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broad

독일 보훔 현지취재_ 안무가 보리스 샤마츠의 신작 〈manger〉
도발적 구성으로 유럽 무용계에 돌풍
정다슬_<춤웹진> 유럽 통신원

 프랑스 출신의 안무가이자 무용수인 보리스 샤마츠 (Boris Charmatz)는 날카롭고 분석적인 작품으로 순수 예술과 철학의 영역에 가까이 접근하는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2009년 발표작인 〈Roman Photo〉 〈Flip Book〉 〈Levée des conflits〉(Suspension of conflits) 등은 세계 여러 도시들과 페스티벌에서 공연되었고, 이내 그만의 작품 전개 방식으로 세계 무용계의 이목을 끌었다.
 샤마츠의 활동은 안무가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다수의 즉흥 요소들을 개발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였으며, 어린이, 학생들과 함께 워크샵도 적극적으로 꾸려나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스프링 페스티벌, 뉴욕 모마 등에서 자신의 전시를 열기도 하였고, 현대무용에 대한 책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프랑스 안무가인 제롬 벨과 함께 〈Emails 2009-2010〉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도시 렌(Rennes)에 위치한 Musée de la danse (Centre choreographique National de Rennes et de Bretagne) 의 예술감독 직을 맡고 있다. 그는 예술감독직을 수락함과 동시에 이곳이 ‘춤을 위한 박물관’이 될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으며, 이후 Musée de la danse는 장르를 막론하고 새로운 형식의 예술을 만들어 가고 있는 예술가 및 연구가들을 정기적으로 초청하여 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렇게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보리스 샤마츠에게 결국 모든 것은 ‘춤’으로 귀결되어 있는 듯하다. 그가 어떤 영역에서 작업을 하건 그것은 반드시 춤과 관련된 무엇이다. 그리고 그는 신작 〈manger〉(2014)에서 ‘먹는’ 활동을 춤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작품은 2012년부터 독일의 국제 공연 페스티벌 루르트리엔날레(Ruhrtriennale)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매년 꾸준히 신작을 선보인 그가 올해 창작한 작품이다.

 




 ‘먹는’ 행위를 춤으로 만든 2014 루르트리엔날레 신작 〈manger〉

 〈manger〉는 불어로 ‘먹다(eating)’라는 뜻을 지닌다. 그리고 그 제목만큼 작품의 내용도 간결하고 선명하다. 캐주얼한 차림으로 관객석에서 무대로 담담히 걸어 나간 14명의 공연자는 ‘먹기’를 시작한다. 그들의 먹는 행위는 작품이 진행되는 1시간 동안 단 한 순간도 멈출 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먹고 있는 것은 음식이 아닌 ‘종이’이다. A4 크기의 종이는 공연자들에 의해 찢겨지고, 녹여지고, 씹혀지고, 먹어지며 소화된다. 보통 종이와 다르지 않아 보이는 조각들이 입으로 들어가 잠시 머물다 사라져버리는 모양새는 꽤나 특이하다.
 아주 일상적인 행위인 먹기와 그 대상이 종이라는 특이 요소가 만나 관찰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은 자연스레 입으로 시선을 끌고 간다.

 



 작품 초반부 무용수들은 마치 몸이 녹아내리 듯 천천히 하강한다. 그들은 바닥에 누워서도 끊임없이 먹고 소화시킨다. 이런 독특한 광경은 관객에게 어색함을 안긴다. 일상생활에서 타인의 먹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는 우리는 비록 그것이 무대 위에서 벌어진다 할지라도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불편함까지 느끼게 된다.
 샤마츠는 관객이 이런 광경을 바라보게 함으로서 일상적 행위에 대한 의식의 환기를 제시한다. 그는 사람들이 텔레비전 앞에서 자신들이 먹고 있는 것을 감자칩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뉴스를 먹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텔레비전 앞에서 삼키고 있는 것은 뉴스이며 현실인 것이다.
 한 시간의 공연 동안 한 명의 무용수가 먹는 종이의 양은 대략 15장에서 17장이다. 그들은 종이를 먹고 소화시키며, 그 위에 얹어진 현실 세계도 함께 소화시킨다. 현실을 삼켜버리고 눈앞에 보여지는 뉴스를 소화시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그것을 마주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샤마츠는 이러한 도발적 작품 구성과 광경을 무대 위에 올림으로서 종이와 그 위에 쓰여진 것이 사라지는 것은 결국 우리가 그것을 삼키고, 원하기 때문이라고 또렷이 이야기한다.

 



 〈manger〉에서는 녹음된 음악이 재생되지 않는다. 대신 무용수들이 끊임없이 소리를 낸다. 언뜻 듣기에 그것은 특정 음악이나 리듬이 아니라 무의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의성어의 형태로 들려온다. 하지만 사실상 무용수들은 베토벤의 ‘심포니 7’와 Morton Feldman의 ‘Three Voices’ 등 클래식, 현대음악, 락, 테크노 비트를 허밍으로 변환시킨다. 불투명한 청각의 자극은 종이가 만들어 내는 소리, 그것을 무용수들이 끊임없이 먹는 소리와 섞어져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분위기를 표현해 낸다.
 작품이 후반으로 치달을수록 무용수들의 행위는 점점 복잡한 구조를 띄어나간다. 그들은 누운 채로 종이를 먹고, 종이를 씹으며 노래하고, 입에 종이를 가득 물은 채 춤을 춘다.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세 가지 행위-먹기, 노래하기, 춤추기-가 무의식 상태로 혹은 의도적으로 의식을 배제시킨 채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다.
 샤마츠는 무언가를 먹는 동안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에 대한 관심도 빼놓지 않았다. 무용수의 몸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그는 고전적인 형태의 움직임이나 몸이 아닌, 갈비뼈가 어떻게 팽창하고 수축하는지, 먹는 동안 손이 어떤 형태를 하고 있는지 관찰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용수들이 자신의 몸을 먹는 것으로 이어진다. 사실상 먹기가 불가능한 몸이지만 손가락을 빨고, 팔뚝을 잘근잘근 씹고, 발가락 사이사이를 핥으며 무용수들은 몸이 먹어지는 행태를 그럴 듯하게 표현해낸다.

