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해외춤기행_ 타이완①
아류가 아닌 많이 다른 중국
이병옥_춤비평가

 흔히 타이완은 또 하나의 중국으로 생각한다. 물론 미국처럼 원래 살던 원주민을 물리고 후발로 중국인들이 자리잡은 국가임에는 틀림없다. 그리하여 타이완 원주민들은 중국인에 동화되거나 산으로 밀려나 살고 있다. 따라서 현재 타이완은 몇몇 소수의 원주민들과 대다수의 중국인들이 살고 있는 나라이다.
 그래서 타이완은 중국인의 민족성을 가진 변방문화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번 2월 중순 짧은 기간이나마 타이완기행에서 또 다른 중국이나 아류(亞流)가 아니라 많이 다른 중국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타이완 민족문화의 특성과 형성과정

 첫째는 시끌벅적한 중국인이 아니라 아주 조용한 타이완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차분하고 뻐기지도 않고 남의 일에 크게 반응하지도 않았다.
 둘째, 화려하지도 않지만 지저분하지도 않았다. 거리나 재래시장은 여느 거리와 같지만 구석구석이 깔끔하고 잘 정돈되어 있고 준법성이 강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타이완의 식민지배 역사를 살펴보면 이해가 간다. 맨 먼저 1590년 포르투갈인들이 동방무역을 위해 진출하여 ‘아름다운 섬’이란 뜻의 ‘포르모사(Formosa)’라고 명명 하였다. 1626년 에스파냐도 진출하였으나 1642년 네덜란드가 지배권을 얻었다. 다시 명나라 멸망 후 1661년 중국인들이 대거 유입되었고, 1683년 청나라는 푸젠성(福建省)에 병합시켰다가 1884년 중국의 타이완 성(省)으로 승격하였다. 1895년 청일전쟁에 패해 일본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중국에 반환되었다가 1949년 중국내전에 패배한 국민당 장제스(蔣介石)정부가 타이베이(臺北)시로 옮기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1954년 국민정부와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하면서 타이완은 거의 30년간 미국으로부터 군사·경제 원조를 받아왔다.
 이상과 같이 타이완은 대부분이 중국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유럽과 미국, 중국과 일본 등의 범국제적 지배와 영향으로 본토의 중국인들과는 아주 다른 민족성을 형성하게된 것이다. 그래서 생김새는 중국인이나 요란하지도 않으며 지저분하지도 않고 사치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일본인처럼 틀에 박힌 친절도 아니지만 차분하게 사람들을 대하면서 소박하면서도 유럽인들보다 깊은 신뢰감과 진실성을 느끼게 한다. 그러니까 영향받은 여러 나라들의 민족성을 믹스(mix)하고 버무려 장점들만으로 형성한 민족 같았다.
 그러나 고령층에서 친일(親日) 성향이 많은 반면 오히려 혐한(嫌韓)이 많고, 반대로 젊은이들은 한류문화의 영향으로 친한(親韓)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았지만 친일파가 많은 것은 우리보다는 착취와 핍박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정부는 타이완이 섬나라이기에 주변 영향력이 적어 일본영토라 여기고 서서히 황국신민화하면서 개발하는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52년간 지배 속에 일본 민족성까지 흡수하며 젖어든 것이다.
 셋째, 세계 대도시에서 흔히 보이는 초고층건물은 딱 하나가 있고 대부분이 소박한 빌딩에 외관은 화려하지 않고 밋밋하였다.
 우리는 겨울인데 여기는 가을기온 정도이나 도착하여 떠나는 날까지 햇빛을 본 적도 없이 매일같이 구슬비만 내리다 말다 하여 으슬으슬 추웠다. 이처럼 일 년 내내 맑은 날이 많지 않아 가옥이나 빌딩의 외관은 치장을 하나 안하나 별반 차이가 없어 신경을 많이 쓰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대기업이 모든 상권과 경제권을 지나치게 주도하고 있으나 타이완은 중소기업이 주도하는 구조로 된 영향도 있어 보였다.

 대만의 랜드마크는 바로 '타이페이 101빌딩'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나밖에 없는 초고층 빌딩이라 타이페이 시내를 360도 조망할 수 있고 야경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타이페이 101빌딩은 대나무 위에 꽃잎이 겹겹이 포개진 형상으로 건축되었는데, 숫자 8은 대만에서 부와 번영을 상징한다고 하여 빌딩의 대나무 마디를 8개로 구성하였다고 한다.

