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바비레따〉 10주년, 춤추는여자들
경계 허문 커뮤니티댄스로 세상에 스며들다
  • 일    시
    2022년 2월 9일(수) 오후 6시
  • 장    소
    아카데미아인(서울 동교동)
  • 사    회
    김채현_〈춤웹진〉 편집장
  • 참석자
    강애심 장은정 최지연 김혜숙 조민수

 

 




김채현: 저는 그동안 개인적으로 〈바비레따〉 공연을 일곱 번 정도 관람했습니다. 한국춤비평가협회에서는 방방곡곡에서 힐링의 분위기와 상황을 조성한 공로를 기려서 ‘2021 춤비평가상 특별상’을 수여했습니다. 그동안 전국에서 100회 정도 공연을 올린 줄로 압니다. 그간의 노고에 비추어 활동이 정확하게 기억되어야 할 것이고, 앞으로 이 같은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늘어나길 기대합니다. 〈바비레따〉는 2011년 춘천에서 시작하여 2021년 12월 연말 아르코예술극장에서의 공연까지 10년 넘는 작업이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우선 〈바비레따〉 출연진 5분으로부터 2011년 춘천에서 〈바비레따〉를 시작하게 된 동기나 계기부터 순차적으로 말씀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2011년에 시작한 〈바비레따〉의 원년 멤버인가요?
장은정: 다섯 멤버 가운데 2013년 조민수 선생님이 합류했고 나머지는 원년 멤버입니다. 〈바비레따〉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좀 복합적입니다. 저는 김혜숙 선생과 오랫동안 한국컨템퍼러리무용단에서 활동했어요. 몸이 잘 움직여지던 시절에 생각을 조금 더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나중에야 들더군요. 우리는 대학에서 미국식 마사 그레이엄 테크닉을 교육받았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희들 몸에는 맞지 않았어요. 각자 몸이 다르고 히스토리도 다른데, 마치 자로 딱 잰 듯했거든요. 예를 들어 발레에서 턴 아웃이 180도 되어야 하고, 턴을 몇 바퀴 돌아야 하는 것 같은 형식적 테크닉들이 있잖아요. 우리가 배운 현대무용에도 유사한 개념들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행복한 시절이었고 선후배들과 선생님들께 좋은 것도 많이 배웠어요. 그런데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이게 다가 아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보니 그런 생각을 한 지도 20년이 넘었군요.
 2000년 무렵 당시 춤계에서 춤의 대중화와 소통이 화두였어요. 주변 친구들과 오랫동안 ‘대중화란 무엇인가?’ 고민을 나누면서 비슷한 지점을 발견했습니다. 춤이 대중화되려면 관객과의 소통을 잘 이루어야 하는데, 우린 너무 멀리 있는 사람 같더라고요. 근대 이후, 프로시니엄 무대는 관객과 너무 멀리 있고 해서 적절한 답이 선뜻 내려지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가장 중요한 건 몸의 자각이었습니다. 특히 마사 그레이엄 테크닉이 불편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음에도 이 테크닉을 수행하지 못하면 루저가 되는 그런 분위기였죠. 제가 2005년에, 40여 년의 한국 현대무용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한국현대무용 뮤지엄 초청 공연’에서 한국컨템퍼러리무용단 도반들과 함께 작품 〈RED〉를 발표했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활동한 친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인데, 2005년 이후 김혜숙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어요. 결국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머리를 맞대고 마음을 모아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에 5~6년간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떤 그룹과 접촉해서 워크숍을 하기도 했고요. 때마침 2011년, 춘천아트페스티벌이 10주년을 맞이했죠. 춘천 시민들이 너무나 자발적으로 잘 참여해주는, 유례없는 축제이지요. 축제의 장승헌 대표님이 우리가 무언가를 하고 싶어하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대표님이 ‘이번 춘천아트페스티벌에서 10주년 기념으로 춘천 시민들과 함께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는데 해보겠는가’고 제안해서 그 기회에 한 거죠. 춘천 행사 때는 최경실 선생님도 같이 했고, 우리가 40대 중반이었기 때문에 중년 여성을 타깃으로 하여 30~50대 춘천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참가 신청을 받았는데 60대 언니도 왔어요.






2011년 춘천 어린이회관 ©이도희




춘천 시민 몇 분이 무대에 참여했던가요?
장은정: 처음 모였을 때 15명 정도였는데, 각자 생활이 있다 보니 결국 열 명 정도 함께 했습니다. 10회 워크숍을 거쳐 공연작을 만들었지요.

춘천아트페스티벌 할 적엔 강애심님과 최지연님도 참여하셨습니까?
장은정: 아니요. 그 작업은 같이 못 했어요. 저랑 김혜숙님과 최경실 그리고 춘천 여성들이 참여하였어요.

당시 무대작 제목은 무엇이었어요?
장은정: 〈당신은 지금 봄내에 살고 있군요〉입니다. 춘천의 우리말이 ‘봄내’입니다. 춘천 작업을 하면서 참여자들한테서 아주 소중한 가르침을 얻어서 네 사람이 같이 만들이 시작했고, 2012년 아르코극장 옥상의 다락에서 공연을 올렸죠.

