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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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시
- 2019년 11월 27일(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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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소
- 레스토랑 張(서울 대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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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석자
- 김채현 · 서정록 · 김혜라 · 김인아
서울무용제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 서울무용제가 10월 하순부터 한 달 동안 진행되었다. 올해로 서울무용제는 40주년을 맞이했다. 1979년 순수 경연제로 출범하여 국내 무용계의 최대 제전으로 인식되어 오다가 90년대 들어 서울무용제의 위상은 점차 변하기 시작하였다. 춤계의 환경과 여건이 달라지면서 서울무용제에 대한 관심 또한 달라졌다. 최근 몇 해 서울무용제는 행사 구성에서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서울무용제의 앞날이 어떠해야 할지를 염두에 두고 이번 서울무용제에 대해 의견을 자유로이 나누기로 하자.
- 이번 경연 부문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너무 낮았다. 팸플릿에는 경연 부문 말고도 온갖 행사와 무용인들 얼굴이 나오면서 양적으로는 서울을 대표하는 제전 같다. 이름만 봤을 때는 대표성이 있는데, 질적으로는 고인 물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출품작들만 봐서는 이 경연제를 왜 하는지, 춤계에 어떤 자극을 줄 수 있는지 또 무엇을 기준점으로 비교해야 하는지 잘 짚이지 않는다. 서울무용제의 정체성, 방향성이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경연 부문의 작품 수준을 기준으로 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행사를 위한 이벤트성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 경연 부문에서 작품들은 비슷한 양상들을 취했다. 장르와 내용은 다를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작품이 이미지라든지 공간배치라든지 무대, 조명, 음악까지 춤 장르와 상관없이 유사하다. 이것이 서울무용제의 특색인가. 안무작의 개성이 얕은 데다 경연대회 속성에 맞춘다는 인상이 강했다.
- 그렇다. 우선 작품들의 특색이 약하다. 간단한 예로 조명 크루가 다를 텐데도 조명이 비슷하고, 대체로 드라마 주제곡 같은 인트로 음악을 사용했다. 총평해보면 각 작품이 자기의 고유한 특징을 보여주는 걸 다 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경연대회라는 성격 때문인지, 서울무용제 특색인지 구분이 안 된다. 경연을 통해서 획일화된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 과연 21세기에 이런 식으로 공공 기금을 들이는 춤 경연대회가 필요한지 자문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춤이 소외되어 활성화할 필요가 있던 시기에는 경연대회는 춤을 활성화시키는 순기능이 있었다. 지금은 순기능이 있는지 의문이 있는데 획일화된 모습을 보면서 상당히 뜨악했다.
- 1979년 서울무용제가 처음 개최될 때부터 경연 부문이 있었다. 그때는 순기능을 한다는 전제하에 시작했고 춤계에 끼치는 파급력도 컸다. 1980년대 중반, 서울무용제의 심사에 대한 이의제기가 무용계에서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심사의 공정성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었다. 성명서까지 나왔고 당시 한국춤평론가회가 따로 심사한 해도 있었다. 심사의 공정성 그리고 심사 기준에 있어서 관점의 차이는 문제가 된다. 행사를 시작하고 나서 10년도 되기 전에 이미 경연대회로서 순기능을 하는지 그런 이의제기가 강하게 있었고 그 이후로도 이의제기가 춤계 뒷담화 또는 평론 의견으로서 표명되곤 했다. 이미 ‘획일화’ 때문이 아니라 심사의 공정성 때문에 문제가 많았던 것이다. 심사의 공정성에 이의가 잦아지면서 서울무용제의 권위는 떨어지고 90년대 중반에 서울무용제에 관한 관심도 시들해졌다. 무용계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던 서울무용제가 자기 역할을 상실한 듯한 지경에 빠졌던 것이다. 이후 25년이 흘러 올해 40주년이다. 경연대회 자체에 순기능이 있는가는 근본적인 문제이면서 언제든 제기되어야 하는 과제이다. 또 이번에 작품을 보니깐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경연대회에 출품한 작품들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경연 출품작들, 현대성과 창작성에서 문제 많아
- 8편의 작품 모두 대극장에서 공연됐다. 작품들이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데 동감이다. 구조적인 문제들이 보완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울무용제가 38회 때인 2017년부터 새롭게 탈바꿈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국내 춤의 현주소를 보여주고자 하는 대표성을 다시 회복하려면 갈 길이 멀다고 본다.
