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안무가 김보라가 7월 9일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초연한 〈Thank you〉는 2014년 기억될 만한 수작이었다. 올해 3월 29일 초연한 <꼬리 언어학> 역시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2012년 6월에 초연한 <혼잣말>은 지난해 10월 서울댄스플랫폼에서 외국의 프레젠터들에게 공개된 이후 올해만도 일본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 6개국에서 초청받았다. 연이어 빼어난 작품을 만들고 있는 안무가 김보라는 어느 새 유럽의 춤시장이 주목하는 한국의 안무가로 급부상했다.
2013년 LDP무용단 정기공연에서 선보인 40분 길이의 〈I'm Not There〉와 문화역사 284 공간에서 선보인 1시간 길이의 <프랑켄슈타인>에 이어 그녀가 2014년에 안무한 일련의 작품들은 저마다 다른 색깔과 평균점을 훨씬 넘는 예술적인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김보라의 안무 작품 모두를 지켜본 춤비평가 김예림은 “<꼬리언어학>은 김보라의 춤어휘 탐구에 대한 성과를 보여준 작품으로 <혼잣말>(2012)에서 시작된 움직임 해체가 〈I'm Not There〉(2013)에서 통제불가의 몸부림으로, <프랑켄슈타인>(2013)에서 절제되기 시작하여 이번 무대에 동물탐구로 드러난 것이다.
특히 등을 웅크리고 발끝으로 걷는 무용수의 실루엣에서 ‘고양이’라는 동기유발체가 설명되고, 4명의 출중한 무용수의 출품작 가운데 가장 정돈된 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한층 노련해진 안무력을 볼 수 있었다. 초록 꽃가루가 흰 플로어에 쌓이는 엔딩장면은 대형작품을 감당해내는 김보라의 스케일과 세련된 감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며 그녀의 작업을 평했다.
8월과 12월 연이은 해외 공연을 앞두고 있는, 2014년 가장 핫(Hot)한 안무가 김보라를 만났다.
장광열 며칠 전 아르코예술극장대극장에서 본 〈Thank you〉는 수작(秀作)이었습니다. 감사의 표시로 하는 인사법을 관습과 연결시키는 안무가의 착상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절제의 미학을 통한 지적인 안무, 간결한 오브제와 움직임의 매칭이 주는 컨셉트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김보라 감사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이 작품은 제가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냈지만 동작을 구성하는데 있어서는 함께 출연했던 댄서들의 도움을 받은 작품입니다. 신체와 접촉하는 또 다른 신체, 그리고 오브제와 신체의 만남을 통한 의미들을 표출해보고 싶었습니다.
그 때문이었나요? 〈Thank you〉는 그 전에 보아왔던 보라씨의 작품과는 좀 다른 성향이었던 것 같습니다. 뭐랄까? 많이 세련되고 정돈되었다고 할까요?
이번 작품은 제 색깔을 많이 넣기보다는 지경민씨 등 함께 출연한 무용수들의 색깔이 덮여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안정적인 것보다 약간 거친 작품이 좋습니다. 너무 잘 다져진 작품이 된 것 같아요. 이는 아직도 안무가로서 저의 스타일이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요.
젊은 안무가들의 경우 함께 작업하는 무용수들이 대게 정해져 있는데 보라씨의 경우 작품마다 출연 무용수들이 그다지 중복되지 않아 보이더군요.
그동안 작품별로 무용수들을 다르게 캐스팅 해 왔습니다. 작품의 컨셉트에 따라 캐릭터를 달리 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구요.
솔로 작품이나 다름 없는 <혼잣말>을 빼고는 최근에 안무한 4개의 작품 모두 5명 이상의 무용수들이 출연하는 30분이 넘는 길이의 작품이었습니다. 작품 속에 담아내고자 하는 색깔은 서로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한 데가 있는 것 같기도 하구요.
제가 하고 있는 일련의 작업들은 “변이” 시리즈라고 할까요? 크게 “변이”라는 이미지를 정해 놓고 해나가는 중입니다. 컨셉트를 정해놓고 안무할 때 댄서들을 바꾸어 가면서 하나의 프로젝트로 운영해가고 있습니다. 최근 잇따라 몇 개의 작품을 만들면서 이제 서서히 저랑 호흡이 맞는 댄서들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지난해 팜스(PAMS) 기간 중에 내한했던 무용 쪽 프레젠터들을 대상으로 서울댄스플랫폼 쇼케이스가 끝난 후 참석했던 30여명의 외국 델리게이트들이 <혼짓말>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었습니다. 2013년 후쿠오카댄스프린지 페스티벌에서도 그런 호평이 이어졌고요. 이 작품은 금년 요코하마댄스콜렉션에서도 수상을 했지요?
