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재외 활동 무용가 초청 좌담
국외에서의 모든 것을 국내에서 쏟아놓으려는 아름다움

김남진_댄스시어터 창 

오재원_브레멘국립무용단(독일) 

김남경_ 피에트라 갈라 컴퍼니(프랑스) 

원진영_바젤 발레단(스위스) 

사회 진행: 이지현_춤비평가

일시ㆍ장소: 2011. 7. 21. 카페 모차르트(서울 대학로) 






사회
: 이렇게 자리해주셔서 감사하다. <2011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초청공연>에 출연하신 두 분 김남경씨와 원진영씨, 해외에서 활약하다가 국내로 들어오신 대선배님 김남진씨와 브레멘 무용단원 오재원씨가 함께해 주셨다. 먼저 독자들을 위해서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김남진: 저는 프랑스국립현대무용단, 벨기에 세 드 라베(C.de la.B)무용단에서 활동하고, 2006년도에 한국에 와서 댄스시어터 창을 만들어 국내외활동을 하고 있다. 1995년에 프랑스로 건너가서 2006년에 귀국했다. 

 

사회: 대표적으로 활동한 무용단은?

 

김남진: 벨기에 세 드 라베무용단에서 셰르카위와 함께 작업했었다. 울티마 베즈와는 스케줄이 안 맞았고 그가 셰르카위를 소개해줬다. 그리고 프랑스 렌느 국립현대무용단에서 활동했다. 

 

원진영: 저는 한국에서 선화예중,․예고 나와서 스위스 로잔 콩쿨 입상을 계기로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 주니어 컴퍼니(이하 NDTⅡ)에서 연수1년 하고 그 기간 중 오디션에 합격하여 NDTⅡ에서 3년 간 활동했다. 지금은 스위스 바젤 컴퍼니에서 2년째 활동 중이다. 

 

김남경: 저는 부산예고와 한예종 창작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몽펠리에 국립 안무센터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2004년도부터 댄서로서 피에트라 갈라 무용단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오재원: 저는 한성대 나왔고 지금 독일 브레멘 탄츠 테아터에 있다. 처음에는 독일 폴크방 학교를 1년 다니고, 졸업 후 몇몇 무용단에서 1년 프로젝트를 하고 부퍼탈에서 3년 6개월 정도 있었다. 이후에 10개월 동안 샤샤 발츠의 프로젝트를 했다. 99년 여름에 (독일로) 나갔으니 12년 정도 해외에 있었다. 브레멘에 입단한지는 5년 정도 되었다. 

 

사회: 남경씨와 진영씨는 이번에 <2011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초청공연>에서 훌륭한 작품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남진씨는 이미 오래전에 이 공연에 참여했었고, 재원씨는 내년에 무용단과 함께 국내에 소개될 예정으로 알고 있다. 성공적으로 해외 활동을 한 여러분들에게 우선 박수를 쳐주고 싶다. 오늘 이 자리는 소중한 각자의 경험을 듣고, 국내의 후배들과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되고자 마련하였다. 풍성한 얘기 부탁한다. 남경씨는 이번 공연에서 본인안무의 솔로작품을 공연했는데 굉장히 흥미로웠다. 무용수로서 뿐 아니라 본인작품을 해외에서 공연한 적이 있나? 

 

김남경: 그 작품은 이번에 처음 만든 것이다. 앞으로 안무를 계속 하고 싶어서 이를 시작으로 계속 작품을 만들 생각이다. 이번 공연의 페스티벌적인 성격상 60분짜리 작품을 다 보여드릴 수 없어서 뒷부분의 10분 정도만 보여 드렸다. 꾸준히 소개 중이고 몇 군데 초청을 받았다. 

 

사회: 이 공연이 새로웠던 건 해외무용스타 공연 중에서 대부분의 발레 작품 중, 음악도 거의 없이 바닥 치는 소리나 신음 소리로 무대를 이끌어나가는 가 파격적이었던 거 같다. 

 

김남진: 나도 2006년도 이 공연에 참여했었는데 그때도 난리가 났었다. 케찹 뿌리고 침을 뱉고 해서 많이들 안 좋아하셨을 거다.(웃음) 

 

사회: NDTⅡ는 국내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무용단인데 진영씨는 그곳을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나.