처음 할 적에 음악은 어떠했습니까?
장은정: 쇼스타코비치 〈왈츠〉, 〈소양강 처녀〉, 장기하 〈달이 차오른다〉 그리고 물 같은 자연의 소리를 편집했어요.




장은정




〈바비레따〉하면 관객과의 대화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은 텐데, 춘천의 첫 공연에서도 관객들과 함께 하는 대사가 있었던가요?
장은정: 대사는 있었습니다. 처음 했던 춘천시어린이회관은 아크로 무대잖아요. 그래서 그때는 춘천 여인들이 가고 싶은 곳을 골랐어요. 각자 나는 누구인가를 얘기하고, 두 분이 〈소양강 처녀〉를 불렀어요. 나(자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컨셉이었어요. 그래서 춘천뿐 아니라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택할 수 있었지요.

각자 소망하던 여행을 풀어냈다고 할 수 있겠군요. 공연 시간과 의상은 어떠했던가요?
장은정: 작품 길이는 20분간 이었습니다. 의상 재질은 조금 달라지긴 했는데, 지금 의상과 첫 번째 의상이 같아요. 의상은 민천홍님과 통화로 의견을 주고받았고, 춘천에서 우리보다 먼저 의상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김혜숙: 옷이 주는 마력이 있었어요. 그대로 보관하고 이번 공연 때 다시 입었는데, 그 기억이 그대로 소환되더군요.

그때 해보니까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까?
김혜숙: 그때 한 1주일간 언니랑 춘천에 머물면서 자나 깨나 계속 아이디어를 냈어요. 워크숍 하면서 받은 영감을 아침에 눈 뜨자마자 이야기하고 둘 다 완전히 몰입되어 있었죠. 정말 재밌었고, 하고 싶었던 걸 찾는 과정이었어요. 공연 당일 이분들이 처음 공연하는 거라 떨 것 같아서 걱정했어요. 공연 앞뒤엔 프로 무용수들의 공연도 있었지요. 그런데 떠는 게 아니라 마음껏 하시더군요.(웃음) 오히려 우리들의 움직임이 인위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분들이 주는 생생한 날것의 에너지, 무언가 일어나는 일을 경험하는 것은 충격적이기까지 했어요. 그래서 ‘앞으로 마음껏 모험을 떠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죠.




김혜숙




긍정적으로 인상적인 느낌을 받았다는 거네요. 그러고 몇 달 후, 2012년 1월 서울 다락에서 공연하게 된 경위는요?
김혜숙: 서울문화재단에서 지원금을 받았습니다.

서울문화재단에 지원한다면, 2~3월에 결과가 나올 텐데 1월에 했잖아요.
김혜숙: 그 전해에 신청했어요. 춘천에 갔다 오고 어떤 공연을 해야 할지 생각하면서 기획서를 쓰기 시작했거든요.

2012년 1월에 한 그 포맷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나요?
장은정: 큰 틀은 같습니다.




조민수




음악의 조민수님은 언제 합류하셨나요?
조민수: 2012년 1월 공연에는 참여하지 않고, 그해 말에 합류했어요.

2012년 1월에는 네 분이 출연하셨고 어떻게 진행됐나요?
장은정: 그때 이충우님이라고 다른 연주자가 있었어요. 춘천아트페스티벌에서 하기 전에 모여서 워크숍을 같이 했고, 2012년 1월 공연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어요. 그리고 우리가 춘천에서 경험한 것들을 토대로 서로 아이디어를 내서 여러 모로 시뮬레이션을 했어요.




2012년 춘천 축제극장 몸짓 ⓒ우종덕




2013년 8월 다락에서 한 공연을 처음 봤고 인상적이어서 리뷰(〈춤웹진〉 2013년 11월호)도 썼습니다. 〈바비레따〉의 상세 내용에 대해서는 그 리뷰를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그 포맷이 유지된 거죠?
장은정: 네, 2012년 첫 공연 때부터 큰 틀이 있었어요.

제일 처음 할 적에 음악은 어떻게 해결했나요?
장은정: 장면에 맞는 MR을 고르고 민수님과 같이 하는 형태처럼 타악기 연주자와 함께 했어요.

2013년에 관객들과 함께 노래를 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2012년에도 같은 포맷이었다는 거죠?
장은정: 네, 그리고 애심 언니가 통기타를 연주했죠.

강애심: 그때는 관객과 함께 공유할 가요를 불렀고, 그후 공연에는 시를 간략하게 추출해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가사로 노래를 만들어 같이 불렀어요.

강애심님은 어떤 계기로 동참하게 됐나요?
장은정: 제가 안경모 연출 〈살〉이라는 연극 작품에서 안무를 맡으면서 강애심 언니를 마치 운명처럼 만났어요. MT를 갔었는데 애심 언니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 부르더군요. 언니를 본 순간 ‘우리한테 없는 것을 채워줄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그렇게 언니와 함께하게 된 거죠.

