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바이칼 호수에 부는 바람처럼
바이칼에서 춤추다
현병호_교육 잡지 격월간 <민들레> 발행인

 

 




 바이칼 여행은 즉흥적으로 정해졌다. 5월 초 민들레 식구들 엠티 일정 중에 남원에 살고 계신 임동창 선생님을 찾아뵙고 개인적인 고민을 털어놓았다. 지난 십여 년 동안 교육운동가로서 또 출판사 경영자로서 둘 다 역할을 제대로 못한 것 같아 최근 슬럼프에 빠진 것 같다고 하자 뚫어지게 바라보시던 선생님이 그럼 여행이나 같이 가자고 제안하셨다. 아예 저 멀리 바이칼로 가자고. 나중에 알았지만, 임선생님도 그 순간 즉흥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여행사를 알아보고 같이 갈 일행을 찾기 시작했다. 평일에 열흘씩이나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이 흔치 않았지만, 모으다 보니 열두 명이나 되었다. 20대 초반부터 60대 초반까지, 소리꾼, 농사꾼, 화가, 작가, 스님, 주부, 학생, 교사...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일행이었다. 여행사와 함께 스케줄을 짜고 경비를 조정했다. 여름 한 철에는 이루크츠크 직항편이 개설되어 바이칼 호수까지 가는 길이 쉬워진다. 비싼 공항 이용료 때문에 심야에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고 한다. 6월 22일 출발해 7월 3일 돌아오는 걸로 10박 12일의 일정이 잡혔다. 대부분의 한국 여행객들은 알혼섬에서 하루나 이틀밖에 묵지 않는다는데 우리는 관광이 목적이 아니어서 일주일 정도를 알혼섬에서만 보내기로 했다. 이야기를 나누고 한가롭게 산책도 하면서 일상에서 벗어난 시간을 충분히 즐기기로 한 것이다.
 저녁 8시에 출발한 비행기는 새벽 1시 즈음 이루크츠크에 도착했다. 국제공항 청사는 청주 공항만한 규모였는데 시설은 훨씬 열악했다. 수세식 화장실 변기에는 시트조차 없었다. 여자 화장실도 마찬가지란다. 다들 어떻게 용변을 보는 걸까. 이루크츠크 변두리 아름다운 숲속의 캠프장 같은 곳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아침에 알혼섬으로 출발했다. 시베리아 벌판을 4시간 가까이 달렸다. 문학 작품으로만 접하던 시베리아 벌판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지만 별 감흥이 없다. 겨울이 아니어서 그럴까. 소나무와 자작나무 숲들, 구릉을 덮고 있는 초지와 밭들이 끝없이 반복되는 풍경이다. 버스 차창으로 바라보는 시베리아 벌판의 여름 풍경은 ‘여기가 시베리아?’라는 느낌이 들게 한다.
 알혼섬은 바이칼 호수 안에 있는 가장 큰 섬이다. 제주도의 절반 크기가 넘는다. 우리가 묵은 숙소는 여행사 측에서는 러시아 전통가옥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통나무 방갈로였다. 시설 수준은 거의 80년대 남이섬 방갈로 같았다. 방에는 한 사람이 누우면 딱 맞는 나무침대만 두세 개씩 놓여 있었다. 실망스러웠지만 애초에 내 멋대로 상상한 것이었으니 얼른 기대를 접고 지금 여기에 충실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다행히 식사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요리사 솜씨가 좋은 편이었다. 스프에 설탕을 넣는 것만 빼고. 추운 지방이어서 그런지 음식을 달게 먹는 편이었다. ‘오믈’이라는 바이칼 호수에서 잡히는 민물고기 요리가 많이 나왔다.
 무엇보다 큰 장점은 숙소에 다른 여행객이 없어 우리가 전체를 전세 낸 것처럼 쓸 수 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저녁 식사 후에는 식당에 모여서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었다. 저마다 가슴 속에 꾹꾹 누르고 있던 삶의 숙제를 끄집어내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스스로 세상을 버리신 아버지와 못다푼 이야기, 바람난 배우자 때문에 힘든 이야기, 늦잠을 주체하지 못해 생활이 엉망이 된다는 하소연... 마치 <데카메론>을 연상시키듯이 하룻밤에 한 사람씩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듣는 이들이 중간중간 자기 생각을 들려주면서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갔다.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스토리 힐링이란 것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들의 수다라는 것이 힐링 요소를 띠고 있지만, 자기 삶의 본질을 건드리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도 함께하는 이들이 적절한 역할을 하면 어떤 프로그램보다 훌륭한 치유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다.


