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사)민족미학연구소 한국민족미학회 2022 가을 학술대회
탈춤의 전승방식과 미학적 지향
- 원형과 전형, 생성과 형상, 신명을 중심으로 -
정형호_무형문화연구원 연구위원

사)민족미학연구소 한국민족미학회에서 지난 9월 열은 '한국 탈춤의 생성미학적 접근'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발제문들 가운데 5편을 선별해서 싣는다. 춤 연구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는 이 자료들의 폭넓은 전재를 허락해주신 사)민족미학연구소에 깊이 감사드린다. - 편집자주


1. 원형과 전형의 문제

(1) 원형의 개념과 학계의 비판적 시각
문화재청은 오래동안 무형문화재의 원형 전승을 고수해 왔으나, 근래에 원형을 전형으로 바꾸었다. 이유는 크게 3가지로, 원형의 실체가 모호하고, 현장에서 계속 변화되고 있으며, 원형 지향이 무형문화재를 박제화하고 전승의 활력을 약화시켰다는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기존에 학자들은 원형의 폐해를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원형은 무형문화를 유형문화적 시각에서 보는 데에 기인한다. 인간의 지식과 행위를 통해 실현되는 무형문화를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는 고정된 물체로 보려는 시각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전경수는 문화를 물상인 ‘재(財)’로 파악하는 것이 문제이며, 삶의 실재인 문화의 일부를 문화재라는 조작된 항목의 장르로 환원시킴으로써, 시간과 공간이 기초가 된 삶 자체를 파편화시키고, 전통문화를 삶의 실재로부터 탈맥락화시켰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무형문화의 원형 논리는 하나의 고정된 형태로 규정하려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이경엽은 진도다시래기와 진도씻김굿 등을 중심으로 무형문화재의 원형은 전승 맥락을 무시하고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원형에 대해 비고정성의 생명력 있는 연행 예술의 고유원리 및 본질적 속성으로 규정하고 있다. 임재해는 민속은 현장상황에 맞게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동하는 문화적 실체이기 때문에, 가장 오래된 것이 고형일 수는 있어도 원형일 수는 없다고 본다. 그는 단지 추론된 원형으로서, 하나의 각편이자 변이형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훈상은 1970년대부터 가산오광대의 복원에 참여하면서 원형을 표준화된 것, 상상력의 개입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지역사회의 현장과 유리되고 현실적 생명력을 갖지 못한다고 규정했다. 한양명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의 재구성되고, 변형된 형태가 문화재 지정으로 연결되면서 원형을 선별적 창출, 재구성, 변형 등에 의해 조작된 개념으로 보고 있다.

원형은 추론된 것, 재구성 및 창출된 것, 조작된 것, 의도적으로 표준화된 것,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 탈맥락화된 것 등으로 규정되고 있다. 이런 점은 지정 당시부터 인위적으로 복원, 변형, 창출되어 원래 무형문화의 전승 맥락과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형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며, 전승 현장에서는 편의상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당시를 원형으로 설정해 왔다. 그러나 지정 당시도 여러 채록본 중에 어느 것이 원형으로 타당하고, 복원도 제대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세밀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많은 종목이 지정 당시의 원형도 모호한 상태에서 출발한다.

(2) 전형의 개념과 현실적 한계
원형에 대한 여러 논란으로 인해, 문화재청은 몇 년 전에 원형을 전형(典型)으로 바꾸었다. 전형은 사전적 의미로 같은 부류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본보기나 가장 대표적인 것을 말한다. 곧 전형은 대표적, 모범적, 이상적인 것을 지칭하지만, 역사적 시기마다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

문학에서 전형은 보편성⋅본질성을 나타낸 것이며, 동시에 개별성도 지닌다. 특히 전형적 인물은 미리 규정된 범주의 속성들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서, 한 사회의 집단적 성격을 대표하며 보편성을 지닌다. 반면 개성적 인물은 사회의 집단적 성격과 대립하는 예외적 기질을 갖춘 인물이다. 루카치는 전형성에 대해 정체된 현실이 아닌 변화하고, 역동적인 역사적 현실로서의 특수성으로, 개별성과 보편성 양자 사이의 어떤 지점에 있다고 본다. 한편 전형화는 개인적인 것 속의 사회적인 것, 특수한 것 속의 보편적인 것, 우연적인 것 속에 있는 합법적인 것, 여러 현상들 속의 본질적인 것을 발견해 내고 끄집어내어 예술적으로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행위라고 규정한다.

개정된 무형문화재 신법에서 전형(典型)이란 무형문화재의 가치를 구성하는 본질적 특징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하면서 구현되고 유지되어야 하는 고유한 가치, 기법 또는 지식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50여년 전인 1965년 문화재위원회에서 제시한 원형 개념은 민족생활의 핵심으로, 오랜 역사성에 전통적이고 독특한 형식과 기법을 지니며, 두드러진 향토색에 예술적 가치 있는 학술 연구 대상이면서, 문화적 가치상실 우려의 대상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원형 개념과 50년 후에 제시된 전형 개념은 역사성, 본질성, 고유성 등에서 큰 차이가 없다

송준은 전형의 개념을 무형문화유산의 속성인 순간성과 공간성, 그리고 변화의 속성인 내발적 역동성을 모두 포괄한다고 제시했다. 이것은 동일한 원리가 반복 적용될 때 발생하는, 내부적인 변화를 인정하는 개념으로, 상황, 즉 시공간에 따라서 변하는 가변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허용호는 전형이 복수적인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 원형이 갖고 있는 절대적 가치에 대응되는 상대적 가치를 추구한다고 보았다. 발탈의 전형이 모호하며, 굳이 설정한다며 각 이본간의 공통점이라 말한다. 그는 표현된 형태를 창출하는 원리에 중심을 둔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위의 여러 개념 규정을 통해 보면, 전형은 보편성을 지향하며, 본질적인 속성에 가까운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면서 역사적 현실을 바탕으로 그 변화를 인정하며, 또한 개별성과 특수성도 인정하기에 여러 유형과 양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설정된 개념이다. 이런 점에서 전형은 고유하면서 대표성 있는 것을 지칭하고, 개별적 다양성과 가변성을 인정하면서 내적인 역동성도 지닌다.

