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대담_ 김매자 명인전 공연을 말하다
나와 시대를 찾아간 춤 역정을 돌아봅니다
  • 일    시
    2021년 5월 24일 오후 1시
  • 장    소
    아카데미아인(서울 동교동)
김매자 - 김채현



김채현, 김매자 ⓒ춤웹진




김채현: 김매자 선생님은 오는 6월 12~13일 토월극장 무대 ‘명인 시리즈’에 서실 예정이시지요. 보도에 따르면 이 시리즈는 2015년부터 현대차정몽구재단이 주최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산학협력단이 주관하는 ‘예술마을 프로젝트’ 가운데 한 사업으로서, 그동안 판소리의 안숙선, 사물놀이의 김덕수의 무대가 마련되었고 이번에 세 번째 명인으로 선생님이 선정되었다 합니다. 한국 창작춤을 개척해온 작업을 토대로 이 명인전에 발탁되셨는데, 이번 무대 또한 그 작업에 초점을 맞춰 꾸려진 것으로 압니다. 전체 무대 타이틀은 〈깊은 여름〉으로서 선생님의 춤과 인생을 재조명하는 내용으로 구성될 예정입니다. 깊은 여름이라는 언어가 상징성을 품고 있다는 느낌부터 받습니다. 우선 〈깊은 여름〉의 추진 과정이나 전개 내용에 대해 먼저 들어보기로 하지요.

김매자: 저 역시도 깊은 여름이라는 말에서 어떤 울림을 봅니다. 극본에서 ‘깊은 여름’이란 제목이 나왔습니다. 개인적으로 10년 전 〈봄날은 간다〉가 제 춤 인생의 끝 작품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번에 무대가 마련되었군요. 이 공연은 작년 10월부터 준비했고, 이후 제작진, 극본가, 연출가와 함께 제가 쓴 책, 방송 인터뷰 내용 등을 검토하는 작업을 매달 2~3번 만나서 대화로 진행했어요. 〈봄날은 간다〉를 할 때 이제 겨울 무렵에 들어서지 않았나 생각했는데 이분들이 ‘아직도 선생님은 깊은 여름이다’라고 해서 조금은 부끄러운 마음이었어요. 깊은 여름을 상징하는 그만큼의 업적이 있어야 하고 저는 끝낼 때라는 생각인데, 그런 화두를 앞세워 극본이 작성되었더라고요. 깊은 여름이면 한창 무성하게 쌓여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깊은 여름 말 자체가 이쁘고 듣기에도 매력적인 단어예요. 깊은 여름이 쌓여서 무언가 결실을 맺을 때가 된 거 같은 느낌이 있어 그렇게 제목을 갖기로 했어요. 저한테 결실을 제대로 맺으라는 숙제를 준 말이 아닌가 싶어요.




김매자 명인전 〈깊은 여름〉 포스터




김채현: 과일이나 오곡이 거의 익어가는 시기로 잘 마무리 지으시라는 뜻도 곁들여진 듯합니다. 제작진들과 어디서 어떻게 대화했는가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도 있을 거 같군요.

김매자: 포스트 극장, 레스토랑, 또 한예종 산학협력단 사무실에서도 했어요. 인터뷰 기록과 과거 제 작품을 보기 위해 빔프로젝트, 와이드스크린이 있는 곳에서 만나기도 했어요.

김채현: 〈깊은 여름〉 공연은 ‘길의 탄생’ ‘태생적 무(舞)-차이와 반복’ ‘마술적 도포’ ‘깊음 여름’의 4부로 구성되어 있군요. 1부는 어린 시절부터 창무회를 결성하던 시기까지 춤 입문과 새로운 춤을 탐색해온 과정, 2부는 창작춤을 모색한 작업, 3부는 한국 창작춤을 전세계로 알려온 활동을 정리하고, 4부는 자신의 삶과 춤을 반추하고 창무회와 함께 앞날을 전망하는 내용으로 제시될 예정입니다. 〈깊은 여름〉에서 펼쳐질 내용이 선생님의 춤 인생일 터이니 자유롭게 소개해 보시지요.

김매자: 이번 공연은 신작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해왔던 일과 삶에 대해 이야기를 진행하는 무대이지요. 지금까지 지내온 나날들과 작업이 소개될 것이고, 앞으로 전망도 함께 말해질 것입니다. 먼저 1부 ‘길의 탄생’부터 소개해보기로 하면, 제가 8~9살 때 한국전쟁이 일어나 지금 북한 지역인 강원도 고성군에서 가족과 함께 월남했습니다. 제가 집에서 막둥이고 큰 오빠는 당시 서울로 유학할 만큼 집이 비교적 넉넉한 편이어서 전란 시기에 혹시 반동가족으로 몰릴까 우려하여 그랬던 것입니다. 강을 건너 월남했는데, 그 과정을 저는 〈얼음강〉으로 만든 바 있습니다.

김채현: 어린 나이에 여차하면 반동으로 몰고 몰리는 비극의 한가운데 있었군요.