알혼섬에서 펼쳐진 즉흥 공연


 피아노가 있다는 얘기에 귀가 솔깃했다. 잘하면 여기서 임동창 선생님의 피아노 연주를 들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합동 공연을 하거나 공연이 없는 날 우리가 공연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식사 시간에 제안을 하자 선생님이 흔쾌히 해보자고 했다. 전원이 출연하는 즉흥 공연을 하기로 뜻을 모으고 가이드가 니키타 쪽과 협의해 공연일을 이틀 뒤로 잡았다. 원래 예정된 공연일에 우리 팀이 대신 출연하기로 한 것이다. 니키타를 방문해 공연장을 둘러보았다. 30석 규모의 작은 공연장이었다. 아쉽게도 피아노가 낡아서 제대로 된 연주는 힘든 상태였다. 임동창 선생님은 반주만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셋째날 아침 일찍 바이칼 호수로 세수하러 가는 길에 한국인 배낭여행객 두 분을 만났다. 정년퇴임하고 여행 중이라면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바이칼 호수까지 왔다고 한다. 알혼섬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게스트하우스인 ‘니키타’에서 묵고 있는데, 격일로 공연이 열린다고 해서 하루 더 묵기로 했다고 한다. 니키타의 주인장 가족이랑 직원들이 여행객들을 위해 여는 작은 콘서트라고 했다. 바이올린, 아코디언, 기타, 피아노 등 다양한 악기 연주와 노래를 들려준단다. 

 

 

 

 

 니키타 쪽에서는 우리 일행을 환영하는 뜻으로 카페에서 즉석 공연을 열어주었다. 할아버지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카페에서 일하는 두 여성이 노래를 들려주었다. 임동창 선생님은 당신이 세계 곳곳에서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의 공연을 보고 협연도 했지만 이 할아버지처럼 자연스럽게 청중들과 교감하며 연주하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청중들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공연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일 것이다. 공식적인 공연 프로그램이 다 끝난 뒤에도 청중들 대다수가 자리를 뜰 때까지 당신이 아리랑 연주를 계속하는 것도 돌아가는 청중들을 생각해서라고 한다. 임선생님의 공연을 두 번 봤는데, 공연장이 썰렁해질 때까지 연주를 계속하시는 까닭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사람들을 아끼는 그 마음이 전해져서 마음이 찡했다. 

