 오브제의 사용도 생활 속에서 우연히,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의식의 흐름을 따라 머리보다는 장기(臟器)의 명령에 따라 만들었다’는 이야기였다. 즉각적으로 자유롭게 만들어진 작업이므로 하나의 주제가 있기보다는 관객에게 감상의 틈을 많이 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논리가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포가 있다는 게 신선했다. 예를 들어, 사슴뿔을 뒤집어쓰고 동물의 모피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남성은 코스튬으로 남들보다 더 크게 자신의 몸을 확대시키며 전지전능한 권위, 권력을 가진 신적인 존재임을 과시하는 듯했다. 이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그는 다른 사람에 의해 발가벗겨져 맨 몸뚱이로 초라한 동작을 보이면서 힘과 권위를 상실한 장면에서, 퍼포머인 그 자신도 “전지전능한 권력을 한 순간에 잃는 순간, 스스로 초라해지는 심경에 변화가 느껴지는 것은 새롭고 낯선 감각이었다”라고 밝혔다.
덧붙여 밧줄 타는 퍼포머는 (하늘의) 공기의 신,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을 많이 선보였던 퍼포머는 지하의 신, 다른 한명은 매개자 역할의 신으로 세 가지 신적 캐릭터를 설정했다고 한다.

― 앞서 캐릭터의 설정과 같이 창작자가 내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을 미리 설명하지 않으면 관객이 알아챌 수 없다. 작품 소개가 충실하지 않을 때 빗나가는 이해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관객에게 감상의 틈을 준다기보다 어쩌면 혼돈을 주는 것일지 모른다.

― 그럼에도 규칙으로 다듬어지고 틀로 짜여진 공연예술을 보다가 그런 것으로부터 벗어나 작품전개의 논리나 맥락 없이 공연 자체를 즐기는 퍼포먼스를 접하는 것은 좀 흥미로웠다. 작품 전체에 흐르는 무질서가 퍼포머들에게 잘 어울렸고 거짓도 없어 보였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터무니없고 이상해 보이지만 그 모습을 차분히 바라보다보면 오히려 일탈, 날것, 본능이라는 원초적 감정에 대해 상기하게 된다.

― (전지전능한 역할의) 퍼포머의 옷이 벗겨졌을 때 여성이 스트립쇼에서 입을법한 관능적인 망사 스타킹을 신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관객과의 대화에서 흥미로운 질문이 나왔었다. 여성의 복장은 성소수자(LGBT)의 코드를 반영한 것인가, 아니면 남성성의 다양한 표현방식 중 하나인가,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천이 모자라서 이런 의상을 입은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이에 창작자들은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꺼려하는 것인지, 질문이 불쾌했던 것인지, 대답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던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저 자신들의 창작 환경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인데 그런 질문을 받아 순간 대답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들은 ‘여성의 복장이 어떤 코드로서 작용했다고 보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사운드도 즉흥적인 과정에서 탄생한 듯 비선형적이지만 자연스럽게 극의 사건들과 뒤엉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나 작품 그 자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법도 한데 우리는 질문을 통해 어떤 코드인지를 분류하고 규정지으려는 게 아닐까. 이 또한 폭력적 시선이 아닌가도 싶다. 우리의 규범 혹은 시선과 그들의 삶, 창작 환경에서 비롯된 생각 사이에 굉장한 간극이 있음을 느꼈다.

― 우리가 생각하는 이성, 균형성, 합리성, 전형성을 넘어선 모습들이 보였다. 작품은 동물, 본성, 놀이성, 즉흥, 경쾌함, 야생의 거친 것들, 퀴어 요소를 제시한다. 폭력이라는 주제로 바라보면, 우리는 전형적인 틀 안에 규정해 놓은 것을 벗어나는 것에 대해 (폭력적으로)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그런 비정상적인 요소를 이 작품 안에 모두 드러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딱 폭력이라는 주제보다는 우리 춤문화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는 요소들을 저들은 놀듯이 거침없이 무대에서 즐기는 것만으로도 자유로워 보였다. 다양한 정서와 표현이 용납되는 작업이 많을수록 축제는 풍성해지고 관객들의 인식의 지평이 넓어질 계기를 주는 것이다.