김매자: 네, 제가 강원도 영월군 상동면 구래국민학교에 다닐 때 처음으로 학예회나 운동회 때 춤을 췄어요.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 때 가족이 부산에 집결했어요. 부산 남성여중에 다녔어요. 김동민 선생님의 민속무용연구소를 다녔는데, 춤만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여성국극을 가르친 곳이었어요. 제가 중학교 때만 해도 춤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춤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죠. 초등학교 때는 운동회를 할 때 춤을 잘 춘다고 했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어요. 당시 여성국극단의 임춘앵 등 배우들 인기가 엄청났는데, 저는 인기인들의 그걸 너무나 하고 싶어 김동민 선생님 연구소에 갔어요. 거기서 판소리, 춤, 연기를 배웠는데 저는 판소리에 소질이 없었던가 봅니다. 제 혼자 앉혀놓고 판소리 완창 다 배우게 했는데 못해도 다 배웠어요. 춤은 좀 췄고 연기를 배웠고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만, 창은 안 되더군요. 거기서 연기와 무대를 배운 게 저한테 굉장한 거였고 지금까지 그렇습니다. 김동민 연구소에 중학교 기간에 3년 다녔어요. 연기도 했고, 조연 왕자 역할도 맡았으며, 지방공연도 다녔어요. 그때 악극단은 삼륜차 같은 것을 타고 꽹과리를 들고 지역을 돌아다녔어요. 공연 끝나면 벌써 내 팬이 생겨서 사인해달라는 사람도 있었어요.

김채현: 그 시기에 황무봉연구소에 입문한 줄로 압니다.

김매자: 1950년대 후반에 여성국극은 점차 사그라드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김동민연구소 근방에서 그때 막 생긴 황무봉무용연구소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 연구소에서는 신무용을 하는데, 이쁜 옷을 차려 입고 하는 것을 보니까 눈이 휘둥그러지더군요. 춤추는 게 너무 좋아 고등학교 1학년 때 황무봉연구소에 들어갔어요. 남성여중 다닐 때 3년 동안 장학생으로 공부했는데, 선생님과 학교, 우리 오빠가 춤추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그때는 춤하면 기생이었던 풍토 아니었어요? 그래도 내가 좋은 걸 어떡합니까.

김채현: 황무봉 선생께 배운 춤은 무엇이었습니까?

김매자: 우리 선생님은 일본에서 발레를 공부하신 분이에요. 발레도 가르쳤고 당시에는 ‘신흥무용’ ‘남방무용’이라 부른 현대무용도 가르쳤어요. 그런 게 너무 재밌고 좋아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저는 신무용이 전통인 줄만 알았어요. 전통이든 신무용이든 그런 개념이 없을 때니까요. 옛날에 전통이라 하면 무당만 생각했잖아요. 또 무당은 무대에 존재할 수도 없었어요. 미신이라 비하했기 때문이고 국사당에서 하고 무당 굿하는 사람은 몰래 숨어서 할 때였지요.




김매자 ⓒ춤웹진




김채현: 춤의 길로 들어서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으셨군요.

김매자: 1962년 이화여대 체육과에 진학했는데, 무용과는 없었고, 체육과 홀 안에서 구기 종목, 기계체조도 해야 하니까 큰 거울을 못 달았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우리 학번의 반은 무용하는 사람들이었고, 도대체 현대무용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을 때 현대무용이 유입되기 시작했어요. 우선 박외선 선생님한테 표현주의적인 춤을 배웠고 대학교 4학년 때 육완순 선생님이 이대에 부임하셨습니다. 대학 다니면서 현대무용을 공부하기도 하고, 인왕산 국사당에 가서 이지산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때부터 굿을 보기 시작했어요. 굿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대사 읊는 걸 보니, 너무 재밌는 겁니다. 그래서 학교 끝나고 굿이 있다 하면 가서 봤습니다.

김채현: 무당들에게서 배우셨던가요?

김매자: 배운다는 개념은 없었고, 가서 구경하는 거예요. 그 당시는 굿이 완전한 미신이었고, 대학생이 와서 구경해주는 것만 해도 무당들은 너무 좋아했습니다. 떡도 주고, 떡을 먹으면서 보는 게 재밌는 거지요. 무당이 공수하는 것, 말 한마디에 울고 웃고 너무 재밌어요.

김채현: 길게 보면 선생님에게서는 굿을 만난 것이 선생님이 한국춤의 뿌리를 찾는 데 어떤 방향으로 작용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학 과정에서 김천흥 선생님을 만나신 것으로 압니다.

