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흐름

춤으로 보는 프랑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부터 〈킹아더〉까지… 프랑스 뮤지컬 안무의 변천사
송준호_문화칼럼니스트

한국 뮤지컬 무대에서 ‘프랑스 뮤지컬’은 관객에게 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브랜드다. 그 기대감의 배경에는 프랑스 감성의 감미로운 음악과 매혹적인 춤이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프랑스 ‘국민 뮤지컬’로 불리는 〈노트르담 드 파리〉다. 이외에도 국내에 소개된 프랑스 뮤지컬들은 흥행 결과와 별개로 특유의 감성적인 노래와 안무로 늘 깊은 인상을 남기곤 했다.
 지난달 개막한 〈킹아더〉(3. 14. ~ 6. 2., 충무아트센터, 서울)는 그런 프랑스 뮤지컬의 계보에서 가장 따끈따끈한 신작이다. 인터넷 영상을 통해 파리 초연을 먼저 접한 국내 관객들은 높은 기대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한국에서 공개된 〈킹아더〉는 상당 부분 한국 창작진의 각색을 거쳐 탈바꿈한 버전이었다. 과연 〈킹아더〉의 이 이색적인 ‘현지화’는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그동안 국내 무대에 소개된 프랑스 뮤지컬들을 돌아보며 그 가능성을 점검해본다.


모든 것의 시작, 〈노트르담 드 파리〉

프랑스 뮤지컬은 2005년 2월 〈노트르담 드 파리〉(Notre Dame de Paris)의 첫 내한 공연을 시작으로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뤽 플라몽동이 극본을 작업했고, 음악은 리샤르 코시앙뜨가, 안무는 현대무용 안무가 마르티노 뮐러가 맡았다. 이 작품은 원작 소설처럼 성당 종지기 콰지모도와 집시 에스메랄다, 부주교 프롤로, 치안장교 페뷔스, 그의 약혼녀 플레르 드 리스, 집시 리더 클로팽, 시인 그랭구아르 등이 주조연의 구분 없이 고르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세 시간의 공연 시간에 이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압축할 방법은 상징성이 강한 단어와 표현들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대사 대신 시적 문장들로 이뤄진 노래로 극을 전개하는 ‘성 스루(sung through)’ 방식은 이로부터 출발한다.




 

〈노트르담 드 파리〉 ⓒ마스트엔터테인먼트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 등 영미(英美) 뮤지컬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있었던 국내 관객은 기존의 뮤지컬 문법과는 다른 이 뮤지컬에 큰 관심을 보였다. 프랑스에서도 대형 경기장에서 공연될 정도로 큰 규모로 진행되는 이 작품은 한국에서도 대극장에서 대형 세트와 거대한 종, 기둥과 석상 등을 등장시켜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했다. 또 배우가 노래와 춤, 연기를 함께 하는 영미 뮤지컬과 달리, 가수와 무용수로 구분된 캐스트의 운용 방식은 각자의 전문성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얻었다.
 특히 〈노트르담 드 파리〉의 춤은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그들이 처한 상황을 표현하는 중요한 매체가 된다는 점에서 관객들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기존의 영미 뮤지컬에서 춤은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한 장식적인 기능이었지만, 이 작품에서는 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요소였다. 극의 시작과 함께 클로팽과 집시 무리는 재즈댄스와 비보잉을 혼합한 역동적인 춤을 보여준다. 남루한 옷차림의 부랑자와 불법체류자들이 절규하듯 그려내는 몸짓은 이 작품의 시대 상황을 암시한다. 그런데 잠시 후 아름다운 집시 에스메랄다의 넘버 ‘보헤미안’과 함께 감각적인 현대무용이 이어지면 분위기는 급변한다. 이렇듯 장면에 따라 전환되는 춤의 성격은 캐릭터와 상황을 묘사하는 한편 극 전개에도 강약의 리듬을 부여한다. 격정적인 춤과 우아한 춤이 순간순간 교차되며 절묘하게 극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것이다.




 

〈노트르담 드 파리〉 ⓒ마스트엔터테인먼트




 그중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페뷔스가 플뢰르 드 리스와 에스메랄다 사이에서 갈등하는 ‘괴로워(dechire)’ 장면이다. 페뷔스의 절규가 점차 고조되면 그 뒤에서 무용수들이 길게 점멸하는 핀 조명 아래서 그 고뇌의 무게를 격렬한 몸짓으로 풀어낸다. 페뷔스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춤으로 상징화한 이 장면은 〈노트르담 드 파리〉 안무의 백미로 꼽힌다. 이처럼 마르티노 뮐러는 클래식 발레, 재즈댄스, 현대무용, 비보잉, 아크로배틱 등 다양한 장르의 춤을 자유롭게 무대 위에 펼쳐놓으며, 각각의 춤이 또 하나의 배우 역할을 수행하게 했다. 그리고 이런 특징은 이후 등장하게 되는 대부분의 프랑스 뮤지컬들에게 하나의 기준점이 됐다.


