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대담_ 이순열 vs 문훈숙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1984년에 출범한 유니버설발레단이 창단 30주년을 맞았다. 민간 직업발레단으로 한국 발레의 발전을 견인해 온 유니버설발레단은 지난 30년 동안 세계 무대에 통하는 춤 상품으로 자리잡은 <심청>과 <라 바야데어> 등 그랜드 발레, 나초 두아토, 한스 반 마넨 등 유럽 안무가들의 작품을 꾸준히 소개, 국내 무대에 컨템포러리 발레를 보급하는데 기여했다. 러시아 바가노바 발레 메소드를 국내에 정착시킨 공도 빼놓을 수 없다. 유니버설발레단을 이끌고 있는 수장 문훈숙 단장과의 대담을 통해 유니버설발레단의 지난 30년과 세계무대를 향한 한국 발레의 과제에 대해 들어본다. -편집자 주-
이순열: 유니버설발레단은 초창기 문훈숙 단장을 비롯하여 최민화, 김인희씨 등 10여명이 어렸을 때 델라스 선생한테 발레를 배우면서 그 씨가 뿌려졌고, 그 씨가 싹터 어느새 창단 30주년을 맞이했군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30년은 강산이 세 번 변하는 세월입니다. 흔히 형태만 바뀌는 것을 변형(transformation), 질적인 변화를 변성 또는 변신(transmutation)이라고 일컫는 듯 한데 유니버설 발레단은 30년 동안 세 번의 변신을 겪었다고 생각하시는지…….
30년 동안 끊임없이 진화된 유니버설발레단
문훈숙: 저희는 계속 진화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유니버설발레단은 1984년 5월 12일 창단을 했습니다. 1984년도부터 10년인데, 그 때는 개개인 무용수들의 기량을 만드는데 급급했습니다. 애드리언 델라스 선생님이 처음 발레단에 오셔서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셨습니다. 정확히 10년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1992년에 러시아 마린스키와 인연이 되어 <백조의 호수>와 <잠자는 숲속의 미녀> 공연을 통해서 작품의 진화가 이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1998년부터 해외 진출에 들어갔고, 2001년부터 현대발레로 진화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좋은 인연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만남이 저희가 한 단계 진화하는 밑거름이 된 것 같습니다. 1984년도에 창단한 저희 발레단이 키로프발레단과 인연이 될지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키로프 최고의 예술 감독이 오신 것이었죠.
이순열: <멕베스>에도 나오지만 “기록된 마지막 순간까지”(to the last syllable of recorded time) 헛되이 보람 없이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비젼을 가지고 무언가를 창조하고 변신을 해가는 길을 택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발전을 꾀할 때, 스스로의 변신 못지 않게 중요한 것으로 이식(transplantation)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식이란 원래 모판에서 자란 새싹을 다른 곳으로 옮겨 심어 새로운 환경에서 더 잘 자라나게 하는 농업용어였죠. 발레도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이식되었을 때 크게 성장했고, 프랑스에서 러시아로 이식되어 날아올랐습니다. 이제는 러시아에서 새로운 환경으로 이식해서 뻗어 나갈 때 입니다. 그 최적의 이식처가 한국이지 않을까 아니 한국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렇게나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풍토를 만들고 굳게 뿌리박아 뻗어나갈 수 있도록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할텐데요.