강애심: 춤을 좋아해서 춤을 추고 싶었는데, 저에게 제안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강애심




조민수님은요?
조민수: 그전에 작업하던 이충우님과는 학교 선후배 사이입니다. 그 친구가 이 공연에 참여할 수 있냐고 묻길래 처음에는 고사했어요. 시간이 조금 지난 후, 활동하던 팀에서 나와 있던 차에 다시 묻더군요. 그리고 장은정 선생님과 제 아내가 아는 사이였어요. 장은정님이 안사람을 통해 연락을 주셨던 거로 기억해요. 아무튼 압력이 사방에서 와서 수락했죠.(웃음)

장은정: 당시 조민수 선생님이 ‘공명’에서 활동했고,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민수님에게 부탁드리고자 했으나 조금 어려웠어요. 우리도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몰랐고, 민수님도 일이 많았죠. 우선 같이했던 충우님이 활동 그룹이 많아지면서 민수님이랑 하고 싶다고 사정을 했어요. 그렇게 같이하게 됐습니다.

조민수: 제가 하는 연극이나 무용 작업과는 아주 달랐어요. 연극 같은 경우는 대본이 있고 브릿지 음악이라든지 어떤 사람의 음악이 있듯이 기본 포맷이 있죠. 이 작업에선 각자 맞는 악기를 선택하거나 또 다른 고민이 요구되었습니다만, 다행히 다들 긍정적으로 수용해주셨습니다.

강애심: 초연 때와 민수님이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음악 포맷이 서로 달랐었어요. 2012년 10월 인천아트플랫폼에서 했는데, 그때는 춤추는 여자가 5명이었어요.

장은정: 인천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김희진 선배 무용가와 함께하게 되면서, 인천문화재단에서 지원받았어요. 그때는 무용극처럼 여자들이 가진 이야기들을 구체적으로 다뤘습니다. 예를 들면 가방을 들고 어디를 떠나는 여자, 빨래 더미에 묻힌 여자 등 구체적인 캐릭터를 설정했어요.

김혜숙: 기획에 따라 포맷 안에서 유동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추가했지요.






2012년 인천아트플랫폼 공연 ⓒ이현준




야외에서도 했었던가요?
장은정: 인천아트플랫폼 C공연장에서 하고 다 같이 밖으로 나갔어요. 밖에는 나무 데크가 크게 있어요. 민수님이 북치는 소년이 되었어요. 큰 북을 매고, 다 같이 따라 나갔고, 다시 공연장으로 들어오면 나이트클럽처럼 분위기가 바뀌어서 함께 놀 수 있게끔 만들었지요.

김혜숙: 재밌었어요. 야외에 있다가 다시 들어가는데, 나이트클럽처럼 되어있다 보니 사람들이 즐겁게 춤췄어요.

최지연: 초반부터 지금까지 음악의 변천사가 있어요. 처음 할 때는 오프닝 때 장기하와 얼굴들의 〈달이 차오른다, 가자〉를 사용했다면, 나중엔 하하의 음악을 틀었어요. 전 특히 〈베사메 무초〉를 잊지 못해요. 정말 몸이 저절로 움직여졌어요. 그리고 카로 에메랄드의 〈파리〉도 사용했는데, 마력처럼 몸을 가만히 둘 수 없고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이번 공연 때는 라이브 음악을 많이 사용했고 변화를 주고자 했지만 결국은 프렌치 음악을 고수했죠.




최지연




조민수님은 작업 참여에서 어떤 점이 가장 인상이 남는가요?
조민수: 회의를 정말 많이 합니다. 3시간 연습이면, 2시간을 회의하죠.(웃음) 저는 거의 의견을 개진하지 않는 편인데, 대부분 서로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받아들이고 안 될 것 같더라도 열린 마음으로 일단 해보시죠.

강애심: 그중 딴지를 거는 사람은 저였어요.(웃음) 작업 방식이 다르다 보니 버겁고 힘들었어요. 우선 작품을 해석하는 방법이나 구성법이 너무 다릅니다. 연극은 정확한 지시가 있어요. “오른쪽으로 몇 걸음 가서 고개를 돌려라”라고 하죠. 그리고 움직일 때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감정을 갖는지 사전에 분석해야 하는데, 이 작업에서는 “일단 가봐”라고 하는 거예요. 저한텐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가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여러모로 작업 방식이 달랐어요.

조민수: 제 기억엔 강애심님께서 “관객들에게 강요하지마”라는 말씀들을 하셨어요. 우리에겐 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누군가에겐 강요가 될 수 있다는 거죠. 이 말이 제 기억이 많이 남았어요.

조민수님이 음악 선곡을 하나요?
조민수: 아니요. 음악을 가끔 만들긴 하지만 제가 선곡하진 않았어요.

