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지난 50여년 동안 한국 춤계의 오랜 염원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중등 교원자격증 표시과목에 “무용”이 포함되면서 무용교사자격증 제도가 신설된 것이 그것이다. 그 중심에는 2002년 “무용교과독립추진위원회”로 출발해 지난해 “무용교육혁신위원회”로 개칭한 단체가 있고 바로 이 단체의 수장으로 지난 12년 동안 수고를 아끼지 않은 김화숙 교수(원광대)가 있다. 그는 “모든 국민은 무용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구호와 함께 무용은 체육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 고군분투 해왔다. -편집자 주-
이병옥(이하 이) : 무용교육혁신위원회(이하 무교혁)에서 그동안 추진했던 무용교사자격증 제도가 도입된다는 소식을 듣고 초창기 참여했던 저 역시 정말 기뻤습니다. 동시에 무교혁에서 중심역할을 하고 모든 것을 바쳐왔던 김화숙 교수님이 제일 먼저 생각났습니다. 오늘 이렇게 만나 뵙고 그간 있었던 어려움과 시련, 노력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모든 무용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우선 무교혁의 활동 내용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화숙(이하 김) : 무용교육혁신위원회(구:무용교육발전추진위원회)는 2002년 12월 9일, “무용교육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로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과 분수대 광장에서 심포지엄 및 범 무용인 결의대회가 시작이었습니다. 당일 행사 후 모임에서 이 문제는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의견을 그 당시 금란여고 전혜리 교사가 제안했고 함께 했던 무용인들이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용교과독립추진위원회'라는 이름으로 결성되었다가 후에 무용교과독립 뿐만 아니라 무용교육의 제반 문제를 다루고자 ‘무용교육발전추진위원회‘로 바꾸었지요. 그리고 2013년 6월에 ’무용교육혁신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지금은 ’무교혁‘이라는 약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모든 국민은 무용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이 : 당시 무교혁을 발족할 때 무용계의 흐름은 어떠했는지, 무교혁의 필요성 혹은 당위성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김 : 1963년 이화여대를 시작으로 대학에 무용과가 설립된 지 50년이 지났습니다. 무용교과 독립은 50여 년 동안 모든 무용인들이 바라왔던 일이었습니다. 처음 위원회를 결성할 때 무용계 원로 선생님들 전체와 무용 관련 협회장, 대학 무용학과장들이 실행위원이 되어 조직을 구성했습니다. 모든 무용인들이 무용의 독자성과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에 이 문제만큼은 해결해야한다는 의지가 매우 강했지요. 학교 교육 내에 독자적인 무용교사, 무용교과가 없다는 사실은 모든 무용인들이 마음의 짐처럼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모두가 동참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무용교과독립추진위원회’에서 ‘무용교육발전추진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모든 국민은 무용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활동을 시작했지요. 따라서 예술교육의 개혁운동과 무용교육의 발전이라는 두 가지 큰 목표를 갖고 구체적인 실행 방안으로는 첫째, 예술교과로서 무용교과 독립 추진, 둘째, 무용교사자격증 및 초등학교 무용전담교사 제도 시행을 목적으로 무용교육의 행정제도상의 문제 개선을 위해 활동을 시작했었습니다.
이 : 당시 어려움에 많이 부딪혔는데 반대 입장이나 추진하는데 저해요소는 어떤 것이 있었나요?
