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방담_ 예술의전당 제작 기획 · 문병남 안무 〈안중근〉
시의성 높은 기획에 아주 미달한 작품 완성도
  • 일    시
    2021년 8월 23일 오전 10시 30분~
  • 장    소
    인터넷 비대면 화상 좌담
  • 참석자
    이종호 김채현 김혜라 방희망

- 예술의전당 제작 기획으로 발레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 공연이 8월 13~15일 광복절 기간에 열렸습니다. 예술의전당이 춤뿐만 아니라 창작을 자체적으로 기획하는 경우는 드물고, 또 코로나19시기에 악화되는 경영에도 불구하고 춤을 대상으로 기획하여 더욱 관심을 모았습니다. 제작 기획으로서 예술의전당은 안무 및 창작은 안무자와 스탭진들에게 일임하고 작품의 목적이나 방향성 등에 대해서는 의견을 제시하며 조율한 것으로 압니다. 이 작품은 원래 2015년도 창작산실 사업에서 문병남의 안무로 초연되었고, 이번에 다시 올려졌습니다. 우선 이 제작 기획의 의의부터 짚어보도록 하지요. 코로나19로 다수의 모임이 어려운 사정에서 인터넷 비대면 화상으로 좌담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예술의전당 제작 기획 · 문병남 안무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 ⓒ예술의전당




역사사회의식 바탕, 시의적절한 기획

- 예술의전당 같은 공공기관에서 민족이라든지 그와 유사한 주제로 본격적인 예술 작품을 프로덕션하겠다는 것 자체는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예술의전당은 〈안중근〉과 같은 기간인 8월 14~15일 〈대학가곡 축제〉도 했습니다. 전국 대학의 성악과 재학생들이 혼자 또는 팀을 구성해서 전쟁, 가족, 그리움 등 각각의 주제를 걸고 거기에 어울리는 우리 가곡 몇 곡 부르고 중간에 대사와 연기를 넣어 짧은 드라마를 만들었습니다. 한민족 특유의 정서를 환기하면서 개인사, 사회사를 반영했던 우리 가곡이 근래 많이 약화된 건 사실입니다. 가곡 부활운동의 차원에서 예술의전당이 그런 기획을 했다는 데 대해 상당히 좋은 취지로 봤어요. 〈안중근〉도 안중근처럼 상징적인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소재로 창작 발레를 만드는 게 취지였지 않습니까. 예술이 민족주의를 고취해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사회적 의식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예술적으로도 뛰어난 양질의 작품을 만들어 예술과 역사의식, 사회의식을 혼융시키려 한 기획 취지는 상당히 긍정적이었습니다.

- 제가 알기론 예술의전당에서 작년부터인가 창작 진흥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시작했어요. 예술의전당 안내를 들어보니까 소극장 오페라 축제, 창작 음악극 〈굿모닝 독도〉, 창작 오페라를 제작했다던데 그 일환이겠죠. 우리 역사, 민족과 연관되는 레퍼토리를 개발하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에서 했기 때문에 말씀하신 대로 의미는 충분할 것 같고 예술의전당 내지는 공공기관에서 응당해야 할 일인데 오히려 너무 늦은 감이 있습니다.

- 음악계 쪽에서는 창작극, 창작 오페라가 굉장히 활성화돼있고 관객 반응도 상당히 좋은 편입니다. 학부나 대학원 차원에서도 창작극이나 창작 판소리를 굉장히 다양하게 시도하면서 무대에 올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음악 향유층이 춤 향유층보다 저변이 넓고 호응도와 인기가 높다 보니 그런 부분이 꽤 활성화되어 있는 건 사실입니다. 예술의전당에서 춤 쪽으로 손을 댄다고 하면 가장 친숙한 발레 쪽을 손 대기가 쉬웠을 거라 생각이 들어요. 6월에 유니버설발레단과 공동기획으로 〈돈키호테〉도 올렸고요. 아무래도 작년부터 코로나 상황 때문에 창작 단체들이 운영도 어렵고 여러 사정으로 예술의전당 같은 큰 공공기관에서 제작의 비용을 상당히 투자한다는 거 자체가 의미 있습니다. 예술의전당 유인택 사장이 “창작산실 초연작에서 예술의전당 직원들이 이 작품을 추천했다”고 밝힌 걸 보면, 택하기 쉬운 많은 발레단이 있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는 규모가 작은 발레단이라 더 관심을 끌었습니다. 발레 부문에서의 투자도 필요한 일입니다.

- 특히 국내 공공기관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 발레이고 민간 발레단체가 제작하기 어려운 여러 취약한 부분을 지원해주겠다는 의도가 좋습니다. 또 8·15에 맞춰서 그런 주제를 갖고 작품을 만든 기획과 의의가 시의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 공공기관과 극장, 단체에서 레퍼토리를 개발할 적에 어떤 관점에서 어디다 초점을 두고 개발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흔적이 뚜렷하지 않은 게 통례입니다. 작품의 완성도도 완성도이지만 그에 앞서 기획의 발단이 어디서 출발하느냐가 중요한데, 이번 같은 경우는 대내외적으로 명분 있는 기획이 아닌가 합니다. 공공극장에서도 자칫 일과성에 맴돌 기획을 할 것이 아니라 지속성 있으면서도 일반 대중들도 공감하고 수긍할 기획을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번 경우는 시금석이지 않나 생각되지요. 초연작과 재연작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 궁금했습니다.