장은정: 이번에도 민수님이 물 음악을 만들었어요. 보통 모두 작곡하는 게 맞습니다만 기존의 음악을 사용한 이유는 관객과 더 가까이 편하게 만나기 위함이었어요. 그리고 고답적인 형태의 예술을 탈피하고 싶기도 했고요. 그런 면에서 제가 민수님, 애심 언니와 함께 하고 싶은 이유가 있었어요. 연극 작업에서 움직이는 시간을 가졌는데, 애심 언니가 제일 먼저 나와서 열심히 움직이는 거예요. 앞서 언니가 말한 것처럼 작업 방식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데, 춤을 추는 사람들은 직관적인 게 크잖아요. 민수님 같은 경우는 한태숙 선생님 집단과 작업을 많이 하셨는데, 연주할 때 사람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와 너무 잘 맞겠다고 생각했어요. 애심 언니가 중요했던 건 물론 배우로서 노래, 기타, 대사를 잘하는 것도 있지만 관객 역할을 해주셨어요. 춤추는 사람만 있다면 간과하고 넘어갈 문제를 끊임없이 짚어주었어요. 그리고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던 것을 해볼 용기를 얻었던 것 같아요.






2015년 〈Young 바비레따〉 ⓒ민영주




중간에 2015년에 〈Young 바비레따〉를 했잖아요. 그 발상은 어떻게 나왔습니까?
장은정: 아르코에서 ‘극장은 내 친구’라는 기획을 했는데, 청소년 대상으로 하기를 원해서 〈Young 바비레따〉를 만들었어요.

최지연: 전 〈Young 바비레따〉라는 제목 앞에 붙인 ‘쫌 놀아본 언니’라는 말이 더 와닿았어요.

〈Young 바비레따〉는 왜 한 해만 했었지요?
장은정: 영 보이가 비보잉을 하던 친구였어요. 제가 국립현대무용단에서 3년간 일반인 무용학교를 수업하면서 만난 친구인데 공연하고 난 후에 입대했어요. 그에 맞는 사람을 찾기 힘들어서 공연이 연속되지 못했죠. 그래도 그해 지방에 한 번 갔어요.

바비레따를 10년간 지속했는데, 이번 공연 제목을 보면 〈바비레따, 열 번째 계절〉이라고 붙였습니다. 10년을 의미하는 것 말고 다른 은유 내지 감춘 뜻이 있나요?
장은정: 처음에 중년 여성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중년 여성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더군요. 그래서 성별은 물론이고 다양한 연령대, 어린아이들까지 각자의 바비레따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열 번째 계절, 그러니까 그것이 나한테 몇 번째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계속될 것이고, 꼭 우리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바비레따의 계절을 계속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2021년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옥상훈





2018년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옥상훈



2018년 제주 현대미술관 ⓒ조재무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있군요〉, 어떻게 이 제목을 착상했습니까?
김혜숙: 춘천 가기 전에 최경실 언니와 같이 러시아에 있다 귀국한 장정희 작가를 만났어요. 작가가 ‘러시아에서 바비레따는 중년 여성들에게 바치는 극찬의 말’이라면서 ‘바비레따’라는 제명과 함께 간단한 주제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나이 들었지만, 삶의 경륜과 연륜으로 얻는 원숙한 아름다움을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발전시켰죠.

제목 때문에 끌리는 사람이 많을 거로 생각합니다. 안정감이 있고, 여성들에게 그때 알았더라면 하는 것과 동시에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는 걸 시사합니다. 지난 나날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바비레따〉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역설적인 이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행 중에 본인 고백과 관객과의 소통도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순회 활동을 하면서 그에 얽힌 인상적인 순간, 기억날 만한 순간들이 적지 않을 텐데요.
최지연: 경주 안강에서 공연을 했는데 관객층 연령대가 80대였습니다. 관객들이 말씀을 나누는 요지를 보니, “살아생전 속 태우고 화났지만 돌아가고 나니까 너무 그립다. 남편한테 잘 해라”라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고 나갔더니 운동장에 할아버지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기다리고 있었고 할머니들을 픽업해서 가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운 거예요. ‘저런 모습으로 늙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많은 얘기를 나눴던 기억이 있어요. 그리고 미국에 사는 제 친구가 갱년기가 너무 심해서 한국에 왔어요. 예원, 예고, 이대 무용과 졸업하고 창무회 활동을 하다가 아예 춤을 그만둔 친구인데, 즉흥적으로 청주 공연에 같이 가게 되었어요. 그 친구는 갱년기 여행이었죠. 춤을 그만 둔 사람은 춤추는 모습을 보면 가만히 있지 못해요. 그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어요. 이제는 우리가 SNS에 게시물을 올리면 답을 열심히 달아주는 열렬한 팬이 되었어요. 또 다락에서 공연했는데, 암에 걸리신 관객이 모자를 벗고 머리카락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시고, 힘을 얻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마지막으로는 같이 공연 보러 온 고3 아들과 엄마가 서로 완전 반대쪽에 앉았는데, 아들이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모습을 봤어요.

