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해외춤기행_ 동아프리카(3)
탄자니아 역사문화와 동아프리카 부족춤
이병옥_춤이론. 용인대 명예교수

 마사이족에 밀려 산속 땅굴에 사는 차가족 마을과 킬리만자로

 동아프리카 여행 6일째(1월10일) 6시 기상하여 조식하고 7시 반에 중형버스로 짐은 지붕 위에 싣고 케냐를 떠나 탄자니아로 가는 대장정에 올랐다. 12시에 탄자니아 국경에 도착하여 비자 발급(50불)을 마치는데 2시간이나 걸려 2시에 출발하였다. 4시간 만에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MT.Kilimanjaro, 5896m) 등정을 준비하는 거점도시 모시(Moahi)의 YMCA호텔에 도착하였다. 장장 11시간이나 걸린 장시간 버스여행이라 모두들 지쳤다.



 



 1월 11일 7일째 아침 6시 반에 호텔조식으로 가볍게 해결하고 킬리만자로 등정팀(140달라)과 수영 및 휴식팀, 씨티투어팀(50달라)에서 선택하는데 나는 씨티투어팀, 4명이 합류하였다.
 킬리만자로 등정 입구인 마랑구(marangu, 1970m) 게이트에 가까이 올라가니 바나나나무숲을 이루고 있는 밀림지대가 나타났다. 협곡에 폭포가 있어 절벽 같은 흙 계단을 한참동안 꼬불꼬불 내려가니 폭포가 보였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협곡밀림 속의 진풍경이었다. 다시 올라오는 길에 차가족들이 가내농업으로 바나나와 커피를 경작하는 곳을 들러 잠깐 살피고 차가족(Chagga족-농업, 커피, 사이잘삼(麻), 사탕, 옥수수, 바나나) 동굴 속 생활을 볼 수 있었다. 200년 전 마사이족들이 쳐들어와 소와 사람들을 노예로 끌고 가기 때문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 숨어살게 되었는데, 방과 부엌, 곡식 창고와 외양간 등과 죽은 가족들을 조상신으로 모시고 목각 모습으로 세워 놓고 영원히 함께 사는 것처럼 살고 있었다. 그 길이가 몇 km씩 연결되어 있고 중간 중간에 지상으로 통풍구를 뚫어 공기와 햇빛을 받고 살았다고 한다. 또한 지상에는 차가 하우스라는 삼각형 움집에 나무에 바나나잎과 풀잎을 얹어놓고 살고 있었다. 이어서 킬리만자로(아프리카 대륙에서 최고 높이, 세계 다섯 번째 높이. 뜻은 ‘빛나는 산’ 혹은 ‘하얀 산’) 등정의 관문인 1800m 위치에 있는 마랑구 게이트에 다다라 소풍처럼 도시락을 먹고 기념촬영을 하고 오후 4시경에 숙소로 돌아왔다.

 

 