예술의전당 제작 기획 · 문병남 안무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 ⓒ예술의전당




서사 전개에 무리 많아

- 초연을 보았던 저는 외형적인 거 말고는 차이를 많이 느낄 수 없었습니다. 외형적인 건 무대, 의상, 조금 동원된 영상, 작곡되어서 사용된 음악입니다. 그런 외형상의 변화는 있었지만, 러닝타임도 엇비슷했고요. 전체 대본 줄거리와 배역이 거의 동일하게 유지됐기 때문에 크게 다른 작품이라는 느낌은 들진 않았습니다.

- 초연의 경우에는 한국적인 걸 섞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거 같아요. 혼례식 장면에서 연날리기, 부포상모와 열두발상모 돌리기 등의 장면이 한국적인 요소를 살리면서 잔치의 흥을 돋우려는 목적으로 들어갔었습니다. 조마리아 여사의 의상도 흰색 저고리치마가 확연했구요. 이번에는 의상도 수정되고 그런 농악놀이와 연주가 삭제되었습니다.

- 방향과 지향점에서는 약간의 수정이 있었다고 할 수 있지요.

- 초연 때는 무엇을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맥락 없이 너무 섞여 있었습니다. 발레 작품다운 면모가 꽤 부족하다는 평을 주변에서 많이들 하였을 테고, 이번에 개작하는 데 참조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 개선 또는 완성도를 강화한 부분이라고 얘기했는데, 아무튼 달라진 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요. 가장 크게 달라진 부분을 보면 한국적 풍속, 풍물 같은 것이 배제되고 서구적인 클래식 발레에 어울리는 구성 양식으로 탈바꿈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시도의 결과는 작품의 완성도에 따라 판별할 문제 같아요. 이번 재연작의 예술적 완성도를 진단하는 데 있어, 〈스파르타쿠스〉와의 유사성, 참조, 모방이라 얘기할 수 있는 면이 많았습니다.

- 대형 발레 작품에서 배역진을 골고루 기용해서 무용수들의 일자리까지 창출하는 건 필요한 일이겠습니다. 그래도 수많은 여성 배역들이 그런 식으로 소모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 들게 하는 그런 배역 구성이 두드러져 보였습니다. 〈스파르타쿠스〉와 판박이로 영웅과 영웅의 아내, 그와 대척하는 라이벌과 라이벌의 정부, 이 구도였습니다. 그런데 〈스파르타쿠스〉 같은 경우는 맥락이 맞았다고 볼 수 있는데, 스파르타쿠스가 압제를 당하게 하는 역할을 크라수스 장군이 담당했잖아요. 그래서 스파르타쿠스가 그것에서 벗어나는 게 적절했는데, 작품에서 안중근 의사가 숙적으로 여긴 것은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그러나 발레 〈안중근〉에서 안중근과 대적하는 이시다라는 아마도 가공의 인물과 그 정부 역할을 굳이 삽입해놓은 것은 익숙한 발레 명작의 얼개를 그대로 따와서 쉽게 편승하는 전략이 아니었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궁금해서 김아려 여사와 어머니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려 했는데 자료가 거의 없더군요. 여성 캐릭터를 긍정적으로 확장해서 해석한 걸 바람직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김아려 여사와 안 의사의 어머니 분량을 상상으로 채워넣었다고 해서 또한 상대편 역을 정부로 설정하여 짝을 맞추어 넣는다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정부(情婦)와 무희들의 춤 장면이 〈스파르타쿠스〉와 판박이인 것도 많았지만 기본 구도 자체가 불편했습니다.

- 발레 〈안중근〉은 드라마 발레로 분류될 것입니다. 소개 기사를 보니까 가장 치중한 부분이 안중근 의사의 영웅적 면모와 인간적 측면, 두 가지 면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디베르티스망으로서 결혼식과 이토 통감의 취임 축하연 장면이 전체 내용에서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닌데, 발레가 가진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그런 디베트티스망 요소가 전반부에서 과도하였습니다. 발레 〈안중근〉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그후의 장면들에서 드러납니다. 안 의사의 꿈이나 싸움 장면 같은 것들이었어요. 한 시간 남짓의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디베르티스망 같은 부분을 과도하게 넣음으로써 드라마성을 굉장히 저해했습니다. 결국은 컨템퍼러리 발레도 아니고 드라마 발레가 가진 요소에서 저해하는 부분들이 있었어요. 고전발레 형식을 고수하며 한국적 소재와 서사를 버무려 보려 했으나 전막발레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적 드라마 발레라는 요소도 의상 외에는 딱히 찾기 쉽지 않았어요.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이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져야 했을 텐데, 전체 맥락이 조각조각이 나서 단편적으로 보였습니다. 어떤 교육용 프로그램 보는 거 같았어요. 제국주의에 당한 나라에서 있음 직한 얘기인데 과연 발레 〈안중근〉을 다른 나라 사람이 봤을 때 특별할지 의문도 들었습니다. 한국적인 부분이 주제나 양식에서도 희미하였습니다.

- 〈스파르타쿠스〉에서는 크라수스의 애첩 애기나가 향락을 제공하는 부분은 단순한 눈요깃거리가 아니라 복선으로도 쓰입니다. 스파르타쿠스의 봉기군이 크라수스를 물리치고 승리에 젖어 늘어져있을 때 애기나가 잠복해서 향락적인 분위기를 만든 것으로 인해 스파르타쿠스의 군사의 사기가 풀리고 그래서 크라수스가 그들을 이기게 된다는 줄거리로 가거든요. 발레 〈안중근〉에서는 무희 역할들은 극중에서는 일본군, 공연중에는 관객에게 눈요기감을 제공하는 역할에서 끝나고 마는 것이 매우 큰 문제라 생각됩니다.