― 정상과 비정상, 남성과 여성, 깨끗한 것과 추잡한 것, 잘 짜여진 것과 날것, 안정된 것과 위험한 것 사이를 희미하게 만들어 그것들의 경계가 매우 얇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 일부러 특별한 의도를 보여주려고 했다기보다 실제로 창작자들은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의 삶이 작품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다른 문화가 만나는 것은 굉장히 즐거운 일인데, 이를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우리는 구조를 읽고 코드에 맞춰 답을 찾으며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갇혀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지점이다.




스발바르컴퍼니 〈All Genius All Idiot〉 ⓒCreamart/SIDance2019




― 시댄스에서 개막작으로 무게를 둔 울티마 베스의 〈덫의 도시〉는 사회적 억압, 도시 혹은 공동체가 소속된 사람들에게 가하는 폭력이 선명하게 읽혔다. 두 종족 간의 갈등을 고대의 신화로부터 빌어 왔다는데, 그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겠는지 의문이다. 과장된 해석이 아닌가 싶었지만 어쨌든 갈등에서는 그 도시에서 두 종족이 지배와 피지배, 권력자와 억압받는 자의 관계가 드러난다. 권력자의 딸이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뿌리치고 피지배자들 편에서 그들을 동조하면서 도우려는 노력을 하고 있고, 피지배자들이 그런 노력을 본래성이 없는 것으로 신뢰하지 않자 딸은 스스로 항변한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선악 이분법 구도에 맴돌고 있어 던지는 메시지가 무척 단순하다고 느꼈고 그래서 관객 입장에선 별 감흥이 없었다.
또 다른 점으로서 빔 반데케이부스의 이전 작품에서 보였던 신체의 극렬한 사용을 벗어나 〈덫의 도시〉가 춤이 있는 다원예술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몸의 움직임 구사 자체가 이전의 반데케이부스 움직임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신체극 같은 느낌이지, 작품의 구성과 춤의 측면에서 이전 작품처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물음이 생긴다. 처음에는 상당히 흥미 있게 보았다. 영상에서도 아시아권 도시의 뒷골목 같은 물리적 공간, 미로에 사람들이 갇히고 우왕좌왕하고 질주하는 장면들이 역동적이었는데 단조롭지만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 아무튼 이번 개막작은 스토리텔링이 이분법으로 단순하게 전개됐고 움직임에선 새로울 것이 없었다. 어쩌면 그의 한계를 드러낸 작품이 아닌가 싶다.

― 앞서 언급된 ALDES/로베르토 카스텔로의 〈우리는 밤에 방황하고 불로 소멸한다〉가 개막작으로 내세워졌더라면 어땠을까 한다. 물론 개막작에 따라 축제의 성과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폭력이라고 내세운 여러 작품들보다 로베르토 카스텔로의 작품이 개막작으로서 주제에 더 어울린다는 판단이 들었다. 움직임의 구사가 단순해 보이는데 이를 미니멀적으로 끈기 있게 반복해 나가면서 음악과 함께 점차 커지는 크레센도 효과를 가졌다. 폭력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폭력을 당하고 있는 상태나 당해왔던 상태, 또는 폭력이 가해지는 상태를 은유적이지만 선명하게 잘 드러냈다. 그런 점에서 관객들이 이 작품에 대해 호평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스발바르컴퍼니의 〈All Genius All Idiot〉는 종잡을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창작자들도 보는 이가 작품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길 원하지 않은 듯하다. 폭력 특집으로서 작품을 읽는다면 오늘날 규칙과 규율에 얽매인 문명사회, 그 안에 보이지 않는 폭력적 분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항변 내지는 저항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렇게까지 해서 이 공연작을 폭력의 범주에 넣어야 할까? 이렇게 생각하면 오늘날 예술작품이 폭력을 주제로 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는 데 생각이 닿는다. 또한 오늘날 문명에 대한 비판을 반어법적으로 슬쩍 다루는 작품까지도 폭력이라는 주제에 부합하게 된다. 폭력이라는 개념 자체를 팸플릿에서도 설명해 두었지만서도, 폭력 특집의 작품 분류를 보면 폭력이라는 말의 범위가 너무 넓다는 느낌이다. 기존의 어떤 틀이 있으면 그 틀을 지켜야 하는 관행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폭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폭력의 범위가 갈수록 넓어지고 색깔이 엷어져서 결국 주제가 흐려지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래서 올해 시댄스에서 폭력의 의미가 과연 얼마만큼 부각되었을지 불투명하다.
그런 측면에서 폭력이 아주 극명하게 부각된 것이 몇 작품 있다. 넬라 후스탁 코르네토바 〈강요된 아름다움〉, 메테 잉바르첸 〈69 포지션즈〉, 케다고로 〈하늘〉은 제가 본 작품 가운데 폭력이라는 주제가 가장 선명했던 것 같다. 먼저 케다고로의 〈하늘〉은 일본 연합적군파의 아사마 산장 사건을 다뤘는데 이 사건은 일본 사회를 향한 항변이라기보다는 연합적군파 내부의 폭력이었다.