- 휴먼스탕스의 〈원, 색〉은 나름 고민의 흔적이 보였다. 전반적으로 내용은 추상적이지만 구도가 잘 짜였으면서 장면마다 변화가 보이고 색깔이 달랐다. 삶의 전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추상/은유했다는 생각이 든다. 댄서들도 훈련이 잘되어 있었고 오브제들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열어놓았다. 반면 팸플릿에서 안무자는 비움의 미학이라 표명했지만 오히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것 같았다.
- 〈원, 색〉은 그나마 눈에 띄었던 작품이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덜 구태의연했다. 물론 이인수의 〈한국〉도 참신한 면이 있었다. 원형으로 도는 무대를 사용할 때 〈레미제라블〉의 인상이 들었다. 다른 작품들은 1990년대나 이전에 어디서 봤을 법한 내용이거나 그런 작품이었다. 이에 반해서 〈원, 색〉은 그런 점에서 참신했고, 다른 작품에 비해 완성도가 높았다고 본다. 대개의 작품은 표면적이고 허술했다. 그런 점에서 높이 사고 싶다. 색감도 굉장히 강렬한 색깔을 사용해서 다른 작품에 비해서 색깔이 들어왔고, 색깔의 배치도 다른 작품이랑 달랐다.
- 〈원, 색〉은 구성이 잘 짜여있었다. 난장에 이르기까지의 진행 과정들에 있어서 구도가 나쁘지 않았다. 구도가 있다는 것은 보는 사람을 생각하고 객관화시킬 수 있는 준비를 했다는 의미에서 안무의 의미가 들어간 것이다. 다른 작품은 무대 위에서 객관화될 때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미흡한 편이었다.
- 〈원, 색〉에서 중반 이후에 바람개비 비슷한 판넬이 나오는데 이 부분은 구태의연한 데에다 일단 거추장스러웠다. 앞부분의 구성에 대해선 그렇게 동감이지만, 판넬 부분이 구성의 강점을 저해하였고, 전체적으로는 작품을 끌어가는 관점에서 현대성이 약하지 않는지 의문이 들었다.
휴먼스탕스(조재혁) 〈원, 색〉 ⓒ한국무용협회 |
- 댄스컴퍼니 더 붓의 〈곳〉은 줄타기를 은유했다. 적절한 군무로 끌어가는 기능적인 작품이다. 이번 서울무용제에서 테크닉이 가장 많이 구사된 작품이다.
- 그럴 수 있겠으나, 움직임과 군무의 취지가 잘 이해되지 않고, 기능적으로 형태를 만들어서 구성에만 충실한 작품으로 동작성은 뛰어났으나 컨템퍼러리한 창작성이 약하였다.
- 댄스컴퍼니 더 붓의 〈곳〉은 구성에서 한국무용의 흔한 군무 스타일을 탈피했다. 분산시켜서 각 동작과 움직임을 나름 집중시키면서 미니멀 식으로 확대해 나가는 작품이다.
- 색감을 쓰는 것과 줄타기 하는 것이 재밌었다. 그러나 처음에 등장하는 오브제는 이해가 안 된다. 설득이 안 됐다. 〈곳〉에 나오는 오브제는 왜 사용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공공연하게 작품 속에서 파편화시키면서 이해를 방해할 거라는 식으로 메시지를 준 것도 아니었고 그런 면에서 감상의 호흡이 끊겼다.