장은정: 다락에서 다리가 불편한 70대 언니가 불편한 분들을 위해 놓아둔 의자에 앉았는데, 마이크가 그곳까지 닿지 않아서 말을 못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그쪽에 마이크를 보냈더니 “설거지 그만두고 입은 채로 당장 나가라”고 하는 거예요.(웃음) 관객들이 손뼉 치며 환호를 보냈어요. 그러고 나서 다 같이 춤출 때는 벌떡 일어나서 춤추셨어요. 그리고 우리가 고백하는 시간을 갖잖아요. 특히나 저는 무대에서 마이크 잡고 말하고 노래하는 게 힘들었어요. 애심 언니의 지도로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때 주제를 정했어요. 각자 어떤 일이 있는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거죠. 누구는 부모에 대해서, 또 누구는 사랑 혹은 남편에 관해 이야기하는 등 주제를 정했어요. 그런데 이야기하는 도중 어떤 관객이 불편하셨던지 중간에 일어나서 나가셨어요. 무언가 건드렸나 봅니다. 이런 일을 겪으며 오히려 더 조심해야겠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어떤 분은 아르코를 통해 공연을 예매했는데 이런 공연인지 몰랐던 거예요. 대부분 연극인 줄 압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다르니까 금방 나가버리기도 했어요. 또 아이들이 있으면 전체 에너지가 달라집니다. 아이들은 정답이에요. 우리가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고 아이들을 통제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아주 불편하지 않는 이상 가만히 둡니다. 중간에 들어와서 움직이기도 하고 놀 때도 있지만 집중할 때는 정말 집중해서 봅니다. 그리고 의외의 대답을 하기도 하고요.






2014년 아르코예술극장 스튜디오 다락 공연 ⓒ이현준




출연자가 개인사를 고백하는 순간이 제 개인적으로 볼 때도 퍽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을 일이기도 합니다. 관객의 눈높이라 말할 수 있는데, 출연진이 스스로를 낮추는 거죠. 저는 이 공연의 핵심으로 보고 있습니다. 주로 몸 연기에 치중하거나 그걸 중심으로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데, 무대에서 눈높이의 고백을 한다는 건 무용인으로서는 큰 변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변신의 결단을 내리기까지의 고심도 적지 않았을 듯합니다.
장은정: 저 같은 경우 2005년 이후, 2011년에 우리가 만나기 전까지 이런 이야기를 끊임없이 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의 일등 공신은 김혜숙님의 남편입니다. 아르코예술극장은 극장이 주는 위압감과 권위스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락극장으로 오려면 빨간 벽돌 사이로 3층에 올라서 문을 열어야 하고 그 순간 하늘이 보여요. 거기서부터 사람들은 일테면 어떤 벽 하나를 허물고 다락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입구에서 “안녕하세요”라면서 맞이해줄 때 또 한 꺼풀을 벗죠. 그러다 화룡점정은 어느 미모의 출연자가 “제가요, 10년 전에 이혼했거든요”라고 말하는 순간입니다. 사람들은 거기서 무장 해제가 되는 거죠.

김혜숙: 남편이 자기 이야기를 한다고 공연을 보러 오지 않아요.(웃음) 당시에 제 속의 것을 터놓고 드러내야만 하는 개인적 절박감이 있었어요. 그전까지는 힘들어도 참고 감당하려고 애썼는데 병이 나더라고요. 공연을 통해 제 이야기를 마음껏 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저는 치유되었어요. 겉으로 괜찮은 척 살았던 나로 인해 병들었지만, 내 이야기를 하고 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같이 치유되고 기운을 얻으면서 살아갈 용기가 났어요. 남편과 재결합하면서 나름 고민도 있었지만 힘든 것을 이야기하면서 힘을 얻고 극복했어요. 제가 성장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아까 낮춤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드러냄이 없으면 낮춤이 되지 않지요. 출연자가 솔선수범해서 자기를 드러내면서 낮추는 거예요. 일반 춤 공연에서도 드러냄이 있겠지만 성격이 좀 다르겠지요. 그러니까 흉중의 속마음, 고뇌 내지는 고심하는 바를 솔직하게 드러내니까 저절로 낮춤이 이뤄진 겁니다. 우리가 연기자를 존중해야 하지만, 우러러보는 차원은 아니란 거죠. 관객들에게 솔직하게 다가가면서 소통뿐 아니라 힐링의 장으로까지 나아갑니다. 제목에서도 ‘관객참여형 감성 치유 프로그램’이라고 했잖아요. 치유에도 여러 형태가 있겠죠. 의사한테 가서 치유받는 것도 있고 공연에서 소통을 통해, 관람을 통해 힐링할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런데 무대 공연 형태를 갖고 힐링을 기할 때 밀도가 짙은 경우를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공연이 힐링 효과가 크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무대 출연자가 먼저 힐링될수록 다른 사람을 힐링시킬 수 있다는 점도 감지하게 되었고요. 진솔이라는 측면에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는 부분이 아닐까 해요. 힐링 관점에서 출연진으로서 느꼈을 점이 많을 거로 생각하는데, 그 점을 소개해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차후에 이러한 유형의 공연이 나올 때 보탬, 지침이 될 수 있는 소감이라고 할까요.
조민수: 제가 이야기를 잘 못 하기도 하고 어릴 때는 내면의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점점 나이 들면서 이제 못하게 되더군요. 꺼내고 싶지도 않고요. 그런데 그것들을 안에 갖고 있으면서 오히려 상처가 되기도 하고 힘들어지기도 하잖아요. 누구와 소통하면 좋을 텐데, 옆 사람과 소통하자니 창피하기도 하고요. 〈바비레따〉에서는 먼저 다가와서 이야기를 건네고 아는 사람도 없다 보니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러한 것들이 힐링을 주기보단 자기 치유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무엇보다 출연자들이 가장 많이 치유받았을 것 같아요.