케다고로 〈하늘〉 ⓒCreamart/SIDance2019




― 아사마 산장 사건은 1972년 일본 나가노현에 있는 가와이 악기 소유의 사원용 휴양 시설인 아사마 산장에서 일본 적군의 일부 세력인 연합 적군이 일으킨 사건이다. 연합적군파가 산장을 점거하면서 산장관리인의 배우자를 인질로 하여 열흘 간 산장에서 경찰과 대치하였는데 인질은 약 219시간 정도 감금되었다가 무사히 풀려났다. 진압 후 경찰이 산장을 조사하면서 사상 단결, 내부 결속을 구실로 29명의 적군파 대원중 12명을 구타를 포함한 잔학한 방법으로 살해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은 일본과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고 전국에서 활동하던 적군파 대다수가 회의감을 느끼게 하여 일본 적군파가 해체되는 제일 큰 원인이 되었다.
〈하늘〉은 정치적 이념이 만든 끔찍한 폭력을 혁명 분위기의 거친 음악과 단결을 외치는 목소리, 저돌적이고 가학적인 행위로 보여주었다. 무거운 주제와 대조적으로 코믹하게 전개된 점이 이색적이다.

― 연합적군파가 경찰에 쫓기며 사회로부터 배제되는 과정에서 내부 살인을 저질렀고, 이는 적군파가 해체되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안다. 그래서 무라카미 하루키도 여기에 환멸을 느끼고 일본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전공투, 1968년 대학 내 문제에 맞서 조직된 일본의 학생운동 단체)와의 관계를 접고 작가로 돌아서게 되었다. 내부의 폭력이긴 하지만 내부에서 그런 폭력을 저지르도록 하는 일본 사회의 외부적 요인도 있다. 이념의 갈등이 있었거나 마지막 해결책에 있어서 상반된 의견이 있었을 것이다. 〈하늘〉에선 우두머리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과 이를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었고, 코믹하게 표현되었다.

― 출연진이 하필 여성 9명과 남자 1명인지 의문이 든다. 아사마 산장 사건을 빌리긴 하지만 동시에 일본의 남성 지배적인 가부장적 사회, 여성에게 강요된 희생그리고 무용단 내부의 전체주의적이고도 강압적인 규율 등을 이야기한 것이지 않나. 기저귀를 찬 여성들이 엉덩이를 노출하면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성이 한 대씩 때리고, 이를 여성 스스로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며 자학을 벌이다 여성들 간에도 폭력이 오간다. 이런 행위가 반복되면서 여성들에게 힘의 위계가 생성되고 자아비판에까지 이른다. 젠더의 문제로 볼 수 있는 지점이었다. 마지막 부분에 자막이 나왔다. 자식을 위하는 어머니의 이야기였는데 여성이 희생을 강요당하는 중에도 자식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행복하다는 메시지를 남기는 것 같았다. 작품에서 여성의 몸이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것을 목격했다. 한 명의 남성에게 지배당하는 여성들의 몸, 그것을 스스로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더 가열 차게 노력하자고 구호를 외치는 장면들이 일본 사회의 가족중심의 가부장적인 문화 그리고 집단주의 문화에서 내면화된 폭력을 고발한 것이 아닌가 싶다.