김매자: 대학 다니면서 제일 먼저 만난 분이 김천흥 선생님이에요. 그때 당시 김천흥 선생님이 누구신지, 궁중무용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몰랐어요. 김천흥 선생님을 만나고부터 신무용과 다른 춤이 있다는 걸 알았죠. 그리고 또 한영숙 선생님을 알게 된 거죠. 김천흥 선생님께는 따로 공부 많이 했어요. 선생님과 둘이서 〈춘앵무〉 홀기를 푸는 게 너무 재밌었어요. 선생님이 한문 하나하나 용어를 풀어주셨어요. 선생님도 그때 처음으로 용어를 만들어가기 시작하셨고 그때 청계천에 선생님 학원이 있었어요. 거기서 궁중무용을 배웠습니다. 그때만 해도 궁중무용의 가치를 몰라서 〈춘앵무〉를 추면 어깨가 떨어져 나갈 거 같이 힘들었어요. 의무감에 어쩔 수 없이 배운 거지요. 그리고 김천흥 선생님 나름대로 정리하신 〈바라춤〉을 가르쳐주셨어요. 〈바라춤〉을 김천흥 선생님께 처음 배웠어요. 졸업 후에는 박송암 스님께 따로 개인 레슨으로 〈바라춤〉을 배웠습니다. 창덕궁 안 민속박물관을 지나치는데 포스터에 송암 스님이 공연한다고 쓰여 있었어요. 그래서 들어가 봤습니다. 그때만 해도 불교 의식 무용 존재조차 몰랐어요. 66년에 대학을 졸업했는데, 60년대부터는 국문학 등 모든 분야에서 전통 발굴이 시작됐습니다. 신무용이 전통이라고 생각했을 그런 시기였지요. 그런데 스님이 춤을 춘다는 겁니다. 송암 스님이 춤추는 걸 보고 너무나 깜짝 놀랐어요. 지금까지 우리나라 남자춤꾼들이 송암 스님만큼 춤 잘 추는 사람 보지 못했어요. 스님이 〈법고〉를 추는데 나비가 꽃에서 살짝살짝 뛰는 거 같았어요. 아직 그런 춤꾼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그걸 보고 너무 놀라서 송암 스님을 찾아간 거예요. 69년부터 이대 강사를 나가면서 새벽 6시에 스님 절에 올라갔어요. 스님은 춤을 가르치지 않았어요. 범패부터 가르쳤고, 저는 외워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천수바라를 치는 건 무용가 중에서 저밖에 없을 거예요. 천수경을 외워야 천수바라가 나옵니다.

김채현: 송암 스님께 얼마나 배우셨어요?

김매자: 69~71년까지였죠. 그때만 해도 스님들조차 이걸 안 배우려고 했어요. 송암 스님이 “너만큼 잘 추는 스님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고민을 얘기하시더군요. 그러다 74년도에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현대음악계의 강석희 선생님이 전통과 현대의 만남이라는 ‘제1회 국제현대음악제’를 했어요. 프로그램 중 전통에 박송암 스님을 넣었어요. 스님이 범패를 하고 제가 〈법고〉 〈나비춤〉 〈바라춤〉을 했어요. 스님이 무대에 안 서려고 했기 때문이지요. 앞에는 현대음악을 하고 나중에 스님이 나가서 짓소리를 했어요. 분장실에 앉아서 듣는데 저도 깜짝 놀랐어요. 하늘에서 천상의 소리가 들려오는 거 같았어요. 깜짝 놀라서 나갔고 제자들과 같이 〈나비춤〉을 하고 제가 〈천수바라〉와 〈법고〉를 했어요. 끝나고 나니까 제가 어느 산속에 들어와서 천상의 소리를 들은 거 같았어요. 〈공간〉 잡지에 그런 평이 나왔어요. “현대음악을 듣다가 스님의 소리를 들으니까 천상의 소리를 들은 거 같다”고요. 스님한테 몇 년을 배웠지만 그걸 못 느꼈는데 현대음악과 비교해서 들으니까 느껴지더라고요.

김채현: 2부는 ‘태생적 무-차이와 반복’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김매자: 타고난 게 무당으로 태어났다는 거죠. 나는 무용가가 되길 원했습니다. 제가 이화여대 교수로 부임한 이후 우리 민속 연구가들과 향토축제협의회를 만들었어요. 아무것도 몰랐는데 여러 선생님들 쫓아다니며서 무언가를 발굴하고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필드워크하는 방법을 알게 된 거죠. 이전에 알아서 했다기보다 그런 걸 하면서 공부하게 됐습니다.




김채현 ⓒ춤웹진




김채현: 죽 이야기를 들어보면 춤이라는 것의 체계가 명확하게 잡히지 않은 한국 근대사회에서 춤을 찾아간 것이고, 어쩌면 이것이 김 선생님의 길이 되기도 했는데요. 누가 던져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가고, 그런 방향에 몸바쳐 집중하여 명인의 반열에 오른 그간의 노고가 대단하다 하겠습니다.

김매자: 춤 체계를 몰랐던 건 물론입니다. 과거에 무당이 굿하는 걸 누가 춤이라고 생각했겠어요. 게다가 탈춤은 탈춤이지 그 속에서 춤을 만들어 낸다고 신무용에서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최승희 선생은 우리 춤의 형태적인 걸 따서 신무용으로 만들었고, 제가 그 깊이를 느끼게 된 건 필드워크를 한 이후입니다. 제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신무용이 전통이었죠. 저는 전통을 본 적이 없었어요. 대학 와서 현대무용을 공부하게 되고 그런 와중에서 내 것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내 춤에서 어떤 방법론을 찾고자 했지요.