2021년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옥상훈




조민수님 가족들은 공연을 봤나요?
조민수: 네, 이번에 자료 정리하면서 장은정 선생님이 영상을 보내주셨어요. 예전에 제 아내가 공연 보러 와서 저도 모르는 옛날 이야기를 하더군요. 제가 그걸 들으면서 아내를 더 이해할 수 있었고 더 사랑스러워지기도 하고, 더 관심을 두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내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지만, 아마 서로가 서로를 치유하는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 자리에서의 힐링도 있지만 공연 보고 난 이후에 드문드문 힐링이 연속되면 더 바람직스러울 것 같군요.
김혜숙: 공연 때마다 지금의 고민, 삶의 문제를 나눠요. 요즘은 어떤 점이 힘들지, 우리 안에 또 어떤 것이 있을지 찾는 과정을 거칩니다. 힘든 것에 눌리는 게 아니라 삶 속에서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자신을 더 생각할 수 있는, 나를 돌봐줄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최지연: 무대 공연을 하다 보면 정말 죽겠다 하는 포인트들이 있잖아요. 이 공연을 한 시간 반 정도 하고 하면 서 있을 힘이 없을 만큼 소진됩니다. 어떨 때는 초반부터 힘이 빠지는데, 공연을 끝내고 나면 어떤 선물을 받은 느낌입니다. 엄청나게 울었는데 오히려 기운이 더 생기는 것처럼요. 아까 힐링을 말씀하셨는데, 저는 관객한테 무엇을 줘야지가 아니라 이 공연이 저한테 무언가를 줍니다. 그래서 제가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걸 느껴요. 저 자신이 참 많이 바뀌었어요. 제 남편한테 하지 못한 이야기를 저도 모르게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는 저 자신을 보면서 아주 놀라기도 합니다. 가끔씩 공연 중에 “언니가 제일 이뻐”라는 말을 들으면 힘을 받고, 너무 신기한 작업입니다.

조민수: 공연 들어가기 전에는 무릎이 좋지 않아서 계속 다리 만지시거든요. 그런데 공연 끝나고 보면 ‘어떻게 저런 표정이 나오지?’라는 생각도 들어요.

김혜숙: 요즘 10년을 맞아 〈바비레따〉 사진 정리하는 작업하면서, 우리의 역사를 보게 되었어요.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을 발견했고 그 순간들이 기억납니다. 이 공연은 그 사람들과 그 시간에 일어났던 순수한 우리들의 반응이잖아요. 한 사람 한 사람 변천사를 보면서 신기했어요. 저 같은 경우는 처음에 무겁고 어두운 면이 많았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익살스럽고 발랄한 모습으로 변하는 거예요. 이런 저를 보면서 놀랍고 우리가 같이 이렇게 나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게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강애심: 아까 이야기했지만 전 사실 비판적이었어요. 사람들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피드백줄 수 있는 재간이 필요한데, 우린 그런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이야기를 잘 할 수 있을까?’ ‘관객에게 마이크를 주는데, 관객이 고개를 돌리면 마이크를 건네는 사람은 얼마나 민망할까?’ 등 항상 노심초사했어요. 그래서 전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없어요. 기타 반주를 치면서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봤거든요. 그런데 어쩔 땐 관객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와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비판적 자세로 ‘저건 하지 말라고 했는데?’라는 생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게 되기도 하더라고요. 그런 순간을 많이 느꼈어요. 작품을 끊임없이 바꾸고 새로운 걸 시도하는 모습을 보면 ‘더 깊이 있게 가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래도 10년간의 과정에서 제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장은정: 10년을 하면서 한 번도 같은 버전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언니는 “항상 왜 또 바꾸니?”라고 하죠.(웃음) 공연마다 최선을 다해서 만들지만, 모자란 게 꼭 발견되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보완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수정해야 하죠. 항상 현재진행형이지, 마침표를 찍는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하지요.








2021년 아르코예술극장 공연 ⓒ옥상훈




〈바비레따〉를 30곳에서 거의 100회 했어요. 앞으로 이 작업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요?
강애심: 처음 시작할 때 환갑이 되면, 작은 마을 회관에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셔놓고 공연하면 재밌겠다고 얘기했는데 벌써 곧 환갑이네요.

