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추모기획_ 무용가 정재만

 

 

 

무용가 정재만 선생이 7월 12일 오후 11시30분 교통사고로 별세했다. 향년 66세. 전북 익산에서 춤 강습회를 미치고 다음 날 부산에서 열리는 강습회를 위해 KTX 역이 있는 대전으로 이동하는 길에 변을 당했다. 고인은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대학 교수(세종대, 숙명여대)로 많은 후진들을 양성했고, 일반인들에게 우리춤을 널리 보급했으며, 수많은 공연을 통해 빼어난 춤으로 대중들과 소통했다. 남무단을 만들어 남성 무용수들에게도 활력을 불어넣었다. (편집자 주)



(1) 정재만의 춤과 예술



연과 교육에서 큰 업적 남긴 전통춤의 명인

 
 

김영희_우리춤연구가

 

 무형문화재 27호 ‘승무’의 예능보유자 정재만(鄭在晩) 선생이 7월 12일 세상과 이별했다. 익산에서 제자들을 지도하고 돌아가는 중에 중앙선을 넘어온 차가 선생이 타신 차를 덮쳐 어처구니 없게 춤계를 떠나신 것이다. 그의 나이 66세. 완전히 무르익은 춤이 당신 자신을 잊게할 지경에 이르렀고, 한창 제자를 양성하며 금과옥조를 남길 나이에 참으로 어이없게도 가버리셨다. 정재만 선생은 1948년 경기도 화성군 정남면에서 옹기쟁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이 어려웠지만 예술 방면에 소질이 있었고, 주변에서 영화배우가 되라고 권유했었다. 배우의 꿈을 안고 배우수업을 받으러 다니던 길에 우연히 송범무용연구소에 구경을 간 것이 춤에 입문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고 송범(1926~2007)에게서 춤을 배우던 정재만 선생을 발견한 고 한영숙(1920~1989)이 그를 제자로 데려가 춤을 가르쳤다.
 한영숙 선생에게 <승무><살풀이><학무><태평무><훈령무> 등을 이애주 선생과 함께 수학하다가, 선생은 20대 중반부터 춤계에 당신의 이름을 내놓기 시작했다. 1972년 전국신인무용콩쿨에서 <사념>이라는 춤으로 특상을 받은 후, 1974년 제7회 동아무용콩쿠르에서 <승무>로 대상을 받았다. 국립무용단의 무용극에서 연이어 남성 주인공으로 춤추다가, 2회 대한민국무용제(1980)에서 <춤소리>로 안무상을 받았고, 6회 대한민국무용제(1983)에서 김현자와 공동안무한 <홰>로 대상을 받았다. 이후 서울예술단, 경기도립무용단, 한국의 집, 삼성무용단 등에서 예술감독을 역임하며, <학불림굿>(1988), <광대의 꿈>(1992), <혼이여, 혼이여>(1993), <아! 수원성>(1994), <땅의 혼>(1997) 등을 안무했다. 현대적인 무대 메카니즘과 현재적 감수성에 맞게 전통춤을 재구성, 재해석해낸 것이다.
 정재만 선생의 창작품 속에는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인물들이 품고 있는 정신과 미의식, 신명을 담아냈었다. 이 외에 1986년 아시아게임 폐막식과 1988년 서울 올림픽 폐막식, 2002년 월드컵 전야제 등 굵직한 국가 행사에서 안무를 맡았다. 또 국내외의 각종 무용페스티벌, 국제문화 교류행사, 민속예술제 등의 수많은 대형공연을 주도했다.
 쉼 없는 창작활동 중에 세종대를 거쳐 1987년부터는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의 교수로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 사이 이매방, 이애주에 이어 2000년에 한영숙류 승무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고,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후 선생은 전통춤의 보존과 계승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그의 은사인 한영숙의 호 ‘벽사(碧史)’를 받아 벽사춤아카데미를 설립하고, 한성준으로 시작된 한영숙, 정재만 춤의 계보를 성립시켰다. 그렇게 시작된 한성준-한영숙 춤의 맥에서 <허튼 살풀이>, <태평무>, <살풀이>, <훈령무>, <선비춤>, <광대무>, <즉흥춤>, <학춤>, <고구려무>, <비천무>, <북소리사위> 등을 레퍼토리로 남겨놓았다. 이 춤들은 한성준과 한영숙 춤의 자산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전통춤의 또 다른 유산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춤들을 남기신 외에 정재만 선생은 춤계에 또 다른 흔적을 남기셨다. 남무단(男舞團)을 창단해 한국춤에서 남성춤의 부재를 극복하고 후진 양성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국립극장 대극장에 올려진 1987년의 창단공연은 전석매진이었다. 남성춤, 남성춤꾼의 필요성이 춤계에서 늘 언급되었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무도 나서지 않았었다. 이때 정재만 선생은 남무단을 통해 남성춤꾼들을 결집하고, 이들의 춤을 공연으로 가시화시켰다. 홍웅기, 한광수, 정진욱, 신재우, 배성한, 임원, 김충한, 김상덕, 김원국, 이정수, 장윤범, 윤민석, 김윤수, 이경수, 황재섭, 양승호, 김종원, 이흥식, 이진원, 정용진, 박이표, 안덕기 등이 남무단 출신이다. 이들은 현재 춤의 다양한 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선생은 남성무용수의 기량 향상에 무엇보다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정재만 선생은 춤을 부르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춤추셨다. “관객이 있고, 내 춤이 필요하다면 무대가 크고 작은 것은 내게는 중요하지 않아요. 세간에서는 내 공연에 대해 격이 떨어진다는 쓴 소리를 하는 것을 들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느새 우리 춤이 너무 고답적인 예술이 되어버려 춤 본연의 자세를 잊어버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춤을 통해 세상의 시름을 잊을 수 있고 잠시나마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예술이고 춤의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선생의 이 말 속에 춤에 대한 가치관, 춤을 통한 실천, 관객에 대한 겸손함, 또 현재 춤계에 대한 안타까움이 모두 배어있다.  