 이튿날 저녁에는 또 한 번 우리 일행을 위한 저녁식사와 특별공연이 있었다. 니키타의 주인장과 직원들의 자녀들로 구성된 어린이 공연단이었다.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러시아 동요와 동화로 만들어진 뮤지컬이었지만 아이들의 표정과 닭 울음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유쾌한 뮤지컬이었다. 이어서 배낭여행 중인 영국인 청년이 아코디언과 기타를 연주했다. 니키타에서는 숙박비 대신 공연을 하는 여행객도 받고 있다고 했다. 규모가 커서 여유 공간이 있기에 가능한 방식이겠지만,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훌륭한 방법 같다. 아무튼 특별공연과 훌륭한 저녁식사까지 대접 받고 보니 공연에 대한 부담이 좀 생겼다.
 본격적인 공연 준비에 들어갔다. 임동창 선생님이 연출을 맡기로 했다. 반야심경 독경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이 어떻겠냐는 선생님의 제안에 선뜻 좋겠다고 했다. 전날 알혼섬 북쪽으로 나들이 갔을 때 절벽 위에서 바람을 맞으면서 잠깐 춤을 췄었는데 그걸 보시고 즉흥적으로 기획 아이디어를 내신 듯했다. 스님 독경에 맞춰 춤을 춘다는 기획은 순전히 모두가 출연하기 위한 방편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참신한 기획에 다들 고무되었다. 평소 어떤 곡이든 춤을 출 수 있다는 막춤에 대한 무모한 자신감이 알혼섬에서 이렇게 발휘될 줄이야.
 혼자 춤을 추기 시작한 건 이십 년도 넘었지만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춘 것은 십여 년 전 딱 한 번뿐이다. 도예를 배우던 곤지암 보원요 봄축제 때 홍신자 선생이 오셔서 마당에서 춤판을 펼쳤는데, 벌건 대낮에 맨 정신으로 춤을 추자 하니 아무도 나서지 않아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가만히 서 있기가 더 민망해서 나라도 같이 춤을 추자 싶어 난생 처음 많은 사람들이 둘러선 자리에서 춤을 췄다. 배운 바도 없는 막춤이었지만 분위기를 살리는 데는 도움이 된 것 같다. 그 후로는 혼자서도 잘 추지 않았는데, 바이칼에 와서 느닷없이 춤바람이 분 것은 광활한 호수를 건너 불어오는 바람의 힘일까.
 일행 중 김성호씨는 20여 년 전 문화기획사 뭉치를 꾸리기도 했던 분인데, 나이가 오십이 넘었지만 타고난 신명을 주체하지 못해, 곧바로 함석 대야를 가져 와 꽹과리처럼 두드리면서 즉흥으로 사설을 읊기 시작했다. 5분 만에 기획안이 나왔다. 레파토리는 네 가지로 잡혔다. 먼저 지훈스님의 독경 소리에 맞춰 내가 춤을 추고 동시에 송도혜씨가 춤동작을 벽에 크로키로 그리기로 했다. 이어서 김성호씨가 꽹과리 연주와 함께 즉흥 타령을 부르고, 다음은 임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송도영씨의 노래가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아리랑 연주와 함께 모두가 나와서 춤판을 벌이는 것으로 공연 마무리를 하기로 했다.
 연습에 들어갔다. 지훈스님의 염불이 시작되었다. 안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천천히 샌들을 벗고 맨발로 식당을 돌면서 염불 소리에 몸을 맡겼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염불 소리의 단순한 리듬은 금방 몸에 녹아들어 4분 정도 되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너무 짧아 염불을 두 번 반복하기로 했다. 어색함도 가시고 점점 춤에 빠져드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춤추는 자가 사라진 춤의 세계를 오랜만에 맛보았다. 무대에서도 춤을 출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난생 처음 무대에 서는 셈이었지만 무모한 자신감이 샘솟았다. 식당에서 벌어진 공연 연습은 주인 가족들까지 동참해 버라이어티 쇼처럼 되어 밤늦도록 춤과 노래가 이어졌다. 중앙아시아인들도 우리만큼이나 신명이 많은 사람들이 분명했다.
 이튿날 본격적인 공연 준비에 들어갔다. 지훈스님은 송판을 방망이로 두드려 목탁 소리를 만들어냈다. 김성호씨는 나무를 깎아 꽹과리 채를 만들고 쑥대를 묶어 손잡이에 술을 만들어 달았다. 제법 그럴싸한 채가 만들어졌다. 세숫대야에도 손목을 걸 수 있게 줄을 가로지르고 역시 쑥으로 만든 술을 늘어뜨렸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술 모양에 다들 놀랐다. 탁월한 임기응변이었다. 나는 춤복으로 어두운 쪽빛 개량한복 핫바지를 입고 김성호씨가 빌려준 몸에 달라붙는 검정색 티셔츠를 입었다. 그런대로 어울렸다.
 안무와 연습을 위한 시간은 만 하루밖에 없었다. 몇 차례 연습을 하는 동안 구상이 잡혔다. 구도자의 일생을 나의 일생과 함께 표현해보자 싶었다. 매번 춤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전체 구도는 얼추 가닥이 잡혔다. 아리랑 군무도 몇 차례 연습을 했다. 공연 당일 오후 마지막 리허설을 하고서 공연장으로 향했다. 시작 시간은 8시였다. 알혼섬은 해가 늦게 져 밤 10시 반쯤 되어서야 노을이 진다. 한국과 시차가 없는데 해가 늦게 지니 밤이 늦게 시작되는 셈이다. 공연장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유럽 각지에서 온 여행객들과 알혼섬 주민들이 40여 명 참석했다. 동양인은 우리 말고는 보이지 않았다. 가이드가 러시아어로, 송도혜씨가 영어로 우리를 소개한 뒤 공연이 시작되었다.
 춤을 추면서 무대에서 눈을 뜨고 있기는 쉽지 않았다. 연습 때도 눈을 감는 탓에 방향감각을 잃고 마무리를 제대로 하기가 힘들었다. 눈을 뜬 채 춤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가능한 눈을 뜨고 추자고 마음을 다잡은 덕분인지 중간중간 눈을 제대로 뜨고서 객석을 바라볼 여유까지 생겼다. 공연 도중 연습할 때와 전혀 다른 동작이 나왔지만 그대로 춤에 몰입할 수 있었다. 바지가 흘러내려 몇 번 발에 밟히는 통에 동작이 살짝 부자연스러워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무난히 넘어갔다. 8분이 눈 깜작할 사이에 흘렀다. 마무리도 그런대로 된 것 같았다. 첫 무대치고는 큰 실수 없이 공연을 한 셈인가.