댄스컴퍼니 더 붓(변재범) 〈곳〉 ⓒ한국무용협회 |
- 안귀호춤프로젝트의 〈갇힌 자의 위로〉에서 80년대식의 그런 감성 코드를 보았다. 90년대 한국무용 창작춤을 연상시키는 스타일로서 레트로한 감성이 강하다. 무대 세팅도 굉장히 공을 들여서 한 것 같지만 객석에서 감지되는 감각은 그렇다. 주역 급으로 나오는 남성은 90년대식 연기를 했다. 좋게 표현하면 레트로한 감성이겠으나 과거가 연상되는 작품이다. 음악은 드라마적이었고, 요즘 트렌드를 따라가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 안무 의도를 보면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해서 이 시대를 투영하고자 한다. 사도세자가 마지막에 갇힌 프레임을 써서 그 안에서 갇혀서 연기하는 장면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이 작품이 한국 창작춤이라고 하기에도 미흡하다고 본다.
- 작품 구성에서 한두 명 주역 내지는 주역과 조연의 움직임만 있는 것이지 나머지 집단들의 움직임은 일반적인 춤 움직임을 그대로 배열한 편이다. 안무가 아주 미약해서, 〈갇힌 자의 위로〉는 안무작이 아니라 오히려 연기작이라 해야 더 적절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안귀호춤프로젝트(안귀호) 〈갇힌 자의 위로〉 ⓒ한국무용협회 |
- JCDance의 〈인술라이(insulae)〉는 마임과 극, 이야기, 동작을 이미지화하는 데 초점을 맞춰 독창성을 추구한다고 했는데, 무리가 많았다. 안무가의 의도와 내용, 움직임 모두 유기적 연관성이 약하다. 작품에서 세대 간 갈등을 봐야 하는지, 주거공간을 통해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맥을 잡기 힘들다. 안무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작품 안에서 불분명하다.
- 처음에 작품 설명을 보면서 아파트 문제를 소재로 하는 줄 알았다. 안무 의도에서 소개하는 것과 작품이 매치가 되는지 의문이 들고, 춤부터 마임까지 독창적이지 않고 옛날 스타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파트에 대한 참신한 해석이 발견되지 않는다. 구성, 전개, 발상이 촌스럽지 않은지 묻고 싶다. 아파트를 이 작품을 통해 다시 생각했으면 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 21세기 관점에서 아파트의 인간 군상을 드러낼 수 있지 않겠는가 기대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일테면 아비규환 모습을 연상시킨다. 스토리텔링보다는 작품의 내러티브가 허술하다.
JCDance(신종철) 〈인술라이(insulae)〉 ⓒ한국무용협회 |
- EDx2무용단의 이인수는 이전에 무대에서 개인적인 무브먼트를 해왔다. 〈한국〉에서는 시의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요즈음 사회의 여러 변화를 겪으며 바뀌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작품 전개가 피상적이라는 느낌이다. 전반부는 현재 대중들의 모습, 수동적이고 집단적인 모습을 보여주다가 장면을 전환시켜서 적극적이고 저돌적이고 저항 의식을 가졌던 과거 젊은이들의 모습을 대비하면서, 그 시간을 고뇌하며 개인적인 춤을 춘다. 그렇게 자신의 무브먼트를 하다가 뮤지컬 〈레미제라블〉 장면이 나온다. 주제에 적절하게 자유를 위해 싸웠던 과거의 일상적인 영웅들을 조명하려 했다. 안무자는 기본적으로 춤을 잘 추는 사람이다. 그런데 평소 익숙하던 소재를 바꾼 탓인지 작품의 깊이가 좀 약했다. 앞으로의 행보를 더 지켜보고 싶다.