김채현: 부제로 ‘차이와 반복’이라고 했는데 이건 무슨 뜻인가요?

김매자: 시대적으로 우리가 차이를 크게 느끼고 살잖아요. 그래도 근본은 반복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김채현: 대학 재학중 현대무용을 접하고부터 한국무용에서 자신의 메소드를 찾아야겠다는 자극을 받으셨겠지요. 김매자 선생님 하면 물론 개인 작업도 중요하지만 창무회를 결성했던 그 자체가 트레이드 마크처럼 돼 있지 않습니까. 창무회 결성이나 지향점을 소개해 보았으면 합니다. 창무회를 제자들과 1976년에 결성했죠?

김매자: 네. 제자 5명이요. 임학선이 첫 제자죠. 제자들이 한국춤을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필드워크도 많이 시켰고, 그래서 창무회를 조직했어요. 지금은 무용단 같지만 원 이름은 ‘창작무용연구회’입니다. 춤만 추는 게 아니라 춤을 하기 위해서 이론적인 걸 갖추어야 한다고 보아, 이론과 실기를 겸비해야 창무회에 들어올 수 있었어요. 적어도 석사나 석사에 준하는 과정에서 전통춤에 대한 논문 반드시 한 편을 써야 하고 전통춤을 자기 나름대로 분석, 실기로 표현해야 합니다. 현대무용에서 영향을 받은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무대에서 근거 없이 웃고 울고 싶지 않은 거예요. 나도 내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고, 그러면서 나에 대한 이야기와 사회적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때는 근대사의 격동기였고, 데모도 하고 탈춤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도 시대적인 거였잖아요. 그렇다면 ‘이 시대의 무엇을 내 춤에 남겨두아야 할 것인가?’는 생각을 갖고 이 시대의 춤, 내 춤, 그리고 이 시대 창무회의 춤, 그리고 김매자의 춤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김채현: 이 시대를 호흡하고 나를 표현하는 춤은 신무용과는 전혀 다른 개념인데요. 어떤 점에서 매우 획기적이었지요.

김매자: 네. 그렇게 나온 것이 75년 1회 발표회입니다. 77년, 79년, 81년, 홀수 해에 발표회를 열었어요. 81년에 〈사금파리〉 〈사물〉이라는 작품을 했습니다. 채희완 선생님이 〈사금파리〉를 지금도 다시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시대적인 것이었어요. 사금파리는 깨진 사기그릇 조각이죠. 김지하 선생님이 수감 중일 때에요. 〈황톳길〉 가사를 갖고 김영동이 선생님이 음악을 만들었어요. 그때 한참 김영동 선생님 음악을 썼습니다. 초창기에 황병기 선생님 음악, 그 다음에 김영동 선생님 음악을 사용했습니다. 죽어도 죽어도 또 죽어가는 내용을 갖고 작품을 만들었어요. 국립극장에서 그 작품을 하는데 그때는 엄혹한 시대니까 “겁나지 않으세요?”라고 누군가가 묻더군요. “우리가 예술적으로 표현하는데 정치와 결부시키지 마라”고 했어요. 시대적인 걸 표현하고 싶었으니까요. 사실 그 작품을 올리는데 방해받을까 걱정이 되었어요.

김채현: 현실적 소재를 반영한 춤을 만드신 거군요.

김매자: 네. 그 작품하고 〈사물〉이라는 작품을 했어요. 탈을 쓰고 사물 악기로. 그때 한참 대학생들이 탈춤하고 사물 할 때니까 우리는 무대에서 그것을 대변하는 식으로 작업했습니다.




김매자 ⓒ춤웹진




김채현: 창무회를 결성해서 새로운 양식의 한국춤을 추구하셨는데, 그전에 우리 무대 춤은 신무용 일색이었다 하겠지요. 창무회 작업과 신무용은 어떤 차별점이 있을까요?

김매자: 창무회 1회 발표회 때는 개인 안무작들이 올려졌어요. 그때 두들겨 맞았다 할 만큼 반응이 부정적이었습니다. 맨발로 하고 시대적인 걸 했는데 하여튼 매섭게 맞았어요. 79년에 발표회를 했는데 완전히 창무회가 다시 발돋움도 못 할 정도로 평으로 두들겨 맞았죠. 그리고 재정비했어요. 1981년에 개인 안무를 시키지 않고 공동 안무를 시켰어요. 공동으로 어떤 주제를 갖고 깊이 연구하고 시대적인 걸 얘기하게 했습니다. 그때 나온 작품이 〈도르래〉와 〈소리 사위〉예요. 두 작품으로 ‘신무용과 한국 창작춤의 시대가 바뀌었다’ ‘완전히 춤의 시대가 왔다’는 평을 듣게 되었습니다. 〈소리 사위〉는 음악부터 획기적이었습니다.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기차 소리, 인쇄 소리, 소음을 갖고 작품을 만들게 했어요. 그리고 신문지를 무대에서 사용한다는 의미가 여러 가지 있었어요. 인쇄 돌아가는 소리, 기차 소리, 이런 것이 굉장히 획기적인 방법이었어요. 내가 〈사금파리〉만들 때 너무나 현실적이었고, 〈소리 사위〉도 현대를 얘기했습니다. 신문지와 음악도요. 옛날에는 멜로디가 있는 음악을 사용했다면, 이건 잡음이죠. 한국춤은 손과 팔을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저는 〈도르래〉 때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몸통으로, 몸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 대신 내용은 인연, 어머니 자식, 사람과 사람과의 인연을 다룹니다. 무속에서 사용하는 끈으로 인연을 표현했습니다. 손을 움직이지 않더라도 내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 거죠. 〈도드래〉에서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춤을 선보였습니다.