김 : 2003년 청원서를 청와대, 문광부, 교육부, 여야 당사를 비롯해 한국교육과정평가원까지 보냈지요. 그러나 다른 부서보다 교육부가 이 문제와 직접 관련된 해당부처이기 때문에 당시 저희 임원들이 청원서를 들고 교육부를 방문했는데, 교육부의 반응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첫 번째 발언이 무용계가 한 목소리를 내서 오라는 것이었죠. 그 당시 무교혁 조직 자체가 무용 관련 학·협회장, 전국 대학 무용학과장, 예술중고등학교 학과장까지 포함되어 있었는데… 참으로 어이가 없었지요. 이러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무용교과 독립에 관련해 무교혁은 2002, 2003년 연이어 세미나와 함께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결의대회를 했지요. 이러한 상황들을 교육부, 문화부는 즉각 보고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체육교사자격증으로도 만족한다는 의견을 무용계 누군가가 교육부에 발언한 것이 계기가 되어 10여 년 동안 교육부를 설득하는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어 힘들었습니다. 사실 국회 법령을 개정하는 것도 아니고 교육부의 시행령을 바꾸는 일인데 무려 10여년이 걸렸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납득되지 않는 일이지요. 연극영화교사, 사진교사, 영양교사, 보건교사, 심지어는 미용교사라는 명칭까지도 있는데, 무용교사라는 독립적인 명칭이 없다는 건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였지요.
벌써 10여 년 전이 되었습니다만, 2003년 9월 정기 국정감사에 당시 교육의원이셨던 이재오 의원께서 무용교과 독립에 관한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해주셨습니다. 따라서 무용과 졸업생은 무용교사자격증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당시 교육부총리가 ‘예’라고 대답한 기록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이번에도 관계기관에 서류를 제출할 때 그 자료를 첨부했지요. 그렇게 정식으로 거론 됐음에도 불구하고 10여 년 동안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은 무용인 자체 내부의 몇 사람의 반대의견이 교육부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용교과 독립과 무용교사자격증 제도 마련을 위한 노력들
이 : 무용교사자격증 제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정말 많은 일들을 추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추진했나요?
김 : 같은 해 “무용교사자격증 취득을 위한 국회 공개토론회”도 개최했었습니다. 당시 교육부, 문화부 관계자 및 국회 교육의원이 참석해 토론회가 진행됐고 심지어는 예원․예고 등 무용전공생과 학부형까지도 참석해서 의견을 제시했었지요. 학부모들은 오랜 시간 무용을 가르쳐 자녀를 대학 무용과에 들여보냈는데 체육교사자격증을 취득하게 되는지 몰랐다며 생생히 발언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용교사자격증 제도 도입은 소식이 감감이었지요. 나중에는 띠까지 두르고 대학로에서 연극, 영화분야와 함께 “한국예술교육을 위한 궐기대회”에 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의원들의 관심을 촉진시키기 위해 2004년에는 국회 강당에서 ‘춤과 정치의 아름다운 만남’이라는 주제로 무교혁 특별공연까지도 했습니다.
한편 국악, 연극, 영화 등 세 분야는 예술강사지원사업(구:강사풀제)을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무교혁 이름으로 문화부에 ‘무용분야도 예술강사지원사업에 포함시켜 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었지요. 결과적으로 무교혁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2005년부터 무용분야도 예술강사지원사업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업 진행은 무교혁에서, 교재 개발은 한국무용교육학회에서 담당하면서 초, 중, 고등학교 무용교수-학습과정안, 초등학교 학년별 교과서, 전국아동복지시설 무용교수-학습과정안, 소년원학교 무용교수-학습과정안 등을 개발했습니다.
예술강사지원제 무용분야가 시행된 지 벌써 10여년이 되어가네요. 2005년 첫 해 초등학교 100개교, 110명의 무용강사로 시작된 이 사업은 2014년 현재 2,000여 학교에서 900여명의 무용강사가 전국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교육분야에서도 80여명의 무용 강사가 활동하고 있으니, 전국 무용학과 졸업생들의 취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결과적으로 무용강사풀제는 외부적으로 무용교육혁신위원회가, 내부적으로는 한국무용교육학회가 분담하여 함께 이뤄낸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떻게 그 많은 일들을 다 했나 싶습니다.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네요.
이 : 12년 동안의 활동은 돌이켜보면 엄청난 일들을 해온 것이었습니다. 김화숙 교수는 교육자로서 전담해야할 일도 많았을 텐데 무용교육 발전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당시 각 대학, 학회를 비롯한 많은 단체와 개인이 자발적으로 찬조금을 내놓는 등 사실상 무용계가 유일하게 단합된 모습을 보여줬던 시기였습니다.