끊임없는 도전이 해외 진출 도와

 

원진영: 학교 다닐 때 일주일에 한 번 뿐인 현대무용 수업시간이 재밌었다. 해외 콩쿨을 나가면 발레 클래식이라도 모던작품 하나는 가지고 참가해야 하는데, 그런 모던작품을 준비하면서 춤이 재밌게 느껴졌다. 로잔 콩쿨도 처음 참가할 때는 잘하고 싶다는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다. 한번을 그렇게 혹독하게 겪고 나니 재밌게 춤추고 싶었다. 그래서 두 번째 참가할 때는 마음을 비우고 즐기는 게 목표였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춤을 추니 결과도 좋았다. 그 때 한예종 출신 이종승 선생님께서 NDT를 추천해주셨다. 제가 기본은 되는데 제 신체적 특성상 클래식에서 요구하는 가녀린 공주라인이 힘드니까(웃음). 움직임이 좋으니 모던쪽으로 해보라고 권해주셨다. 콩쿨 입상자는 3개의 컴퍼니 중 한 곳을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이 있었다. 그 중 NDT가 있었고, 선택을 했다. 저도 사실 그때는 발레단을 가는 게 좋을까 새로운 스타일의 춤을 추는 게 좋을까 고민이 많았다. 가끔은 ‘내가 발레단에 갔으면 어떻게 됐을까’하는 생각도 하는데,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 학교에서 10개월 정도 연수를 받고 1월 쯤 오디션을 통과해 컴퍼니에 들어가게 되어 큰 어려움은 없었다.

 

사회: 학교와 무용단은 분위기가 많이 달랐을 텐데... 

 

원진영: 그렇게 큰 어려움은 없었다. 워밍업으로 발레클래스를 하는 데 그래도 내가 아는 것을 하니까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다른 단원들이 발레클래스를 너무 편하고 자유롭게 해서 놀라웠다. 그동안 엄격한 분위기에서 동작을 정확하게 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춰 수업을 받다가 단원들이 워밍업으로 발레를 대하는 게 신기했다. 주니어 컴퍼니라 단원들이 어려서 그런지 내가 가만히 있어도 와서 말 붙여주는 친구들이 많았다. 적응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사회: 10개월 동안 좋은 조건에서 지낸 것 같다. 그리고 오디션 봐서 단원활동을 하는 3년 동안 몇 작품이나 했나? 

 

원진영: 주니어는 1년에 2개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 프로그램 안에 20분짜리 3개 작품이 있다. 그래서 프로그램으로 따지면 연간 여섯 작품이고 중간 중간 투어를 간다. 투어 프로그램은 조금씩 바뀌는데 3~4개 작품을 한다. 그리고 댄서가 안무를 하는 워크샵이 있는데 나는 직접 안무해보진 않았지만 친구들 작품을 같이 해줬었다. 

 

사회: NDTⅡ의 나이제한이 있나? 

 

원진영: 서류상으로는 17~22살까진데 내 생각에는 오디션 나이인 듯하다. 22살에 오디션에 붙어서 3년 정도 활동하기도 하고... 예외가 있다. 주니어라는 이름에 맞게 17~22살까지가 오디션을 볼 수 있는 나이인 것 같다. 원래는 2년 계약이지만 3년 정도 활동하기도 한다. 

 

사회: 정단원이 되었을 때 대우는 어땠나? 

 

원진영: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다. 좋은 점은 NDT가 큰 단체라서 집 떠나있는 어린 단원이나 해외무용수들을 위해 아파트 전체를 렌트해서 쓴다. 무용수들은 렌트비를 컴퍼니에 내면 된다. 댄서를 위한 편의와 복지가 잘 되어 있었다. 

 

사회: NDTⅠ과의 관계는 어떤가? 

 

원진영: 거의 가족 같다. 오전 9시 30분부터 10시 45분까지 주니어 클래스가 있고, 메인컴퍼니는 11시부터 클래스를 하는데 오며 가며 보고, 큰 스튜디오가 두세 개 있는데 번갈아가면서 쓰니까 (매일 본다). 리허설하면 서로 도와주고 비디오 보고 배우다가 어려울 때는 오리지널 댄서들이 직접 리허설을 해주기도 한다. 비디오를 보고 배우는 것 보다 직접 설명을 듣고 배우니까 그런 면에서 정말 많이 배웠고 좋았다. 

 

사회: NDT도 지리 킬리언 이후 세대교체를 하는 것 같던데? 

 

원진영: 킬리언이 상임안무가 그만둔 지 2년이 넘었다. 지금 단장은 짐 빈센트라고 NDT 출신으로 시카고 하버 스트릿 댄스컴패니를 이끌었던 사람이다. 단원들도 많이 바뀌었다. 안무자 폴 라이트 풋(Paul Lightfoot)과 솔 레온(Sol Leon) 부부는 계속 있다. 유명 안무가들이 게스트로 초청되어 다양하고 풍성하게 작품이 창작되고 있다. 내가 무용단을 옮기게 된 시기가 딱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던 시기였던 것 같다. 

 

사회: 남경씨는 프랑스를 어떤 계기로 가게 되었나? 