 



 보리스 샤마츠는 “사람들이 먹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미적 관찰의 독특한 형태이다. 먹는 것은 전혀 스펙타클 하지 않으며 보여지지 않는 과정이다. 동시에 그것은 숨겨지지 않는 행태이며 상징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나는 그 모순에 주목했다.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먹기는 이제까지 안무 요소로 활용되지 않았고, 나는 먹기를 통해 근본적인 사라짐의 과정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말처럼 무대 위에 뒹굴던 흰 종이들은 작품이 후반부로 치달을수록 서서히 사라진다. 마침내 종이는 사라지고 거기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들만이 나뒹굴 뿐이다. 보통 예술 작품에서 음식이 특정한 의미와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오브제로 활용되는 것에 반해, 샤마츠는 그러한 기존의 방식을 전복시키며 안무의 공간을 넓히는데 성공한 듯하다.
 굉장한 움직임이나 무대 효과가 없이도 관객은 한 시간 동안 먹는 것을 바라보고 무언가가 사라지는 경험을 함께 함으로서 그의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받는다. 오브제로서의 음식이 아닌 그 반대에 놓여있는 먹기에서 사라짐과 소화되는 것으로 발전되는 작품은 우리가 어떻게 현실을 소화하고 있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기 충분했다.
 독일 출신의 무용수인 레나 플라익은 공연 직후 “끊임없이 먹기와 노래가 행해졌고 그것만으로도 볼거리는 충분했다”고 말했다.




 미술과 무용영화의 경계 넘나든 비디오 인스톨레이션 〈Levée〉

 올해 루르트리엔날레 페스티벌에서 보이츠가 선보인 것은 무용 작품만이 아니다. 다방면에 대한 그의 관심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그는 자신의 이전작 〈Levée des conflits〉(Suspension of conflits)을 바탕으로 한 비디오 인스톨레이션 〈Levée〉를 선보였다. 이미 여러 번 보리스 샤마츠와 작업을 함께 한 프랑스의 영화감독 체자 바이씨에 (César Vayssié) 와 다시 손을 잡았다.
 보리스 샤마츠는 〈Levée〉를 통해 다시한번 춤과 비주얼 아트, 철학의 연결고리를 탐구하였다. 미술, 다큐멘터리 무용 영화의 경계를 자유로이 오가며 특정 장르로 분류되길 거부하는 작품은 마치 미로와도 같다. 한눈에 담을 수 없는 25가지의 제스처들이 동시에 진행되며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독일의 도시 보트롭에 위치한 할데 하니엘은 분화구와 같은 형태의 독특한 장소로서 이곳에서 촬영 된 필름은 넓은 공간에 매몰차게 불고 있는 모래바람과 제스처를 반복하는 무용수들 사이를 뚫고 지나간다.
 샤마츠는 특이한 형태의 공간과 상황에 춤을 던져 놓음으로써 보는 이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기법을 활용하였다. 24명의 무용수들은 모래 바람 속에서 지쳐가면서도 끊임없이 제스처를 반복하고 그들의 사투는 몸들이 배배 꼬아지고 나서야 마무리가 된다. 구겨진 몸의 형태는 춤의 형태로 다가오는 대신 장소와 상황과 맞물려 독특한 이미지로 해석된다.
 카메라는 이 모든 것을 뚫고 지나가 마침내 모든 것을 지켜볼 수 있는 앵글로 변환된다. 그리고 관람자가 보게 되는 것은 보리스 샤마츠가 만들어 낸 개념의 파편이다. 보리스 샤마츠는 〈Levée〉를 통해 무대 위가 아닌 건축에 춤을 얹었고, 그것은 다시금 카메라와 필름 기법 등을 통해 재해석되어 춤이라는 장르의 유연한 가변성과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보리스 샤마츠는 그의 모든 작업들에서 자신에게 장르라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하지만 동시에 춤에서 시작하거나 춤으로 귀결되는 그의 작업을 통해 샤마츠의 관심이 여전히 춤에 놓여있는 것을 확인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춤은 순수예술의 관점에서 보자면 비물질적인 것이다. 특정 형태로 고정되지 않는 움직임이 그러하다. 하지만 반면에 무용수가 발목을 다치면 점프를 뛸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춤은 매우 물질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국 식탁이나 조각들 등의 물질들에 비교하자면 춤은 꽤 비물질적이다. 내가 움직임을 만들고 그것을 행하는 순간 그것은 이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예술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좀 더 명확한 표현의 형태를 탐구하고 싶다”고 말한다.
 보리스 샤마츠의 확고하면서도 유연한 무용 철학과 개념, 탐구력은 오늘날의 컨템포러리 댄스 신에 많은 무게감을 실어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앞으로 그가 춤에 또 어떠한 연결고리를 만들어 낼지 주목된다.

2014. 10.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