그런데 우리 탈춤의 전승현장을 보면, 초기 지정 당시에 다양한 채록본에 대한 검토가 미약하고, 졸속 복원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그러고 경연대회를 통해 부분적으로 창출되었으며, 전승과정에 의식적⋅무의식적인 변형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본질적 역동성이 크게 약회되어 탈맥화된 상태이다. 따라서 전형은 원형과 마찬가지로 현장을 고려하지 않은 관념적이고 허구적인 논의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전형으로의 전환은 현장에서 대표성, 전형성을 가지고 오히려 분란을 야기할 여지가 있으며, 또한 전승상황을 고려치 않고 용어 하나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전승 현장에 일시적인 혼란만 주고 더이상 논의는 진전되지 않고 있고 잠복한 상태이다.






사)민족미학연구소 한국민족미학회 2022 가을 학술대회 '한국탈춤의 생성미학적 접근' 현장




2. 탈춤 현장의 생성과 형상화

탈춤 현장의 생성은 고정된 것이 아닌 스스로 바뀌어가는 방식을 말한다. 본질이 불변의 개념이라면, 생성은 유동적이고 변화되어 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형상은 현실적으로 실체화되어 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1960년대부터 시작된 탈춤의 복원과 지정과정에 나타나는 다양한 재구성과 창출 방식, 또한 지정 이후에 나타나는 내부적 변화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1) 복원의 한계와 창출
우리 탈춤은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 이후의 복원과정까지 짧으면 20-30년에서, 길면 40-50년의 공백기를 가진다. 일제는 표면적으로 향토오락의 증진을 주장하면서, 이면으로는 집단놀이 억압이라는 이중적 정책을 시행했다. 특히 만주침략과 강화된 강압정책에 의해 1930년대 후반에 와서는 대부분 지역에서 지역 탈춤과 집단놀이 등의 전승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해방공간의 혼란, 한국전쟁의 영향, 경연대회와 무형문화재 지정, 지역의 전승방식 등에 의해 전승중단의 시기가 제각각 달리 나타난다.

따라서 많은 탈춤이 인위적인 복원과 지정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대체로 양주별산대놀이나 동래야류 등과 같이 지역적 연고가 강한 종목은 세시적 대동놀이로서 단절되었을뿐 민간의 자연전승이나 간헐적 공연 형태로 유지되어 비교적 단절 기간이 짧은 편이다. 그리고 해서탈춤이나 북청사자놀음은 전쟁 이후 월남인 중심으로 남한에서 복원되고 재구성되었다. 그리고 강릉관노가면극, 송파산대놀이, 일부 오광대는 단절된 기간이 비교적 긴 편이다. 따라서 세시적 대동놀이의 성격이 소멸되면서 전승이 중단되거나 크게 약화되었다.

민속의 복원은 엄밀한 의미에서 부분적 재현이고 창출이라 할 수 있다. 전승이 단절된 이후 일정 시점에서 되살리는 것은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문화에 의존해 해당 민속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전승이 단절되었던 민속을 재구성해 이전의 전승맥락과는 다른 차원에서 전승하게 되는데, 이에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개최와 문화재보호법에 따른 무형문화재 지정이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탈춤도 일정한 공백기를 극복하고 다시 복원하는 과정에서 전승주체에 의한 재구성과 창출이 일어나게 된다.

① 문화재 지정을 위한 재구성
1960년대 이후 탈춤의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출연과 이어진 무형문화재 지정은 재현과 지정 과정에서 재구성된 경우가 나타난다.

북청사자놀이는 북청 현지에서 정월대보름에 사자 형상을 끌고 집집마다 다니며 놀던 소박한 집단적 세시놀이 형태이다. 이것이 월남인 중심으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하고, 1967년에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철저히 재구성되었다. 즉흥적 재담에 사자춤 중심의 단순한 대보름 놀이에 애원성춤, 사당춤, 거사춤, 무동춤, 넉두리춤, 꼽추춤, 칼춤이 각각 2-3분의 짧은 시간에 걸쳐 여흥으로 덧붙여졌으며, 각종 재담이 고정적으로 삽입되었다.

애원성춤은 원래 북청 현지에 없던 춤으로, 단지 사자놀이를 놀기 전에 흥을 위해 불렀던 지역 민요인 애원성 노래에 춤을 새로 구성해 덧붙였다. 넉두리춤도 사자놀이와 무관하게 북청의 여성들이 한식 다음날 남대천가에서 노래에 맞춰 추던 돈돌날이춤이다. 칼춤은 사자놀이가 아닌 토성리의 관원놀이에서 추던 춤으로, 역시 사자놀이에 삽입되었다.

원래 즉흥적이던 재담도 재현 과정에 연행의 장면전환을 위해 새로 만들어 삽입되었다. 따라서 꼭쇠가 “악사 듭시오”, “애원성춤 듭시오”, “〇〇〇듭시오”라는 방식으로, 등장인물을 알리는 말을 반복해서 외친다. 기존 탈춤에 이런 식의 장면 전환과 안내 재담은 사용되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자연스럽게 다음 과정으로 넘어간다. 이런 점은 북청사자놀음이 후대에 재구성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50여년간 재구성된 방식으로 공연이 반복되면서 이제는 고정화되고, 정형화되었다. 세시적 집단놀이를 연희적 성격의 공연물로 만드는 과정에 첨가, 편집, 재구성이 이루어졌다. 어찌보면 복원이라기 보다는 재구성과 창출이 더 적합할 것이다.