 

김남경: 처음엔 독일이나 벨기에 쪽으로 가고 싶었는데 그 당시만 해도 나가기가 힘들었다. 10년 전 이야기니까. 학교 입학 서류가 없으면 비자가 안 나왔다. 고민하던 차에 남정호 교수님께서 프랑스에서 오디션이 있으니 일단 가서 다른 오디션도 알아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일단 부딪혀 보자는 생각에 프랑스에 가게 된 거다. 오디션에 붙고 그러면서 언어가 익혀지고 그렇게 계속 프랑스에 있게 됐다. 독일가면 독일어를 다시 배워야 하니까 (웃음). 제가 갔을 때는 국립안무센터의 오디션이 1월에 있었다. 솔로작품을 가지고 간 것도 아니었고 즉흥을 했다. 그때는 나이제한이 23~30살 정도였다. 마틸드 모니에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분위기였다. 틀에 맞춘 작품을 보여주기보다 즉흥을 통해 개인이 가지고 있는 면면들을 보려고 했던 것 같다.


한국 무용수들이 인정받는 것은 열정

 

사회: 그곳에서 활동하면서 무용수로서 어떤 평가를 받은 적이 있나?

 

김남경: 그곳에서는 개인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금기시 하는 분위기다. 우리나라는 1등, 2등, 3등 순위를 매기거나 좋다 나쁘다 평가를 내리지만 그쪽은 각자의 캐릭터나 각자의 색깔을 존중하기 때문에 평가하는 일을 굉장히 조심한다. 그런데 우스갯소리로 “(좋은 뜻으로)미쳤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다. (웃음) 전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의 그런 점을 좋아하는 것 같다. 차분하다가도 폭발적인 에너지가 나오거나 확 몰입하는 모습이 좋게 비춰지지 않았을까 한다. 

 

사회: 활동은 얼마나 했나? 

 

김남경: 마틸드 모니에와는 7개월 정도로 짧게 활동했다. 마지막에 학생들과 함께 몽펠리에 페스티벌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후에 프로 댄서가 되기 위해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처음에는 작은 무용단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큰 무용단으로 옮겼다.

 

사회: 프랑스는 무용수를 위한 사회적 제도가 잘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어떤가? 

 

김남경: 그렇다. 등록이 되어 있는 프로 무용수이면 내가 춤을 안 춰도 매일 얼마씩 돈을 준다. 내가 무용에 전념할 수 있도록 생활복지를 지원해주고 내 경력이 쌓인 상태에서 직업전환을 하고 싶을 때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기도 하고, 재정적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런 점이 굉장히 좋은 것 같다. 

 

사회: 그럼 작품별 계약하는 건가? 

 

김남경: 그런 경우도 있고 내가 오랫동안 있는 피에트라 갈라 무용단 같은 경우엔 1년 단위로 계약하기도 한다. 

 

사회: 피에트라 갈라 무용단에서는 몇 개 작품을 했나? 

 

김남경: 2005년부터 3~4개 작품정도. 작품수가 기간에 비해 많지 않은 건 순회공연이 많아서 하나의 작품으로 계속 공연을 하기 때문이다. 

 

사회: 2005년부터 무용단에 있었으면 이제 무용단 내 위치가 상당히 높아졌겠다. 

 

김남경: 할머니다. (웃음) 

 

사회: 피에트라 갈라 무용단과는 어떤 점이 맞나. 무용단이나 안무가의 특성을 설명한다면? 

 

김남경: 피에트라는 40대 중반의 젊은 안무가이다. 예를 들면, 마지막에 했던 작품은 무용수가 17명이었는데 2명의 현대무용 댄서 외에 나머지 15명이 힙합하는 친구들이었다. 원래는 발레 오페라 에뚜왈이었지만 새로운 움직임을 찾는데 열성적이라 힙합에 대해서도 열려 있다. 프랑스에서 대중적인 인기가 있는 무용단에 속해 대중의 취향을 많이 고려하는 편이다. 게다가 굉장히 큰 스타디움에서 공연할 역량을 갖춘, 관객을 만족시킬 주목받는 무용단이다. 얼마전까지 피에르 가르뎅이 후원했는데 그런 지원에 힘입어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다. 무용수 대우도 다른 곳 보다 안정적이고 조건도 좋은 편이었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체류조건이 까다로운데 이 무용단 계약서 들고 가면 무사통과한다. 

 

사회: 많은 경험을 위해 무용단 옮기고 오디션을 보는 과정들 얘기를 좀 듣고 싶다.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김남진: 요즘 얘기 들어 보면 내가 있었던 때와 또 많이 다른 거 같더라. 그때는 인터넷도 없었고 지금처럼 신진안무가 지원 사업 같은 정책도 없었고. 그때는 직접 가서 부딪히면서 무용단을 확인해봐야 했다. 특히 프랑스에 관한 정보는 미국보다 더 없었다. 국립현대무용단이 있는지도 몰랐을 정도이니. 

 

사회: 그럼 처음 프랑스로 가게 된 계기는?