김 : 초기에는 무교혁 공동 대표, 위원들 중심으로 추진비용을 쾌척해 주셨고, 이후 후원 활동은 범 무용계 운동으로 확산되었지요. 최근에 다시 살펴보니 대학 무용학과 교수 130여명이 후원금을 10만원씩 내주셨고 이밖에도 무용관련 학, 협회, 개인 무용단체 등에서 한마음으로 뜻을 모아주셨습니다. 정말 많은 무용인들이 무용교과 독립과 무용교사자격증 제도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요.
그러나 10여년을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서울사이버대학교의 이세웅 이사장님 후원 덕분입니다. 이 이사장님께서 무교혁의 추진 활동을 알고 먼저 연락을 주셨고, 이 후 거의 매년 후원을 해주셨습니다. 그동안 총 13회에 걸친 세미나(강원, 대전, 청주, 대구, 부산 등 전국 각 지역)와 무용인 좌담회를 14번이나 했습니다. 또한 그간 무교추의 활동을 담은 『무용교사자격증 왜 필요한가?』라는 자료집, 리서치 기관에 의뢰해서 전국에 무용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학생, 교사, 학부형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한 결과물인 『무용수업 만족도 조사』, 그리고 『무용교육의 힘』이라는 세 권의 책을 발간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첫 번째 발간된 ‘무용교사 왜 필요한가?’에서 현 제도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고, ‘무용수업 만족도 조사’를 통해 수업 현장의 만족 여부를 파악했으며, ‘무용교육의 힘’에서는 예술교과로서의 무용, 해외 사례 그리고 전국 무용 강사들에게 성공적인 수업사례를 공모, 5편을 선정해 책의 3부에 담아 무용수업의 효과를 검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무용 수업의 결과물까지 제시할 수 있는 탄탄한 기초자료를 마련한 셈이지요. 이러한 작업은 자금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 10여년을 지속시킬 수 있었던 또 다른 힘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김 : 사실 작년 6월 상임이사회의에서 이제 모든 것을 접자는 의견이 나왔었지요. 자금도 바닥나고, 상임이사 중에서 일곱 분(김말애, 김숙자, 이득효, 이병옥, 정재만, 최청자, 하정애)이나 정년을 해버리셨고… 더 이상의 추진 여력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10여년이라는 기간이 얼마나 긴 세월이었는지 그간 자문위원 열두 분 가운데 다섯 분이 돌아가셨지요. 그만큼 조직 구조도 약해지고 힘도 빠지는 상황이어서 회의 당시 그만 둬야하지 않을까, 희망도 없는데 가능할까 등등 부정적인 이야기도 나왔었습니다. 교육부는 무용계의 반대 입장을 불식시키고 한 목소리를 내오라고 요구하고 있고… 따라서 해체하자는 데에 의견이 좁혀지다가 ‘10여 년의 노하우가 너무 아깝지 않은가? 한번만 더 노력해보자!’는 의견에 모두들 반대를 못하고 조직 구조를 재정비하기로 했습니다. 바로 그동안 발간한 책 세권, 한국무용교육학회에서 발간한 교육 자료들, 교육부에 끊임없이 보냈던 문서들, 국정감사 자료들을 모두 관계 기관에 제시했더니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작년 하반기 사이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성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무교혁 임원진들의 굳은 의지와 화합이 가장 큰 힘으로 작용한 것이지요.
그리고 시작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하게 도움을 주시는 이재오 의원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2003년 국회 청원서 제출, 국정감사에서 무용교사자격증 문제 거론, 그리고 국회에서의 무용교사자격증 문제 공개 토론회, 국회 무용 공연, 대학로 궐기대회 참석 등 2013년 국회청원서 제출에 이르기 까지 참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무용계에 정말 큰 선물을 안겨 주신 분입니다.