 옛 수도 다르에스살람에서 환상의 잔지바르섬으로

 1월 12일(8일째) 7시30분 모시(Moahi) YMCA호텔에서 탄자니아 옛 수도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 평화의 땅. 현 수도: 도도마Dodoma)으로 12시간을 버스로 달려왔다. 터미널 공용버스임에도 비용을 더 주니 다른 아프리카 승객이 있음에도 호텔까지 와서 짐까지 실어주었고 다르에스살람 터미널에서도 승객을 내려주고 팁의 위력으로 우리의 숙소 이코놀로지(Econolodge)호텔까지 데려다주고 갔다. 리무진 장거리 대형버스로 아래층 짐칸이 커서 승객들은 2층 버스를 탄 기분이었고 아프리카에 와서 처음 에어컨 혜택을 맛보았고 승차감도 좋았다. 그런데 이코놀로지호텔은 우리 예전 여인숙 수준으로 5층은 옥상층이라 밤12시가 되어도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열대야가 심했다. 하는 수 없이 일층 로비로 내려오니 모두들 쇼파에 앉아 카톡을 하고 있었다.
 1월13일(9일째) 7시30분에 식사하고 짐정리를 다시 하면서 배낭여행은 배낭은 큰 것으로 하고 여행가방은 대형 아닌 것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사이마라 국립공원 갈 때도 첫날 나이로비 썬라이즈(Sunrise) 호텔에 큰 가방은 맡기고 배낭에 3일 동안 외출분을 나눠 들고 가야해서 공간이 부족했는데 역시 다르에스살람에서도 큰 가방 맡기고 작은 배낭으로는 한계가 있어 먹거리와 옷 종류를 별도로 비닐 백에 담아 물 끓일 포트까지 담아들고 나섰다. 페리호를 타고 잔지바르(Zanzibar: 검은 해안)로 떠나기 전에 환전하는데 40도가 넘는 폭염으로 육수가 줄줄 흘렀다. 페리호 승선 11시30분까지 1시간이 남아 일행 몇몇이 해변 씨푸드 시장으로 택시타고 나가 오징어를 사서 데쳐 아주 맛있게 먹고 승선했다. 엄청 더워 쓰러질 지경이었지만 생전에 이렇게 맛있는 데친 오징어 별미가 그나마 위안이었다.
 이윽고 잔지바르에 도착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에 햇볕에 나갈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숙소배정을 마치자 바닷가로 나갔다. 여기저기에 씨푸드 노점상들이 눈에 띄었다. 문어, 갑오징어, 소라, 게 등을 즉석에서 구워 팔고 있어 문어를 주문하고 사탕수수를 즉석에서 수동기계로 짜내는 주스를 사먹었다. 그리고 즉석에서 구워 만든 문어피자를 먹으니 고소한 버터 맛에 한 끼 밥이 되었다.

 

 




 잔지바르 노예무역전시장과 잔지바르 전통춤 공연

 1월14일 10일째를 맞았다. 오늘은 잔지바르의 식민지시절 노예감옥소와 노예로 팔려나가던 슬픈 역사를 간직한 프리즌섬(Prison island)에 배를 타고 나갔다. 인도양의 쪽빛바다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석양에 해떨어질 때까지 시원함과 씨푸드를 만끽했지만 오늘도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바다 속을 쳐다보며 일행은 작은 섬 모래사장에 내렸다. 먼저 바다거북과 공작새가 서식하는 곳에 가니 백오십년 이상 된 대거북(Giant Tortoise)부터 어린 거북까지 수많은 거북이들을 사육하고 있었다. 짝짓기를 하면서 내는 소리가 공룡소리 같았다.
 노예감옥소와 쇠사슬 고문장과 경매장, 곧바로 바닷가로 승선시켜 팔려나가던 부둣가가 슬픈 아프리카인들의 역사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잔지바르로 배를 타고 돌아와 바오밥나무 그늘아래 식당이 사람들이 많아 찾아와 먹는 차이니스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식후 프리즌 박물관에 가서 노예의 역사와 생활, 문화 등 사진과 그림을 곁들인 전시관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역경 속에서도 꿋꿋이 생존하며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지켜온 내력이 전시되어 아이러니한 그들만의 자존감마저 느꼈다. 다시 스톤타운(Stone Town)이라는 미로의 집들과 상점들을 둘러보다가 예전 성곽 안에서 공연이 있다하여 5 달러를 내고 공연을 관람하였다.
 〈zanzibar school of acrobatic sports〉단의 주최로 잔지바르 음악과 전통춤, 그리고 아크로바틱 조립체조와 텀블링, 무술대련체조 등이었다.
 