김혜숙: 이번 공연하면서 이렇게 무대에서 움직이는 건 마지막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지만 춤은 계속될 것이고, 우리 몸이 어떻게 되든 삶의 이야기와 춤추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찾아갈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해요.

말하자면, 새 버전이 나오거나 후진들이 할 수도 있겠죠.
강애심: 그런 상상을 한 적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상설공연을 한다면, 우리가 다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농담 삼아 초반에 팀을 구성해서 우리는 이 공연, A팀은 지방 공연, B팀 또 다른 공연을 하자고 했죠.(웃음) 그리고 본인의 캐릭터에 맞는 사람을 데려와 보자고 했는데, 아무도 없었어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동안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거라 이 사람에게 가르쳐줄 게 없는 거죠. 어떤 팀이 만들어진다면 옵션을 통해서 새롭게 만들어야 해요. 그래서 후진 양성은 불가능할 듯해요.

장은정: 우리 처음 시작할 때 한 10년은 해보자고 했어요. 그래서 무언가가 생기지 않겠냐고 생각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올 줄 몰랐지만 한 해가 지나고 다음 해가 되고 또 다음 해가 되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관객들이 “백 년 동안 해주세요” “오래오래 해주세요”라는 말씀을 주셨어요. 지금과 다른 형태일 수도 있지만 더 깊숙이, 더 세심하게 들어가서 관객과 만나고 싶은 마음이 10주년이 되면서 강해졌어요. 올해 우리의 꿈은 사람들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밥도 먹고 산책할 수 있는 숲속 아지트와 같은 공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김혜숙: 그래서 그런 워크숍을 계속 시도하고 있거든요. 우리가 더 연구해서 콘텐츠나 프로그램을 만들면 좋지 않을까 해요.

장은정: 작년 12월 말일에 공연하면서, 연말 공연으로 해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2021년 제주 공연 ⓒ박중일




아르코극장에서 밀도 있게 진행이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아무래도 관객과 주고받는 게 누락되거나 상당 부분 생략될 텐데, 가능할까 싶었죠. 대체로 관객 반응이 긍정적이었습니다만, 조금 더 주고받는 게 있었으면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한 순간이 전체 공연 시간 가운데 길지 않아도 한 10분 정도는 삽입되었으면 어떨까 싶더군요. 그리고 마지막에 관객과 함께 춤추는 부분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아르코 대극장에서 처음 했으니까 보완책이 나오겠죠.
장은정: 공연 일주일 전에 대학로 소극장에서 진행된 연극 공연에서 문제가 생겨서 기립이 안 된다고 하더군요. 원래는 기립할 순 있었어요. 아무것도 안 되는 바람에 문제들이 생겼어요. 그렇지만 아무것도 같이 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 올해 그 방식을 찾아야 하지요.

올해 공연 계획은 어떻게 잡고 있나요?
장은정: 올해 지원금 신청을 하지 않았어요. 작년에 지원금을 많이 받아서 여러 가지 시도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 지원금을 신청한다고 하면 동일한 레퍼토리가 아니지만 주관처 입장에서는 같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래서 한 해 쉬고 버전을 달리하려 해요. 그리고 우리 작업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직장 문화배달’입니다. 직장인들이 공연을 잘 보지 못하니까 예술가가 직장으로 찾아가는 거죠. 회사마다 오너가 누구냐에 따라 분위가 정말 달라요. 올해는 이 사업을 진행하려 해요. 그리고 작은 그룹으로 워크숍을 열어서 연구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어요.