이 : 말씀을 듣고 보니 소설을 집필할 정도로 대단합니다. 저 역시 초기에 결의대회, 학술대회에 참석하며 무용교과독립에 동참했었지만 개인적인 일들로 후반기에 직접적인 참여가 불가능했습니다. 그간의 노력들이 결과물로 나와 이렇게 많은 자료와 연구실적을 이뤄냈기 때문에 더 이상 반론를 제기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문을 맡아주셨던 분들 가운데 다섯 분이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분들이신지 거명을 부탁드립니다.
김 : 김천흥, 김진걸, 송범, 송수남, 정병호 고문님. 이렇게 다섯 분이십니다.
이 : 그야말로 무용계의 산역사이며, 우리의 윗세대 분들이십니다.
김 : 영상제작을 위해 지나온 자료들을 정리하며 사진 속의 고문님들을 뵈니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특히 김천흥 고문님께서 주먹을 불끈 쥐며 무용교과 독립을 주장하시는 모습… 그냥 가슴이 아련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무용계 원로 분들이신 강선영, 김문숙, 김백봉, 김옥진, 김정욱, 이매방, 육완순, 조흥동 선생님께서 고문으로 계시면서 적극적으로 동참해 주셔서 정말 든든하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무용교육의 체계적 연구 - 한국무용교육학회
이 : 1963년 대학에 무용과가 설립된 이래 50년 역사 속에서 무용계가 이만큼 결집한 사례는 처음인 듯합니다. 몇 사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랜 동안의 노력 끝에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동안 축적된 자료들이 무용교사자격증을 최종적으로 인정하게 된 이유일 것입니다.
공동추진위원장님 몇 분계시지만 김화숙 교수님이 모임체의 핵심이자 중심이었습니다. 이 시기를 놓치고 교수님도 정년퇴임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래서 다음 사람이 이어받아 이것을 추진한다면 더욱 힘들어졌을 겁니다. 퇴임 전에 마무리 짓게 된 것에 대해 축하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교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네요. 한국무용교육학회의 조직과 활동내용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 : 개인적으로 정년 전에 결실을 맺게 되어 정말 감사한 일이지요. 대학 졸업 후 금란여고에서 7년 동안 교직생활을 하면서 무용이 얼마나 많은 학생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체험을 통해 알 수 있었지요. 또한 내 전공인 현대무용이 갖고 있는 상상력과 창의성도 교육과 관련이 깊기 때문에 무용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구체적으로는 1975년 제 석사논문의 주제였던 무용즉흥이 무용교육의 기초 자료가 되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1989년 ‘한국무용교육학회’ 설립 당시에는 대학 무용과 교수들은 무용도 예술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창작활동에 몰두할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은 교수들이 우리나라 무용예술계를 이끄는 시대였기 때문에 교육에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었지요. 그래서 고등학교 무용교사 세 사람을 포함하여 총 아홉 명으로 한국무용교육학회를 출범시켰습니다. 저는 89년 창립부터 6대까지 총 18년간 학회장을 맡았고, 이후 6년 동안 이화여대 신은경 교수가 학회장을, 그리고 올 해부터 경성대 한혜리 교수가 9대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8년 동안 학회장을 하면서 세월이 지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학회 덕분에 현대무용 활동을 하면서도 무용교육 관련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1980년대로 기억이 되는데… 정승희 공동위원장께서 대한무용학회장이셨고 제가 학술부장이었을 때 무용교과 독립과 관련된 심포지엄을 개최했는데, 그 때 교육부 소속 참가자께서 ‘무용교과가 시행된다면 당장 가르칠 내용이 마련되어 있느냐?’는 질문에 할 말을 못했었습니다. 우리가 준비 없이 무모하게 무용교과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는 반성과 동시에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었지요.