② 새롭게 창출된 탈춤
단절 기간이 길어서 복원을 위한 근거한 희박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행된 탈춤에는 자인팔광대놀이와 강릉관노가면극이 있다.

자인팔광대는 검증 없이 창출되어 국가 지정의 자인단오제에서 연행되는 종목이다. 이것은 오랜 단절과 구술자의 희미한 기억에 의존해, 원래 형태도 모호한 상태에서 복원되었다. 1926년 마지막 공연 이후 1988년에 복원되면서 60여년의 단절이 있었다. 그런데 복원을 전적으로 이복순 할머니가 13살 때에 집안 마당에서 부친 주도의 연습 장면을 보았던 희미한 기억에 의존했다. 따라서 재담과 인물설정에 있어 한국 탈춤의 일반적 성격과 맞지 않는 파격적인 전개를 이루고 있다.

양반의 재담은 이례적으로 상황 설명적이고, 자기고백적이며, 심지어 놀이 진행자 역할도 한다. 특히 양반의 팔도유람 재담은 타지역 탈춤의 말뚝이나 먹중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또한 몰락한 양반으로서 무자식을 하소연하는 이례적 모습도 보인다. 또한 첩에 대한 애정 표현도 노골적이고, 다른 지역 양반이 갖는 권위의식도 찾아볼 수 없다. 말뚝이는 상전인 양반에게 거친 욕설을 하다가 이유없이 굴종하는 모습으로 바뀐다. 또한 자식이 없는 양반에게 여자를 소개해서 첩으로 맞아들이게 한 다음에 본처에게 고자질하는 이중적 태도도 보여, 기존 말뚝이의 모습과는 다르다. 본처는 남편인 양반에 대해 신체 공격을 가해서 죽게 하지만, 소생한 남편과 쉽게 화해하고, 남편의 제안에 따라 후처와도 타협하는 파격적 인물이다. 후처도 다른 지역과 달리 무언이 아닌 유언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기존 탈춤의 양반, 말뚝이, 본처, 후처의 모습과 다른 유형의 인물형이다. 자인단오제 지정 시기보다 17년이나 늦게 창출되어 검증 없이 마치 국가무형문화재 종목인 것처럼 공연되고 있다. 대부분 창출된 하나의 창작탈춤임을 내세우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강릉관노가면극은 대체로 18세기까지 창우 집단 사이에 잡희 형태로 전승되다가, 19세기에 와서 관노가 주도하게 된다. 그리고 1909년을 마지막으로 전승이 중단되고 1960년대에 와서 복원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단절 기간이 50여년에 이르는데, 1965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최상수의 주도하에 출연했고, 춤사위는 김천흥에 의해 중부 지방 탈춤 춤사위가 일부 삽입되었다. 근거가 부족한 상태에서 짧은 기간에 급히 복원이 이루어지면서 춤과 몸짓이 창출될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관노 집안 출신의 김동하(1884∼1976)와 그의 친구 차형원(1890∼1972)이 등장했으나, 지극히 단편적인 증언을 하고 세상을 떠났다. 춤사위가 모호해서 초기 복원 과정에는 해서탈춤의 한 이수자가 직접 복원에 참여해서 조언하기도 했다.

강릉의 탈춤은 재담이 없는 무언이기 때문에 전통적 몸짓언어가 중요하다. 성급한 복원에 따라 지정 이후에도 수시로 몸짓과 춤사위, 동작선이 바뀐다. 따라서 강릉 고유의 신탈놀이로서의 성격이 무색할 정도로 현대적 몸짓이 삽입되었다. 이 탈춤은 독립적으로 연행되지 못하고 강릉단오제에 편승해서 주로 실연되었다. 그동안 춤과 몸짓에 대한 여러 고민을 통해 많이 정제되었지만,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③ 이본에 대한 검토 미비와 편의적 지정
초기 무형문화재 지정 당시에 일부 탈춤 종목에는 여러 편의 이본이 존재했다. 그런데 각 이본에 대한 정밀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지정이 이루어지면서 어떤 채록본이 고형이고, 지정의 타당성이 있는가에 대한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양주별산대놀이를 예로 들면, 1964년 지정 당시에 채록본이 아끼바본(秋葉隆, 1929년 조사), 김지연본(1930년), 현지인본(1957년), 이두현본(1958년), 최상수본(1950년대 말), 이보라본(1958년)의 6종류에 이르고, 지정 이후에 김성대본(1968년), 노재영본(1995년)도 나왔다. 각 판본에 따른 마당 구성을 보면 차이가 있다. 우선 아끼바본을 보면, 애사당, 말뚝이 과장이 빠져 있고, 김지연본과 현지인본, 김성대본에는 삽입되어 있다. 그대신 김지연본, 현지인본, 김성대본은 원숭이과장을 말뚝이과장으로 표기하고 있다. 김성대본은 말뚝이춤이라 제시하고, 아울러 신장수놀이라고 부연하고 있다.

시대별 채록본의 내용도 차이가 있다. 1930년본, 1957년본, 1979년본의 신할애비과장을 살펴보면, 1957년본이나 이두현본에는 성적 노출이 심해 도끼가 모친인 미얄할미의 중요 부위가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1930년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이두현본에는 도끼의 재담에서 근친상간을 나타내는 내용과 도끼누이가 동생을 인신매매범으로 표현하는 내용이 삽입되었다. 이런 내용은 1930년본과 1957년본에는 없는 부분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1930년본보다 후대에 갈수록 내용이 더 비속화되고, 세밀화되며, 상하 계층간의 갈등이 부각된다.