- 기생 역할의 그 장면들이 전체 맥락과는 동떨어져 보였지요. 물론 유린당한 조선의 모습을 의도했겠으나 축하연 후에 바로 의병부대 활동이 전개됩니다. 그러나 그 연결성이 섬세하지도 맥락도 부자연스러웠습니다. 아마도 제작진이 관객이 이미 내용을 알고 본다는 상정 아래 전개한 불친절한 장면 중의 하나로 설득력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평면적 묘사로 부각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

- 〈스파르타쿠스〉와 유사성을 가지려면 주역들 사이의 사각(四角) 관계가 설정돼야 하겠지요. 먼저 발레 〈안중근〉에서는 그런 사각 관계가 설정될 수 있겠는지 기본적으로 물을 수 있죠. 두 번째는 사각(四角) 관계가 불가능하다면 이각(二角) 관계라도 확실히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스파르타쿠스〉에서는 크라수스와 대적하는 아주 절체절명의 순간이 있는데 〈안중근〉에서는 이런 이각 관계마저도 제대로 설정되지 않았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돋보이는 반면에 이토 히로부미라는 인간이 당대 조선과 연관해서 어떤 일을 저지른 인간인지 하는 점을 제3국의 사람이 보면 전혀 모르게 돼 있어요. 안중근이 일방적으로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겨누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무대 위에서 설득하는 과정 자체가 전혀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사각 관계를 설정하려면 제대로 하든지, 사각 관계 설정이 여의치 않다면 〈스파르타쿠스〉와의 유사성에 너무 연연하면서 작품을 끌고 나갈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렇게 연연함으로써 야기되는 문제는 단적으로 무희들이 나오는 부분에 악영향을 끼칩니다. 무희들 가운데 우두머리인 사쿠라라고 하는 여성이 그 이후에 행하는 복선 역할이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발레 〈안중근〉은 입체적이지 못하고 평면적으로 진행됩니다. 상식이라 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평면적으로 나열하다보니 그저 그냥 발레 움직임으로 보여줬다는 수준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점들이 많았다는 거죠.




예술의전당 제작 기획 · 문병남 안무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 ⓒ예술의전당




- 〈스파르타쿠스〉와의 유사성을 의식한 것이 오히려 이 작품에서는 양면적으로 작용했습니다. 부정적이면서 긍정적인 두 측면이 있다는 것을 창작자와 연출진은 짚어봐야 합니다. 〈스파르타쿠스〉를 의식하고 그만한 작품을 만들겠다는 의지야 누군들 부정하겠어요. 이를 긍정시하고 한국 발레의 창작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충분히 품을 법한 의지라고 여겨지지만, 너무 성급하지 않았는가 합니다. 성급하지 않았다면 치밀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스파르타쿠스〉의 분석을 제대로 했느냐고 묻게 되는 겁니다. 제3자 입장에서는 〈스파르타쿠스〉가 철저히 분석이 되었는가에 대해 의아심을 갖게 된 거죠. 이번 재연작의 예술적 완성도에서 우선 문제가 되는 게 서사 전개 측면입니다. 대본 구성에서 앞의 혼례 장면, 이토 히로부미 조선 통감부 취임 연회 이 두 장면이 너무 길었어요. 이 시간이 너무 길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방금 지적된 대로 장면들이 복선 역할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납득할 수 없을 만큼 길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평면적인 디베르티스망, 소비적인 놀이밖에 안 됐던 것이죠. 그리고 전투 씬이 너무 짧았고, 여성들은 소모적인 역할 이상은 해내지 않았어요.

- 전투 씬이 전개되는 데 있어서 여성들이 할 역할이 없었겠느냐고도 물어야 합니다. 그런 장면을 가상적으로 얼마든지 설정할 수 있을 거 같고, 실제 역사적인 사실에서도 의병들의 활동에서 여성들이 뒷받침하는 독립운동이 왜 없었겠습니까. 왜 이런 게 배제됐을까 의문스럽습니다. 다시 말해, 안중근 의사의 의거와 당대 의병 운동을 생각하면 여성들에게도 일정 역할을 부여해도 좋았을 것입니다.

- 김아려 여사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건 없지만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부인과 어머니가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내조했기 때문에 그런 활동이 가능했던 것이고, 한마디로 희생을 한 거죠. 그 희생이 조명이 돼야 하는데, 사랑이란 측면에서 피상적으로 다뤄진 것이 안타깝습니다. 또 하나는 무희 장면이 디베르티스망으로서 눈요깃거리였다는 게 역시 안타까울 뿐 아니라 이 작품을 정말 대외용으로 내보낸다면 부끄러운 부분 중 하나란 생각이 듭니다. 상대방을 저열한 상대로 비하해서 그리는 것이 과연 주역의 영웅적인 면모를 돋보이게 하는데 득이 되는지 생각해봤을 때 이제는 창작자들이 시각을 좀 달리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압제당한 국가의 민족들이 신음하고 있을 때 그들은 그저 향락에 취해있었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것은 상대방의 사악함을 손쉽게 드러내는 간편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영웅이 정말 첨예한 국제 정세 속에서 용기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지략을 통해서 성취해낸 일을, 마치 아무것도 안 하고 뒤에서 즐기는 상대방을 무찔렀다는 식으로 그려서는 훌륭한 업적으로 돋보이도록 만들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 단순하게 옛날식의 선악 대결에 안주한 느낌이요.

- 네. 옛날 만화에서 나올 법한 라이벌 구도이고, 선의의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리는 악당과 같아요. 이런 식의 구도는 촌스럽고 시대착오적입니다.