그래서 무용강사풀제가 시행되면서 첫 번째로 추진한 것이 바로 교재 개발이었습니다. 다른 분야는 초‧중‧고 동시에 시작했지만, 무용은 초등학교부터 단계적으로 시행하겠다고 주장했고, 초등학교 무용교수-학습과정안부터 개발하기 시작하여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순차적으로 교수-학습과정안을 만들고, 초등학교는 학년별 교과서까지 발간했습니다. 아마도 교재가 있어야 무용교과 독립을 주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뇌리에 박혀 그렇게 밀고 나간 것 같아요. 제가 무리하게 밀고 나가서 지금 생각해도 연구진들에게 많이 미안합니다. 다행히도 연구진들이 자신의 몇 십 년 동안의 연구물들을 흔쾌히 내놓아 가능했던 일이었지요. 학회의 교재개발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러한 시스템이 있었고 무용계를 결집하는 무용교육혁신위원회라는 기구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이 : 저도 무용교육학회에 참여해 좌장을 여러 차례 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서울교대에서 무용교육을 전공했고 무용계 활동의 출발점이 초등무용교육이었기 때문에 이것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요. 교육이 되어야 모든 것이 이뤄진다는 취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강사풀제 도입 당시 교재개발에 전통무용 분야로 참여했었고 지원한 강사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등 초기 기틀을 마련하는 데에 동참한 바 있습니다. 이후에는 김화숙 교수님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무용교과독립이라는 훌륭한 결실을 맺으셨는데, 어느덧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습니다.
김 : 2015년 2월이 정년퇴임이네요. 정년퇴임? 사실 아무런 감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학교 일보다도 학교 밖 일들이 더 많았기 때문인지… “아! 이제 월요일마다 기차를 타지 않아도 되겠구나”하는 안도감(?)이 더 드네요. 그런데 스스로 할 일이 있는 사람은 대학에 있든 없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아닐까요?
이 : 저도 작년 2월에 정년퇴임을 했는데 확실히 전후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활동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퇴임했던 무용계 지인들로부터 연착륙을 준비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걱정이 많았지만, 한편으로 퇴임 후에도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을 조금씩 늘리다보니 실제로 일이 더 많아지고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퇴임을 했지만 사회와 문화예술계에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이며 일과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김화숙 교수님은 고문 또는 자문으로서의 역할 등 여러 일들을 하실 것으로 생각되는데 구체적으로 퇴임 후 계획이 있으신지요.
무용은 예술교육의 기초
김 : 무용교사자격증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예술교과’에 무용을 포함시켜야 하는 일이 남아있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무용교사자격증도 빛을 보게 될 것이니까요. 그러나 무용교과 문제는 빨리 해결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직속 문화융성위원회 김동호 위원장님께서 이미 대통령께 보고를 끝냈고, 언론에도 발표가 되었기 때문에 교육부 내에서 추진이 되도록 하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몇몇 무용인들은 무용교사자격증 제도 도입에 불안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무용 교과가 없는데 무용교사자격증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를 염려하는 것 같은데… 무용교사자격증 시행은 2015년 입학생부터 해당되며, 이들이 졸업할 때 즉 2019년부터 무용교사자격증 소지자가 배출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동안 예술교과에 무용이 포함되는 문제를 해결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번 일을 추진하는 동안 무용과 몇몇 교수들의 불안해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50년 동안 무용이 체육교과에 포함되어 있어 어느 사이 체육의 시녀가 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참으로 씁쓸했습니다. 하루 빨리 무용교육의 독자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실 무용교사라는 독자적인 이름을 우리는 너무 뒤늦게 찾았습니다. 예술교과 괄호 안에 무용과목이 포함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까지가 제가 무용계를 위해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남아있는 시간동안 매진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읽고 싶은 책도 읽고 여행도 다니려 합니다. 사실 30여 년 동안 대학에 재직하면서 안식년 두 번의 기회를 모두 무용 교재개발과 무용교사자격증 문제 해결에 쏟았기 때문에 진정한 휴식도 취하고 싶네요.
이 : 말씀을 듣고 보면 체육교사자격증 속에 무용이 예속되어 있었던 세월이 매우 길었다보니 그것에 익숙해져 독립에 대한 불안심리가 일부 있는 듯합니다. 체육교과에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쪽으로 취득하면 되겠지요. 무용은 진작 도입되었어야할 무용교사자격증을 이제야 뒤늦게 찾은 것입니다.