이제 하나의 매듭을 지었다면, 그 다음으로 나갈 전환점 내지는 의미를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방금 숲속 이야기를 했는데, 이와 유사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으면 좋겠지요. 커뮤니티댄스 대가 안나 핼프린이 샌프란시스코에서 70년간 그렇게 했어요. 건축가인 남편이 조촐한 데크를 숲속에 조성해줬어요. 안나 핼프린은 1970년대부터 커뮤니티댄스를 본격적으로 했어요. 2010년대 중반까지 딸이 운영했다 하더라도 매년 6월에 하는 커뮤니티 행사에는 2020년까지 본인이 참여하고 지도했을 거란 말이죠. 2021년 5월 101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안나 핼프린은 일반인들과 어울려 커뮤니티댄스 활동을 했는데, 우리가 해외 사례를 일일이 다 알 수는 없지만 〈바비레따〉처럼 일반 관객과 어떤 장을 펼치면서 주고받는 것이 얼마나 있을지 흥미로운 의문도 듭니다.
〈바비레따〉는 관객과 나눔, 소통을 기하는, 저는 관객참여형 커뮤니티댄스라고 봅니다. 무용가들에게 춤을 배워서 일반인들이 함께 추는 것도 커뮤니티댄스 범주에 들긴 합니다만, 〈바비레따〉 공연은 관객이 배워서 하기보단 출연자가 자신을 열고 낮춤으로 인해 힐링의 장이 형성되면서, 순간순간 커뮤니티댄스 장으로 형성되거든요. 말하자면 경계가 옅어집니다. 출연자와 관객의 경계가 그럴 뿐 아니라 가만히 보면 페미니즘 측면에서도 젠더 경계가 옅어집니다. 젠더 구분을 강조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피해를 받을 수 있고 남혐 여혐 같은 부작용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주의할 점이지요. 공연 중에 나오는 ‘그때 왜 몰랐을까’라는 말과 노래는 본인이 모자라서 몰랐던 게 아니고 그런 상황이었던 것을 더 많이 의미합니다. 그런 상황을 여성 시각의 남혐으로 문제를 풀어내자는 의도가 아니잖아요. 스스로 자각이나 각성, 즉 젠더에 얽매임 없이 함께 깨어나자는 거죠. 그리고 이 공연에는 가족이 얼마든지 함께 참여할 수 있지요. 〈Young 바비레따〉를 보니까 가족이 함께 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어요. 〈Young 바비레따〉에서도 물론 젠더 경계는 허물어졌어요. 물론 요즘 젠더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들이 한두 사례가 아니겠지만, 아무튼 〈바비레따〉는 출연진과 관객의 상호 참여를 통해서 경계를 무너뜨렸죠. 그 점이 〈바비레따〉에서 강조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해외에도 커뮤니티댄스로 색다르게 소개해 볼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하나의 커뮤니티를 일반 참여자와 형성하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이런 방법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커뮤니티댄스의 다양화를 위해서라도 더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고, 또 지속될 필요가 있습니다.
장은정: 우리가 이 일을 시작할 때, 우리가 배운 춤 교육을 탈피하고 다른 걸 해보고 싶었던 그 기저에는, 내가 나의 몸을 혹은 그녀가 나의 몸을 너무 폭력적으로 대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작업이 중년 여성을 대상으로 시작했잖아요. 세 분은 결혼하셨지만 저는 비혼입니다. 만약 모두 결혼한 여성이었다면, 여성을 만나는 게 달랐을 거예요. 그런데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가 나의 몸에 관해 이야기하고 삶을 이야기한단 말이죠. 관객 중에서 비혼 여성, 비혼을 꿈꾸는 잠재적 중년 여성이 있고, 그걸 바라보는 가족인 남자가 있어요. 이 사람들이 공연을 통해 엄마나 누나, 여자를 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목도했어요. 우리가 처음에 꿈꾼 건 다양성의 인정이었어요. 전 대한민국의 아빠들이 우주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이 자신을 만나고 제대로 보고, 몸을 사랑해야 다른 사람의 몸도 사랑할 수 있는 거예요. 그걸 못했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엽기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거라 생각이 들거든요. 우리 출연진들이 성격이 과대 포장하거나 시끄럽게 떠드는 걸 못하기도 해서 〈바비레따〉가 조용히 스며들길 바랐어요. 앞으로도 그런 역할을 했으면 합니다.

김혜숙: 〈바비레따〉를 2박 3일 버전으로 만들고, 관객들이 참여한다면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워크숍을 통해 움직임을 깊게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연구를 해보는 것도 재밌을 듯합니다.

장은정: 2011년에 춘천 여성들을 만났을 때,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등이 파이고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의상을 입었어요. 누군가는 여성미의 극대화라고 할 수 있지만, 몸이 자유로웠거든요. 춘천 언니들한테 의상 갈아입고 나오라고 했습니다. 모두 브래지어를 하고 나와서 벗기를 권했더니 어떻게 벗냐는 거예요. 우리가 잘했다는 게 아니라 워크숍에서 춤을 경험한 여성 중의 한 분은 이 나라를 떠나서 빵 굽은 여자가 되었고, 또 누군가는 연극인이 되었어요. 아마 10년을 전수조사 한다면, 그 언니들 안에 다 들어있는 것 같아요.







〈바비레따〉 저변의 몇 가지 중요한 목소리 가운데 물론 기본은 여성의 자각 내지는 각성일 것입니다. 자기 아이덴티티의 환기와 회복이지요. 현실적으로 여성 아이덴티티를 인정하지 않고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은 폐단을 헤쳐 나와서 〈바비레따〉는 여성의 주체임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 기본은 젠더 구분에 얽매이지 않는 각성으로 확장되는 흐름을 보입니다. 〈바비레따〉 관객층이 여성 일변도가 아니라는 사실에서도 이는 반증되리라 봅니다. 또한 전반적으로 테크닉을 내세우지 않는 연출과 몸을 편견 없이 대하는 열린 자세는 출연진이 일상의 속마음을 스스로 열어 보이는 것과 맞닿아 있다고 봅니다. 이처럼 여러 면에서 일상과 함께 하는 눈높이가 관객의 자발적 참여를 끌어내어 〈바비레따〉를 독특한 참여형 커뮤니티댄스로 만들지 않았나 싶군요. 방방곡곡에서 많은 이들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어왔듯 앞으로도 그 작업이 성과를 더하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좌담에서 주신 소중한 말씀들에 감사드립니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

2022. 3.
사진제공_춤추는여자들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