프랑스 뮤지컬 붐, 그 이후

2006년은 무려 다섯 편의 작품이 잇따라 소개되며 프랑스 뮤지컬의 붐이 일어난 해였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오리지널 팀 내한 공연과 〈벽을 뚫는 남자〉(Le Passe Muraille)와 〈찬스〉(Chance!)의 라이선스 버전, 그리고 〈십계〉(Les Dix), 〈돈 주앙〉(Don Juan)이 오리지널 버전으로 한국을 찾았다.
 그중에서도 한불 수교 120주년을 맞아 추진했던 〈십계〉는 〈노트르담 드 파리〉, 〈로미오 앤 줄리엣〉(Romeo & Juliette)과 함께 프랑스 3대 뮤지컬로 기대를 모았다. 프랑스 뮤지컬 사상 최대의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작품인 만큼 한국에서도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공연이 진행됐다. 비록 흥행 면에서는 기대치를 밑돌았지만, 구약성서의 창세기 이야기를 현대적 감각으로 그려낸 카멜 우알리의 안무는 호평을 받았다. 클래식 발레와 현대무용, 비보잉을 접목한 〈십계〉의 안무는 이집트 벽화 속 인물들이 되살아난 듯한 모습을 연출했다. 특히 네파르타리가 모세와 람세스 사이에서 주저하는 심경을 담은 곡 ‘딜레마(Le Dilemme)’에 맞춰 보여주는 이집트 병사들의 군무는 3차원 그래픽 기술 같은 비주얼로 객석의 탄성을 자아냈다.




 

〈십계〉 ⓒ이룸이엔티




 한편 다른 프랑스 뮤지컬처럼 성 스루로 진행되는 〈돈 주앙〉은 스페인 무용수들의 춤을 적극 활용하는 쇼의 비중이 높았다. 특히 로스 아미고스의 연주에 맞춘 플라멩코와 탱고는 스페인의 정열적이고 관능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또 프랑스 뮤지컬에서 조명은 의상이나 안무만큼 중요한 시각 효과를 담당하는데 〈돈 주앙〉은 그런 특성이 두드러진 작품이었다. 대표적으로 비 오는 장면을 레이저가 쏟아지는 것처럼 연출한 부분은 예술성과 기술의 양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돈 주앙〉 ⓒNDPK




 2007년에는 프랑스 3대 뮤지컬의 마지막인 〈로미오 앤 줄리엣〉까지 들어옴으로써 ‘프랑스 뮤지컬’이라는 브랜드는 한층 더 대중적인 것이 됐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프랑스적인 것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았다. 기존 프랑스 뮤지컬의 관습에서 벗어나, 배우가 노래하며 춤을 추고 무용수들이 코러스에도 참여하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가까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성 스루’ 형식 대신 대사를 삽입해 드라마적인 성격을 강조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이후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를 뮤지컬화한 시도는 의미가 있었다. 또 죽음과 운명을 상징하는 무용수를 따로 등장시켜 극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식의 연출은 프랑스 뮤지컬의 실험 정신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로미오 앤 줄리엣〉 ⓒ이룸이엔티




 이후 〈십계〉를 만든 알베르 코엔과 도브 아띠아 콤비가 제작한 〈태양왕〉(le Roi Soleil)과 〈모차르트 오페라 락〉(Mozart L’Opera Rock),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가 잇따라 선을 보였다. 애절한 사랑을 노래하는 루이 14세의 뛰어난 가창력과 베르사유 궁의 화려함이 묻어나는 퍼포먼스는 〈태양왕〉의 백미였다. 하지만 국내 라이선스 버전에서는 그런 장점들이 실종되면서 관객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모차르트 오페라 락〉은 록 뮤지컬의 특성상 높은 음역대와 격정적인 음악을 소화할 수 있는 캐스팅으로 눈길을 끌었다. 특히 볼프강이 연인 콘스탄체의 집에서 조우하는 언니 알로이지아의 넘버 ‘빔 밤 붐(Bim Bam Boum)’은 오르골 속 인형을 연상시키는 몽환적인 노래와 이색적인 춤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로미오 앤 줄리엣〉의 작곡가 제라르 프레스귀르빅이 프랑스어권 국가에서 얻은 대중적인 성공에 기대를 걸었던 작품이지만, 원작 영화의 존재감이 너무 강해 프랑스 뮤지컬만의 장점이 드러나지 않았다. 특히 〈십계〉와 〈태양왕〉에서 특기를 발휘했던 카메 우알리의 안무는 미국 남북전쟁 배경의 의상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




 

〈태양왕〉 ⓒ마스트엔터테인먼트



 