 숙명여대에 개설한 전통문화예술대학원에서 열성을 다한 것도 전통춤을 제대로 교육하고 보급하기 위함이었다. 1990년대에 무용인구가 확산되고 무용과가 늘어났지만, 전통춤 교육을 전담하는 대학이 없었음을 안타까워 하셨다. 그래서 전통춤의 발굴 보존, 전통춤의 레퍼토리 개발, 전통춤 장단 연구, 전통춤 용어의 정립, 전통춤 문헌 원전 연구 등으로 전문화되고 차별화된 전통춤 교육을 시도했었다.


 정년퇴임 이후에도 전국에 있는 제자들과 자신의 춤을 배우고자하는 지방의 무용가들을 위해 매주 먼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것도 전통춤의 올바른 계승과 보급을 위해서였다. 아! 전통춤의 한 계보이자, 남성춤의 한 맥이셨던 선생님이 그렇게 가버리셨다.
 지난 봄 세월호의 침몰로 전국이 충격에 빠져있을 때, 국립국악원에서 주최한 “명인동감”(5월 8일 풍류사랑방)의 무대에 올랐었다. 이 공연이 아마 선생의 마지막 춤판이리라. 그 날의 프로그램은 <태평무>, <살풀이춤>, <허튼춤>이었다. 선생은 유교적 색채가 두드러진 <태평무>의 의상을 입고, 도당굿의 굿가락을 버선발로 자분자분 헤쳐나갔다. 또 움직일 듯 말 듯 하는 춤사위로 심정을 응축하다가 휙 수건을 뿌려 <살풀이춤>을 추었다. 마지막 춤 <허튼춤>은 세월호 희생자의 넋을 위무하는 한 판 춤이었다. 부모의 마음으로, 스승의 마음으로, 사제(司祭)의 마음으로, 그리고 여러 풍랑을 헤친 춤계의 어른으로서 춤추었던 것이다.
 정재만 선생은 이제 춤꾼으로서의 예술혼, 그리고 업적과 자부심을 뒤로 하고 한 인간으로 돌아가 요셉이라는 세례명으로 흑석동 성당에 안치되셨다. 남은 일은 제자들이 뒤를 이어 정재만 선생의 꿈을 실천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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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의 스승 정재만