 



 1월15일(11일째) 조식 후 9시 셔틀버스로 능귀(Nunggui)로 출발하였다. 해안도로를 따라 1시간 30분 달려온 능귀는 유명한 휴양지로 에메랄드빛 바다와 백사장과 별장들이 즐비하였다.
 드디어 일행들은 수영복차림으로 백사장에서 돛배를 타고 처음엔 엔진으로 출발했다. 한참 해안선 따라 절경을 감상하고 물안경, 구명조끼, 오리발을 착용하고 바다 속으로 풍덩풍덩 빠져 물고기들을 관찰하며 수영을 즐겼다. 돌아오는 길에는 돛을 내려 낙조에 낭만이 깃들어 모두 숙연해지고 있었다. 올드 팀들만 모여 유명한 씨푸드 맛집을 찾아나서 랍스타와 킹피쉬 등과 맥주와 와인을 곁들여 늦은 저녁을 즐겼다. 오늘은 아프리카 여행 중 가장 여유있고 낭만적인 하루를 즐겼다.



 탄자니아 국립박물관과 부락박물관의 부족춤

 1월16일(12일째) 10시에 다시 잔지바르로 셔틀버스를 타고 떠나 중간쯤에 스파이스 농장에 들러 여름과일, 향신료 재배농장 견학과 향내체험을 하고 과일시식에 이어 식사에서도 다양한 과일을 나눠줘 먹고 식사도 맛있게 먹었다. 다시 출발하여 2시 잔지바르 선착장에 도착하여 고속페리 티켓을 받아 입국사증을 받고 기다렸다가 승선하였다. 같은 국내에서 입국사증을 받는 것은 현재의 탄자니아로 탄생하게 된 1964년 이전에 탕가니카(수도 다르에스살람)와 잔지바르가 각기 독립국가에서 통합한 역사의 잔재로 남아있는 것이다.
 다르에스살람에 도착하자마자 몇 명만이 탄자니아 국립 박물관으로 향했다. 역시 탄자니아 동물화석과 인류진화를 밝혀주는 인류화석, 그리고 수많은 암각화와 노예매매로 끌려가고 핍박받던 시기의 자료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었다.

 

 




 1월17일(13일째) 30도가 넘어 찌는 듯한 여름 날씨는 일행들의 행동반경을 위축시켜 휴식이나 가볍게 재래시장을 다녀오는 정도로 오전 일정을 마치고 시내근처에 부족춤도 보여주는 부락박물관이 있다하여 주소를 가지고 몇몇이 택시를 타고 나섰다. 하지만 주소지에는 부락박물관(Village museum)이 없어진지 오래고 외곽 멀리 옮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되돌아왔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동아프리카 마지막 여정을 그냥 끝낼 수 없는 아쉬움이 뇌리 속에 맴돌고 있어 다시 용기를 내어 혼자서 새로 찾은 주소를 가지고 입장료보다 열배나 많은 택시비를 지불하면서 부락박물관을 찾아갔다. 허름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박물관이지만 별도공연비까지 지불했다. 박물관 내부와 소수부족 가옥을 민속촌처럼 전시한 마당 한구석에는 가족팀 같은 공연자들이 반주악기를 설치하고 이동식 플라스틱 간이의자를 원으로 배치한 가운데 앉았다. 관객은 나 혼자지만 캠코더와 사진촬영 준비를 마치니 드럼과 실로폰 반주에 맞춰 광란의 요동춤을 추기 시작한다. 한참을 보고 있을 때 서양인 관객들이 10여명이 입장하여 함께 감상을 하였다. 한 가족들이 다양한 춤을 선보이기는 하는 것 같지만 여러 부족의 특성을 찾아볼 수 없는 춤들이어서 아쉬웠다.
 


 



 1월18일 23명중 30일간 여행팀 18명은 기차로 서아프리카와 빅토리아폭포와 남아공 희망봉을 거쳐 귀국하는데 중간 귀국자 5명은 다르에스살람 공항에서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국제공항에서 환승하여 19일(15일째) 저녁7시25분에 인천공항으로 귀국하였다.