김채현: 가만히 말씀을 들어보면 〈도르래〉는 춤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상체의 손과 팔의 움직임을 최대한 배제했다는 점에서 획기적 발상을 가졌습니다. 몸통으로 움직임을 전개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신무용과의 차별성을 물론이고 다른 춤, 다른 세계의 춤하고도 상당히 차별성이 있지 않은가 싶지요. 손, 팔을 안 쓴다지만 아이리시 댄스는 발디딤새를 갖고 하잖아요. 〈도르래〉에서 몸통으로 춤추는 시도 자체가 어떤 변화를 품고 있었더군요.

김매자: 신무용은 상체 위주로 아름다운 것만 표현합니다. “노인네가 손 한자락 탁 던지는 데서 인생의 결말이 보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작이 전혀 없는 듯해도 그 속에는 무한한 움직임이 들어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동작이지요. 젊은 사람들 춤에서는 손끝에서 맺어지는 게 보이질 않죠. 이건 몸에서부터 나오는 것인데, 인생을 겪은 내 호흡에서 떨어지는 한 자락의 끝에서 결정체가 나오거든요. 내가 묶었다고 해서 손발을 하나도 쓰지 않는 게 아니라 이 몸짓만으로 에너지와 감정을 만들라는 얘깁니다. 전통무용이나 무당들한테 배울 때 보면 기생들도 마찬가지로 아랫배를 끈으로 잡아매잖아요. 손끝에서 노는 건 발레 형식입니다. 그렇지만 발레도 몸에서부터 나오는 거거든요. 우리 춤은 땅을 어머니로 생각하는,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기운을 느끼게 하는 거예요. 손을 전혀 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몸을 쓰라는 얘깁니다.

김채현: 수박 겉핥기의 춤을 출 것이 아니라, 몸 자체에서 발산하는 에너지, 기가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면서 현대적인 정서를 사람들에게 환기해야 한다는 창작 정신을 지향하셨군요.

김매자: 우리 보고 맨발로 하니까 현대무용 한다고 하는데, 나는 절대 현대무용을 하지 않아요. 동작은 우리 전통춤에서 가져온 겁니다. 무용가들이 그동안 전통춤을 추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처음 보는 거라서 현대무용 같게 보였겠지만 저는 그럴 머리가 없어요. 송암 스님의 작법이라든지 탈춤이라든지 그리고 한영숙 선생님한테서 〈승무〉를 배울 때 승무 자락이 돌아가는 선, 몸은 가만히 있고 손끝만 갖고선 그 선이 나올 수 없어요. 내 몸으로 그 선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서양의 현대춤 흉내를 낸다? 천만에요. 사람들이 한국춤 사위, 우리 동작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씀들이지요. 농악에서 12발 상모 돌리는 것 보면 발을 바꾸기 때문에 몸이 돌아갑니다. 상모 돌리는 사람이 그걸 얼마나 빨리합니까. 45도, 90도로 바뀌는 거예요. 돌아가면서 상모를 돌리는 겁니다. 저는 그걸 활용해서 내 동작을 만들 뿐입니다. 〈춤본Ⅰ〉에 그 동작이 나옵니다. 승무 동작을 합니다. 〈춤본Ⅰ〉에서 무한한 원의 선을 만들어 가는 겁니다. 춤에서 속도, 시간, 높낮이, 공간을 달리할 뿐이지 근본적인 건 전통에 있습니다.




김채현 ⓒ춤웹진




김채현: 창무회 전에 나름의 기초 작업 1970년대, 10년 정도 했군요. 그 시기 나름의 모색을 하고 80년대부터 한 건데, 제가 판단하기에는 신무용이라는 것이 1980년대 들어와서 빠르게 퇴조했습니다. 대체로 신무용적이지 않은 것을 한국무용에서 도달하는데 완벽하게 완결된 것은 아니고 계속 모색해나가는 단계였고 어찌 보면 춤의 체계를 만든다는 자체가 결론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한 평생을 나름대로 그 세계를 추구해온 거예요. 그것이 선대에 조금 더 마련돼 있었다면 그런 작업이 수월했을 텐데, 선생님 나름대로 찾아가는 그 시일이 길었던 거 같아요. 적어도 30대 중반까지 이런 모색을 한 거지요. 그전에 김동민연구소에서 국극에 호기심을 갖고 또 황무봉 선생님께 가서 춤 세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김천흥 선생님의 춤세계를 접하고, 박송암 스님한테 가니까 결정적인 자극을 받게 됐습니다. 몇 가지 키포인트를 잡아보면 본인 나름 모색하면서 고생이 참 심했겠다는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방황의 목표 내지는 모색의 목표가 무엇이냐 하면 오늘날 어법으로 쉽게 말해서 현대적 한국춤이겠지요. 장르로서의 현대무용이 아니라 오늘의 시대를 호흡하면서 나를 표현하는 춤이겠죠. 그런 춤을 만드는 것, 그러니까 그것이 어찌 보면 김매자 선생님의 한 평생의 역사였어요. 〈깊은 여름〉의 진행이 어떻게 되는지 자료를 보니까 선생님의 내레이션도 한다고 나옵니다. 춤 세계도 설명하면서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궁금하군요.