 

김남진: 학교 다닐 때 콩쿨에서 상을 받았다. 그것을 계기로 미국에 가서 미국의 현대무용을 보고 상황 스케치를 했다. 대학교 3학년 때였다. 4학년 때는 장학금을 받아 프랑스에 갔었다. 미국무용과 유럽무용의 차이점을 나름대로 비교해보고 유럽으로 선택하고 졸업 후에 갔다. 일단 한국말은 사투리를 쓰지만 불어는 표준어를 쓰겠다는 일념으로 파리를 선택했다. (웃음) 운이 좋았는지 파리의 작은 무용단에 있는 안무자가 절 보고 연수를 온 건지 완전히 온 건지를 물었다. 완전히 왔다고 하자 같이 작업하자고 했다. 그래서 학교를 포기했다. 그 안무자가 이번 코리아 댄스 페스티벌(KDF)에 오는 코린 랑셀이다. 그때는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프랑스의 안무자가 내게 같이 작업하자고 제안한 게 너무 좋았다. 그리고 친구들을 사귀면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점점 알게 되고 프랑스 생활에 눈을 뜨면서 다른 무용단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사회: 그 후 세 드 라베로 옮긴 건가? 

 

김남진: 국립무용단에 있을 때 프랑스 무용에 싫증이 났다. 그 때 벨기에 빔 반데키부스의 새로운 무용을 보고 너무 충격적이었다. 공연의 감동 때문에 집에 못가고 밤새도록 다리를 막 뛰어 다녔을 정도였다. 이런 무용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빔을 직접 찾아갔다. 그런데 아시아인인 나를 보고 현대무용을 아느냐는 질문부터 하더라. 어렵게 오디션을 보게 됐다. 마지막 오디션까지 갔지만 그 전에 같이 작업했던 사람들을 뽑더라. 하지만 전화가 와서 이번에는 2명을 뽑았지만 무용수들 부상이 많으니 후보로 남아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 제안은 거절하고 다시 국립무용단으로 돌아갔는데 빔이 시리 셰르카위(당시 세 드 라베 안무가)를 소개해 줬다. 그렇게 그와 인연이 되어 계속 작업하게 되었다. 

 

사회: 기다렸다가 빔 반데키부스와 같이 작업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거절했나? 

 

김남진: 빔이 가진 것은 내가 가지고 있지만 내가 못 가진 것을 시리 셰르카위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친구들도 빔은 기우는 달이고 세 드 라베는 뜨는 달이라고 이야기했다. 어린 친구지만 정말 많이 배웠다.


무용수에게 필요한 것은 춤만이 아니었다 

 

사회: 각자의 경험들이 아주 다양하다. 해외 활동을 하게 된 계기들은 다 나온 것 같고 이제 실질적인 생활에서 어려움을 해결한 경험들을 얘기해 달라, 앞으로 해외에 진출할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나. 

 

김남경: 조언을 하자면 무조건 부딪혀 보는 건 지금 상황에선 좋은 방법은 아닌 거 같다. 먼저 어떤 나라에 가기 전에 무용단과 미리 컨택을 하거나 워크샵에 참석해 보는 게 좋다. 사실 동양인은 한 컴퍼니에 한 명 정도밖에 필요하지 않은데 지금은 동양인이 많아서 그 자리가 다 차있다. 쉽게 말하면 몇 년 전과 달리 무용단 입장에서 더 이상 동양인이 필요 없다. 오디션이 없으니 워크샵이나 미리 컨택을 해서 서로 몇 번 보고 괜찮다 싶을 때 입단을 제의하거나 아는 사람의 추천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남진: 제일 힘들었던 게 언어였다. 한국에서 기본적인 것을 불어가 아닌 영어라도 배워서 와야 한다. 그들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대화를 많이 한다. 사상을 물어보거나 미술작품에 대한 견해, 역사에 대해 많이 묻는데 그런 방식에 익숙치않고 언어도 서툴러 힘들었다. 작업을 하면 실기위주로 ‘몇 번 뛰어라’, ‘몇 번 돌아라’라는 말만 할 거 같지만 전혀 아니었다. 우리 교육에서도 무용외의 문화, 예술에 대한 교양교육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재원: 내 경험에 의하면 결국 해외에서는 나만의 무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무용수들은 테크닉은 정말 좋으니까 오히려 표현력, 상상력 같은 부분들을 키워야 한다. 외국의 유명한 안무가들을 보면 무용만 하던 사람이 아닌 경우가 많다. 나도 한국에 있을 때는 다른 취미가 없을 정도로 무용만 했다. 그런데 정작 훌륭한 무용수가 되기 위해 필요한 건 상상력이었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 문화와 예술에 대한 교양을 쌓을 필요가 있다. 물론 말로 소통해야 하니까 어느 순간 언어의 필요성이 느껴지면서 독어를 열심히 하게 되더라. 