 






 충렬사의 근위병 교대와 국기하강식의 절도 있는 슬로우 댄스(slow dance)

 2016년 2월 14일 12시 25분 인천공항을 출발하는 차이나항공은 출발부터 조금씩 지연되더니 도착도 지연되고 구름마저 많이 끼어 아직 저녁이 아닌데도 어둑하고 우중충한 분위기로 타이완 도원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예정된 첫날 일정도 어그러질 줄 알았는데 가이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순서를 조정하며 일정대로 진행한다고 안내하였다. 늦어진 관계로 5시에 진행되는 충렬사의 근위병 국기하강식(장개석기념관에서도 행한다함)을 보여주겠다고 안내하였다. 우리나라 경복궁 교대식도 차창 밖으로 본 적은 있어도 제대로 관람한 적도 없는데 남의 나라에 와서 구경하다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중화민국 국민혁명과 항일운동 등을 위해 순국한 장병 33만 명의 영령이 모셔진 성역 충렬사에 먼저 들렀다. 충렬사(忠烈祠)는 우리나라 현충원과 비슷하지만 묘소가 아닌 위패만 모셔져 있다. 북경에 있는 태화전의 모습과 같이 만들어졌고 내부에는 전사한 군인들의 사진, 동상, 훈장 등도 있다고 하나 관광객들에게 개방하지는 않고 있다.
 육, 해, 공, 삼군 의장대들이 3개월마다 주기적으로 교대근무를 하며, 교대식은 9시부터 매시 정각에 한다. 100여m의 거리를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천천히 걸었다. 오후 5시가 되자 근위병 업무 종료 교대식과 국기하강의례까지 관람할 수 있었다.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의 근위병들의 행진은 로봇 같은 스텝으로 시선을 끌어 나름의 현대적인 멋과 근엄함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조선시대 군관복장으로 교대식을 하는데 타이완은 서구식 근위복장으로 하여 비교가 되었다.
 그런데 남들은 군인들의 사열의식으로 보고 있지만 평생 춤을 연구해온 나는 훌륭한 춤 스텝으로 보이고 멋진 군무로 느껴졌다. 늠름한 검정감색 헌병복과 하얀 철모와 집총은 훌륭한 무복이었고, 걸음걸이 하나하나가 춤스텝의 색다른 기법으로 다가왔다. 오른쪽 어깨에 집총(執銃)을 한 상태로 충렬사 계단을 내려올 때는 오른발을 내려딛으며 왼손을 오른쪽 허리도 접고 왼발을 내려딛을 때는 왼쪽으로 내리는 걸음법으로 한 박자씩 걸어 내려왔다. 평지로 대문까지 100m를 걸을 때는 두박자 한걸음 법으로 무릎을 높이 들었다 내딛으며 왼손을 앞으로 어깨 높이로 들었다 내리는 방법으로 걸었다.
 또한 대문 앞의 위병단 위에 올라서 마네킹처럼 서있던 위병 두 명은 마주보고 4박자동안 왼발을 앞으로 뻗었다 천천히 내렸다 단아래 땅으로 내려딛으며 서로 좌우향좌로 국기하강단 헌병들을 향해 돌아섰다. 돌아서고 나서는 오른발을 옆으로 크게 벌려 발끝을 옆에 찍었다가 두발을 모았다. 두발 걷기로 국기 하강단 앞까지 당도하자 사선으로 일렬로 서서 내려총, 들어총, 받들어총, 돌려총, 휘돌려총 등 다양한 총검술을 각자 순서대로 차례차례 보여주고 두 명씩 마주보고 총기 맞바꾸기, 앉아총 등 총검묘기도 시연하였다.

 