- 작품 도입부가 뤼순 감옥에 갇힌 안중근 의사를 묘사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지요. 이 대목에서 작품의 결론은 미리 제시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도입부 이후 작품 전개에서 안중근 의사를 긍정적으로 부각시킬 것은 짐작되기 마련입니다. 이럴수록 주역이 겪을 역경이라는 것이 변수로 작용하고 그 역경을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주역이 부각되는 장치가 필요해 보입니다. 그런데 안 의사가 작품에서 겪는 역경은 의병부대 전투에서 패배한 것과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총격 사살한 두 가지로 제시됩니다. 이 역경들은 스토리를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뿐 큰 감흥을 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 스쳐 지나가듯이 피상적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지요. 우선 그 부분들이 너무 짧았고, 또 주역이 그 역경을 헤쳐나가며 겪는 어려움이나 긴박감 같은, 관객 수용자가 조금은 예측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었어야 했다고 봅니다. 그런 역경의 계기들에서 밀도가 떨어지다 보니 이번 영웅 서사는 인상과 감동을 주기에는 무리였습니다. 미리부터 예단해서 관객은 편하게 볼 수 있었을 테고 애국심의 측면에서 보면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재확인하며 퍽 쉽게 동화될 수 있는 그런 전개입니다. 서사 전개에서 기복이 있어서 객석 속의 한 사람으로서 긴장감과 안도감 사이를 왕래하며 쌓이는 심리적 변화를 현장에서 체험할 수 없었습니다. 단적으로 발레 〈안중근〉은 강렬함과는 동떨어지게 밋밋했고, 안 의사에 관한 간략한 소개서 같았습니다. 상식적 인식 수준과 감성에 머물렀지요.

- 다 알고 있는 내용을 전제로 하였지요. 너무 앞서간 건지 모르겠지만 안무가도 간담회에서 한국적 〈스파르타쿠스〉라고 해요. 해외 무대에 나갔을 때 한국적인 발레라고 한다면, 서사 내용을 봤을 때 과연 한국에서만 있음 직한 내용인가? 그건 아니었습니다. 일반 발레 관객이 안중근 의사를 모르고 본다면 설득력이 있을까요? 서사에서 틈이 많고 극본을 조밀하게 복합적으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 로마 시대에 노예들에게 두건을 씌워 눈이 가려진 상태에서 단도 같은 칼을 주어서 서로를 죽이게 하는 잔인한 놀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거기서 상대방을 죽이면 노예에서 해방됩니다. 발레 〈스파르타쿠스〉에서 스파르타쿠스가 노예로 잡혀가서 크라수스의 연회장에서 그런 절체절명의 상황에 빠뜨려집니다. 두 노예가 살기 위해 칼을 무작정 허공에 휘두르며 쑤셔대는 그 아찔한 씬에서 마침내 스파르타쿠스가 칼로 상대방을 찔러 죽게 합니다. 그 자리에서 두 노예의 두건이 벗겨지고, 알고 보니 자기가 죽인 노예는 절친한 동료 노예였습니다. 자신을 억압하고 자신에게 열등감과 적개심을 가진 로마 사령관 크라수스라는 인간 앞에서 그런 놀이를 강요당한 것도 어쩌면 모멸적인데, 그 현장에서 절친 동료를 죽이고, 자신은 어쨌든 노예에서 해방되고... 이 기묘한 상황은 객석에서 긴박감 그 자체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노예에서 해방된 스파르타쿠스가 노예 해방의 대의를 위해 나서지만 결국은 크라수스 군대에게 섬멸 당하고 자신도 전사하지 않습니까. 발레 〈안중근〉에서는 안 의사가 전투에서 패배한 다음에 부상을 입고 정신을 잃으며 다시 의병활동에 나섭니다. 여기서 긴박감은 물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예술의전당 제작 기획 · 문병남 안무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 ⓒ예술의전당




- 안중근 의사는 의병으로서 독립운동에 나선 군인이라 볼 수 있죠.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는 정부의 고위관리입니다. 두 사람을 맞닥뜨리게 하는 장치가 있었다면 혹시 긴박한 상황이 조성되었을지도 모르지요. 발레에서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두 번 조우하는데, 먼발치에서 연회장을 향해 총을 겨누어 보는 상상의 장면, 그다음 하얼빈에서 총을 겨눌 때도 먼발치에서 겨누는 장면, 두 가지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 대적 상황은 없었다고 볼 수 있죠. 안중근 의사의 영웅적인 서사가 깊이 있게 처리되지 않았다는 걸 여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서사 전개가 아주 평면적이고 서사 자체가 별다른 복선 없이 흘러가는 걸 느끼게 됩니다.

- 처음에 제대로 연구가 안된 상태에서 대본이 작성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거론되는 〈스파르타쿠스〉와 얼개를 유사하게 가져가려고 하니까 잘 모르고 썼나 생각했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한편으로는 안중근 의사의 생애 자체가 영웅적으로 그려지기엔 허점들이 보여요. 계몽 운동과 의병 운동의 중간 지점에서 그 어느 쪽에도 확실하게 서지 못 하고 둘 다 추진하려고 했고,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의병장으로서 한계가 있지 않았나 하는 기록도 있더군요. 군사 작전에서 신앙적이고 평화주의자적인 성향을 드러내서 생포한 일본인이나 상인들을 풀어주고 역으로 의병들이 일본군 기습을 받고 괴멸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군사들한테 신임을 잃었고 또 패한 뒤에는 연해주에서 다시 의병을 모집하려 했는데 호응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은 단독 행동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증명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는 짐작도 해봅니다. 여러 취약한 부분을 피하려다 보니까 있은 사실들을 건너뛰어서 어떻게 보면 상상에 가깝게 영웅이라면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짜 맞춘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간략한 서사가 돼버린 게 아닌가 합니다.