귀천하신 은사님을 그리워하며

김미숙_경상대학교 민속무용학과 교수


 화창한 봄날!
 일요일 이른 아침, 휘리릭... 폰에 문자가 들어온다.
 ‘제자 김교수님! 30분만 일찍 오세요. 승무 한바탕을 먼저 연습하게....’
 매달 1․3주 일요일 아침마다 이수반과 전수반이 연습이 있을 때였다.
 마침, 조금 일찍 연습실 문을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문자 전송과 동시에 나타났다고 진심으로 반갑게 맞아주시던 선생님께서, 지금도 장삼을 입고 함께 춤출 것 같은데… 애통하고도 원통한 심경이다.
 주말이었던 지난 13일 밤 12시경에 선생님의 비보를 듣고는 거짓말이기를 바랬다. 그래서 계속 ‘무슨 말이냐’고 ‘그런 말이, 대체 말이 되냐’고 울부짖었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현실 앞에서 기막히고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받아들일 수 없지만 우리는 선생님을 그렇게 훌쩍 떠나보냈다. 지금도 믿어지지 않아 가끔 먼 산을 바라본다.
 허공을 바라본다.
 뿌옇게, 뿌옇게, 산도, 하늘도.. 


 나에게, 우리에게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이 더운 열기도, 흰 구름도, 뿌리는 비도, 바람도, 그 어떠한 것도,
 의미 없이 다가 왔다가 간다.
 선생님은 우리를 데리고 종종 한영숙 선생님 묘소에 다녀오시곤 했는데, 이제는 누가 우리에게 함께 가자고 할까? 안타깝기만 한, 그리운 선생님!
 하늘나라에 계신 큰 선생님께서 왜 이렇게 빨리 데려 가셨는지…
 한영숙 선생님의 귀천도 마치 엊그제 일어난 일 같은데 말이다. 간경화증 말기 증상으로 돌아가신 한선생님은 그래도 죽음을 예견하고 이런 저런 준비를 미리 하셨다. 문득 병실 침대 위에 흰 봉투를 몇 개씩이나 두고 간호사들까지도 수고했다고 한 개씩을 전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한선생님은 어린 나에게 당신이 춤추는 이런 저런 사진도 주시며, 손을 꼬옥 잡고는 “너는 재만이에게 가서 춤을 추거라. 내 말을 꼭 듣도록 해라! 열심히 춤추고 …” 나는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며… 그렇게 정재만 선생님과의 인연은 더 없이 단단해졌다. 유언으로 대물림 받은 셈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정재만 선생님께 마음을 의지하며 다 같이 한 길을 걸어왔는데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이 우리 곁을 떠나가시고 말았다. 이 헛헛하고 막막함이 허허벌판에 홀로 선 기분이라고 하는 걸까…

 정재만 선생님은 1970년대 국립무용단 수석단원을 거쳐 1980년대 ‘’ 공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어 1984년 대한민국무용제에서 ‘홰’로 대상 수상을 하셨고, 이어 남성무용단인 남무단을 결성해 전국을 돌며 공연 활동을 하셨다. 이때 구름같은 관객들이 단원들에게 싸인을 받기 위해 길을 가로 막아, 대형버스가 출발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인기를 누렸고, 당신도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하셨다.
 수많은 남자 무용수를 육성하면서 박수 갈채도 많이 받으셨고 가정형편이 만만하지 않은 제자들을 위해 남모르게 크나큰 헌신을 하셨다. 선생님의 말씀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고통으로 그들과 동고동락했다고 한다. 저마다 상황과 성격이 다른 남자 무용수들의 직업과 거처가 달라, 연습이 필요할 때면 양평이나 경기도 지역의 연수원에 아예 일주일씩 함께 투숙하면서 맹훈련을 시키는 등, 선생님의 열정은 정말 대단하셨다. 그때마다 나 역시 빠지지 않고 연수원에서 맹훈련을 함께 했다. 참으로 엊그제처럼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니 우울하고 침울한 마음은 더욱 침잠하는 것만 같다.
 선생님은 그 무렵 럭키무용단이나 삼성무용단의 안무자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남자 무용수들을 배출했다. 지금까지 활동하는 큰 제자로는 울산시립무용단 김상덕 예술감독, 전 정동극장 김충한 예술감독, 전 광주문화재단의 윤상진 예술감독, 숙명여자대학교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 배성한, 전 국립전통예술중학교 임원선생님, 인천시립무용단 김윤수 예술감독, 전 울산시립무용단 김경수 예술감독, 전 삼성무용단 이정수 안무자, 벽사댄스컴퍼니 대표 정용진 등이 있으며 이들을 한국 무용계를 이끌어갈 사람으로 키워내셨다.
 1987년 이후에는 세종대학교에서 숙명여자대학교로 옮기면서 <남무단>활동과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예능보유자의 길로 매진하셨다. 2000년대에는 전통춤 공연을 중심으로 한 해외 공연을 펼쳐 국위선양에 앞장 서셨다. 2003년에는 미국이민 100주년기념 순회공연 〈Korea Fantasy〉, 2006년 그리스-터키 해외공연 〈Dynamic Korea〉, 2007년 불가리아-루마니아 대사관 초청공연 〈Dynamic KoreaⅡ〉 등과 다양한 국가행사를 맡으셨다. 특히, 1988년 88올림픽폐막식 <빛과 소리> 안무, 1993년 대전EXPO 개막식 <꿈돌이 여행> 및 폐막식 안무, 2002년 월드컵전야제 안무총괄,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개 ․ 폐회식 안무총괄, 2003년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 개막식 무용총감독, 2005년 제17회 아시아 육상경기대회 개․폐회식 안무총괄, 2008년 제17대 대통령취임식 본 행사 안무, 2009년 경북체전 안무총괄, 2009년 대전 전국체전 무용총감독 등의 국가행사까지 도맡아 진행하셨다. 한평생 춤을 위해 사셨던 분으로 1분도 1초도 쉼 없는 모습을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이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자마자 사모님께서는 “너무 춤밖에 모르고, 일만 하다가 이런 상황이 되어 선생님이 너무 불쌍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는 “이렇게 빨리 가려고 평생 곁눈질도 할 틈 없이 늘 바빴던가?”하시며 슬퍼하셨다. 가슴에 맺히는 말씀이셨다.  