- 본인 춤을 소극장에서라면 밀도 있게 잘 봤을 텐데 대극장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집단으로 나와서 추는 부분에선 〈레미제라블〉의 그늘을 지울 수 없다. 그 영향을 받고 영감을 받을 수 있지만, 문제는 소화가 덜 됐다. 음악에 있어 어떤 건 너무 개인적인 음악을 쓰고 또 어떤 음악은 왜 썼어야 했는지 싶다. 음악 때문에 춤이 잘 안 보여서 아쉽다.
- 메시지 때문인지 본인의 개성이 묻혔다. 가사 있는 음악을 많이 썼는데 가사 때문에 춤이 안 보인다.
- 소시민, 학생들, 이름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장치 쓰임새는 매우 약했고, 그 장치의 의미가 부각되지 못했고 상징성이 무엇인지 모호했다. 사회의 공허함에 대해서 대항/대응하는 의식 측면에서 상징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런 상징성은 보는 사람이 짐작해낸 거다. 작품에서는 실현되지 못했다. 구조물하고 흔히 이야기하는 〈레미제라블〉 식의 집단적인 대열과의 매치가 자연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사회적 메시지가 강한 작품을 소화해낼 자신의 사회적 관점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있다. 그런 시각을 잘 시도하지 않는 춤계 풍토에서 다소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주목해볼 작품이다.
- 〈한국〉 안무자는 솔로나 이인무, 즉흥성이 들어가거나 상대와의 호흡을 중요시하고 대중문화 코드와 자신의 개성을 엮는 데 능하다고 본다. 그런데 이것을 군무로 확장할 적에 문제가 따르는 것 같다. 이번에 경연을 위해 의식적으로 그런 건지 아니면 촛불시위 이후 개인적 변화를 나타내는 것인지 좀 더 주시하고 싶다.
EDx2 Dance Company(이인수) 〈한국〉 ⓒ한국무용협회 |
- 이 외에 평가하지 않은 대부분 작품이 올드하고 컨템퍼러리하지 않다. 서울무용제가 경연 부문의 창작에 어느 정도 비중을 두는지, 그건 꽤나 미약하지 않은지 의구심이 들었다. 창작물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는 인상이다. 그 기본 취지에 충실하지 않는 경연대회에 어떤 기대와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인가.
- 국내의 춤 동향에 비추어 서울무용제 경연 부문이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는지 의심스럽다. 경연 참가작에 대한 지원금도 천오백만원이라는데, 일반 문예진흥기금지원 액수 수준이다. 과거에 서울무용제가 참가자들에 지원하던 것에 비하면 차이가 난다. 리허설도 한 번에 그친 줄로 안다. 이러고서 서울무용제에서 경연 부문이 내세워지기는 힘들다. 경연 부문은 서울무용제가 왜 존재하는지 보여주는 아이덴티티였다. 이제는 시들하다. 그러면 서울무용제는 무엇이 주력 행사인지 물어볼 수밖에 없다. 아니면 앞으로 서울무용제는 주력 행사가 없는 무용인 한마음 축제로서 존재할 것인가.
- 자신을 드러내면서 성장할 수 있는 게 경연대회의 원래 취지이다. 70년대 말에 나왔을 때는 춤계에서 초유의 일이었고 신선했다. 서울무용제가 물이 고였기 때문에 재고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경연대회를 원래의 취지로 잘 살려왔더라면 국내 춤계는 그만큼 발전했을 것이다.
- 서울무용제 자체 내에서 경연제의 어떤 비중은 어느 정도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전체 행사 구성에 비추어 볼 때 지난 3년 사이에 경연 부문의 비중이 확 줄었다. 2016년부터 서울무용제가 경연 부문뿐 아니고 부대행사가 다수 추가되기 시작했다. 초청공연, 자유참가 부문, 경연대상 부문이 늘다가 2017년에 가면 사전축제 부대행사 등으로 인해 경연 비중이 더욱 줄었다. 올해는 대학무용페스티벌까지 덧붙어졌다. 서울무용제는 춤계를 위해 할 수 있는 갖가지 행사를 10월, 11월에 몰아서 한다는 의욕 같은 것을 내비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 모르겠으나, 올해 행사 구성은 그랬다. 모든 것을 다 추구하는 것은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 For all, so for nothing 같은 현상이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는 것이다.