 동아프리카 춤의 특성

 동아프리카 춤은 다른 지역 춤보다 동작이 폭발적이고 격렬함이 특징이다. 그들의 외향적 문화기질을 잘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 남성들의 뜀뛰기춤, 발차기춤, 여성들의 전신요동춤, 엉덩이춤 등이 동아프리카의 춤 패턴에 속한다. 또한 동아프리카춤의 반주악기는 아주 다양하지만 그중 타악기 종류가 가장 많으며 복잡한 리듬과 2박자와 3박자의 중복되는 리듬도 많아 아프리카 춤의 리듬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아프리카 춤의 일반적인 특징은 빠른 비트의 타악반주와 광란에 가까운 몸짓으로 흥미진진하며 원초적인 무형식으로 표현이 다양하고 풍부하다. 춤의 근원적 특성도 활력과 삶을 고양시키는 수단과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는 부족 간의 적대적인 환경과 맹수와 수렵의 위험 속에서 삶을 보호하고 삶을 증대시키는데 주로 관여한 부족민들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원래 춤이란 사회적 문화적 연관뿐만 아니라 신앙과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춤은 한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동시에 그 집단의 사회구조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연결고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아프리카 춤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축제에는 사냥, 수확, 출생, 성인식, 결혼, 질병과 치유, 죽음 등이 포함된다. 중요한 축제나 의식 때 아프리카 부족들의 춤에는 트랜스(trance) 또는 심할 경우 엑스터시(ecstasy) 지경의 열광적인 주술적 샤머니즘적 춤에서부터 장례식 때의 차분한 춤까지 다양하다. 그리하여 중앙아프리카 수도 방기지방의 반다족 가자(gaza)춤은 소녀들의 성인식 때 한데 어울려 격렬한 동작으로 트랜스에 이르기까지 장시간 계속 춘다. 또한 베냉 솜바(somba)족의 풍년제 ‘쿠브워티(kubwoti)’는 마을의 청년들이 농사와 관련한 여러 가지 형태의 상징물을 머리와 등에 걸치고 나무껍질에 붉은 칠한 옷으로 치장하여 흥겹게 춤을 춘다.
 또한 다산, 성공적인 사냥, 비, 풍작 등 희망적인 춤들은 기우제의 레인 댄스(rain dance)에서처럼 일반적으로 상징적 주제와 부합되는 모방적인 춤 패턴을 포함하고 있다. 춤들의 일부 혹은 전부에 나오는 기본적 패턴(pattern)은 추상적(abstract)이거나 모방적(mimetic)인 것이다. 많은 춤들은 단순히 사회적 표현 충동과 움직이고 리드미컬하게 운동하고 스스로 즐겁게 하려는 집단적인 욕구로부터 기인한다. 그래서 저녁에 중부 아프리카의 음부티(Mbuti) 피그미족은 북을 치고 동시에 한발 한발 뛰며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밤새껏 춤을 춘다.

 

 




 동아프리카 마사이족 문화와 춤

 마사이족이란 좁게는 케냐와 탄자니아에 걸쳐 있는 그레이트 리프트밸리 지역에 사는 유목 마사이족을 말하나, 넓게는 케냐의 삼부루족, 탄자니아에서 반유목생활을 하는 아루샤족과 바라구유족도 포함해서 나타내기도 한다. 이들은 남자 중심의 사회이며 모든 씨족은 남자들이 우선권, 결정권을 가지고 움직인다. 또한 일부다처제로서 씨족외혼이 이루어지며 같은 연령집단에 속한 남자들끼리 아내를 빌려주는 풍습(Swapping)이 있다.
 마사이족과 가축과의 관계는 탄생신화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은가이(Ngai, Enkai)와 킨동오이(Kindongoi)라는 신이 하늘나라에서 마사이족을 지상으로 내려 보낼 때 소와 양, 염소를 같이 내려 보냈다는 것이다. 소를 중시하는 마사이 전사는 소를 약탈하고 다른 종족으로부터 이를 지키는 것이 임무로 긴 창으로 상대를 위험하며 용맹함을 과시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마사이족은 타고난 전사로서 호전적이고 용맹해서 노예상인들에 끝까지 저항하여 죽거나 죽이거나 하자 마사이족 노예사냥을 포기했기 때문에 마사이족이 노예로 끌려간 경우도 거의 없었다.
 보통 마사이족의 남자들은 열두 살에 이르면 할례와 성인식을 치른다. 그리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병사촌에 들어가 일정 기간 창과 칼로 야생동물을 잡는 방법, 소를 기르는 방법 등을 배우며 부족을 지키는 전사로 태어난다.
 오늘날 마사이족이 정착생활을 하면서부터 남자의 성인식이나 여성의 할례, 다른 부족의 가축 약탈 등의 전통은 많이 사라져 가고 있다.