문훈숙: LA타임스의 루이스 시걸 비평가가 유니버설 발레단 30주년 축사를 보내주셨습니다. 저희 발레단이 ‘토치베어러’(torchbearer) 즉, 새롭게 떠오르는 빛이 되길 바라신다는 것이죠. 또한 20여 년 전 박보희 이사장님께서 한국이 ‘발레의 메카’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지금은 공감하지만, 그 당시에 저는 확신이 없었어요.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은 선생님 말씀처럼 우리가 노력 한다면 한국이 발레의 메카이자 최적의 이식처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발레 기법과 정신의 균형 있는 발전을
문훈숙: 그 동안 우리 발레계는 괄목할만한 발전을 거듭해 왔지만, 한편으로 여전히 아쉬운 것은 기술적인 발전 못지않게 정신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성장했는지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모든 예술 중에서 발레만큼 엄격하고 어려운 기교를 요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테크닉을 통해서 무엇을 얻으려는 지가 문제입니다. 테크닉의 완성이 목적은 아닐테고……. 무엇 때문에 턴아웃을 했고 익스텐션과 엘레바씨옹을 추구했는지 항상 생각해야겠지요. 피겨 스케이팅도 아니고……. 발레가 기교에 치우칠 때면 내리막길로 치닫는다는 노베르와 볼린스키의 거듭된 경고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들을 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순열: 그리스 신화를 두 마디로 압축하면 ‘상승과 추락’입니다. 그런데 그 추락을 착지(着地)로 탈바꿈시킨 것이 발레의 마법이고 발레의 개가가 아닐까 싶은데 그것을 한층 더 승화시킨 것이 니진스키의 발롱인 셈이지요. 발롱이란 상승계제(上昇階梯)를 확보하고 나서 다시 도약하려는 가눔의 자세이자 층계참이라고 하겠는데 유니버설 발레단 30년을 ‘층계참’으로 삼아 새롭게 비약하는 전환점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문훈숙: 저희 세대는 열정과 열망으로 정상에 오르려는 이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춤을 왜 춰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정신과 가치관에 대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 선생님에 보시기엔 저희 세대도 부족해 보이시지만, 저도 지금의 젊은 무용수들을 보면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시대의 흐름일 수도 있지만 젊은 무용수들이 콩쿨에 대하는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콩쿨의 장점으로 남자 무용수들은 군대문제가 관련되어 있기도 하고, 자기 자신에게 도전하여 세계무대에서 평가 받는다는 훌륭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만 끝나 버리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젊은 무용수들이 “왜 춤을 춰야하는지”에 대한 예술가로서의 고민과 자세가 많이 아쉽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추는 발레가 아니며 예술이 나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술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예술가로서의 정신과 혼에 대한 교육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엔스타시스’라는 한 차원 높은 황홀감
이순열: 예술가로서의 정신과 혼을 심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젊은이들이 엑스타시스(ecstasis) - 밖으로 개화하는 그리고 날아오르는 황홀감 못지않게 안으로 안으로 깊이 침잠하는 엔스타시스(enstasis)의 무한함에 젖어들면서 정신적으로 더욱 성장하고 예술적으로 더욱 성숙해야 할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아쉬운 점도 있겠지만 그동안 이룬 가장 큰 성과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술적 정신과 혼이 채워져야 할 시기
문훈숙: 선생님 말씀처럼 저희 발레단은 지난 세월동안 ‘트랜스플랜테이션’이 되었던 토양이라고 할까요. 이제는 씨를 내릴 수 있는 터가 된 것이 하나의 성과 같습니다. 예전에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힘들었어도 자신을 넘어서는 피나는 노력으로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그래서 외양적인 러시아 발레 스타일 테크닉은 어느 정도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러시아 예술을 대하는 자세나 러시아를 넘어서는 예술혼을 넘어 서지는 못했습니다. 한국 발레계나 저희 발레단도 이제는 예술성 이상의 정신과 예술혼이 채워져야 할 시기인 것 같습니다.
이순열: 단원 개개인의 노력과 헌신, 그리고 앞에서 이끄는 전위적인 인물이 없고서는 그간의 도도한 흐름을 이끌어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크게 공헌한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우선 문단장이 있겠구요.
문훈숙: 저는 혜택을 많이 본 사람입니다. 이 단체는 델라스 선생님께서 씨를 뿌리셨고 열정을 저희에게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열정을 서포트 할 환경을 마련해 주신 이사장님이 계셨기에 가능했습니다. 그 당시 이사장님께서 외국생활을 하시면서 느끼신 점이 한국이 전쟁과 고아의 나라가 아니라 문화강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박보희 선생님의 높은 이상과 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해주신 설립자 어르신이 공로자라고 생각합니다. 발레단이 탄생되어 성장하기 까지 이 분들께서 주요 역할을 하셨고 그 속에서 저희 무용수들의 땀이 함께해서 이렇게 발레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심청>은 유니버설 발레단의 빛나는 개간
이순열: 발레가 프랑스에서 러시아로 이식될 때는 러시아가 유럽의 변두리였지만 오랜 세월에 걸친 교류뿐만 아니라 이질성 못지않게 동질성도 바탕에 깔려 있어 그 수용이 비교적 쉬웠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서양의 토양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터전이죠. 장기를 이식할 때 다른 세포가 체내에 들어오면 기존의 세포들이 배척하는 리젝션 현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접목시키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인데 그런 점에서 한국 고유의 주제를 가진 창작발레 <심청>은 유니버설 발레단의 개가였다고 생각됩니다. 또 다른 작품인 <춘향>의 공연 계획 등 이런 작업을 계속할 생각이십니까?