- 꿈 장면이 더러 나옵니다. 꿈 장면은 서사 전개에 있어서 유효하게 작동할 수 있는 장치이지요. 꿈 장면 자체가 무리가 아닐 것이고, 꿈 장면에 어떤 걸 넣느냐, 어떤 계기를 넣느냐가 중요하겠지요. 꿈 장면에서는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그렇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대적이라든지 이런 건 삽입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움직임 구성에서 창의성 보기 힘들어

- 발레 〈안중근〉에서 움직임은 고전발레 양식을 따른 것이고, 구성에서 창의성이 발휘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 창작 발레에서 파드되가 잘 나오지 않는데, 이번에는 김아려 여사와 안중근 의사 파드되가 두어 차례 나왔습니다. 그것도 강하게 나왔기 때문에 그 점은 긍정적입니다. 물론 그랑파드되는 아니지만, 웬일인지 창작 발레에서 흔히 간과되었지요. 그리고 무대 막을 거의 다 내린 상태에서 약간 들어 올려서 파드부레처럼 여성 집단이 프웽트 동작처럼 옆으로 이동하는, 일반적으로 많이 생각할 수 있는 테크닉 내지는 동작 구성법이긴 한데, 그런 걸 활용한 건 역시 긍정적입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의 압권은 전투 장면일 것입니다. 〈스파르타쿠스〉에서도 군무진이 전투하거나 병사끼리 무대를 휘젓는 장면이 핵심 장면이라 하겠습니다. 발레 〈안중근〉에서 독립하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것이니까 싸우는 장면이 핵심이 되거나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그 순간 자체가 핵심이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투 장면이 펼쳐지다가 그친 듯했고, 한 마디로 테마가 되는 장면이 없었고, 이 점을 등한시한 거 같아요. 전투 장면인 경우에 인원수가 모자라서 그럴 것이다고 짐작할지 모르겠지만 출연진 인원수의 부족이나 여건상의 문제라기보다는 전투 장면의 형상화 측면에서 장면 구성은 조금 있었는데 그것이 그다지 긴밀하거나 오밀조밀하거나 치밀하지 않았다는 판단입니다.

- 전투 장면도 〈스파르타쿠스〉 연출을 연상시키는 연출이 많이 있었죠. 붙잡혔을 때 〈스파르타쿠스〉 같은 경우는 창으로 사람을 때리는 거로 묘사됐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천장에서부터 내려온 밧줄로 묶어서 하는 식으로 묘사됐고 특히 군무의 유사성은 더 말할 것도 없는데 숫자가 많고 적고를 떠나서 제가 본 우리나라 창작 발레 남성 군무는 정말 〈스파르타쿠스〉의 아류가 아닌가 할 정도로 특히 국립발레단을 거쳐 갔던 중견안무가라면 남성군무를 그런 식으로 풀어내는 걸 아주 많이 봤었습니다.

- 〈스파르타쿠스〉 같은 경우는 음악을 작곡한 사람이 아람 하차투리안입니다. 아르메니아 사람이고 아르메니아는 당시 소비에트 전체를 봤을 때 약소민족이거든요. 목동 장면에서의 춤을 보면 남성들이 어깨동무하면서 무릎을 바닥으로 꿇으면서 혹은 튕겨내면서 하는 군무들이 아르메니아나 러시아의 민속무용에서 소스를 얻은 것들을 접목한 것입니다. 여기서 짚어볼 것은 로마제국의 검투사였던 노예들의 춤을 ‘고증’(考證)을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작하는 사람이 당대의 가치관을 담아 창작하게 됩니다. 소비에트 시절 체제의 선전물로서의 목적은 있지만, 작곡가가 가진 정서와 사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민속음악과 춤의 요소를 끌어와서 그것을 민중의 춤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그것은 충분히 노예 검투사들의 춤으로 성립할 수 있는 것이지요.

- 〈스파르타쿠스〉의 그 춤을 우리가 그대로 모방한다는 건 창작자에게 우리 민중의 것을 살려낼 의지가 정말 없다고 보이게 합니다. 그 부분이 사실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프레스콜 간담회에서 안무가 문병남 씨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러시아 유학 당시 우리가 가진 소재로 만든 발레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고요. 하지만 소재만 우리 것이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서양의 춤어법에 그대로 의존하면서 춤에 우리의 정신을 담을 수 없다면요.

- 예를 들면 한국 남성의 집단무, 과거 시대 전통사회의 춤은 지금도 자료를 찾아보면 적지 않습니다. 형상화 측면에서 참고할 측면들이 있습니다. 탈춤 같은 경우 일부이긴 하지만 그런 대로 보존되고 있고 집단무에서 착상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발레 〈안중근〉에서 고전발레를 활용한 그런 춤으로는 대표적으로 일본 복색을 한 기생들의 춤이 길게 나왔습니다. 그걸 보면 일본의 춤 정서나 모양새를 고려해보고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에 반해서 우리 전통사회에 있은 춤에 대한 고려는 해보았는지 의문입니다. 무대에서 나타난 결과로 볼 때, 그런 고민의 흔적을 짚어내기는 어렵습니다.

- 초연 때 혼례식에서 농악의 상모돌리기를 넣은 것은 그런 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보았어요. 다만 상모돌리기 같은 동작들이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클래식 발레 군무를 뒤에 둔 채 병행하여 펼쳐지니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굉장히 튀어보였던 것입니다.

- 안중근과 김아려의 파드되에서 하완(下腕)이나 종아리를 빙빙 돌려 결합시키거나 잔물결같은 손의 떨림을 넣어 동작하는 그런 부분은 안무가 나름대로 본인 춤의 색깔을 넣었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인상깊은 춤이라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 정작 핵심적인, 비중이 높은 장면에서 창의적인 움직임이 개발되지 않았어요.