봉산탈춤의 경우를 보면, 초기 채록본에 오청본(1936년 조사), 임석재본(1936년), 송석하본(1936년), 김일출본(1958년), 이두현‧김천홍본(1965년)이 있고, 1967년 지정 직후에 이두현본(1968), 보존회본(1970년)이 나왔다. 1936년 8월 사리원 공연을 중심으로 채록한 3인의 채록본 중에 최상수본은 송석하본을 전사한 것으로 별도의 채록본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오청본과 임석재본도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같은 현장에 있던 오청본과 임석재본에 대해 허용호는 임석재본이 공연 현장의 특징이나 속성을 반영하고 있으며, 현장의 가변성이나 즉흥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시대를 달리한 여러 채록본이 면밀한 검토 없이 지정이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 봉산탈춤은 이두현본 중심으로 지정되면서 다른 채록본은 이단시되었다. 근래에 봉산탈춤보존회 내에서 최창주 전승교육사가 한예종에서 학생들을 데리고 1936년 오청본을 공연하자 보존회에서 제재를 하는 해프닝까지 일어났다. 한편 송파산대놀이는 지정 당시에는 허호영본이 중심이 되었다가, 후에 이병옥 채록본으로 연희 내용이 바뀌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기존 채록본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없이 지정되어 원형화되었으며, 무엇이 고형에 가까운 형태인가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지정에 참여한 학자의 채록본이나 심의에 참여한 특정 학자의 선호도에 따라서 지정이 이루어졌다.

(2) 무대공연화에 따른 양식화와 변형
탈춤은 무형문화재 지정에 의해 고정성이 심화되었지만, 지정 이후에도 계속 변화양상을 보이고 있다. 탈춤이 지닌 현장의 즉흥적이고, 가변적인 성격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변화의 양상이 지연공동체에 바탕을 둔 집단적 세시놀이의 전승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전승 맥락을 벗어나 탈지역화 및 무대공연화 양상에 따라 나타났다는 점이다. 그리고 연희자의 개인적 판단이나 자의적 설정에 의한 변화도 나타난다. 지정 이후에 의식적, 무의식적 변화는 매우 다양한데, 대체로 외부나 해외 공연을 위한 편집이 이루어지고, 무언의 배역이 유언화되며, 연희자에 따라 인물의 성격 설정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① 외부 공연의 증가에 따른 연희의 변화
탈춤이 각종 축제와 행사 초청에 의한 외부 공연이 늘어나면서 필연적으로 주최측에 의한 시간 제약과 편집을 요구받는다. 대략 20-30분에서 길면 50분의 시간에 맞추어 과장별 편집이 이루어진다.

봉산탈춤은 일찍이 외국 초청공연이 이루어지고, 국내공연이 늘어나면 이런 현상이 더 빨리 일어났다.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이후에 공연이 증가했으며,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 중반 사이에 크게 늘어난 해외공연으로 인해, 연희에 큰 변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가장 큰 변화의 계기는 1977년 3-5월에 미국 29개 주립대학 순회공연에 의한다. 당시 장기간 해외공연을 위해 공연시간에 맞추어 과장별 편집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배역의 인물과 재담이 추가되었다. 덜머리집의 대사가 유언에서 무언으로 변화했으며, 미얄할미의 죽음을 지금 방식으로 영감 가해로 고정시켰고, 이두현본에 없던 무당이 추가되었다. 한편 사자춤에 입사자(立獅子)가 삽입되고, 취돌이(취발이 아들) 인형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탈의 크기가 조금씩 바뀌었으며, 의상이 화려해져서, 취발이 옷에 은색 반짝이를 부착하고, 장롱 쇳대를 이용해 장식을 덧붙였다. 이런 변화는 무대공연화에 따른 필연적인 변화 양상이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하회마을 중심으로 공연이 늘어나면서 일부 배역의 성격에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바보 이매는 관객과의 접촉을 넓히면서 재담이 급격히 늘어났다. 원래 유한상본, 성병희본, 박진태본에 의하면, 이매는 언어보다는 주로 몸짓에 의존하는 인물로서 재담이 1~2마디에 불과했다. 그는 앞가슴을 열어젖히고 가슴과 배를 드러내며, 말이 어둔하고 더듬거리는 바보스런 인물이다. 허도령 전설에 의하면 탈도 완성하지 못한 미완성으로, 중부 지역의 원숭이처럼 장내 정리를 하는 정도의 인물이다.

그런데 근래 이매는 관객과의 접촉을 통해 인물의 성격을 바꾸고 있다. 내외국인들을 탈판에 불러내어 언어적 장벽을 이용해 그들을 희롱하는 영리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국적이나 입국 시기 등을 한국어로 질문하며, 답변을 못하는 외국인과 무작위 통역자를 무지한 바보라고 몰아세운다. 이 과정에서 관객에게 웃음을 유발하며 즐거움을 주는데, 언어불통을 이유로 외국인을 희화화시킨다. 따라서 관객에게 웃음을 안겨주는 인기있는 캐릭터가 되었다. 다소 극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지만, 상설공연화 과정에 관객과의 소통에 의한 새로운 유형의 인물이 설정되었다.

② 무언 배역의 유언화 경향
탈춤에서 무언은 인물의 성격을 부각하고 극적 전개에 긴장감을 불어 넣어주고, 다양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대체로 노장을 통해 종교적 이중성 부각하고, 소무와 첩은 사회적 약자를 상징하며, 사자와 원숭이, 연잎과 눈끔적이 등은 숭고한 존재의 부각에 의해 무언으로 등장한다. 한편 강릉관노가면극과 예천청단놀음은 자체로 무언극이며, 하회별신굿탈놀이는 무언에 가깝다.