― 저는 젠더의 문제로까지 보진 않았지만 젠더의 문제로 볼 만한 여지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여성과 남성의 비율은 원래 이 무용단의 구성이 그런 건지, 아니라면 이 작품을 위해 그렇게 출연진을 구성한 건지 알 수 없다. 후반부에 우두머리는 컵라면을 익혀 먹는 장면이 있었는데….

― 그 장면에서 여성은 폭력으로 붉어진 나체에 가까운 몸으로 차가운 얼음 덩어리를 이고 스스로 고문에 가까운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반면, 남성은 컵 라면이 조리되는 과정을 평화롭게 만끽하고 있었다. 라면이 익는 3분 동안 남성의 기쁨과 여성의 희생이 대조적으로 극명하게 나타나는 이 장면 역시 사회적으로 차별화된 남성 여성의 신체, 역할 그리고 힘의 불균형 등 젠더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 공산주의 이념을 추구하는 극좌파, 연합적군파 내에 억압이 군대처럼 굉장한 것 같았다. 작품은 그 안의 폭력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우두머리와 단원들 사이의 관계에서 보면 우두머리는 공교롭게도 남자이고 단원들은 여자이며 남자의 위세가 굉장하다. 군대조직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상명하복으로 유지되는 관계, 거기서부터 기본적으로 폭력이 유래했다. 살인, 린치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상명하복의 관계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상명하복이라는 관계는 적군파 내에서만 있는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일본 사회가 개인이 희미한 전체주의 사회라는 것을 최근 더욱 느끼게 된다. 문명이란 이름하에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듯하지만 사회가 언론을 적절히 향유하지 못하고 일본 사회는 집단주의적으로 매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 우익들의 움직임이나 지난 1세기 동안 한국동포들에게 자행했던 행동들을 보면서 한국 같으면 그렇게까지 했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작품은 일본 사회 내 전체주의를 양면적으로 비판했다고 볼 수 있다. 기저귀를 착용하고 코믹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안무였다. 무거운 주제를 이처럼 경쾌한 흐름과 구성으로 풀어내는 방식도 가능해 보인다.




넬라 후스탁 코르네토바 〈강요된 아름다움〉 ⓒCreamart/SIDance2019




― 넬라 후스탁 코르네토바 〈강요된 아름다움〉은 구성이 단순하긴 하지만 두 여성이 인터넷 시대에 겪는 폭력, 특히 언어폭력을 당한 양상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 요즘 한창 문제시되고 있는 댓글 문화의 폐해를 지적한 작업이다. 질투 섞인 댓글에서부터 조롱과 혐오의 발언들로 난무하는 인터넷 댓글의 언어폭력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들의 현실을 다소 과장되고 또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이번 폭력 시리즈 중 가장 직접적인 폭력 장면들이 많이 드러난 작품 같다. 그 폭력은 피부까지 벗겨지는 듯 잔인하고 통증이 느껴지고, 냄새나고 축축하고 차갑고 미끈거리는 등등의 여러 감각들이 뒤범벅되어 고스란히 객석에 전달되었다. 무대에서 퍼포머들이 느끼는 고통의 감각들, 냄새, 분비물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관람하는 내내 감각적으로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 굉장히 직설적이다. 토마토 주스 원액을 입에 그대로 밀어 넣고, 밀어 넣어지는 광경이 설치된 화면에 영상으로 투사됐다. 구성이 좀 투박스러웠지만 가학적, 피가학적 폭력이 만연한 시대가 느껴진다.

― 작품은 현실과 가상 사이의 괴리감을 표현했다. 한 여성이 다른 여성에게 목걸이를 다정하게 걸어주는 화면 속 장면은 실제로는 상대방의 목을 조이는 장면이었다. 한 사건을 라이브 캠이 클로즈업으로 촬영하여 일부 모습만 모니터에 비추니 실제의 상황과는 다르게 왜곡된 이미지와 이야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인터넷 공간에서 우리가 접하는 이미지와 이야기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모순을, 그 경계의 모호함과 위험을 알리는 듯 했다. 이중적인 메시지를 다양한 매체로 충실히 전달하는 게 흥미로웠다.