 최고(最古) 사찰 용산사의 춤추는 부조상들

 다음은 용산사(龍山寺)로 발길을 옮겼다. 용산사는 타이베이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다. 1738년 청나라 시절 푸젠성 이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사찰로 중간에 소실되어 현재의 건물은 195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돌기둥에는 다양한 모습으로 조각된 용과 역사적 인물들의 춤추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어두운 저녁이라 사찰 지붕과 기둥과 벽면에 부조된 현란한 장식과 용과 춤추는 인물상들을 상세히 볼 수가 없어서 아쉬웠다. 특히 지붕과 기둥 등에 장식한 용의 형상은 살아서 꿈틀대는 듯한 용틀임이 가장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타이완의 종교분포 통계를 보면 불교(300여만), 도교(200여만), 기독교(50여만), 천주교(30여만), 회교(5만)으로 불교와 도교가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타이베이에는 소규모에서부터 거대한 사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원이 흩어져 있다. 이들은 종교에 관대해서 많은 사찰들이 도교, 불교, 그리고 다른 많은 신을 하나의 사원에서 같이 모시고 그 신의 숫자는 점차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곳을 찾는 연령층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꽤 다양하다는 것인데, 이는 무병장수를 비는 신을 비롯하여 대학합격을 비는 신, 연애운을 묻는 신 등 소원별로 다양한 신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란다.
 또한 한쪽에 점괘를 보는 곳이 있었다. 반달모양 같은 두 개의 패를 던졌을 때 한 개의 패가 뒤집어지고 다른 패가 엎어져야 신이 소원을 들어준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두 개의 패가 모두 뒤집어진 경우에는 신이 ‘알 듯 말 듯 하니 다시 던져보라’는 의미이고, 두 개의 패가 모두 엎어진 경우는 ‘신도 모르겠다’는 뜻이라고 전한다.
 또 소원을 빌며 제사를 올리는 파는 ‘총명하게 해달라’는 의미를, 찹쌀은 ‘시험에 철썩 붙게 해달라’는 뜻이라고도 했다.

 



 

 붉은 색채가 너무 요란스럽고 여기저기 피워놓은 향냄새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고, 현란한 전각들은 회랑으로 이어져 있었고, 좁은 마당 곳곳에는 공양 올릴 꽃, 과일, 향초, 과자 등을 파느라 소란한 시장이 따로 없었다. 넒은 탁자 위에는 먹을 것을 사서 올려놓으면 모아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준다고 한다.
 대만인들은 신이 마음속에 있다고 믿으며, 자신이 존경하는 모든 것은 신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불교의 부처도,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도, 삼신할미도 대만에서는 신으로 존재하며 실제로 불교사원과 함께 각 사당 뒤쪽에 안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흡사 우리나라의 절에도 대웅전 뒤 산으로 칠성각, 명부전, 신신각 등을 작은 사당에 모셔 놓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용산사는 그냥 둘러보면 흔하디흔한 사찰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세세히 들여다보면 중국이 아닌, '타이완스러운 용산사'만의 매력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첫째, 타이완에서 ‘최고(最古)의 사찰’이며, 둘째, 중국사찰이 아닌 중국 같은 ‘타이완 사찰’이며, 셋째, 소원을 잘 이루어주는 ‘소원성취 사찰’이고, 넷째, 불교, 유교, 도교 등 각 종교의 색채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복합종교 사찰’이고, 다섯째, 사찰규모는 대형은 아니나 아시아 불교문화권에서는 장식물과 부조물들이 가장 많고 화려한 ‘부조장식 사찰’이었다.

 



 

 용산사를 구경하고 옆길로 나가니 바로 화시제 야시장(일명 뱀골목)이 있어 둘러봤다. 날은 어둡고 비는 부슬부슬 오지만 골목 안은 지붕을 설치하여 다니기는 괜찮았다. 대체로 야시장은 토속음식과 특산품들을 진열하고 왁자지껄한데 여기는 사람들은 많은 편인데도 조용하고 깨끗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다양한 열대 뱀종류도 상가 앞에 진열하였고, 저렴하게 마사지하는 집도 많았다.

 



 


 첫날 일정이 항공지연으로 늦어지는 바람에 늦은 저녁식사였지만 예약대로 몽골리안 바비큐집으로 갔다. 각종 야채, 고기, 양념을 뿌려 대형철판에 볶아주면 받아다 먹으면서 테이블 가운데는 샤브샤브를 할 수 있는 냄비가 준비되어 있어 고기와 야채 등을 끓여먹었다. 음식마다 중국의 향채 맛이 있으나 약해 익숙한 사람들은 먹는 데는 지장이 없었지만 우리 입맛과는 달라 맛있게 먹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뒤늦게 예약한 호텔로 갔다. 최고급호텔은 아닌데도 아담하고 깔끔하게 정돈되고 청결하며 변기에는 비데기가 모두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도 일본의 장점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돌아오는 날까지 매일 외출했다 호텔에 와보면 베개와 이불의 포가 새로운 것으로 갈아 끼워져 있었고, 칫솔, 비누, 식음료 등의 소모품도 쓰다 남은 것은 우리가 버리지 않는 한 그대로 두고 새 것을 매일 보충해서 비치해 두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다음 호에는 타이완의 공연문화와 소수민족 문화와 춤공연에 대해 소개하기로 한다.

2016. 03.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