김 : 무용과를 졸업해도 본인이 체육교사자격증을 원한다면 교육대학원 체육교육과에 진학하면 됩니다. 혹은 처음부터 체육교육과로 입학을 하면 되는 것이지요. 현재 교육대학원 무용교육과는 거의 체육교육과에서 ‘무용전공’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이제는 무용교사자격증이 신설되었으니 당당히 무용교육과로 운영이 가능해졌습니다.
이 : 과거에는 교육대학원에 무용교육학과가 전국 몇 군데 대학에 설립되어 있었습니다. 체육교사자격증 때문에 체육교과목 내에 필수과목으로 무용교육을 넣다보니 무용과에 무용교육이 빠져버리는 현상이 나타났지요. 체육계에서는 무용교육에 대한 대응책으로 필수과목을 지정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체육교과 내의 무용교육과는 별개로 향후 독자적인 무용교육학과가 설립되면 무용만으로도 교사자격증이 취득되므로 훨씬 좋아지는 것입니다. 앞으로 무용계에서 더 준비할 사항, 실행 과정 속에 필요한 사항은 무엇인가요? 불안해하는 무용인들에게 이해시키는 과정이 조금 더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김 : 무용교사자격증 제도가 신설된다는 내용은 지난 3월 5일자 관보에 실렸습니다. 그로부터 40일이 지나야 효력이 발생되기 때문에 4월 15일까지 숨죽이고 있었지요. 이제 무용교사자격증 제도 시행에 관련해 교육부는 각 대학으로 공문을 보낼 것이며, 그 다음부터 본 제도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2015년 입학생부터 무용교사자격증 제도는 시행됩니다. 따라서 무교혁에서는 전국 대학 무용학과 교수, 단체장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내용을 알기 쉽게 요약하여 발송하려고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관계자들의 인식변화가 가장 중요하니까요.
2003년 방문 때와는 달이 10년이 흘러 지난해 청와대, 교육부, 국회를 방문하면서 그간 노력이 헛되지 않게 많은 변화가 생겨났음을 느꼈지요. 국회의원, 관련 부처 담당자들의 인식이 달라져서 벽보고 얘기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무용계의 활발한 활동이 모든 이들에게 무용에 대한 긍정적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술교육이 살아나야 공연 예술계도 살아날 수 있듯이 교육과 예술의 사이클이 동시에 돌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육으로서의 무용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생성되면 훌륭한 관객이 나올 것이고, 훌륭한 관객이 있으면 무용예술은 발전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 현 정부는 ‘창조경제’를 국가의 주요 비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창조는 예술창조가 근간이 되어 새로운 미래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각 학교가 무용교과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당면 과제 중에 우선시되고 있습니다.
김 : 학교의 무용교과목 선택의 문제는 무용계가 앞장서 홍보해야할 부분입니다. 예술강사지원제 시행 첫 해인 2005년에는 국악, 연극, 영화, 무용, 애니메이션 등 총 5개 과목 중에 학교가 선택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초대 무용교육위원들과 110명의 강사들은 모구 무용전도사가 되어 홍보했었지요. 평가위원들은 학교장을 비롯한 행정가들에게 무용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도록 노력했고, 무용 강사 한 명이 10여개 학교까지 찾아가서 홍보했었습니다. 그래서 무용은 다른 분야보다도 확산 속도가 빨랐습니다, 2005년 100학교 110명의 강사에서 제가 위원장으로 있는 4년 동안 1,000여 학교, 700여명의 강사로 확대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무용계 스스로 노력하고, 홍보해야만 무용교과 시행 학교가 늘어날 것입니다.