김매자: 90분 정도 시간에 제가 해왔던 춤을 보이면서 연결고리에 잠깐씩 내 춤의 방법론적인 내레이션이 있고 영상들이 들어가요. 영상들은 설명적이지 않고 과거 제 작품이 인용돼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상징적인 영상들입니다. 예컨대 작품 소개 영상이 아니라 내가 왜 맨발을 하였는지, 맨발 작업을 상징하는 영상처럼 내가 걷는 길, 거기에 우리 제자들이 함께 하는 길, 길에 대한 이미지이죠. 또 제가 〈춤본〉에서 한 것처럼 우주의 에너지, 이런 걸 내 몸으로 끌어들이는 걸 영상이 있습니다. 저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설명하는데 영상에서 이걸 확대, 우주를 담는 거 같은 영상 이미지를 만들어봤어요.

김채현: 4부 각각에서 등장하는 춤은 그동안 선생님이 만든 작품과 어떻게 연관이 있는지요?

김매자: 그냥 발췌하는 게 아니라 가령 〈얼음강〉이 원래 50~60분 길이인데 제가 얼음강을 걷는 장면부터 편집해서 한 17분 정도로 집약합니다. 월남하는 얘기가 아니라 ‘인생의 어려움이 이렇다’는 걸 보여주고 또 어렸을 때를 상징적으로 해서 어린아이가 한 명 등장합니다. 어린 김매자입니다. 〈얼음강〉은 제 어렸을 때 얘기니까요. 어렸을 때 겪었던 일을 상상하는 겁니다. 새롭게 다시 안무했어요. 그러니까 옛날 〈얼음강〉을 이용하되 ‘어렸을 때 나는 어떤 기운을 갖고 섰다’ ‘이제부터 길의 시작이다’는 걸 보여주며 끝을 맺어요.

김채현: 네. 4부 제목이 ‘깊은 여름’입니다. 4부에는 어떤 춤이 나올까요?

김매자: 제 솔로로 끝냅니다. 일본 덴츠사 기획으로 1998년에 공연한 〈일무〉(日舞)가 있는데, 그것을 10분 정도 길이로 압축하여 펼칩니다. 한국 가야의 공주가 일본에 가서 춤의 신이 되는 설화를 제가 추었던 것입니다. 해가 숨어 버려 천지가 암흑이 되는데, 그 공주가 춤을 추다 옷이 벗겨지자 팔백여 신이 웃었고 해의 신이 숨어 있다가 신들이 왜 웃는지 나와서 봐요. 일본 천지에 광명을 준 사람이 한국에서 건너간 공주 춤추는 신이었어요. 그 기획의 일환으로 기획사는 저를 규슈, 오키나와 곳곳으로 데리고 다면서 한국과 연계된 설화가 담긴 지역을 모두 답사시켰어요. 그러다 제가 쓰러진 적이 있는데, 무당이 뭘 겪는 것처럼 제가 쓰러지면서 이상한 짓을 했다고 그러더군요.

김채현: 신들림 상태였던가요?

김매자: 그런 것이라고, 일본 종교학자가 그러더군요. 제가 정신을 완전히 잃었으니까요. 그 전에 1시간짜리 솔로를 해본 적이 없어요. 혼자서 솔로를 1시간 했어요. 〈춤본Ⅰ〉 〈춤본Ⅱ〉를 갖고 그렇게 만든 거예요. 거기서 〈춤본Ⅲ〉을 만든 거예요. 이 한 시간 솔로를 하고 난 후 〈하늘의 눈〉 〈심청〉, 〈얼음강〉 카롤린 칼송과 〈Full Moon〉만들었고, 몇 년 있다가 〈봄날은 간다〉를 만들었어요. 그때부터 나온 작품은 전부 해외 초청을 받았습니다. 3부 ‘마술적 도포’는 바로 그 얘깁니다.




김매자 〈하늘의 눈〉 ⓒ창무회




김채현: 사람들이 그동안 관심을 표명해온 게 〈춤본Ⅰ〉 〈춤본Ⅱ〉입니다. 그 내용은 많이 알려져 있고 영상 자료로서도 소개됐는데, 이번 공연에서 〈춤본Ⅰ〉 〈춤본Ⅱ〉가 인용됩니까?