메테 잉바르첸 〈69 포지션즈〉 ⓒCreamart/SIDance2019




― 시댄스 폐막작인 메테 잉바르첸 〈69 포지션즈〉는 섹슈얼리티와 공공영역의 관계를 탐색하는 작품이다.

― 안무의 실천적 행위를 잘 보여준 작품이다. 이러한 수행적 퍼포먼스 자체만으로 저와 관객들에는 안무에 대한 지경을 넓혀주는 흥미로운 작업방식이었다. 근래 무용학에서 논의되는 안드레 레페키가 말하는 근대적 움직임의 정치적 존재론에 도전하는 작품으로 보았다. 그녀의 안무적 접근이 사회 정치적인 입장에서 섹슈얼리티와 신체간의 전시와 행위를 통한 직접적인 실천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리서치를 통해 굉장히 많이 준비한 것 같았고, 60년대부터 최근까지 시대적으로 섹슈얼리티가 사회에서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보여주며 자신만의 논리를 열정적으로 전달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재현이 아니라지만 당시의 몇 가지 당시 이벤트를 소환해서 설명하며 현장적 실천을 통해 자신의 안무 의도를 피력하였다. 이런 방식이 한국의 정서에서는 낯설고 그녀가 설정한 69명의 포지션으로서 적극적으로 작품의 현존에 동참해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야 했으나 관객들의 소극적인 참여가 작품의 의도에 제대로 작동했을지 의문이다.

― 사회적 관행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또는 간접적으로 규제되는 반(反)·비(非)사회적인 섹슈얼리티가 3부작에 걸쳐 이야기되었다. 로드투어 형식으로 세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작업 내에 해설 조의 말이 너무 많았다. 그 말을 생각할 시간을 주어야하는데 계속 말을 쏟아내니 관객으로선 소화해낼 여유 없이 따라가기 바빴다. 69의 의미도 관객에게 전달되었는지 의문이다. 한 문장, 한 문장은 대체로 수긍할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기승전결 논리가 뚜렷한 것도 아니었다. 해설을 절반 이하로 줄여 압축해도 충분할 듯하다. 스탠딩 관람이었는데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선에서는 이런 이야기 내용들이 대체로 공유되기 때문에 자기들끼리는 즉각 통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작업은 일반 관객과 함께 하는 것이다. 공연을 소화하고 음미할 틈도 없이 일방적으로 전달된다는 느낌이었다. 메테 잉바르첸은 자신이 생각하는 섹슈얼리티와 공적 영역에서의 양상을 예시하듯이 이야기하고 있고 관객은 알아서 판단해야 한다. 인지하고 수용하고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 뭔가 명쾌하거나 강렬하다는 느낌도 갖지 못했다. 퍼포먼스 이론 면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될 만한 작품이 관객과 밀착되지 않은 인상이어서 퍽 아쉬웠다. 공연중 그저 이런 식의 퍼포먼스가 진행될 수 있구나 하는 정도 느낌이 맴돌았다. 공연 진행에 문제가 많았다는 것이다.

― 그 포맷 자체가 의도된 것일 수도 있다. 퍼포머가 관객참여자들이 따라오길 원했던 것일까, 아니면 쏟아내는 텍스트를 참여자들이 폭력적으로 느끼길 원한 것은 아닐까?

― 후자는 아닌 것 같다. 자신의 퍼포먼스에 관객이 참여해서 생각을 고민하고 동요하고 공유하기를 원했다. 60년대부터 자신이 실천했던 여러 작품들을 설명하면서 현재 시간, 시점에서 참여자로서 새롭게 해석하길 바랐다. 설명된 것을 이미지화하라고 지시하고 그 중에 하나를 몸으로 보여주었다. 주입식 퍼포먼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방적인 요구가 지속됐다. 69명의 포지션을 둔 것이 효과적이었을까? 아니면 우리는 69가지의 섹슈얼리티 포즈였을까?