 

김남경: 작품하면서 그 친구들은 얘기를 많이 한다. 딱 꼬집어 뭘 요구하거나 시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설명을 한 후에 무용수가 스스로 무언가 탐구해서 표현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언어 문제가 중요했다. 처음에 나는 오히려 나는 외국인이니까 간단하게 단어 하나로 얘기해달라고 요구했다. 이해를 못해서 요구하는 걸 못할 뿐인데 정말 못한다고 오해하는 게 두려웠다.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당당하게 요구했다. 

 

사회: 그럼 언어와 무용단 정보를 갖고 그에 맞는 준비를 해서 가는 것이 여러 가지 손실을 막을 수 있겠다. 또 어떤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전쟁같은 오디션과 무용단 생활, 치열한 정신력으로 버텨 

 

김남경: 처음에 갔을 때 오디션 보고 잘 안되고 고민할 때, 우연히 울티마 베즈 오디션에서 남진씨를 만났다. 그 때 오빠가 “이거 아니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해야 된다.” 고 하더라. (웃음) 

 

김남진: 그리고 “이건 전쟁이야.”라고 했다. (웃음) 

 

사회: 오디션은 어떤 식으로 보나?

 

김남진: 오디션을 일주일동안 한다. 또 마지막에는 그렇게 뽑힌 사람들을 그 무용단 무용수들과 붙여서 어울리는 지를 본다. 국립무용단 들어갈 때는 3개월을 그렇게 했다. 그 동안의 체류비와 숙소는 지급된다. 한국처럼 작품 하나 보고 뽑지 않는다. 긴 과정이 힘이 든다. 

 

사회: 대단하다. 건강이나 체력에도 문제가 많겠다. 

 

김남진: 한 번은 무릎이 너무 아파서 다음 날 공연을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도저히 못하겠다고 했더니 그냥 내 자리에 서있으라고 했다. 내가 배운 말 중에 좋은 말이 ‘작품이 잘 구성되어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좋은 에너지를 줄 것이다. 그러니 무리하지 말고 그냥 서 있어라.’였다. 그런 상황 대처들을 보며 그릇이 큰 사람이라고 느꼈다. 나도 앞으로 안무가가 되면 무용수에게 저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약은 항상 들고 다녔다. 내 약 박스가 있을 정도였다. 주로 진통제였다. 1년 후에는 주변에서 나한테 약을 찾더라. (웃음) 

 

사회: 재원씨, 샤샤발츠 오디션 볼 때 어땠나?

 

오재원: 고통스러웠다.(웃음) 사실 소속된 무용단이 있어서 다른 오디션을 보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일주일을 어렵게 빼서 오디션을 봤다. CD를 보낸 사람들 중 각 도시에서 200명씩 추린다. 그리고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시험을 친다. (오디션) 첫 날 오전 시험이 끝나고 결과 발표하는데 눈을 감고 서있으면 (합격자를) 손으로 슥 만지고 지나갔다. 그냥 지나가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다. (웃음) 마지막 날에는 사력을 다한다. 각 도시별로 200명 중 10명을 뽑고 이걸 통과한 20명의 사람들은 3개월 동안 모여서 작품을 짠다. 그 과정을 통한 평가를 해서 최종적으로 2명만 뽑는다. 치열하다. 

 

사회: 거기에서 뽑혔다니 정말 대단하다.

 

오재원: 오디션 가기 전에 허리 부상이 있었다. 듀엣 연습을 하던 중 거꾸로 떨어지는 바람에 3일 동안 입원을 했었다. 사샤 발츠 오디션 가기 전 날 병원에서 절대 나가면 안된다고 했다. 하지만 약 먹고 갔다. 앞에서 사샤 발츠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있는데 겁나기도 했고 오디션 분위기 자체가 아픈 걸 잊게 만들었다. 뭘 하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오브제 주고 포괄적으로 상황 설명만을 한다. 당시는 침대 두 개를 주고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사회: 다른 동양인들도 있었나? 

 

오재원: 별로 없었다. 그런데 자부심을 갖고 있는 점이, 나가서 보면 아시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 무용수만큼 잘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한국처럼 스파르타식으로 춤을 단련시키는 곳이 없기 때문인 거 같다. 하지만 컴퍼니 생활도 그렇고 오디션도 그렇고 처음에 적응하지 못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오픈마인드와 상상하는 것에서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테크닉은 우리보다 못하지만, 무용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그들은 어떤 상황을 던져주었을 때 무용이 아닌데 무용 같고 신선한 어떤 것을 내 놓는 것을 보고 놀랐다. 지금도 후배들에게 이야기할 때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이 두 가지다. 상상력과 체력이다. 그 두 가지만 있으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사회: 우리나라 교육도 앞으로 그런 부분들이 보강되면 기량을 발휘하는 데 더 좋을 거란 생각이 든다. 체력문제도 정말 중요한 것 같은데 부상은 없었나? 