예술의전당 제작 기획 · 문병남 안무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 ⓒ예술의전당




맥락에 어긋난 음악 선곡은 적절한가

- 음악은 이번에 초연과는 달리 부분적으로 작곡자가 작곡했어요. 안중근 의사가 감옥에 있을 적이라든지 꿈을 꿀 적에 또 부부 사이의 파드되에서 부분적으로 창작곡이 들어갔고, 나머지는 요한 슈트라우스, 말러, 림스키코르사코프, 파가니니, 생상 등의 음악들이 주로 편집되어 쓰였지요. 〈스파르타쿠스〉와 비견되려고 하면 전체가 작곡으로 전개되어야 하지 않았나 싶지요.

- 초연 때는 이번에 비해 클래식 음악 비중이 훨씬 높았기 때문에 음악으로 인한 단점이 더 두드러졌습니다. 사실 이번에도 그때 음악들을 상당수 그대로 썼습니다. 아무리 춤추기에 알맞은 음악을 선곡했다고 명분을 대더라도 맥락 없이 마구잡이로 음악을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 해요.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 음악 감독, 스태프진끼리 의사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은 구조였나 싶었어요. 이번에 쓰인 음악은 음악 애호가라면 배경과 작품에 대한 내용을 알고 있는, 말하자면 유명한 넘버들인데 그 음악들을 작품에서 과연 그대로 사용해도 되는지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극이나 드라마에 음악을 삽입할 때 이미 유명한 음악이 끌고 들어올 선입견과 내가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 일치하는지 아니면 배치되는지 기본적으로 체크해야 할 것조차 그냥 간과한 채 넘어간 느낌입니다. 상식이 있는 음악 감독이라면 지적했을 점으로 보이거든요. 아마 음악에 춤이 짜여 있기에 번복할 수 없다든지 그런 이유로 계속 밀고 나갔는지 몰라도, 한마디로 일관성 없는 선곡이었습니다.

- 저는 음악에 대해 세 가지를 지적하고 싶어요. 첫 번째로 혼례식 장면에서 사용된 슈트라우스의 〈박쥐〉는 비엔나 귀족 사회의 여흥을 다룬 오페라입니다. 시종일관 아주 코믹한 분위기로 흘러가는 오페라 작품의 서곡을 이 작품에 가져온 것은 말 그대로 그저 혼례식의 흥겨운 분위기에 충실하자는 것일 뿐, 구한말 격동하는 한국 사회에다 가져오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죠. 두 번째로 무희들 장면에서 〈셰헤라자데〉를 썼습니다. 이국적이고 관능적인 무드를 연출하려고 하면 마치 이 곡밖에 없다는 듯이 말입니다. 단편적인 분위기에 맞춰 특정곡을 연결시켜 반복 주입하는 것은 가벼운 예능 프로그램에서나 있는 일입니다. 세 번째, 천국에서의 춤, 감옥 씬에서 말러의 〈교향곡 5번〉 아다지에토를 썼습니다. 이 곡의 아련하고 감상적인 아름다움은 듣는 사람에 따라 말 그대로 지고(至高)의 순수함, 천국이 이것이라고 느낄 수도 있는 면모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듣기에는 이미 여러 작품에 사용된 맥락이 존재하는 곡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선 말러가 그의 아내 알마를 향해 미처 해소되지 않는 에로스적 갈망을 담아 작곡했다는 배경이 널리 알려져 있지요.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나 가깝게는 프렐조카쥬의 발레 〈스노우 화이트〉에서도 사용되었는데 모두 채 이뤄지지 못한 열정에 대한 갈증이 비극적으로 녹아든 장면에 사용되었습니다. 만약 안중근 의사를 단순히 애정을 갈구하는 한 남자로만 그리려 했다면 이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납득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실제로 안중근 의사가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릴 때 어머니나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굉장히 의연하거든요. 본인이 쓴 유서에 가까운 편지들을 봤을 때는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고 당당해요. 또 가족들도 그렇게 느끼길 바라는 의지의 표현이 있는데, 애욕이 넘치는 음악을 쓴 것은 인물에 대한 접근 자체에서도 의문을 갖도록 하는 선곡이었습니다.

- 정석은 없다지만 안중근 의사가 갖는 역사적 무게와 의거의 상징성을 고려해보면 음악의 선곡 내지 배치 자체가 음악의 배후 맥락보다는 음악 자체의 정서적인 분위기에 초점을 맞춰서 평면적으로 따라간 인상이 강했습니다. 각 음악들을 보면 화려합니다. 작곡가마다 음악 풍이 다를 텐데, 그래서 음악 배열 자체가 우선 산만하다고 할 수 있어요. 안중근 의사의 무게를 떨어뜨리는 음악 편집으로서, 여러 음악을 발췌해 산만하게 배치하는 것이 안중근 의사의 활약과는 좀 어긋나지 않았나 싶지요. 그래서 음악의 선곡 배열 자체에서 무게감이 떨어지고, 그래서 안중근 의사의 무게감마저 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죠.

- 또 시종일관 음악이 대형 오케스트라 편성으로 쿵쿵 울려대는 자체가 내면적인 고뇌를 그리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악기 편성을 줄여서 조용하게 느린 춤으로 소화해가면서 장면을 다변화시킬 수도 있을 텐데 그런 조율이 없이 일방적으로 퍼붓는 음량에 피로감을 많이 느꼈습니다.

- 혹시나 영웅 서사이기에 음악이 강해야 한다는 판단이 작용했을지도 모르겠죠.