― 퍼포먼스를 그렇게 전개해 나가는 형식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의욕이 과하다는 생각이다. 섹슈얼리티가 공적인 영역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가시적·비가시적으로 억압, 규제 당하는가라는 것인데 오늘날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선 자신의 입장이 분명치 않고 생각의 나열이 굉장히 많았다. 다시 하는 말이지만, 조금 더 말을 줄여서 할 말을 효과적으로 했으면 좋겠다.




솔로 매직/제이드 솔로몬 커티스의 〈Black Like Me: Exploration of the word Nigger〉 ⓒCreamart/SIDance2019




― 솔로 매직/제이드 솔로몬 커티스의 〈Black Like Me: Exploration of the word Nigger〉는 여러 장면을 이어붙인 옴니버스 콩트 식으로 구성하였다. 민족적 신체 움직임과 힙합 퍼포먼스, 아카이브 필름, 그리고 SNS소통을 기반한 토크쇼 포맷을 빌려 다양한 형식을 나열한 솔로 공연이었다. Nigger라는 단어가 갖는 미국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갖는 폭력의 의미가 우리 삶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고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친절하게 이야기해준 작품이다.
첫 번째 장면에서 한 명의 여성이 푸른 들판 위의 단상에 누워 뒤틀린 움직임을 하는데 마치 흑인 노예시절 플란테이션 농장에 있는 여성의 억압과 고통을 상징하는 듯했다. 그러면서 흑인 노예시절의 사진과 텍스트 아카이브를 통해 노예제도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 다음 장면에서는 ‘라이브프라임 타임(LivePrime Time)’이라는 실제 보도된 뉴스의 한 장면을 르포 형식으로 보여주는데, 여기에서 학력이 높은 흑인 학생이 속도위반으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백인경찰에게 무시당하고 폭행당하는 장면이 보인다. 이 장면에서 흑인은 신분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여전히 피부색에 따라 백인 경찰의 공권력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차별당하고 폭력의 대상이 되는 피지배자임을 고발한다.

― 미국사회의 인종차별을 언어로서 나타낼 뿐만 아니라 단도직입적으로 묘사했다는 것인가?

― 그렇다. 두 번째 장은 블랙라이트 아래서 야광 후드티를 입고 춤을 추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흑인의 피부색이 보이지 않지만 야광색 후드티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미국사회 내에서 비가시적이기도 초가시적이기도 한 흑인의 불안정한 존재를 말하고자 한 것 같았다. 없애고 싶은 존재이면서 조그마한 잘못도 크게 부각되어 구분과 차별의 대상이 되는 양면성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흥미로웠던 것은 세 번째 토크쇼 장면이었다. 인스타그램에서 해시태그 ‘the word Nigger’를 달아 텍스트메시지로 Nigger에 대한 질문을 받기도 하고, 객석에서 즉흥적으로 질문을 받아 Q&A가 진행되는 참여형 토크쇼였다. 초시계를 달아놓고 시간을 제한해두었는데, 객석에서 두 번째 질문자가 증언하는 순간, 말이 끊어지며 다음 장으로 전환되었다. 질문자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암전이 된 것이다. 질문을 열어둔 채 마무리되는 공연은, 아직 끝나지 않은,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식민지배 역사가 현재진행중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현재 미국사회와 국제사회에서 매체에서 ‘Nigger’ 단어를 통해 흑인들을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열등한 피지배자로서 재생산하고 폭력의 위험에 처하게 하는지를 안무자는 르포, 토크쇼, 흑인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고발한다.