춤제전 목적마저 의아스러워진 서울무용제
- 한국무용협회가 대표성을 뛰는 협회가 되고자 하니깐 갖가지 모든 걸 다 개최해야 한다면, 그건 매우 엉뚱한 생각이다. 한국무용협회는 무용인과 춤계의 권익을 보호하고 신장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이렇게 종합선물 세트 식의 행사로써 존재 의미를 찾으려는 것은 착각이 아닐까. 엉뚱하게 갖가지 행사를 서울무용제라는 이름으로 모아 한꺼번에 열려다 보니까 색채가 없어지고 산만하며 이처럼 나열하는 식을 자초했을 것이다.
- 한국무용협회 집행부가 오판하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 대표적 예로서, 이번에 서울무용제에다 신설한 대학무용축제는 3일 동안 진행하는 것으로 소개되었다. 이에 의하면, 서른 곳 정도 대학이 출품했는데, 3일 동안 하루 저녁에 9~10개 대학이 출품했다. 저녁 7시 30분부터 진행된 공연에서 한 작품당 10분 남짓 공연했을 텐데, 이걸 작품이라 부를 수 있겠는지 모르겠다. 굳이 작품에 연연하지 않아서 그렇게 구성했다면, 그 축제의 목적은 과연 무엇인지 매우 의아스럽다.
- 결과적으로 5~10분짜리는 작품도 아니고 맛보기식의 광고 영상밖에 안 된다. 관객 동원을 쉽게 하기 위한 건지, 유료라면 표를 쉽게 팔기 위한 건지, 모든 대학에 기회를 주기 위해서인지, 이를 통해 대학권의 지지와 참여를 강화하려는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이게 아니라면 어떤 긍정적인 점을 찾을 수 있을까.
- 서울무용제가 근본적으로 퇴색됐다. 그건 유감스럽지만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하다. 춤계 환경도 퍽 달라졌다. 그래서인지 특히 2017년부터 폭을 넓히려는 의지가 뚜렷해 보였고, 그런 취지에서인지 올해는 온갖 프로그램을 다 넣었다. 서울무용제 40주년이라서 한시적으로 이렇게 했는지 하는 생각도 든다. 만약 앞으로도 한국무용협회가 협회에 속한 모든 회원에게 공연 기회를 두루 제공한다는 취지로 운영된다면, 서울무용제를 일 년 내내 해야 할 것 아닌가.
- 현실적으로 서울무용제가 이번 가을에 어떤 파급력을 낳았는지 또는 기여했는지 자문해보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한다. 다만, 하나를 갖고 열을 단정하는 일만큼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 서울무용제의 비중은 춤계에서 갈수록 저하되고 있고 이번처럼 한다고 과연 회복될지 의문이다. 올해처럼 벌려서는 더욱 신뢰도가 저하되지 않았을까. 서울무용제의 객관적 결과를 놓고 정식 공청회가 있었으면 한다. 뒷담화가 아니라 공청회를 통해서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것이다. 서울무용제의 정체성을 재조명하고 다시 정리해야 할 것이다.
- 종합선물 세트 식으로 대학무용축제, 열정춤판, 걸작선, 명작무 무대 등이 있으나 참가하는 사람들 선에서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맴돈다는 인상이다. 경연 부문도 이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 춤계의 시너지를 모으고 일반 사회와 관객을 향해 나아가기를 선도해야 할 한국무용협회가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이번 서울무용제는 행사 가짓수가 늘었어도 이전과 엇비슷하게 무용인들만의 리그에 그쳤다고 본다. 한국무용협회는 이런 기현상을 부추기기를 멈추고, 춤계의 시너지를 모으도록 서울무용제의 앞날을 새롭게 열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