네 심사위원상을 받았습니다. 시상식 후 이 상은 모든 심사위원들이 1등을 준 상이다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러고는 이 상을 받은 안무가가 지난 1년 동안 어떻게 성장했는지 보고 싶다며 저에게 내년 요코하마댄스콜렉션에서 신작을 만들어 하루를 공연해 달라고 제안을 하더군요.
수상 안무가에게 원 나잇 공연 전체를 맡긴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리고 요코하마댄스콜렉션의 그동안의 운영 형태를 보더라도 없었던 것이구요. 내년 2월이면 그리 많은 시간이 남은 것도 아닌데… 어떤 작품을 구상하고 있나요?
30분 길이의 제 솔로 작품과 2개의 듀엣이 선보이는 30분 길이의 트리오 작품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2개의 듀엣 중 하나는 이번에 선보인 〈Thank you〉를 새롭게 구성한 작품이 될 것입니다.
올 한해는 국내에서 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지난해 서울댄스플랫폼에서 <혼잣말>을 공연한 후 그날 그 공연을 본 프랑스의 델리게이트가 바로 만나고 싶어했었는데 상반기에는 어디서 공연을 했나요?
5월에 네덜란드의 KORZO NDT에서, 그리고 프랑스의 생 프랑스 Ren contres chore Graphiques에서 공연을 가졌습니다.
다음 달에는 독일 탄츠 메세(International Tanzmesse NRW)의 공식 쇼케이스에 선정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독일 탄츠 메세의 국제교류 담당자인 Carolelinda Dickey가 지난해 10월 서울댄스 플랫폼에서 <혼짓말>을 보았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4명의 한국 안무가들도 공식 쇼케이스에 함께 선정되었고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탄츠 메세 기간 중에 한국 특집 프로그램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공연 후에는 오스트리아에서 한 차례 더 공연을 가질 예정입니다.
12월에도 벨기에 December 축제에 초청받았지요? 그러고 보면 <혼잣말>은 올해 일본을 비롯해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 해외 6개국에서 연속으로 선보이는 쾌거를 이루었네요. 탄츠 메세가 무용 마켓으로는 최대 규모이고 선정된 쇼케이스 공연의 질이 일정 수준 이상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이후 더 많은 해외공연의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혼잣말> 외에도 〈Thank you〉도 지적인 안무에 더 많은 호기심을 갖는 유럽 무대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는 작품이란 점에서 앞으로 더 많은 주목을 받게 될 것 같습니다. <혼잣말>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나요?
2011년에 아르코공연예술인큐베이션 차세대 안무가에 선정되었고, 과정을 마치면서 발표한 쇼케이스 때 습작으로 선보였습니다. 솔로 작품을 안무하면서 내 스타일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어요. 내가 생각하고 내가 겪었던 기억들을 조각조각 엮어낸 것입니다. 이 작품은 즉흥성을 어느 정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동작도 정형화된 동작이 아니라 스토리나 소리에 따라서 그때 그때 바뀔 수 있어요. 저는 하나로 되어 있는 스토리는 별로 선호하지 않아요. 내 색깔이 무엇이다라고 단정하고 싶지도 않구요.
작품에 나오는 영상과 텍스트의 내용 등이 어필하는 부분도 해외무대 진출에는 적지않게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없었습니다. 습작을 완제품으로 극장 무대에 올리면서 작품의 틀이 제대로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무 작업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어릴 때부터예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 다닐 때에도 실기보다는 안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안무는 중독성이 강한 것 같아요. 하면 할수록 재미있어요. 이즈음 들어서는 재미를 느끼는 기회가 많아질수록 걱정도 커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부담이 따르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예종을 졸업한 후 한동안 국내에서 활동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기과 졸업 후 바로 유럽으로 갔고 아일랜드 무용단의 오디션을 볼 기회가 있었고 합격해 2006년에 Daghdha Dance Company에서 일년 정도 활동했습니다. 독일 윌리엄 포사이드무용단의 객원 안무가가 이끄는 무용단이었어요. 2007년에 스위스의 Alais Dance Company에서 활동하던 중 향수병이라고 할까요? 갑자기 한국이 그리워 돌아오게 되었지요.