근래에 와서 하회별신굿탈놀이에서 일부 무언 또는 무언에 가까운 배역에 재담이 급격히 늘어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하회에서 원래 무언의 인물로는 부네⋅중⋅각시⋅주지이며, 무언에 가까운 인물로는 할미⋅백정⋅이매⋅초랭이 등이다. 본래 유언의 인물은 양반⋅선비뿐이라 할 수 있다.

무언의 유언화는 하회의 중에게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대체로 한국의 탈춤에 등장하는 노장은 종교적 이중성을 지닌 인물로서, 다른 탈춤에서는 무언의 인물로 등장한다. 탈춤에서 노장은 불법을 수호하는 숭고한 존재지만, 여자에 접근하는 파계승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중적인 인물이다. 따라서 숭고함과 세속성을 지닌 인물로서, 내면적 갈등을 미묘한 심리묘사를 통해 무언의 몸짓언어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하회의 중도 기존 채록본인 유한상본, 성병희본, 박진태본에 완전 무언으로 설정되었다. 그런데 근래 파격적으로 유언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중은 내면적 고뇌를 몸짓인 아닌 말로 설명하는데, 부네의 방뇨를 보고 성적 흥분을 느낀 상태에서, 내면적인 갈등을 독백으로 말한다. “그것 참 이상하다. 저거 분명히 사람 같은데, 이상하다.”, “어허! 내가 중인데, 이래서 쓰나?”, “애따, 모르겠다. 중이고 뭐고, 다 집어치고, 춤이나 한번 추고 놀아보자.” 그리고 중은 부네의 거절로 자존심이 상하자 자신을 매력적인 인물로 과시하며, 상대에게 성적 관계를 요구하는 말까지 서슴치 않는다. “나도 사람인데, 사람 괄시하지 마소.”, “여보, 각시. 나도 이만하면 사내대장부지!”, “여보, 각시. 몸 한번 주지!” 등의 재담을 계속 뱉어내고 있다. 한편 앞뒤 맥락과 맞지 않는 재담도 삽입하는데, 부네가 방뇨한 흙의 냄새를 맡으면서 “아이고, 찌린내야.”라는 말을 내뱉는다. 성적 흥분 상태의 중이 내뱉는 말로는 앞뒤 맥락으로 보아 부적절하다. 무언의 배역에 자의적이고 맥락에 벗어난 즉흥적 재담을 가미하면 나타나는 결과이다. 근래 연중 상설화 과정에서 지금은 이 재담이 고정되어 버렸다. 관객의 다양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무언의 몸짓이 지닌 긍정적 측면을 간과한 채 전달의 효율성을 위해 즉흥적 재담이 덧붙여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③ 자체적 축소와 편집에 의한 변화
탈춤 공연의 축소와 편집은 외부의 요구에 맞춰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연행 시간이 짧은 영남지방의 오광대와 야류, 하회별신굿탈놀이 등은 별 영향이 없지만, 대략 2-6시간에 이르는 중부지방의 산대놀이나 해서탈춤, 그리고 남사당놀이는 어쩔수 없이 축소 공연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전승집단의 자체 판단에 의해 축소, 편집되기도 한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전과장 공연에 5시간 이상 소요된다. 그동안 정기공연으로 세시 시기인 음력 단오 대신에 어린이날에 1시간 30분 정도의 축소공연을 계속해왔다. 따라서 20여년 동안 흥미있는 일부 과장만을 지속적으로 반복 공연을 했다. 전과장 공연은 단순히 관객이 관람하기에 너무 지루하다는 이유이다. 더구나 외부 초청공연은 1시간 전후로 더 짧아진다. 특히 2천년대에 와서 자체 내의 갈등에 의해 5인의 전승교육사을 비롯한 일부 전승자들 이탈하면서 한때 전 과장 공연 능력도 상실되었다. 외부의 지속적인 지적으로 2019년에 와서 처음으로 전 과장 공연을 실시해서 현재 3년간 지속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전 과장 공연능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되었고, 부수적으로 기예능이 향상되고, 전승집단의 자존감도 높아지게 되었다.

남사당놀이는 풍물, 어름(줄타기), 덜미(인형극), 덧뵈기(탈춤), 살판(땅재주), 버너돌리기 등으로 구성되어 전체 6시간 정도 소요된다. 그런데 이 전승단체도 장시간 연행의 어려움을 이유로 지속적으로 축소공연을 하고 있다. 2007년을 보면, 풍물과 살판, 버너돌리기를 중심에 두고, 어름을 부분 축소하고, 덜미와 덧뵈기는 크게 줄여서 전체 약 2시간 30분에 걸쳐 공연을 실시했다. 원래 탈춤인 덧뵈기는 마당씻이마당, 옴탈잡이마당, 샌님잡이마당, 먹중잡이마당의 4개 마당으로 이루어졌는데, 당시 먹중잡이마당만 보여주고, 나머지는 모두 생략해서 1시간 정도의 공연이 15분만에 마쳤다. 그리고 인형극인 덜미는 1시간 20분 공연을 24분에 끝마쳤으며, 줄타기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최근 내부적 갈등이 심화되어 정기공연을 1시간에 걸친 맛보기식 공연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축소 공연은 궁극적으로 공연의 전승능력을 하락시키고, 전승집단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④ 인물의 새로운 성격 설정
탈춤의 배역은 원래 고정된 것이 아니라 수시로 바뀐다. 과거에는 배역이 1인 다역이었으나, 근래에는 배역이 세분화되고 고정화되고 있다. 최근 전승주도층의 고령화로 인해 세대교체가 시행되는 일부 단체에서 배역이 바뀌면서 등장인물의 새로운 성격 설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봉산탈춤은 기존에 수십년간 주요 인물이 고정되다가 고령화로 인해 새롭게 바뀌고 있다. 주요 배역이 바뀌면서 새로운 성격의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최근 공연에서 말뚝이 배역은 기존의 말뚝이가 보여주었던 저항적 하인역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현실적이고 이중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햇다. 한편 미얄영감역은 능청스러운 캐릭터가 되었고, 신장수는 순박하고 토속적인 보부상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나름대로 인물에 맡는 새로운 성격을 설정해서 다양한 인물의 조화에 따라 보는 재미를 높이고 있다.