 

 



 마사이족의 전사들을 '모란(Moran)'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에게는 가사를 면제받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지만, 마을에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즉시 모여야 할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도 나가야 한다.
 케냐나 탄자니아 마사이족 남성들은 막대기를 들고 차례로 돌아가며 하늘 높이 뛰면서 춤을 추고, 여자들은 무릎만 살짝 구부린 채 춤과 노래를 부른다. 남자들이 껑충껑충 하늘로 뛰는 춤을 추는 데에는 용맹을 과시하면서 하늘과 가까워지려는 염원이 깃들어 있다. 남성미를 과시하여 여자를 유혹하기 위한 몸짓이라고도 한다.
 젊은 전사들의 점핑춤(adumu, 또는 aigus)은 일렬로 투스텝으로 전진하며 원무로 돌다가 멈추고 한두 명이 점프를 시작하기 위해 중앙으로 들어가 점핑춤을 추는데 발뒤꿈치가 땅바닥에 닿지 않게 춘다.
 은노토(Eunoto)는 10살 또는 그 이상에서 전사의 성인식에서 행하는 노래와 의식춤이다. 이때는 젊은 여자들도 가장 화려한 의상을 입고 함께 추며, 전사(moran)의 어머니들도 아들의 용기와 대담성을 찬양하며 노래하고 춤을 춘다.
 젊은 남녀들의 집단춤은 서로 줄을 서서 부드러운 저음으로 "하 우아"라고 내뱉으며 하체를 밀어냈다 당긴다. 여자들은 남자들 앞에서 서서 골반을 튀게 하고, 남자들과 대등하게 “오이 요요”라고 화음으로 맞춘다. 노래를 부르며 숨을 내쉴 때 머리를 앞으로 기울였다 들이쉴 때 뒤로 살짝 젖히며 가벼운 목춤을 춘다.

 

 




 동아프리카 춤기행 후기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내내 인류역사 700만년의 여정을 겪으면서 생사의 갈림길을 넘고 넘어 포식자인 현생인류(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한 요람의 땅이었는데 오늘날 궁핍한 원시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래서인지 아프리카의 춤과 음악은 원시시대처럼 생존의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사냥 나가기 전에 사냥성공을 기원하면서 절실하게 수렵춤을 추었고, 사냥성공 후에는 배고픔을 해결한 기쁨의 춤을 추고 노래 부른 것도 알 수 있었다.
 아프리카의 미래는 어두운 것만은 아니었다. 광활한 대자연과 자연 그대로의 동물들, 원시춤과 음악, 무궁한 가능성을 지닌 젊은 대륙 같은 긍정적인 요소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해주었던 마력의 힘을 지닌 그들만의 다양한 춤과 음악이 있었기에 아프리카에 대한 동경과 친근함을 느꼈다.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인 미지의 세계는 한층 더 새롭게 다가왔으며 기회만 된다면 또다시 문화탐사를 가고 싶어졌다.

 

  

 

​이병옥
용인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25년간 재직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다 정년퇴임 종신 명예교수이다. 한국무용사학회와 한국동양예술학회, 한국공연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경기도와 서울시문화재위원을 거쳐 현재 이북오도청 문화재위원이다. 1985년 객석 예술평론상을 수상, 무용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7. 05.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