 

 

 

 

 송도혜씨는 춤을 추듯이 그림을 힘차게 그렸다. 한 번도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춰 연습을 하지 못한 채 펼친 공연이어서 잘 어우러질까 걱정이 되었지만 두 사람의 즉흥성이 그런대로 어우러진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야 중간에 도혜씨 손을 잡고 함께 춤을 추고 나도 그림을 한 컷 그렸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은 내 인생에서도 상당히 의미 있는 비중을 차지하고 지훈스님도 출가 전 한국화를 전공했었기에 그림이 세 사람을 묶는 고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모티브를 공연 속에서 어떻게 펼쳐낼지 좀더 생각을 했더라면 더 완성도 높은 공연이 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공연장에서 리허설을 해봤더라면 그렇게 풀 수도 있었을 텐데 식당에서 각자 연습을 하다 보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이어서 김성호씨의 꽹과리 연주와 타령이 이어졌다. 즉흥 타령은 가사가 큰 몫을 차지하는데, 한국인들만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탁월한 즉흥성을 발휘한 노랫말이었는데, 청중들은 아마도 중간중간 나오는 알혼, 니키타, 주인장 이름 정도로 즉흥 노래라는 걸 짐작했을 듯하다. 김성호씨는 옛날 공연 기획자 시절의 근성이 발동되어서인지 너무 잘하려고 애를 쓰다 좀 힘이 빠진 듯했다. 함석 대야 대신 좀더 꽹과리다운 악기를 만들려고 깡통을 갖고서 이렇게 저렇게 시도하다 지치기도 했다. 잘하려고 너무 애를 쓰다가 지치는 것보다 자신의 신명을 보전하는 것이 공연을 준비하는 현명한 자세가 아닐까 싶었다.

 

 

 



 송도영씨의 노래가 이어졌다. 청산은, 자연가, 닐리리야, 도라지, 창부타령을 이어 불렀다. 어깨춤 사위가 노래와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소리꾼의 흥이 청중들에게도 전해지는 듯했다. 평상복에 운동화 차림으로 무대에 서긴 했지만 프로의 노래라는 것이 느껴졌다. 자연가를 부를 때는 나도 흥이 나서 객석에 있다가 나가서 함께 춤을 췄다. 즉흥적인 행동이었는데 청중들은 아마도 기획된 연출인 줄 알았을 것이다. 나중에 동영상을 보니 객석에서 무대로 등장하는 모습이 아주 자연스럽다. 소리꾼의 춤사위를 방해하지 않도록 뒤쪽에서 배경처럼 춤을 추다가 노래가 끝나면서 자연스럽게 내려왔다. 

 아리랑 군무는 공연의 절정이었다. 청중들도 나와서 같이 춤을 췄다. 객석으로 들어가 손을 잡고 이끌자 대부분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로 나왔다. 좁은 무대에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마치 나이트클럽에서처럼 빽빽하니 어우러져 춤을 췄다. 느리게 연주되던 아리랑이 점점 빨라지면서 김성호씨는 마치 신들린 듯이 몸을 흔들었다. 인종과 국적을 떠나 신명으로 하나된 느낌. 신명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싶다. 이윽고 임동창 선생님의 아리랑 변주가 다시 느려지면서 신명의 파도를 서서히 가라앉혔다. 한바탕 격랑이 휘몰아친 뒤 잔잔해진 호수처럼, 고양된 에너지가 충만한 가운데 공연은 막을 내렸다.

 

 

 

 

 공연장 안팎에서 청중들과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춤과 그림이 어우러진 것이 너무 신선했다면서 그림 앞에서 사진을 찍는 이도 있고 한국에 대해 물어보는 이들도 있다. 카페에서 차를 한 잔씩 마신 뒤 바이칼 호숫가로 자리를 옮겨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우리끼리 뒤풀이자리를 가졌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노을의 잔상이 남아 백야처럼 희끄무레한 밤하늘 아래 모닥불 불빛에 상기된 얼굴들이 아름다웠다. 별이 보이진 않았지만 아름다운 밤이었다.