영남지역 탈춤에는 수영야류를 제외하고 대부분 문둥이가 등장하는데 지역마다 1인, 또는 5인까지 다양하다. 통영과 고성고광대는 첫째과장에 1인의 문둥이가 등장해서 무언의 춤을 추며, 거제영등오광대와 동래야류에는 2인의 문둥이가 등장한다. 그리고 가산오광대, 진주오광대, 김해오광대에는 투전을 하는 5-3명의 문둥이가 등장하며, 개평꾼인 반신불수 어딩이와 마마에 걸린 그의 아들 무시르미가 등장한다. 여러 명이 등장해서 투전을 하는 문둥이는 다소 부정적 인물로 그려지며, 어딩이는 도박돈을 훔치는 인물로 그려진다.

대체로 1-2인이 등장하는 고성 및 통영오광대는 문둥이가 치유할 수 없는 질병으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여러 명이 등장하는 가산, 진주, 김해오광대는 반사회적인 도박을 일삼는 부정적 존재로 등장한다. 박진태는 가산오광대에서 문둥이 도박에 대해 관대하지만, 어딩이의 도둑질은 반사회적 범죄 행위로 규정하고 있으며, 진주와 가산오광대는 노름꾼과 문둥이를 동일시하여 도박에 대한 극심한 혐오감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정상박은 문둥이는 한(恨)의 표현보다는, 관객에게 웃음을 유발하는 소극화(笑劇化)된 비정상적 인물로 보고 있다. 다만 고성과 통영의 1인 문둥이춤은 천형의 불구의 모습을 한스럽게 표현하다가, 나중에 흥으로 승화하는 인물로 표현된다. 따라서 오광대 내의 문둥이의 성격이 제각각 다른 양상을 보이며, 이를 어떻게 부각시키느냐도 연행자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양상은 문둥이 관련 과장이 전파되는 과정에 각기 다른 형태로 수용되었다는 점을 반영한다.

근래 고성오광대의 이수자가 문둥북춤을 추면서 고통스런 인물의 몸짓과 춤사위를 후반에 흥으로 승화시켜 관객에게 큰 박수를 받은 적이 있다. 문둥이역을 어떻게 설정하고,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한편 중부지방에는 왜장녀라는 배역이 배불뚝이로 등장해서 관객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기존의 양주별산대놀이 1930년본에는 왜장녀가 장삼을 걸머지고 애사당을 데리고 등장하는 인물 정도로 묘사되며, 이두현본에는 장삼을 걸머지고 애사당을 데리고 등장하며 미친년 날뛰듯이 춤을 춘다고 묘사되어 있다. 근래에 왜장녀역은 거대한 체격의 남자 배역이 짧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커다란 배를 노출한 상태에서 현란한 엉덩이춤을 추며 등장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따라서 산대놀이의 왜장녀에 새로 전형적 성격이 설정되어 일반화되면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할미의 인물 설정도 쉽지 않다. 영남지역 할미는 허리를 노출하고 엉덩이춤 추다가 방뇨를 하며, 나중에는 죽는 인물이다. 기존의 할미에서 벗어나 파격적이고 일탈적인 인물이다. 남성 중심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남성의 횡포에 죽어가는 인물로만 단순하게 표현할 수 없다. 행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성격이 설정된다. 동래야류의 할미역을 남자와 여자 전승교육사가 나누어 맡고 있는데, 전혀 다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탈춤에서 인물의 성격 설정과 이에 따라 재담, 춤사위, 소리, 몸짓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는 현재진행형이다.


3. 신명의 본질과 탈춤 신명풀이의 방식

(1) 신명의 개념과 역사적 의미
신명이란 말은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한자어로는 神明, 神命, 身命으로 사용된다. 신명이란 말은 일찍이 『주역』에서 천지를 통하는 팔괘를 음양으로 풀어가면서 “신명의 덕을 통한다”라는 말을 사용되고 있다.

역사적인 문헌에는 신명(神明) 관련 기록이 다수 나타난다. 대체로 천지신명(天地神明)이라 하여 천지에 있는 모든 신격을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되며, 경우에 따라서 천신 또는 조상신, 지신과 곡식 등을 지칭하기도 한다. 따라서 용례를 보면, 주로 “신명이 도우시다”, “신명이 보우하사”, “신명에 통한다”, “신명이 아실 것이다”, “신명이 보살피시다”, “신명이 벌을 내릴 것이다”, “신명께서 내려다 보신다”, “신명을 감동시킨다”, “신명의 경지에 이른다”, “신명의 힘을 빌린다” 등의 표현이 다수 나타난다. 여기에 보면 신명은 받들어 모시는 존재이며, 또한 인간을 보호해주는 존재이고, 인간 심판자의 역할도 하고 있다. 유학 및 민간신앙 등의 다양한 분야와 계층에서 폭넓게 사용했다.