문훈숙: 한국적인 발레 접목작업은 계속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청>은 델라스 선생님께서 1985년부터 음악작곡을 하시면서 꾸준히 준비하신 그분의 결과물입니다. <심청>은 28년 동안 수정 보완하면서 유니버설과 함께 성장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2007년도에 일산에서 <춘향>을 올렸어요. 제가 <심청>을 할 때는 몰랐었는데, <춘향>을 할 때는 참 힘들었습니다. 역시 이 작품도 서양의 발레와 한국 문화를 조화롭게 하는 발란스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촌스럽고 아니며 한국적인 요소가 안보이거나 해서 더 많은 노력을 들이고 있습니다. 유병현 선생님이 안무중이신데 음악, 의상, 무대장치를 수정해서 9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올릴 예정입니다. 앞으로도 동양과 서양발레가 퓨전하는 길은 찾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내년에는 국내ㆍ외 어떤 안무가이든 한국적 소재를 가지고 새로운 작품을 만들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이순열: 한국발레계가 세계 메이저 발레단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위기이지만 도약할 수 있는 도전의 시기
문훈숙: 테크닉 면에서는 발전했으니, 예술성 부분에서는 아직은 성숙해야 할 단계입니다. 무용수들의 역량을 끌어 올리는 대는 레퍼토리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유럽의 안무가들은 작품을 지도할 때 섬세한 과정과 부분까지 연기하게 합니다. 우리 무용수들은 아직은 성숙한 연기와 표현이 부족합니다. 이를 위한 노력과 문학적 해석력까지 갖춰야 하지요. 그리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춤에 대한 정신적인 부분을 채워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발레가 성장했지만 지금이 위기이며 도전이라고 봅니다. 단순히 예산문제만이 아니라 내실이 있는 정신과 교육이 필요합니다.
이순열: “두 점 사이에 가장 먼 거리가 직선(The longest distance between two points is the straight line.)”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돌아가는 길, 우회(detour)의 길에 숨어있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직선에서는 무참히 학살되어 버립니다.
문훈숙: 아직도 무용수들이 행복에서 좌절을 표현할 때 한순간 표현해 버려요. 그 과정까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보여주라고 지도합니다.
이순열: 함의(connotation)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 미묘한 감정의 변화와 추이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문단장의 당부를 단원들이 잘 삭여 음미해 주었으면 좋겠군요. ‘함의’를 이야기하다 생각난 건데, 아킴 볼린스키가 쓴 <환희의 책> <끄니가 리꼬바뉴> (환희의 책 · Le Livre de Jubilation)이 우리 나라에도 소개되었으면 좋겠네요. 기법을 기법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엘레바씨옹(elevation), 크롸제(croisee), 에파쎄(effacee) 등 동작 하나하나의 바탕에 깔려있는 이 미학적 담론이 놀라운 계시(revelation)로 우리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거든요. 유니버설발레단이 30주년을 맞아 새로운 도약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꼭 하시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문훈숙: 많은 분들이 발레단을 거쳐 가셨습니다. 많이 배울 수 있었지만 힘든 일도 많았습니다. 30년이란 세월동안 수많은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상처도 받았고 몰라서 상처를 주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원들과 직원들 모두 땀과 노력의 결실이 오늘을 있게 했습니다. 그동안 많은 격려를 해주신 무용계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공연을 기다려주시고 피드백을 주시는 관객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행복입니다. 발레를 연마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신 설립자분과 이사장님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불모지에서 여기까지도 멀리 왔는데 앞으로도 갈 길이 멀지만……. 많은 도움 주시길 바랍니다.
이순열: 갈 길이 멀다는 게 좋은 것 이예요. 갈 길이 없으면 어떡하겠습니까.(웃음) 로버트 프로스트의 『눈 오는 날 밤 숲속에 머물음』이라는 시는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이라는 함축적인 구절로 끝나죠. 앞으로 우리 앞길에 눈이 많이 내릴 텐데, 눈이 장애가 될 수도 있지만 눈이 아름다운 꿈을 안겨줄 수도 있듯이 유니버설발레단이 오래 오래 그 길을 걸어가길 바랍니다.
2014. 03.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