 

김남경: 허리를 다친 적이 있다. 다른 무용수들도 다 마찬가지 일 텐데 공연할 때는 아픈 걸 잘 모른다. 그런데 다음 날 병원에 가보니 허리와 다리를 이어주는 인대가 10cm가량 찢어져 있었다. 자잘한 부상들은 정말 많았다. 한국 사람들은 흥분을 잘한다. 아파도 끝까지 한다는 정신이 있다. 반면에 외국인들은 굵고 짧게 하기 보다는 길게 갈 수 있게 조절을 잘 한다. 

 

사회: 20대인 진영씨는 어떤가? 

 

원진영: 체력관리는 수시로 꾸준히 한다. 지금 있는 바젤무용단은 단원수가 29명인데 바쁠 때도 있고 클래스만 있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스스로 체력관리를 한다. 레파토리 컴퍼니라 격렬하게 하지는 않는다. 

 

사회: NDT에서 바젤무용단으로 옮겼을 때 스타일 변화가 있었나? 

 

원진영: 큰 변화는 없었다. 바젤도 레파토리 컴퍼니라 여러 가지 스타일들을 다양하게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나초 두아토, 지리 킬리안, 오하드 나하린 같은 완전 다른 스타일을 하기도 하고. 그렇게 춤을 추니 체력도 관리되고 전환하는 걸 배우면서 그때마다 몸 관리하는 것도 많이 배웠다. 바젤무용단으로 옮겼을 때도 단원들도 친구의 친구인 경우가 많아서 어려움이 별로 없었다. 처음 컴퍼니를 옮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물론 있었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영역도 넓어지고 춤도 풍부해질 수 있는 기회니까 설렘이 더 많았다. 

 

사회: 재원씨는 무용단을 옮길 때 어땠나? 

 

오재원: 내가 원했던 무용단으로 옮긴 것이고 두 분(피나 바우쉬와 수잔 링케)의 스타일도 비슷해서 큰 어려움이 없었다. 

 

사회: 브레멘 탄츠 테아터는 어떤 유형의 작품을 하는지. 

 

오재원: 말 그대로 탄츠 테아터다. 수잔 링케와 피나 바우쉬는 색깔이 비슷하다. 물론 둘은 전혀 부정한다. 무용단 설립 12년째인데 4년 전부터 시스템이 바뀌어서 상임 안무자는 1년에 한 작품만 하고 외부에서 두 명의 안무자를 게스트로 초빙해온다. 무용수 입장에서는 재밌다. 

 

사회: 무용단의 복지는 어떤가. 

 

오재원: 괜찮다. 부상당했을 경우 자기 부담이 없다. 당장 병원에 가는 것은 당연한 거고 그 이후에 테라피를 받는 부분도 보장해준다. 대신 아픈데 컴퍼니에 나오면 안 된다. (웃음) 그렇게 생활이 여유롭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렵지도 않다. 다른 아르바이트는 불법이다. 독일은 탄츠테아터 규모에 따라 등급이 나뉘는데, 오케스트라 등 모든 걸 다 갖추고 있는 테아터는 A급이고 브레멘 탄츠 테아터는 A급이다. 

 

사회: 처음에 독일로 가게 된 계기는? 

 

오재원: 나는 늦게 나간 편이다. 졸업도 하고 군대도 갔다 오고 결혼도 하고 뒤늦게 부인이랑 같이 (독일로) 갔다. 중앙대 대학원 시절 피나 바우쉬에 관한 논문을 썼는데, 너무 아는 게 없어 답답했다. 결혼 후 유럽을 한 번 쭉 돌아봤는데 독일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마침 거기서 공연을 봤는데 남진씨와 같은 기분으로 어떻게 표현이 안 될 정도로 너무 좋았다. 충격적이었다.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리고 1년 후 폴크방에 들어간 거다. 

 

김남진: 피나 바우쉬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피나 바우쉬 페스티벌에 초청받은 적이 있는데, 공연 끝나고 무용수들 한명 한명에게 꽃을 주고 자기가 손수 한 사인을 다 주고……. 돈이나 물질적인 것 보다 피나 바우쉬는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큰 사람이다.


해외 무용단 생활, 화려해 보이는 이면에 치열한 경쟁이 

 

사회: 각자 경험을 통해 변한 점이나 발전된 점이 있었나. 

 

김남진: 처음에 내 CD와 이력서를 들고 빔 반데키부스를 찾아가는 것만 해도 너무 쑥스러웠다. 오디션도 아닌데 적극적으로 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부끄러웠다. 지금은 먼저 말 걸고 작품홍보도 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처음에는 안무가를 만났을 때나 디렉터를 만났을 때 말문을 열기가 참 쑥스러웠다. 후배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은 첫 문을 열기가 어렵지만 그 문을 열어야 들어갈 수가 있으니 적극적인 태도를 가졌으면 한다. 