〈모차르트 오페라 락〉 ⓒ마스트엔터테인먼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쇼미디어그룹





한국화된 프랑스 뮤지컬, 〈킹아더〉

이번에 공개된 신작 〈킹아더〉(La Légende Du Roi Arthur)는 제목 그대로 서구 판타지 서사의 근간이자 다양한 콘텐츠로 변주된 아서 왕 전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바위에 박힌 엑스칼리버를 뽑은 청년 아서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에 맞서 진정한 왕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담았다. 이 작품은 기존 프랑스 뮤지컬 관습에서 벗어나려 했던 〈로미오 앤 줄리엣〉이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달리 〈노트르담 드 파리〉가 구축한 원래의 전형을 따라가려 한다. 출연진의 가수와 무용수 영역은 다시 분리됐고 몰입도 높은 음악과 애크러배틱을 바탕으로 현대적이고 다양한 안무를 강조한다. 게다가 이야기 자체가 판타지적 색채가 강한 만큼 무대 세트나 의상, 영상 등의 시각적 요소로 프랑스 뮤지컬의 특색을 드러내려 했다.




 

〈킹아더〉 ⓒ알앤디웍스




 이런 태도가 드러나는 대목이 아더의 라이벌인 멜레아강과 아더를 증오하는 모르간이 함께 부르는 ‘복수의 약속’ 장면이다. 이중창을 하는 두 사람의 뒤로 모습을 드러내는 무용수들의 춤은 바로 〈노트르담 드 파리〉의 ‘괴로워(dechire)’ 안무를 연상시킨다. 점멸하는 조명 속에서 격정적으로 표현되는 춤이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는 페뷔스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나타냈다면, 〈킹아더〉에서는 아서 왕에게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두 사람의 다짐과 분노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다소 엇갈린다. 매혹적인 선율의 넘버는 명불허전이고 배우들의 역량도 출중하지만, 그밖의 다른 요소에서는 오리지널 버전이나 다른 프랑스 뮤지컬에서 느꼈던 특색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무용수들이 가수들과 별개로 고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프랑스 뮤지컬의 특징이었다면, 〈킹아더〉는 그런 특징을 지향하면서도 무용수들의 존재가 주로 가수의 퍼포먼스에 종속된다는 점에서 한계가 발견된다.




 

〈킹아더〉 ⓒ알앤디웍스




 이런 변수의 원인은 ‘한국적’ 각색에 있다. 이번 공연은 프랑스 프로덕션과 대본과 뮤지컬 넘버만 계약한 ‘스몰 라이선스’인 까닭에 그밖의 영역은 국내 창작진의 손을 거쳐 재탄생했다. 안무 역시 기존 프랑스 뮤지컬의 색채에 한국 안무의 개성이 더해져 원작과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채현원 안무가는 기존 프랑스 뮤지컬의 전통과 한국의 트렌드를 혼합해 새로운 퍼포먼스를 만들었다. 발레, 현대무용, 힙합, 재즈, 애크러배틱을 넘나드는 군무 외에도 도구를 활용한 파워풀한 볼거리를 새로 창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에어리얼 스트랩(Aerial strap, 두 갈래 천을 이용한 공중곡예)과 파이버 옵틱 휘프(Fiber Optic Whip, 광섬유로 제작된 특수 채찍)다. ‘늑대’와 ‘사슴’ 역의 두 배우는 〈노트르담 드 파리〉 월드 투어와 한국어 버전 공연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경력을 바탕으로 이 고난도의 퍼포먼스를 노련하게 소화한다.
 사실 프랑스 뮤지컬의 진정한 차별점은 이런 앙상블의 존재에서 드러난다. 커튼콜 때 영미 뮤지컬과 달리 프랑스 뮤지컬에서는 주조연 배우들이 앙상블들이 관객의 박수를 받을 수 있도록 무대 전면 중심을 내어준다. 이는 앙상블들이 단지 ‘백업 댄서’가 아니라 한 명의 배우에 준하는 또 하나의 배우라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킹아더〉 공연에서도 〈노트르담 드 파리〉 초연 때부터 참여해온 프랑스 뮤지컬의 ‘베테랑 앙상블’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어쩌면 다소 허술한 서사의 틈새를 메워주는 이들이야말로 작품이 프랑스 뮤지컬의 매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진짜 주인공일 수 있다.

 

송준호

문화 전문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에서 무용미학을 전공했다. 주간한국과 한국일보, 더뮤지컬을 거치며 문화 예술의 각 분야를 두루 취재했다. 춤과 공연예술의 다양한 변화를 주시하며 이를 바탕으로 대학에서 춤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2019. 04.
사진제공_마스트엔터테인먼트, 이룸이엔티, NDPK, 쇼미디어그룹, 알앤디웍스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