여행과 일상의 경계에서

 니키타 측에서 한 번 더 공연을 해달라고 요청해 다들 고양된 마음에 처음에는 선뜻 하겠다고 했지만 이튿날 다들 좀 지치기도 하고 처음처럼 후레쉬하지 않다고 임 선생님이 판단해 재공연은 취소하기로 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아마추어들이 그 신명을 다시 살리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바이칼 여행의 클라이막스가 그렇게 지나가고 서서히 여행을 마무리하는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산책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냈다. 날씨가 썩 좋지 않아 하룻밤도 별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을 기대했는데 서울 하늘처럼 희뿌연 밤하늘만 봤다. 호수에서 수영을 제대로 못한 것도 아쉽다. 물이 차서 30초도 몸을 담그고 있기가 어려웠다. 해안처럼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는 호숫가에는 일광욕하는 여행객들이 간간히 눈에 띌 뿐이었다.
 호숫가에서는 가끔 시베리아 샤먼의 의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큰 굿판이 아니라 유럽 여행객들 몇 명이랑 치르는 아주 간단한 의식이었다. 이제 이름난 샤먼들은 대학교수가 되어 제례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했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의례를 주관하는 샤먼(?)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어, 300달러를 내고 요청하면 언제든지 의례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자본주의 바람은 바이칼 호숫가에도 어김없이 불고 있었다. 이전에는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농사를 짓던 알혼섬 주민들 거의 대부분이 이제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이런저런 밥벌이를 하고 있단다. 사륜구동 소형 버스를 갖고 관광객들을 태워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지역의 유지급이라고 한다.

 

 

 

 

 알혼섬은 자전거로 돌아다니기가 좋은 곳이다. 완만한 구릉이 많지만 자전거족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우리 일행에는 여성들이 많아 차를 빌려 알혼섬 북쪽으로 갔다. 북쪽은 남쪽과 달리 숲이 우거지고 호숫가 바위 절벽이 장관이었다. 알혼섬에는 야생화들이 어디나 지천으로 피어났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뿐만 아니라 너무나 친숙한 민들레, 제비꽃, 할미꽃, 나리꽃, 구절초, 엉겅퀴꽃이 무리지어 온 산과 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야생화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최근 20여 편의 창작곡을 발표하기도 한 임동창 선생님은 야생화 사진만도 수천 장을 찍었다. 야생화를 주제로 음악, 미술,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공동작업팀을 꾸려 한 달쯤 알혼섬에서 지내면서 공동작업을 해보면 좋겠다는 제안도 했다. 

 마지막 이틀 동안은 이루크츠크 시내 관광을 했다. 여행사가 최소한으로 추천한 코스였다. 며칠 동안 호숫가를 거닐다가 관광객 모드로 바뀌는 게 쉽지 않았다. 수도원과 미술관 등 관광지로 알려진 곳들은 그다지 마음을 끌지 못했다. 유럽 변방의 중소도시가 갖고 있는 어정쩡한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듯했다. 한국의 민속촌 비슷한 전통가옥 전시장 말고는 그다지 인상적인 곳이 없었다. 그보다 훨씬 흥미로운 곳은 중앙시장이었다. 숱한 인종들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오늘의 문화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곳이었다. 남대문시장과 흡사한 시장에는 난전에 보자기를 펴고 손수 기른 채소를 팔고 있는 곱게 늙은 할머니들, 리어카 앞에 서서 물건을 파는 러시아 인형처럼 몸통이 동글동글한 아주머니들이 눈길을 끌었다. 시장통을 돌아다니는데 도로를 달리는 시내버스들이 대부분 대우 로고를 달고 있다. 그보다 더 시선을 끄는 것은 버스 유리창과 출입구 옆에 그대로 붙어 있는 전국 각지의 행선지 표시판들. 서면 행 버스와 서울역 행 버스가 줄지어 달리고 있었다.
 시장 사람들의 표정에는 삶의 고단함과 즐거움이 묻어 있다. 일상을 벗어나 우리는 이곳으로 왔지만 이곳에는 또 다른 이웃들이 하루하루의 일상을 꾸려가고 있었다. 이 시간 서울의 거리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행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상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한다. 일상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기에 가능한 것일까.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기. 이것이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 비결일까. 바람처럼 형체도 없이 스치고 사라지는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 비결은 그와 함께 흐르는 길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들의 춤이 그러하듯, 시장에서 부지런히 몸을 놀리는 상인들의 몸짓이 그러하듯 순간순간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감응하기. 춤과 삶의 비밀은 이처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못다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밤이 깊어갔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새벽 3시,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다들 잠든 시간에 비행기는 이루크츠크를 떠나 서울로 향했다.

2012. 07.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