 

사회: 창작자가 자기 작품을 알리고 팔고 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인데 우리는 아직 그런데 익숙하지 않다. 남진씨의 적극성은 그때 그렇게 터득한 건가 보다. (웃음) 이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으니까. 

 

김남진: 밖에서는 편해 보이지만 안에서는 전쟁이다. 현대무용도 자리싸움이 있다. 기싸움이 엄청나다. 내가 서고 싶은 자리가 있으면 주저할 틈이 없이 움직여야 한다. 우리처럼 ‘언니 먼저 가세요’ 하면서 양보 할 수가 없다. 

 

오재원: 백번 동감한다. 나도 처음에는 몰랐다. 작품 짤 때 연습인 줄 알고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괜히 뒤에 가서 하곤 했는데, 작품에 그게 그대로 픽스되서 무대에 올라가더라. 그래서 만날 뒷줄이었다. 솔로할 때 잠깐 보이고 군무할 때 아예 안보이고... 한번은 안무자가 자리를 정해줬는데 화장실을 다녀오니 그 잠깐 사이에 다른 무용수가 내 자리에 딱 서 있더라. 그 정도다. 

 

김남진: 내가 앞에 서있으면 뒤의 무용수가 자꾸 밀고 들어온다. 한번은 내가 화가 나서 이 자리에 서고 싶냐고 물어봤는데 서고 싶다고 말하더라. 그래서 자리를 내 줬다. 그런데 안무자가 봐도 그 친구가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는지 전체 방향을 돌려버렸다. 그렇게 해서 내가 다시 앞 쪽으로 올 수 있었다. 

 

김남경: 나는 그런 친구들이 있으면, 속으로 ‘어차피 네가 앞에 서도 동양인 무용수가 나 하나라 내가 잘 보이니 마음대로 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달랜다. 

 

오재원: 안무자들은 무용수를 배려해 마킹(동작을 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을 중심으로 리허설하는 것)으로 쉬엄쉬엄 하라고 한다. 그래서 정말 그렇게 하면 엄청난 지적과 후환(?)이 있다. 아파서 하루 쉬면 다음 날 다른 사람이 솔로를 한다. 실제로 그런 일이 다반사로 있다. 

 

사회: 한국 친구들을 위해 도움 되는 이야기를 더 해 보자. 아까는 언어적인 문제, 정신력을 무장해야 하는 것, 적극적으로 나를 알리는 것, 자기가 어디로 갈지 겨냥해서 정보들을 파악하고 가야한다는 것 등의 이야기를 했다. 정보를 얻는 방법은 어떤 게 있을까? 

 

김남경: 요즘 너무 좋은 건 유투브(youtube.com) 다. 10정보만 봐도 무용단 색깔이 파악 되니까. 나도 개인적으로 내가 공연하는 작품을 올리기도 한다. 각 무용단 홈페이지에도 많은 정보가 있다. 

 

오재원: 독일 웹사이트 ballettanz.de에 가면 오디션, 워크샵, 프로젝트 등 많은 정보가 올라와 있다. 활용하기 바란다.


국내 지원정책 세계적 흐름 반영해야 

 

사회: 오늘 한 이야기들이 앞으로 진출할 후배들에게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웃음) 남진씨는 해외에서 활동하는 무용수들이 다시 국내 정착하는 부분에 대해 선배로써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김남진: 국내에서 활동을 해보니 한국이 문화예술지원 정책 덕에 지원금도 많이 는 거 같다. 그러나 지원금을 쓰는 방법은 좀 더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국의 경우 지원금을 여러 곳에서 받을 수 있고 코프로덕션(co-production)이 많을수록 그 작품이 더 인정을 받는다. (프랑스 춤 잡지를 꺼내 보여주며) 한 작품을 여러 군데서 지원을 받아 모두 지원해준 기관이나 기업과 공동제작으로 명시하고 그것이 작품의 수준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그런데 한국은 한 곳에서 받으면 다른 곳에서 중복지원을 못 받는다. 한 곳에서만 받아서는 작품하기 힘들다.. 이번에 천만 원 받았는데, 3명 월급밖에 안되더라. 외국에서 활동하다 들어온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따뜻하고 신선할 때 바로 지원을 해주었으면 하는데, 오히려 처음에는 국내 경력이 없어 심사에서 불리했다. 그러면 경력을 쌓는 몇 년을 기다리는 동안 신선함은 사라지고 ‘한국화’되어 버린다. 