본인에게 안무가로서 가지고 있는 특별한 어떤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글쎄요.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가끔 국제 발레 콩쿨에 나가는 학생들의 짧은 컨템포러리 작품을 안무할 기회가 있었는데 작품을 본 선생님들께서 “현대의 명품을 보는 것 같다”는 평을 해주시더군요. 평범한 컨템포러리 작품에 내 개념만 살짝 묻혀 놓은 것인데 의외의 좋은 반응에 저도 깜짝 놀라곤 합니다.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고 싶은가요?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하고 싶습니다. 새로운 무용수들을 만나 함께 진중하게 고민하면서 창작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많은 댄서들과 작업하다 보니까 주고받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주게만 되더군요. 그리고 기회가 되면 더 많은 공부와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제 생각에서 파생되는 다른 움직임들을 보고 싶습니다. 내가 아이디어만 좋은 안무가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항상 있어요. 내 작품에 내가 출연하지 않더라도 김보라의 색깔이 강한 작품이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댄스프로젝트 보라’ 라는 단체 이름을 갖게 되었더군요.
이곳 저곳으로부터 공연제의가 많다 보니 제대로 된 컴퍼니 체제는 아니더라도 단체의 골격을 갖추는게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스태프들이 구성이 되어 그때그때 작업하는 프로젝트 무용단 시스템으로 운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객원 안무를 할 수 있는 기회도 가져보았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장광열 이번 해외 투어에 좋은 성과가 있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활약도 기대하겠습니다. 많은 작품을 만드는 것 보다는 갖고 있는 작품들의 예술적인 완성도가 높아 레퍼토리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가능한 세계 여러 나라의 많은 관객들에게 보여졌으면 좋겠습니다. 또 그 작품이 다른 컴퍼니의 공연작품으로도 자주 무대에 올려지길 기대합니다.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기획자가 본 안무가 김보라
송남은_디아츠앤코 대표
디아츠앤코와 다양한 기획 프로젝트를 함께 만들어 왔던 안무가 김보라는 지난 몇 년간 계속적인 자기 진화의 과정을 겪으며 나름의 독특한 어법과 색깔을 구축해가고 있는 듯하다.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색감은 회색의 그로테스크함과 코발트블루의 위트, 그리고 퍼플색의 감정적 동요와 붉은색의 강렬한 도발을 한 데 섞은 듯 묘하게 매력적이다.
자신의 작품 <프랑켄슈타인>에서 하드코어 적으로 보일만큼 집착했던 ‘변신’ (metamorphosis)이라는 화두를 창작 작업의 선상에서 지속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매번 파격과 도발을 넘나들며 변신하고 있는 그녀의 표현성은 예견된 심상들을 해체시키고, 여성 안무가에게 기대(?)할 법한 ‘아름다움’의 미적 개념을 전복시킨다.
디아츠앤코와 김보라는 지난 2년간 총 4개의 프로젝트를 함께 해왔다. 허름한 창고 공간에서부터 대극장 무대, 컨테이너 박스로 이뤄진 복합 공간과 역사성을 담고 있는 문화역사 RTO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공간을 해석하고 관객과 조우하는 방식은 한마디로 ‘대범함 속의 섬세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떠한 제한된 여건들도 창작 작업의 콘텐츠로 역이용하는 총명함과 융통성을 발휘해왔다.
깨질 듯이 섬세하고(fragile) 조심스러우며, 다분히 개인적이고(private) 때때로 비밀스럽게 느껴지는 그녀의 외적 이미지는 어느 새 춤으로 전환되는 그 순간 반전의 한 방을 멋지게 날리곤 했다.
깊이 있는 사유의 과정과 결과로서의 창작 작업보다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감각과 직관에 의거하여 발생한 듯 한 김보라의 작품들은 때때로 논리적인 비약과 허술함을 내보이기도 한다. 시각적인 화려함으로 개념적인 허술함을 상쇄하고자 하는 건 아닐까하는 의문도 잠시, 그녀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파편들은 직관과 본능의 산물로서 ‘살아서 부유하는 그 어떤 것’이기도 하다. 논리와 개념에 박제화 된 작업들과 차별화된 ‘감각의 향연’이랄까.
그녀 스스로 절감하듯이, 지난 몇 년간 국내외 무대에서 쉼 없이 달려온 김보라 안무가에게 ’휴식‘과 ‘사유’의 여유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본능과 직관에 과감하게 응답해왔던 그녀에게, 차근차근 생각을 전개하고 맥락을 찾고 정황을 만드는 ‘좌뇌’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앞으로 그녀는 예측할 수 없이 성장한 모습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낼 지도 모른다.
그녀의 또 다른 ‘변신’을 기대하며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