오늘날 예술교육이 그 어느 때 보다도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학교 무용교육 원래의 목적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학교에서 무용은 일회용, 행사용이 아니라 아이들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개발시킬 수 있는 수업이 되어야 합니다. 즉, 학생들의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 영성교육이 가능한 무용은 예술교육 중에서도 기초가 되는 교과입니다. 대중 춤을 선호하는 학생들의 요구에 맞춰 방송 댄스나 힙합을 무용수업 일부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음악교사가 아이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요를 가르치지 않는 것처럼 무용 교사들도 이 점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합니다. 일반 학교에서의 무용 수업에서는 기능교육이 아니라 예술교육이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 강사풀제가 도입되어 지평을 넓혀왔던 것이 각 학교에 무용교육의 필요성을 인지시킬 수 있도록 일조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부터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당시 강사풀제를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더라면 오히려 역효과가 생길 수도 있었을 텐데 잘해왔기 때문에 수치적으로도 팽창한 것이지요. 예술강사지원제도에서 무용분야를 원했던 학교가 많았다는 것은 앞으로 무용교과로 독립해서 정규교과목으로 채택되는데 교두보 역할을 이미 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무용을 강사풀제로 시행했던 것과 정식교과로 다루는 것에서 나타나는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김 : 2013년부터 ‘문화예술교육사’ 제도가 일부는 시행되고 있습니다. 무용교사 자격증과 문화예술교육사 자격증의 차이에 대해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쉽게 정의하면 ‘문화예술교육사’는 강사자격증, ‘무용교사자격증’은 정식 교사자격증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무용교사자격증은 현재 정원의 10프로 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외 인원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제도로써 문화예술교육사 제도 역시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대학 무용학과에서는 학생들을 위해 두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지요.
오늘 대담을 의뢰받고 지난 12년을 돌이켜보니 그동안 무교혁 공식 상임이사회를 무려 49차례나 했더군요, 비공식회의 까지 합하면 아마도 100여 차례가 넘을 것입니다. 이 기회를 빌어 무교혁 임원진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네요. 장르를 떠나 한 마음이 되어 10여년을 함께 달려왔습니다. 개인적 차원은 물론 무교혁을 통한 무용계 화합의 모습은 소중한 자산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고문님, 자문위원님들은 무용교육 발전을 위해서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셨습니다. 무교혁 설립 당시 한국무용교육학회장이었던 저를 비롯해서 한국무용협회 조흥동 이사장, 대한무용학회 서차영 회장 이렇게 무용계 주요 단체장 3인이 모여 공동위원장을 맡았었지요. 후에 정승희 위원장과 제가 공동위원장을 맡아 지금까지 이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정승희 위원장께서 함께 해주셔서 지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박인자, 신은경 두 부위원장과 박희태, 장광열 선생님도 12년을 함께 지켰습니다. 얼마나 든든한지요. 김인숙 부위원장도 10년을 함께 일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조직을 재구성하면서 임학선, 양정수, 김명숙, 양선희 교수 이외에도 많은 분들이 흔쾌히 동참해주셔서 진심으로 기뻤습니다. 12년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이 일은 결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후원금은 물론 많은 시간을 투자해 준 임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외적인 결실도 중요하지만, 많은 무용인들이 한마음이 되어 긴 시간 함께 일 할 수 있어 정말 행복했습니다.
이 : 무용교과독립추진위원회로 시작해서 무용교육혁신위원회에 이르기까지 부단한 노력으로 무용계에 큰 성과를 남겼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용교사자격증 제도의 도입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무교혁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미래를 향해 무용을 혁신시키고 발전시켜야할 시점입니다. 과거 무용교육이 시작된 50년을 되짚어보면 초기에는 어느 학교에나 체육교과 속에 무용교사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체육이 강화된 반면 무용교사는 어느덧 설 자리가 없어져 고사 직전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반백년 무용역사에서 이제 다시 회생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무용계가 발전할 수 있는 또하나의 교두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으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김 : 개인적으로 평생에 걸쳐 공연 활동을 해왔고, 그리고 무용교육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춤은 곧 내 삶이었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려 합니다. 내게 남아 있는 시간동안 무용계를 위해 헌신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내게 일은 놀이이고, 놀이 또한 일이니까… 다행스럽게도 함께 할 수 있는 동반자들이 많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무용교육혁신위원회의 자문이나 고문으로서 말년의 여생을 뜻있고 보람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저 역시 시간을 내어 깊은 뜻에 동참하도록 하겠습니다. 귀중한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