아네-마라이케 헤스 〈전사〉 ⓒCreamart/SIDance2019




― 아네-마라이케 헤스 〈전사〉는 퍼포머의 등장부터 특이하다. 반바지와 반팔 차림에 테이핑한 팔다리 그리고 한 가닥도 흘러내림 없는 포니테일 머리는 마치 당장이라도 육상경기에 뛰어나갈 듯한 운동선수의 모습이었다. 여성 퍼포머의 제스처는 굉장히 과장되어있고 남성적이다. 거친 호흡과 전투적인 표정 그리고 근육의 과시로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단단한 플라스틱과 같은 형태가 갖추어진 의상이 무대 위에 늘어져있는데, 이를 여성무용수가 상의, 랩스커트, 조끼, 칼라를 단계적으로 착용하면서 마침내 완전한 갑옷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마치 영화 〈트랜스포머〉의 장면처럼 갑옷을 장착하자 평범했던 주인공이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되듯, 옷을 하나씩 덧입을 때마다 신체의 움직임이 점차 강화되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엄청난 옷들의 겹겹에 묻혀 미약한 목소리만 남게 되는 역설을 보여준다. 작품은 군더더기 없이 세련됐다. 몸을 세분화하여 의상에 따른 움직임의 질감을 각기 다르게 표현하고, 남성적 움직임과 제스쳐를 분석하여 부드럽지만 치밀하고 명료하게 드러냈다. 이 작품을 보며 왜 이 여성 퍼포머(창작자)가 몸이 굳이 남성의 힘과 제스쳐를 빌려 전사가 되고 싶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관객과의 대화에서 안무가가 이 주제를 택한 동기에 대해 묻게 되었다. (룩셈부르크에서 활동하는) 안무가는 그간 줄곧 창작단체에서 맴버로 활동하면서 타인에 의존하는 나약한 존재로 살았던 자신을 극복하고자 최근 솔로활동을 시작했고 이 시점에서 더 강해지고 싶었다고 한다. 또 미국과 주변국의 정세, 전쟁과 비슷한 갈등이 첨예한 사회 분위기에서 약자로 존재하는 자신이 나약해지는 것을 발견했기에 전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전사’와 관련된 단어와 이미지를 인터넷과 여러 매체에서 찾아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녀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왜 하필 여성의 안무가가 자신의 약함을 보충하기 위해 강함을 표현하기 위해 남성적 힘의 과시, 기록을 달성하는 운동선수의 이미지, 남성적 전사 이미지를 차용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계속 남는다.




토니 트란 & 안테로 하인 〈스키즈모제네시스〉 ⓒCreamart/SIDance2019



이정인 크리에이션×블랙박스 댄스컴퍼니 〈중독〉 ⓒCreamart/SIDance2019




― 토니 트란 & 안테로 하인 〈스키즈모제네시스〉와 이정인 크리에이션×블랙박스 댄스컴퍼니 〈중독〉은 같은 날 더블빌로 공연되었다. 이 두 작품은 폭력의 범주에 넣을 수 있겠지만 너무 밋밋하고 초보적이며 단순했다.

― 토니 트란과 안테로 하인의 〈스키즈모제네시스〉는 프로그램북을 읽고 나서야 폭력의 카테고리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이 작품에서 보여준 2인무의 동작 시퀀스는 현재 남성 2인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형태인 것 같다. 다만 여기서 보이는 움직임의 빠름이나 역동성 등이 기존의 남성 2인무와는 다르게 다소 정적이면서 미니멀하였다는 점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상호 몸의 규범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어느 정도 전달되는 것 같았다. 작품의 임팩트는 약하지만 〈스키즈모제네시스〉는 주제를 단계적으로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했던 흔적이 엿보인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과정이 창작에서는 큰 차이를 만드는 것 같다.

― 이정인 크리에이션×블랙박스 댄스컴퍼니 〈중독〉의 경우 주제는 선명하나 너무 단순하다. 집단 속의 경쟁 등 여러 요소가 있지만 두 작품 모두 안무적 상상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 폭력적인 사회 제도를 보는 시각을 안무적으로 깊이 고민해야 한다. 문제의식을 표면적으로 누구나 예측 가능한 움직임으로 조합한 초보작이라 별로 할 말이 없다.