김매자: 앞서 언급한 〈도르래〉나 〈소리 살이〉를 했을 때부터 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고 ‘왜 우리는 덩실덩실 별 의미 없이 손발만 움직이는 춤을 춰야 할까?’ 생각하면서 춤 어법에 관해 고민했습니다. 〈춤본〉은 제가 배웠던 전통무용, 전통문화를 내면화하고 그것을 내놓은 것입니다. 내 몸과 춤 어법에 대한 것이지요. 그동안 굿을 접하면서 내면화시켜 그에 맞는 논리성과 체계성을 갖춘 춤사위를 만들어내는 것이 나의 춤본, 기본기를 만들어내는 방법이었어요. 〈춤본Ⅰ〉은 김매자의 기본 틀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궁중무용이나 작법을 하면서 제가 명상에 들어가는데, 〈나비춤〉 같은 것은 완전히 명상을 하지 않으면 출 수가 없어요. 송암 스님한테 배울 때 무한했고, 무한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에서 저는 숙연해집니다. 그런 것을 접하면서 하나의 춤의 길을 걷는 자로서 어떤 수행해야 할 것인가. 춤의 길을 걷는 사람의 법도, 하나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춤본〉에서 얘기합니다. 〈춤본Ⅰ〉은 나로 하여금 생명을 유지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또 춤을 추게 하는 에너지원은 무엇이며 이를 발언하고 조종하는 ‘내 몸의 중심체는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지요.

김채현: 몸의 중심체가 곧 춤의 중심체겠죠?

김매자: 몸의 중심체가 곧 움직임의 중심체입니다. 그 매듭을 터득한 건 궁중무용이에요. 왕 앞에 내가 섰을 때 비뚤어진 자세일 수 없습니다. 한국인이 가져야 하는 바른 몸,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왕 앞에 갈 수 있는가?’를 김천흥 선생님한테 춤을 배우며 감지했지요. 그것이 나중에 흐트러져서 민속무용으로 갈 수 있지만, 〈춤본Ⅰ〉은 그 몸을 기본으로 하면서 내 몸이 소우주로서 대우주의 기운을 끌어들이는 방법, 이건 물론 궁중무용에서도 느껴집니다. 궁중무용 춤사위예요. 회두라든가 회란에서 우리 구조가 보이기도 하고 그런 것이 즉, 내 몸과 삶과 우주 운행은 같은 것이고 궁중무용에서 무한히 무한히 돌고, 회두에서 건 내가 중심입니다. 대우주의 기운을 내가 끌어들여 내 몸속에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거예요. 한국춤은 발레 같이 테크닉 연습은 아니에요. 한국춤은 테크닉을 연습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 몸속에 에너지를 만드는 수련을 해야 합니다. 젊고 이쁜 여자 무용수가 추는 것과 구부정한 노인네가 추는 맛이 달라요. 손끝에서 떨어지는 맛이 다르듯이 대우주의 기운을 내 몸속으로 끌어넣지 않으면 그런 멋이 나올 수 없어요. 그 수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 몸과 삶, 우주 운행의 진묘를 거치는 삶의 길이라면 그것은 고행이기 전에 더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몸과 삶과 우주 운행의 길이 춤의 길이라는 것이죠.

김채현: 어떤 기교, 테크닉에 연연하기보다는 몸의 운행에 정신을 집중하는 춤 수련을 다시 성찰하게 되는군요.

김매자: 네, 〈춤본Ⅰ〉이 구조적이고 형식적인 틀이라면, 〈춤본Ⅱ〉는 어떤 틀 안에 갇힌 몸의 자유로운 이탈을 드러냅니다. 감정의 자유로운 표출로서, 그것이 틀에 갇혀있으면 안 되지요. 감정의 표출에 의미를 두고 어떤 법식에도 얽매이지 않고 신명의 기운이 하늘에 닿도록 해야 합니다. 이걸로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자유로움과 즉흥성을 〈춤본Ⅱ〉에서 보자는 겁니다.

김채현: 〈춤본Ⅰ〉은 에너지, 몸의 운행을 제대로 인식하라는 것이고 〈춤본Ⅱ〉에서는 발산이 주제였었지요?

김매자: 우리나라 신명의 발산이라는 게 서양춤의 발산과는 달라요. 디스코와 같은 발산이 아니라 우리는 안에서 응축된 기운이 있잖아요. 〈춤본Ⅰ〉에서 말하는 에너지 기운을 갖고 하늘로 닿게 하는, 그런 신명으로 표출되어야 그게 더 크게 신명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닌 서양춤과 같은 발산은 한계가 있다 봅니다. 이런 차이를 어디서 느끼느냐면 궁중무용의 구조입니다. 우리는 항상 중심에 있습니다. 우리 전통 무대의 구조가 마당이잖아요. 우리춤에는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습니다. 구조도 마찬가집니다. 오행, 〈처용무〉 같은 경우는 가운데에 있고 사방이 있잖아요. 이건 바깥으로 발산이 안 돼요. 안으로의 집중입니다. 몸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요즘 무용을 만드는 사람들이 자기 몸에 대한 생각, 자기 춤의 어법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는 거 같아요. 그걸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김채현: 동감입니다. 자기 춤 어법을 갖는 게 너무나 중요하고, 자기 춤 어법을 갖추기 위해 한평생 그 길로 정진한 독특한 체험이 담겨질 것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이번 공연은 깊은 여름처럼 의의가 깊다 하겠습니다.