- 전막 발레가 취하는 방식을 어느 정도 절제해가며 짧은 시간 안에 생음악이 아닌 부분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없었던 거 같아요. 감독과 소통이 잘 안 됐다는 추측도 들고 무드 자체에 치중했다고 봅니다. 작품의 주제 측면이나 또 발레에서 음악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런 점에서 얼마나 고려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 음악은 웅장하고 드라마틱한데 움직임 구성은 창의적인 게 없고 일반 클래식 발레 양식을 가져왔어요. 군무진 간에 깊이 있는 감정 공유, 상호교감이 드러나는 게 아니라 스타들의 감정 연기에 치중하다 보니 겉도는 것이었지요. 사전에 매우 역동적인 군무로 소개되었지만 역동성이 안 느껴지고 안 의사가 붙잡히는 장면에서도 전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아요. 군무진과 주역 배역, 음악 다 따로 겉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보면서 감정이 동요되지 않고 상호 교감도 안 됐습니다. 짧은 작품인데도 지루하고, 예측되는 결말이었고요. 드라마 발레가 가진 기본적인 요소 자체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감동적인 내지는 기억나는 장면을 꼽기가 어렵습니다.


부실한 형상화로는 영웅에 대한 상식을 넘어서기 어려워

- 무대 형상화 측면, 무대 장치나 영상을 보면 우선 하얼빈역 장면에서 마치 역으로 가는 듯한 잠시 동안의 장면이 삽입부로서 극의 전환을 알리는 부분으로 관객들에게 볼거리를 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활용된 영상도 뮤지컬 풍의 느낌이었지요. 주된 무대 장치는 삼면을 배열하였지요. 에워싼 삼면이 계속 고정된 상태로 역할을 달리하는데, 어떨 때는 감옥소가 되었다가 연회장이 되고 전투장이 됩니다. 여러 공간의 역할을 포괄하는 삼면 벽 장치였는데 디자이너가 나름 판단을 내려서 했겠죠. 〈스파르타쿠스〉 같은 경우는 무대의 막이나 배경 자체가 계속 바뀝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삼면의 벽을 막은 게 갑갑해 보였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감옥이니까 갑갑한 느낌이 들어야 했겠죠. 전반적으로 평이하면서도 갑갑했고 시각적으로는 그다지 세련되어 보이진 않았습니다.

- 기차 씬이 새롭고 입체적이다는 이유 말고 줄거리에 꼭 필요한 것이었나 의문이 듭니다. 관객 입장에서 꼭 직접적으로 체감을 해야 하나, 우리가 안중근의 시각이어야 하는지, 현대인의 시각이어야 하는지 어떤 주체가 돼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공을 들인 거에 비해서 극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바지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전투 씬에서 그물 같은 오브제도 천장에 매달리기만 하고 떨어지지도 않았어요. 덫에 걸렸다는 상징적인 표현을 하려고 한 것 같은데 실제 그런 방식으로 영웅이 잡혔다고 묘사하기에도 사실 우습지요. 그러면 굳이 제작을 해서 보여주어야 했을까요? 무대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각각의 합당한 이유를 갖고 용도대로 쓰임이 되고 퇴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체홉을 인용하면, 권총이 등장하면 그것은 반드시 발사되어야 합니다.

- 초연에서 강렬한 색감 위주로 쓸데없이 번쩍거리며 화려했던 데 비하면 의상 쪽은 전체적인 톤이 통일감이 있었고, 확실히 새롭게 제작된 느낌이었어요. 혼례식 장면에서 〈박쥐〉 서곡이 흐르는데 한복을 응용한 의상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였고, 초연에서 여성 무용수들 의상이 드레스 위주로 천편일률적이었다는 데 비해 비교적 다양화되긴 했지만 무희들의 의상은 노골적이고 천박해보여 보기 불편했습니다.

- 의상 문양, 옷깃이라든지 한복에 수를 넣는 등 세심하게 신경을 썼던 거 같고, 권장할 일입니다. 알록달록하고 울긋불긋하고 산만한 걸 일소하고 단출하면서도 품격있고 우아한 느낌이 나도록 신경 쓴 정도이겠지요.

- 출연진의 연기력이나 기량에 관해 이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출연진 가운데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와 이토 히로부미의 춤이 없었어요. 주요 조역들이 무대에서 다 춰야 한다는 건 철칙도 아니지만, 꼭 춤을 넣는다면 무슨 춤으로 처리할 것인가 하는 과제는 제기됩니다. 이런 것은 안무자의 판단 내지는 상상력에 따라 해결되어야 하겠죠. 안중근 의사 어머니 역할 비중이 큰데, 어머니의 심정이 한자락 춤으로 표현될 수 없었을까. 어머니의 말씀은 나옵니다. 제일 처음도 그렇고 마지막도 그렇고 어머니는 거동, 제스추어로 시종합니다. 그 역할을 맡았던 출연자는 중년의 발레 전문가 아닙니까. 어머니의 춤이 없었다는 게 아쉽고 또 이토 히로부미의 춤은 안중근 의사와의 대적, 대결 또는 적대적인 관계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쓰일 수 없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발이 어려웠는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 조마리아 여사의 춤이 없었다는 점에 정말 공감합니다. 기자간담회 때 김아려 여사 역의 김지영 씨는 가장 핵심적인 장면이 조마리아의 나레이션을 배경으로 조마리아 여사와 안중근 의사가 끌어안는 장면이라 생각한다고 했어요. 그것에 공감하면서도 조마리아 여사의 중요한 나레이션이 춤으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게 큰 문제라고 생각이 들거든요. 조마리아 여사는 독립군들 사이에서도 여걸로 유명했던 분입니다. 결국은 그 인물의 의지를 춤과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냥 어머니로서 아들을 안아들이는 것 말고는 달리 행동이 없었거든요. 몇 해 전 장혜림 안무의 〈마음으로 읽는 역사- 유관순〉에서 유관순 열사와 동지들의 의지와 정신은 춤으로 충분히 표현되었었습니다. 한 사람의 정신이 행동으로 발현되고 삶의 궤적을 남겼을 때, 그 총체를 춤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이미 연극, 영화, 뮤지컬로 제작된 바 있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춤으로 다시 접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술의전당 제작 기획 · 문병남 안무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 ⓒ예술의전당