유학자들은 신명을 인간의 마음, 곧 본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조선 중기의 장유는 “사람의 신명(神明)을 심(心)이라 하는데, 심(心)의 체(體)는 성(性)이다”라고 하여 신명이 마음으로 보았다. 이런 견해는 다른 성리자들에게도 두루 나타나, 心之神明, 神明之心의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기(氣)를 신명과 연결시켜 체계화한 것은 19세기 실학자 최한기(1803-1877)이다. 천지에 기(天地之氣)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문헌에 두루 나타난다. 최한기는 천지와 인간 만물의 생성이 모두 기(氣)의 조화에 의한 것이며, 이것은 경험과 오감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하늘이 준 인간의 모든 형체를 신기(神氣)라 했으며, 이런 기(氣)가 운화와 조화를 이루면 신명(神明)이 되며, 양심을 거슬린 잘못된 학문은 신명(神明)을 흐리게 한다고 보았다. 또한 신기는 인간마다 서로 다르지만, 이해가 가능하며,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신기가 감각기관을 통해 서로 통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최한기는 천지만물이 기(氣)의 조화이며, 하늘의 주신 기는 신기(神氣)이고, 이것에 의해 신명이 나온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런 기는 주로 경험과 감각기관을 통해 체득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중요한 것은 하늘이 준 신기(神氣)가 인간과 자연 사이에 감각을 통해 상호 소통 및 확산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신명의 확산과 소통의 근거가 된다.

김지하는 신명을 민중 집단 속에서 성취감과 해방감에 의해 나타나는 생명 에너지로 보고 있다. 그는 최한기의 氣 이론을 수용해서 이것을 생명으로 연결시켰다. 한편 조동일도 최한기의 신기(神氣) 이론을 수용해서 신명이 사람의 기력이고 생명력이며, 누구나 신명을 지니고 있지만 뛰어난 사람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견해로 다시 정리한다. 그리고 최한기의 ‘活動運化之氣’에 최재우의 동학가사의 「검결(劒訣)」에 나오는 신명(身命)과 인내천(人乃天)에 의한 신일합일(神人合一)을 연계짓는다. 따라서 한걸음 나아가서 신명을 투쟁하고 생성하는 것으로 재해석한다. 그는 신기를 신명과 동일시하고, 신명풀이를 신기 발현으로 보며 신명의 변화양상 및 투쟁과 생성에 주목하고 있다.

김열규는 무속의 시각에서 신령을 풀어간다. 무속에서 인간이 신과 어우러져 노는 종교적 체험의 굿판이 민속화되어 사람의 신명을 부추기고, 제의적 광란이 마을공동체 안에 신바람을 피우면서 신명풀이가 된다고 보았다. 이때의 신바람은 인간과 신령의 만남 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도취와 쾌감과 흥분이 밖으로 표현되는 형태이며, 민속화된 신명이 난장판을 형성하는 것이 탈춤의 기본 원리라 주장한다. 그는 무속의 종교적 체험에 나타나는 신명을 민간 공동체 속의 신명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리고 신명을 민간의 신바람과 동일시하며, 신명풀이의 난장판을 탈춤의 원리로 보고 있다.

채희완은 신명을 가무를 통한 현실투쟁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살풀이로 보았다. 삶의 응어리진 한과 고통을 풀어헤쳐 삶에 활력을 주고, 풍자로 대립을 높여 삶의 생산성을 드높이는 투쟁의 무기로 보았다. 이런 살풀이가 절정일 때에 신인융합(神人融合), 성속일여(聖俗一如)에 이르러 초인적 능력을 발휘하며, 이런 예술체험에서 신명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민중적 전형성, 현장적 운동성, 상황적 진실성이 상호 순환관계를 형성하면서 신명이 자극되고 고조된다고 보았다. 그는 신명을 살풀이라는 예술체험과 연관시키고, 이를 다시 현실의 문화운동 차원으로 해석하였다.

전반적으로 신명에 대해 천지의 신격, 인간의 마음 등으로 보는 시각도 하지만, 대체로 천지의 기를 생명력으로 연결시켜, 현실변혁적, 예술적 시각에서 해석한다. 그리고 신명을 억압 받은 민중 집단의 응어리지고 맺힌 한을 풀어가는 과정에 강하게 표출된다고 본다.

신명 논의에서 불가분 수행되는 것이 우리 민족의 한의 정서이다. 우리에게 한이란 기본적으로 슬픔과 고통을 바탕으로 하며, 부정적 속성을 지닌다. 정한(情恨)은 현실의 결핍을 바탕으로 형성된 서러움과 그리움의 맺힌 정서이며, 원한(寃恨, 怨恨)은 외부의 공격과 억압에 의해 이루어진 맺힌 정서로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속성이다.

한을 풀어가는 해원(解寃) 과정에 신명풀이가 이루어지며, 이것이 예술적 창조의 바탕이 된다. 그러나 한을 풀지 못하고 쌓이면 좌절감, 상실감에 의해 우울증, 무기력증에 빠지며 삶 자체에 희망을 갖지 못한다. 한국인이 한이 많다는 것은 한의 속성이 많다는 의미보다는 한을 풀어가는 과정에 한을 많이 표출하기 때문이다. 곧 슬픔을 같이 나누고 아픔을 서로 풀어내는 적극적인 과정 속에 한의 표현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래서 마치 한국인이 한이 많은 민족인 것처럼 인식되었다.

한의 발생 요인은 다양하지만, 심리학에서는 자기 가치의 손상에서 오는 것으로 보며, 부당한 차별, 심각한 상대적 결핍, 현실적 좌절 등이 직접적 원인으로 보고 있다. 이의 해소를 위해 전환적 사건, 우리의식, 자기표현에 의한 신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해마다 지역민이 대거 참여하는 세시적 대동놀이는 구성원들의 감정이나 행동, 다양한 예술적 표현을 통한 적극적인 자기표현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인식하는 우리의식은 공동체 의식을 형성한다. 그리고 집단 참여의 세시적인 놀이, 춤과 노래는 현실적 한을 풀어가는 전환적 사건이 된다. 한의 풀이는 원인 제거가 아닌 전환과 승화의 방법이다. 한이 자기 가치의 손상을 의미한다면 신명은 손상을 입은 자기가치가 회복되는 과정이다. 이를 위한 신명풀이는 집단적인 어울림의 열린 판에서 가무악희의 총체성에 의해 나타난다.

