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broad

해외춤기행_ 17세 이수빈 불가리아 국립발레단 〈백조의 호수〉 데뷔 관람기
압도적인 무대, 내년 재초청에 후원자까지
김선희_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원장

 

 

 지난 3월 22일 일요일 오후 4시 소피아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불가리아 국립소피아발레단의 정기공연 <백조의 호수>. 그 주인공은 한국소녀 이수빈이었다. 이제 겨우 17세, 서양 나이로 따지면 16.5세(1998년 10월 2일 출생)에 불과한 수빈이는 소피아의 관객과 전문가들을 글자 그대로 압도했다.
 작년 여름 바르나 국제발레콩쿠르에서 주니어 부문 그랑프리 수상이 계기가 되어 초대받은 무대여서 현지 관객들의 호기심과 기대가 컸지만(공연에 앞서 수빈이 이야기가 현지 일간지에 몇 차례 소개됐고 입장권은 일찌감치 매진되었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나이가 너무 어린 탓에 불안한 측면도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더구나 <백조의 호수>처럼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레퍼토리의 경우는 더더욱 보는 눈이 예리할 수밖에 없는 노릇.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발레단 주변에서도 “콩쿠르에서 보여준 실력이 워낙 출중해 초청했지만 클래식 전막 발레 경험이 전혀 없는 어린 소녀가 제대로 해낼까” 하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수빈이와 단원들의 리허설 과정을 일주일 동안 함께했던 예술감독 사라-노라 크리스테바(Sara-Nora Krysteva)는 나를 보더니 “걱정 마세요”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수빈이의 공연 전날인 21일 현지에 도착한 나는 소피아발레단 수석무용수가 출연하는 <백조의 호수> 개막공연을 보았다. 수빈의의 공연을 보기에 앞서 이 발레단의 전반적 수준과 관객들의 분위기 등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과거 소련의 위성국답게 러시아 발레의 영향을 간직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수준이 있긴 했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과거 전성기에 비해 침체된 인상을 주었다. 그래도 나를 긴장시킨 게 있었는데, 그것은 관객들이 박수에 인색하다는 점이었다. 수빈이 춤에도 박수가 안나오면 어떡하나...
 소피아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는 모두 4막에 3번의 휴식으로 장장 4시간짜리였다. 박수에 인색한데다가 이 기나긴 공연을 막간에 떠나는 사람 없이 끝까지 지켜보는 무서운 관객들이었다. 수빈이의 공연 날 입장권은 이미 매진 상태여서 뒤늦게 한국인 주역의 출연 소식을 알게 된 교민들은 관람을 포기해야 했다. 그래도 신맹호 대사님을 비롯한 우리 공관 주재원들께서 와주신 덕분에 큰 힘이 되었다.

 



 그날 수빈이는 가냘픈 몸매에서 나오는 여리고 슬픈 감정과 사랑을 동양인의 감수성과 훌륭한 테크닉으로 풀어낸 백조였고, 지그프리드 왕자 뿐 아니라 모든 관객을 휘어잡는 오만과 기세로 백조 때보다 더 큰 반전의 매력을 발산하는 흑조였다. 갖가지 고난도 테크닉은 바르나 콩쿠르의 그랑프리 수상자답게 너끈히 해치웠다. 장면 장면마다 브라보를 외치며 흥분하는 나에게 옆에 있던 현지 관객들은 “정말 대단하다. 곧 대스타가 되겠다. 엄마냐?”고 묻기도 했다.
 수빈이의 파트너인 소피아발레단의 인기 만점 수석무용수 니콜라 흐리스토프 하지타네프(Nikola Hristov Hadjitanev)는 키가 작은 편이었다. 솔직히 내 눈에는 춤도 좀 아쉬웠다. 그러나 충분한 경험을 바탕으로 어린 수빈이와 호흡을 맞추는 데는 노련한 기량을 발휘했다. 나중에 예술감독 사라-노라는 수빈이가 말라 키가 작은 것으로 판단, 니콜라를 배정했었다면서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공연에서 주역의 역할은 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한 것이지만, 특히 이 작품 제4막에서 드라마를 온몸으로 풀어내며 관객에게 전달하고 감동을 이끌어내는 열쇠는 결정적으로 주역무용수가 쥐고 있다. 전날 공연의 짠 박수에 계속 마음이 불안했었는데 수빈이의 등장 때마다 터져 나오는 박수에 저으기 안심이 되었다.
 4막이 진행되는 동안 박수의 강도가 점점 커지고 환호의 시간이 점차로 길어지면서 “브라바(Brava)!”의 외침이 격렬해지더니 급기야 커튼콜 때에는 모든 관객이 기립박수로 먼 곳에서 날아온 소녀를 열렬히 환호해주었다. 여러 차례 커튼콜이 계속되자 어린 수빈이는 다소 당황해하며 쑥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신 대사님은 한국발레가 높은 수준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잘 할 줄은 몰랐다며 수빈이를 자랑스런 문화외교관이라고 불러주셨다.
 더 큰 기쁨은 막이 내린 후에 찾아왔다. 예술감독은 내년 봄 <라 바야데르> 공연에 수빈이를 주역으로 또다시 초청하고 싶다고 제의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불가리아의 발레애호가인 한 사업가는 수빈이의 춤에 반했다며 국제적인 프로 무용수로 성장할 때까지 돕고 싶다는 뜻을 밝히면서 만찬에 초대했다. 한 평론가는 곧 리뷰를 써보내겠다며 내게 명함을 달라고 했다. 수빈이가 도대체 몇 년이나 배웠는지, 한국에서 배운 게 맞는지, 이런 놀라움은 실비 길렘(그녀도 바르나 수상 이후 같은 무대에 섰었다) 이후 처음이라면서.

 



 수빈이가 주니어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한 작년 7월 불가리아 바르나 국제발레콩쿠르는 창설 50주년으로 특별한 대회였다. 1964년 출범한 바르나는 현존하는 발레대회 가운데 가장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역사만 긴 것이 아니라 경연과 심사의 과정이 지독하고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대회이다.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실비 길렘, 파트릭 뒤퐁, 모리시타 요코 등 세계적인 무용수들이 받았던 주니어부문 그랑프리(공식명칭은 스페셜 디스팅션상)를 수빈이가 한국인 최초로 받았던 것이다. 수빈이는 ‘창립자가 주는 젊은 무용수상’도 함께 받으면서 소피아 국립발레단의 전막공연 주역으로 초청 받은 것이다.
 그랑프리를 받는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국제발레대회가 국가 간 보이지 않는 세력경쟁의 장이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작년 대회에서도 중국인 심사위원의 방해공작으로 난항을 겪어야 했다. 대부분의 심사위원들은 당연히 수빈이에게 그랑프리를 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중국인 심사위원이 개인적 친분이 있는 몇몇 심사위원과 담합해 중국인 참가자에게 주려고 무진 애를 썼었다. 이 과정에서 역시 심사위원이었던 나로서는 “잘 한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는 정공법 밖에 쓸 수 없었고, 결국은 두 차례의 투표 과정에서 명분과 실력이 이겼던 것이다.

 



 수빈이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교육원을 마치고 월반을 해서 현재 대학 1학년생이다. 수빈이의 미래는 창창하다. 이번 공연은 수빈이 자신에게나 선생인 나에게나 한국발레에 대한 점검을 위해 우리의 장단점을 다시금 확인하게 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2015. 04.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