- 김아려 여사가 애절한 것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조마리아 여사가 왜 애절함이 없었겠어요. 그런 중에서도 자식한테 의연하게 죽음을 대하라는 게 강조되어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발레 〈안중근〉에서는 김아려 여사에게서는 애절함이 남고 조마리아 여사에게서는 의연함만 남았습니다. 조마리아 여사의 춤이라는 것이 복합적으로 애절함과 의연함을 함께 전달할 수도 있을 거란 말이지요. 춤이 가진 복합적인 특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부터 조마리아 여사가 어느 정도 춤을 추는지 관심 깊게 봤는데 혼례 장면에서도 그냥 등장했다가 나가는 그런 식이었어요. 퍽 아쉬웠습니다. 발레 〈안중근〉에서 조마리아 여사는 춤으로는 아주 미미한 존재에 머물렀습니다.

- 조마리아 역의 김순정 씨가 프레스콜 끝나고 간담회에서 안무가가 여성의 시각, 어머니의 시각, 아내의 시각에 관한 부분을 잘 해석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에 그런 인간적인 측면들, 한국적인 모정, 아내의 순정, 희생, 애절한 삼자 구도가 발레로써 집중적으로 다뤄졌을 때 이 작품이 가치가 올라가고 그 부분이 하이라이트를 이룰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는데, 그렇질 못했습니다.

- 전체적으로 출연진들이 상당히 혼신의 힘을 다해서 작품을 펼쳐나갔습니다. 저는 프레스콜과 맨 마지막 공연을 봤습니다. 프레스콜에서는 이동탁 씨가, 마지막 공연에서는 윤전일 씨가 주역을 맡았습니다. 윤전일 씨 공연을 본 인상을 얘기하면 아주 절도 있고 연기 자체가 안중근 의사라고 할 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결기를 동반하면서 군데군데 부분적으로 폭발력을 보이더라고요. 윤전일 씨 체구가 작은 편이지요. 〈스파르타쿠스〉를 보는 일반적인 이미지와 비견되기 어려운데 한국 발레라고 했을 때 생각할 점이 있지 않나, 그런 체구로서도 적절하게 과단성 있는 역할 내지는 연결을 전개했다는 점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지요.

- 이 작품이 어느 정도 대중적 호소력을 확보했을지 궁금합니다. 관객들에게 수용될 만한 소재인 건 확실합니다. 한국에서 호소력 있는 소재이긴 한데, 몇 가지 주요 측면에서 안중근 의사의 활약 내지는 공로를 부각하는 데 있어서 미흡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일반 사람들의 마음속에 발레 〈안중근〉으로 새겨지는 안중근 의사는 어느 모습이었을지 궁금했어요.

- 뮤지컬을 많이 보고 취미 발레를 하는 친구와 같이 관람했는데 일단 무희 장면에서 너무 부끄러웠다고 하더라고요. 보통 관객이 보기에도 이 작품은 순수한 창작 발레라고 보기 어렵고, 무언가의 모방작처럼 보인답니다. 하고 많은 인물 중에 굳이 또 안중근을 선택한 것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고요.

- 그런 생각도 상당히 수긍이 갑니다. 왜냐하면 이미 널리 알려진 인물을 평면적으로 소개한다면 굳이 다시 형상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상식을 넘어서지 못하는 예술은 가치가 낮지 않습니까. 전체적으로 보면 화려하고 남성적인 측면이 있는데, 그게 오히려 발레 〈안중근〉에서 부정적으로 작용한 면이 있지 않았나 합니다. 작품의 밀도감이 떨어지고 완성도가 낮아지는 것은 예상되는 일이죠. 안중근의 인간적인 면모가 관객들에게 깊이 있게 전달되었겠는지 다시 물어야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연회장에서 총을 겨누며 그냥 스쳐 지나가고, 하얼빈역에서도 총을 쏘고 그냥 잡혀가며 끌려나가는 것으로 끝나고, 또 일본군 병사들과의 싸움에서도 그냥 잡히고요. 그런 장면들이 순간으로서 끝났기 때문에 안중근 의사의 행동 내지 거사 자체가 부각되지 않았다고 지적할 수 있지요. 부각됐다면 태극기 이미지를 배경으로 손가락을 꺾어서 병사들과 결의를 다지는 단지(斷指) 장면인데 〈스파르타쿠스〉의 장면과 상당히 유사하긴 합니다. 그러나 적과 대적하려는 결의 측면에서도 역시 밀도가 낮았다고 봅니다.

- 작품 전체로 보아, 발레 〈안중근〉에서 전달받을 핵심주제나 정서로서 안중근 의사의 결기는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상식에도 미치지 못했다 하겠습니다.

- 실제 공연에서 공연 후 커튼콜이 시간적으로 과도하게 길어 보였습니다. 커튼콜에 정칙이 있겠습니까마는 셀 수 없이 반복적으로 등퇴장하는 커튼콜은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퍽 어색했습니다. 이로 인해 공연의 여운이 감퇴하는 부작용은 없었겠는지 연출진은 진지하게 반추해 보았으면 합니다.

2021. 9.
사진제공_예술의전당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