아트프로젝트보라 〈무악〉 ⓒCreamart/SIDance2019




― 지난해 ‘난민’, 올해 ‘폭력’을 주제로 한 시댄스의 연속 기획은 고무적이다.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내년의 주제는 무엇일지 궁금하다. 내년 주제를 미리 미리 설정하고 기획하여 주제의 깊이와 폭을 정하여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예를 들어 아트프로젝트보라의 〈무악〉은 누가 봐도 해체의 측면이 강한데, 전형성, 기존의 보편적 고정관념 내지는 예술관을 해체해서 다시 춤과 음악의 본질을 보겠다는 의도도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폭력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넓은 영역으로까지 폭력의 바운더리로 설정한다면 폭력이 아닌 작품이 어디 있을까 되묻고 싶다. 폭력에 대한 집중력이 분산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 시댄스는 특정한 주제 없이 다양한 춤작품을 소개해오다 지난해부터 사회·정치적인 이슈와 맞닿은 주제를 설정하여 현실 비판의 시선을 담은 작품을 제시하고 있다. 주제를 관통하거나 예리하게 꼬집는 작품은 무엇보다 동시대 춤으로서 설득력을 갖기 마련이다. 시의성 있는 전체 주제 아래 그에 적합한, 문제의 최전선에 뛰어든 핵심적인 작품이 소개되었으면 한다.

― 한 무용 페스티벌에서 다채로운 작품을 보는 것도 좋지만, 현재 우리 삶에 첨예하게 대두되는 주제를 제시하고 그에 집중된 특정한 몇 개의 작품을 만나는 것도 관객에게 생각해 볼 지점을 풍성하게 한다. 이번 시댄스에서는 폭력이라는 주제가 다소 광범위하게 적용됐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젠더, 권력, 제도, 문화 등에서 오는 폭력 등 주제를 세분화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폭력의 범주 안에 두기에 다소 모호한 작품들도 있었던 것 같고, 작품 수도 많았던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주제에 합당한 서너 작품을 선정하여 공연 후에 담론이 나올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도 좋겠다 싶다.

― 폭력 주제 아래 작품을 면밀하게 택하는 시간이 길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다보니 폭력에 다소 부합하지 않는 작품이더라도 포함시키게 된 점이 없잖아 있었던 것 같다. 기획의 고충을 얼마간 이해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기획에 대해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 폭력에 대한 관찰 또는 연구의 내공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올해 폭력이라는 주제 자체가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한 것 아니겠는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겪는 폭력은 굉장히 넓은 층위를 가진다. 우리가 누구 기준이냐는 문제도 있겠고, 생활 속 폭력이 무대에서보다 더 심한 것도 있다. 그렇다면 폭력의 기준이 무엇인가라는 복잡한 문제가 제기된다. 시댄스를 보러오는 관객 입장에서 볼 때 그보다 더한 폭력이라고 한다면 이번 작품 가운데 넬라 후스탁 코르네토바 〈강요된 아름다움〉과 케다고로 〈하늘〉, 솔로 매직/제이드 솔로몬 커티스의 〈Black Like Me: Exploration of the word Nigger〉 정도가 꼽아질 것이다. 이들 작품은 깊이와 무관하게 작품 자체가 주제와 부합하는 강렬함이 있었다. 그외 부합하지 않는 작품을 넣는 것은 논란을 유발할 수 있다.
방담에 앞서 프로그램북 서두, 폭력을 이야기한 글을 보았다. 글의 내용과 직접 본 작품이 잘 맞지 않아 납득이 가지 않았다.

― 그게 공연의 큰 문제인 것 같다. 작가들의 생각과 프로그램북의 텍스트, 그리고 실제 공연현장에서 감상의 지점이 각각 다르다. (창작자의) 말과 (기획자의) 글과 (관객의) 현장에서의 느낌이 제대로 만나야 할 것이다. 친절하게 그들의 루트대로 보고 작품을 읽으려고 노력해야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데, 이 간극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지, 이번에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 이번 시댄스를 보면서도 폭력의 범위를 생각하였다. 개인적 폭력도 실은 사회적 폭력의 재생산인 점이 강하다. 폭력은 무엇이라 정의되어야 하는가? 단정할 일은 아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폭력 개념을 일깨우고 다시 쓰게 하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정된 폭력 개념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폭력은 지금까지나 앞으로나 우리가, 인류가, 예술이 두고두고 씨름해야 할 과제이다. 폭력에 관한 인식을 쇄신하는 것은 권할 일이지만, 폭력 개념에서 혼선을 동반하는 것은 이번 행사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폭력의 주제에 걸맞은 작품을 소개하는 기획 전략이 이번에 더 요구되었다.

 

2019. 11.
사진제공_Creamart/SIDance2019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