(2) 탈판에서 신명풀이의 방식
탈판의 신명은 가상의 극적공간이면서 동시에 현실의 공간에서 도출된다. 해마다 일정한 시공간에서 민중집단은 신분의 억압, 현실적 결핍, 인간다운 삶에 대한 기원을 춤⋅노래⋅몸짓⋅재담으로 풀어낸다. 근본적으로 탈춤은 고정성이 높아 반복 참여하는 향유자들에게 극적 호기심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다만 민중들은 현실적 고통에 의한 부정적 한을 신명에 의한 해원으로 풀어내는 과정에 부정적 현실을 긍정적 삶의 자세로 전환한다.

탈춤의 신명풀이는 놀이와 극으로 구분된다. 놀이는 다시 앞놀이와 뒤놀이로 구분되며, 본놀이는 극적 성격이 강하다. 앞놀이는 길놀이로서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상호 어우러지는 판놀이 방식이고, 뒤놀이는 시간 제한없는 뒤풀이로 이어진다. 극적 성격의 본놀이는 과장으로 구분되어, 중간에 향유자들이 추임새, 대거리, 허튼춤으로 끼어든다.

탈춤의 신명에 대해 한양명은 놀이형 신명풀이이면서 능동형 신명풀이로 보고 있다. 곧 그는 전문적 예술가가 개입하는 ‘굿형의 신명풀이’와 그렇지 않은 ‘놀이형의 신명풀이’로 구분하고, 굿형을 다시 ‘능동형 신명풀이’와 ‘피동형 신명풀이’로 세분하였다. 또한 신명풀이의 조건을 시공간의 개방성과 여유로움, 맺고 품의 반복과 가속성, 집단성과 육체성, 가무악의 총체성으로 규정하였다. 곧 신명 발현이 기존의 가무악 중심의 집단적 공동체 속의 억압된 생명력의 발현이란 시각을 수용하고, 개방성과 반복성, 육체성 등을 추가하였다. 따라서 신명의 유발 조건을 집단성, 개방성, 반복과 점층성, 총체성(가무악희), 해방성(일탈성), 육체성(직접 참여)으로 규정한다.

신명 도출과 전이방식을 보면, 뛰어난 기능에 의한 연행자로부터의 일방적 도출, 향유자로의 전이, 관중 촉발로 인한 연행자로의 역(逆)전이, 쌍방향 교감에 의한 상호 전이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에는 기예능의 수준, 탈판의 소통방식, 상호간의 친화력, 공연 성격과 소통방식, 개방적 공연장 여부, 공연시간(낮과 밤), 뛰어난 기획력 등이 좌우한다.

현재의 시점에서 탈춤이 신명풀이의 장으로서 어느 정도 기능을 하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탈춤의 공연화, 대형 축제화, 내용의 고착화 속에서 현실성을 상실하고, 내용과 연희요소의 상호교감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신명의 도출은 어렵다. 따라서 현재의 탈판은 전통에 대한 호기심을 지닌 소극적 구경꾼들에게 일회성 관람만을 유도할 뿐이다.

더구나 최근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신명의 놀이, 신명의 축제가 현재도 필요한가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곧 현대는 제의성이 사라지고 변혁과 해방을 상징하는 신명풀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시각이다. 광란의 축제나 신명의 축제는 전근대적인 것으로 심리적, 정신적 안정을 추구하는 현대인에게는 웰빙과 힐링, 건강⋅치유의 축제가 각광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제 신명은 해체되고 파편화되어 대중문화 속에 깊숙이 들어와 오히려 게임, 영화, 스포츠, 유흥문화가 이를 대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현대에 왜 집단적 신명풀이가 필요한가에 대한 해답이 나온다. 현대인은 공동체에서 벗어나 개인주의를 추구하지만, 이것이 현대인에게 인간소외, 자기포기, 타인 가치 경시의 사회상을 일으키고 심리적 불안감을 일으킨다. 개인은 자유로운 삶의 추구에 의해 공동체로부터의 벗어나려는 심리도 있지만, 오히려 공동체를 통해 개인의 삶의 정체성과 가치를 찾으려는 경향도 내재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집단적 대동놀이나 신명풀이의 축제는 그 중요성이 더 커진다. 이것은 스포츠나 개인 중심 여가생활로 대치할 수 없으며, 오히려 집단적 놀이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자기 생명력을 확인하는 소중한 기회가 된다.

궁극적으로 탈판의 신명 도출은 공유되지 않는 탈판에서 쌍방향 소통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로 집약된다. 놀이적 성격을 살려, 앞놀이와 뒤놀이를 어떻게 살리느냐에 있다. 일부 단체에서 강강술래 방식의 뒤놀이를 시도하여 관객을 적극 끌어들이고 있다. 또한 탈춤에는 현대에도 공감과 흥미를 살릴 수 있는 요소는 존재한다. 언어의 유희를 통한 해학적 표현, 개성적 인물의 성격 부각, 비정상적 외모의 인물의 역설, 현실의 전도와 저항적 인물형, 화려한 기예능과 극적 전개 등이 있다. 근래에 할미, 애사당, 이매 등의 특정 인물이 탈판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개성적 인물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킨 결과이다. 또한 이에는 인물 설정과 극적인 조화, 즉흥성 등을 통해 현대인의 억눌린 생명력을 끌어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2022. 10.
사진제공_사)민족미학연구소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