김매자: 젊은 사람들 작품과 비교해 보면 내 춤은 너무나 고전이라 느껴집니다. 내 연습장에 오면 아주 고전무용 같아요. 젊은 사람들이 작품은 많이 만드는데 도대체 저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몸에 대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요. 우리나라 탈춤이면 탈춤, 농악이면 농악, 나름대로 자기 어법이 있었거든요. 범패, 작법 나름대로 가져야 할 어법이 있었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왜 휘두르는지를 저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지요.

김채현: 몸 예술가라면 몸에 대한 자기 자신의 생각이 어떤 줄기, 핵심을 갖고 있어야 하고 그걸 남한테 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김매자: 그게 전혀 없는 거 같아요. 가령 서양춤을 끌어오면 끌어올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잖아요. 저는 옛날부터 내 제자들을 나 혼자 움켜 앉고 있지 않았어요. 제자들을 이매방, 한영숙 선생님께도 보냈어요. 옛날 선생님들은 욕을 잘하십니다. 옛날 분들의 재치, 표현이고, 그 욕 가운데 진실이 있어요. 그 욕 가운데 선생님의 삶이 있고 겪어온 세월이 있고 그걸 못 느끼면 춤을 출 수 없는 거죠. 저는 운이 좋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에 나를 이끌어준 선생님이 계셨고, 내가 쫓아갈 수 있었어요. 우리 때는 이 방향으로 가라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춤을 배울 때 선생님들이 공간을 어떻게 썼고 어떻게 했다고 얘기해주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선생님의 말씀 가운데 그런 걸 느끼게 됐어요. 굿 하신 이지산 선생님한테 맨 처음에 배운 게 머리에 배개를 얹고 걷는 방법을 배웠어요. 이지선 선생님 같은 경우에는 서울 굿이잖아요. 궁중에 들어가서 하잖아요. 그것과 궁중무용과의 비교, 물론 무속이지만, 그런 걸 요즘 젊은 사람들은 배울 기회마저 드물지요. 저는 우리 제자들을 한영숙, 김천흥, 이매방 선생님에게 보냈게 송암 스님한테 같이 가기도 하고, 한국무용연구회를 하면서 여름마다 필드워크를 했습니다.

김채현: 선생님은 그 타당한 이유를 스스로 충족시키려고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애써오신 겁니다.

김매자: 평생을 해도 아직 부족합니다. 이제 좀 깨달을 만 하니까 80을 앞두고 있네요. 이제껏 조금 깨달았고 내 것에 대해서 타당성 있게 더 설명하고 가르치고 싶은데 이젠 시간이 넉넉지 않다는 느낌도 있지요.




김채현, 김매자 ⓒ춤웹진




김채현: 그날 이런 것들이 공동의 과제로서 화두로 제시됐으면 합니다. 깊은 여름이라는 제목도 인상 깊고 제목 자체가 갖는 함축적인 걸 정리하면서 큰 것을 내비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하지요.

김매자: 이번 공연에서 제작진들이 오랫동안 5개월 이상 붙어서 그동안 내가 실없이 뱉은 말이나 내가 해왔던 일들을 종합적으로 해서 나를 투명하게 볼 계기를 마련한 것에 있지 않나 싶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예술가든 다 자기 나름대로 무언가를 갖고 하지만 이런 기회가 없어서 못 하는 경우도 많잖아요.

김채현: 대학 입학 이후 춤의 근원을 찾는다고 할까요. 그런 굽이굽이에서 아주 귀한 분들을 만나셨잖아요. 김천흥 선생님, 한영숙 선생님, 박송암 스님, 이런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선생님이 춤에 대해 획기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죠. 스스로의 모색이 꾸준히 있었죠. 그렇게 모색하는 동기로서 춤의 근원, 춤의 핵심을 찾는다는 의지가 저변에 있었고 그 같은 동기 때문에 자극이 주어지면 그걸 놓치지 않고 선뜻 받아들였습니다. 김매자 선생님의 남다른 점은 여기서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길이 근 60년간 이어져왔지요. 그 긴 세월의 체험과 역정을 한 시간여 길이로 소개하는 〈깊은 여름〉에서 풍부한 메시지가 나올 것입니다. 게다가 메시지들을 이 시대의 춤꾼, 예술인들과 공유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역정에 얽힌 많은 말씀들을 듣고 싶으나 인터뷰 형식이라 이만 줄이게 되어 아쉽군요. 그간의 노고를 되짚어보며, ‘깊은 여름’ 이후 결실도 기대해보려고 합니다. 긴 시간 인터뷰에 감사드립니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

2021. 6.
사진제공_춤웹진, 창무회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