 또, 얼마 전 유명한 해외 페스티벌 디렉터가 “한국 무용수들은 정말 기가 막히다. 하지만 그들 안무는 별로다.”고 한 말을 들었다. 안무자는 교육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러 경험을 바탕으로 그것들이 접목되어서 자기만의 방식이 생기는 것이다. 차라리 안무자를 교육해서 육성하는 지원금을 작품할 기회를 제공하는데 썼으면 좋겠다. 방식도 자잘한 돈을 나눠서 주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굵직하게 지원해 주는 게 현장에선 더 유용하다. 중복지원 금지도 융통성있게 수정되는 게 창작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사회: 코프로덕션이 많아야 그 작품에 대한 국제적 신뢰가 높아져 결국 다시 해외 진출할 때 도움이 되는데, 우리는 지원금이 몰리는 것만 우려해 제도적으로 중복되는 것을 금기시 해 놓으니 오히려 재정이 빈약해지고 작품의 퀄리티도 떨어지는 결과를 낳은 셈이다. 

 

김남진: 그렇다. 지방자치 구조로 분리되어 있는 문화재단의 경우도 서울에서 받으면 지방에서 못받게 되어 있다. 그런 규정은 지방 투어 공연 자체를 어렵게 만들어 작품을 더욱 일회용이 되게 하는 거 같다. 

 

사회: 해외 활동 후 국내 정착에 고군분투하는 남진씨의 경험에서 나온 지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국내의 사정도 있다. 국내에 있는 무용가들이 다 해외 진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이런 어려운 조건에서도 국내에서 활동한 사람들을 고려할 때, 그들이 느낄 상대적 열등감으로부터 국내 무용가들을 보호해야 하는 측면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것이 해외에서 활동하고 돌아온 무용인들에게 만족스럽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같은 지적은 국내 작품 생산력과 수준을 높이는 데 필요한 개선으로 타당하게 들린다. 

 그나마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수 초청공연>이 그나마 통로의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자리를 통해서 이렇게 어렵게 도전정신을 갖고 해외에서 활동했다는 걸 알게 되면 국내에서도 해외무용수들에 대한 인식이 어떤 부분을 인정해주고 받아들어야겠다는 게 생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더 빈번한 소통이 필요하다. 

 남경씨는 국내 들어올 계획은 있나? 

 

김남경: 한국과 프랑스 양 국가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고 싶다. 그런데 정말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오랫동안 나가있다가 한국에 들어오면 정착하기 어려울까 봐 걱정도 된다. 근 10년 간 제가 여기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건 아닐까하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나마 이런 페스티벌(해외무용스타)이 있어서 한국관객들에게 춤추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었던 거지 이조차 없었다면 소개조차 되기 힘들었을 거다. 

 

사회: 마지막으로 이번에 한국에 들어와서 느낀 것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린다. 

 

김남경: 이래서 한국 사람이 여러 가지 반찬과 국을 먹는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무슨 말이냐면, 유럽이랑 차이점이 체계적인 것 보다는 다양한 것을 즐기는 것이 우리의 특성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에서도 그런 취향이 있는 거 같았다. 짬뽕도 먹고 짜장면도 먹고 싶어서 짬짜면이 있는 것처럼 여러 가지 반찬을 한 번에 먹는 것이 한국 스타일인 것 같다. 그런 차이를 느낀 게 공부가 됐다. 

 

김남진: 해외에서는 내가 어느 무용단에 있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굉장한 자긍심을 느낀다. 그리고 사회에서도 인정을 해주는데 우리는 그런 부분이 약한 거 같다. 무용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그래서 춤추는 사람들이 춤 추는 것에 자긍심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 일례로 외국에서는 컴퍼니 등록번호가 행정상도 필요하지만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우리도 사회가 보호해 주는 무용단을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재원: 해외에서 무용수로 가족을 부양하면서 가장 고민됐던 것은 한국의 직업군에서 ‘댄서’가 들어갈 수 있느냐이다. 한국은 그 토대가 너무 미미하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준비되어야 하기 때문에 단순히 지적만 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춤만 추면서 먹고 살 수 있는, 아이도 키우면서 생활이 가능한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원진영: 아직은 활동한지 얼마 안 되어 당분간은 무용단 활동을 열심히 해볼 계획이다. 앞으로 다가올 도전속에서 많은 것을 배울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이번 기회에 해외에서 활동하시는 선배님을 많이 알게 된 게 나에게는 큰 소득이다. 돌아가서 연락하고 조언을 구하면 정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 같다. 갑자기 마음이 든든해진다. 

 

사회: 바쁜 일정 속에서 이렇게 긴 시간 할애 해주어 감사하다. 돌아가 더욱 힘차게 활동하기 기대한다. 그리고 물론 많이 성장한 모습으로 다시 볼 것을 기대한다. 건강하기 바란다.
 

 

 

정리_남궁진아

2011. 08.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