 2011년 진주 논개제의 명무전에 오셔서 공연을 성황리 끝낸 후 그 늦은 밤에 지리산으로 숙소를 정하고는 출발하시겠다고 하여 모두가 말렸다. 그러나 이를 만류하면서 결국 부지런히 지리산 칠불사 근처까지 가셨는데 계획이 있으면 바로 몸으로 실천부터 하셔야 하는 적극적인 행동파였기 때문이다. 무척 피곤했을 텐데 그 다음날 새벽에 행방이 묘연해져서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숙소로 들어오시면서, 칠불사 참배 다녀오시는 길이라고 하셨다. 모두 걱정했던 걸 알고는 말씀하시길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 춤이라도 추거나 움직이고 일이 있어야 해! 내가 그런 스타일이니 걱정을 말라”고 하셨다.
 정말 휴식을 취할 줄도, 즐길 줄도 모르고 춤만 추셨던 우리 선생님!
 늘 새벽 5시면 제자들을 연습실로 불렀던 우리 선생님!
 어른 섬기기를 실천했던 우리 선생님!
 부지런하고 근검절약이 몸에 배여 있어서 늘 걷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우리 선생님!
 외화를 아껴야 한다고 해외 공연을 가서도 선물을 사는 일이 거의 없었던 우리 선생님!
 딸 바보이신 우리 선생님!
 춤을 못 춰도 화를 내는 일이 없는 다정, 다감한 우리 선생님!
 제자들의 아픔을 다 안아 주시고 함께 고민해 주시던 우리 선생님!
 춤에 있어서는 완벽한 우리 선생님!
 대한민국이 원하는 국민 상! 그가 바로 우리 선생님이셨다.


 스승만한 제자가 없다고 했던가? 춤만 잘 추고 인품이 부족했다면 이렇게 큰 스승이 될 수 있었을까? 너무 원통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아깝기만 선생님은 공연을 위한 축사를 멋지게 써주셔서 놀랄 때가 많았는데 춤을 추지 않았으면 종교인이나 시인이 되고 싶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예술은 종교만큼이나 거룩하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은 우리의 전통춤을 지켜온 예인으로서 종교인만큼이나 큰일을 하셨다. 수많은 제자들의 마지막 인사를 받으며 먼 길 떠나신 우리 선생님!
 이제 살아생전 솔선수범했던 그 모습을 가슴에 새겨 선생님의 뜻을 지켜야 한다. 춤을 향해 한평생 한 길만을 걸어온 선생님의 꿈은 우리가 가꾸고 이루어야 할 것이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정신을 심어주시고 전통예술문화가 온전하게 전승되고 꽃필 수 있도록 우리를 함께 맺어 주셨다.
 6월 14일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있었던 “아시아전통무용단” 공연에서 큰 축하를 해 주시던 그 모습이 살아생전 마지막 모습이었다. 늘 멀리 있는 제자로서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35여 년을 선생님과 함께하여 늘 감사하고 행복했었다. 선생님과 함께 평생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오는 행운은 결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먼 산을 바라본다. 

2014. 08.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