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장광열: 한국춤비평가협회에서는 최근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 지난 11월 4일 시국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이후 밝혀지고 있는 이른바 비선실세들을 둘러싼 국정농단의 전말은 국민들을 경악시키고 있습니다. 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정부의 총체적 실정은 문화예술계를 초토화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술검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문화융성위원회 파행운영,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표류 등등 여기에 최근 몇 년간에 걸친 공공 문화정책의 실패는 한국의 춤 문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태평무 보유자 선정을 둘러싸고 춤계 내부에서 보여준 행태, 김영란법 시행을 계기로 드러난 대학 무용과 박사학위 취득과정에서의 잘못된 관행 역시 건강한 춤 문화를 저해하는 요인들로 지적받고 있습니다. 한국춤비평가협회에서는 작금의 국정농단 사태와 연계된 문화정책의 실종과 지금, 현재 한국의 춤계가 당면한 현안을 진단하는 자리를 긴급히 마련했습니다.
이병옥: 작년부터 문화재청의 무형문화재보호법이 시행되면서 ‘원형론’과 ‘전형론’에 대해 학계나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무형문화재보호법에 대한 내용으로 말문을 열까 합니다. 직접적인 요지는 시국과 무관할 수 있겠으나 문화재청에서 주관하고 있는 문화재 제도 관련 현상들이 금년 너무나 시끄럽게 문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문화재를 지정하던 차에 강선영, 이매방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전수조교 혹은 일반이수자도 낼 수 있다 하여서 보유자를 지정하기 위한 서류를 받은 지 2년 내지 3년차가 되었습니다. 완전히 개방형으로 한 것이죠. 개방이라는 취지 자체는 굉장히 좋습니다. 실질적으로 태평무가 서류를 받았기 때문에 심의를 했는데요. 과거 수십 년 동안 문화재보호법의 관행은 전수조교를 거치지 않으면 보유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일반 이수자들은 감히 서류를 내지 않았던 거죠. 지금 전통무용에서는 가장 많이 공연되고 있고 대표성을 띄고 있는 강선영류와 한영숙류의 태평무가 있습니다. 한성준으로부터 한영숙, 강선영으로 이어졌지만 내려오면서부터 개별화되고 많은 차이가 있는 다른 유파도 지정할 수 있다 했어요. 나름대로의 역할과 예술성, 전통성이 강한 다른 유파 한 사람(박재희)을 포함해 전수조교 세 사람(이현자, 이명자, 양성옥), 총 네 사람이 후보자였지요. 그런데 후보자 가운데 누가 되더라도 문화재 지정을 받지 않은 나머지는 희생되고 피해를 입고 힘들어지는 상황에 놓였어요. 네 사람 중에서 선정하는데도 엄청난 후폭풍을 맞았습니다.
국가제도라고 하는 것은 한 번에 바꿔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특히 무형문화재와 같은 제도를 바꾸려한다면 충분한 검토와 준비기간이 필요한데, 그런 과정 없이 갑자기 개방형으로 한다고 하면서 마구 뒤바뀌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죠. 그동안 보유자가 장수하면서 전승자들이 80대가 넘었어요. 이런 문제를 완충할만한 대비도 실은 해왔어야 했습니다. 평생을 바쳐 해 오신 전승자들이시잖아요. 공개심사에서는 전승력과 지도력, 기량 등을 검토해 양성옥 교수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결과를 예고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반론이 거셌지요. 이현자 선생님은 청와대 앞에서 시위를 하기도 했고 동조하는 그룹이 생기기도 했구요.
그래서 2차 문화재위원회에서 양성옥 교수 인정결과를 보류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또 문제지요. 심의결과는 영원히 보류로 둘 수 있는 것이 아니고 6개월 지나면 폐기됩니다. 마지막 10월쯤 최종심의에서도 보류가 되었기 때문에 결국 양성옥교수의 보유자 인정이 자동으로 없어졌습니다. 문제가 심각하다보니 국회의원이 나서서 공청회를 열었어요. 저는 토론자로 참석했고 발언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행 보유자 인정방식은 ‘살인법’이 되는 무모한 시행이다.”
김채현: 개방형은 언제부터였나요?
이병옥: 무형문화재법에서 발효권이 있었던 것이 작년부터입니다. 이전까지는 전수조교가 아니면 안 된다 하는 폐쇄형이었던 거죠. 그게 1962년에 생긴 문화재보호법입니다. 재작년에 국회를 통과해서 작년 시행된 것에는 개방형으로 조례를 바꿨죠. 그래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문화재청에서 보유자 지정에 힘을 쏟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처리해야할 일을 하지 않은 거죠. 제가 말씀드린 것은 개인종목인 태평무, 승무, 살풀이입니다만, 단체종목인 승전무, 처용무 그리고 탈춤 종목의 경우엔 초창기 지정할 때 6-10명 이렇게 다수로 지정했었습니다. 단체종목의 보유자도 하나도 지정하지 않았어요. 보유자가 돌아가시면 그제야 한 명을 지정했지요. 한때 어떤 일이 있었냐면 단체종목은 보유자를 지정하지 않으려고 조례를 만들어 대통령보호법으로 시행하려 했습니다. 국무총리실에서 이건 이상하다, 그냥 사인해버리면 문제가 생길 것 같다 해서 저에게 자문을 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이렇게 보유자지정을 하지 않는 것은 일제시대 민족문화 말살정책보다 더 심각한 정책’이라고 발의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폐기를 하게 되었죠. 그런데도 문화재청에서는 아직까지도 그 의식에서 벗어나지 않고 보유자가 아무도 없을 때 한두 명 정도 지정하겠다는 자세예요. 보유자가 고령이 되어 움직이지 못해도 방관했던 거죠. 그전에 조치를 했었다면 됐을 일입니다.
이매방 선생님, 강선영 선생님께서 80세가 되셨을 때, 이를 기준으로 보유자 지정을 새롭게 하려고 문화재청이 움직였어요. 그런데 보유자들의 반대가 심하게 일자 문화재청은 이를 권장사항 쯤으로 변경하고 이후에는 슬그머니 물러나버렸습니다. 여기에서부터 문제가 심각해졌어요. 그때 두 분이 명예로 가셨으면 이현자 선생님은 70세였기에 보유자로 10년은 너끈히 할 수 있었죠. 그런 시기를 놓쳤어요. 전승자 입장에서는 보유자가 돌아가셔야 본인이 지정될 수 있으니 이게 ‘살인법’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저는 국회공청회에서 개선방안을 발표했습니다. △현행법 시행 전에는 과도기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평생을 보유자 되기만을 기다린 전수조교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 그들을 모두 보유자로 지정하거나 원로 보유자, 원로 전승자라는 직함으로 예우해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저 무시해버리는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어요.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 양성옥 교수를 예고했다면 칼이 들어와도 보유자 인정을 고수했었어야죠. 두 번이나 보류로 두 번 죽인 것과 다름없어요. 지정하지 않은 사람도 죽이고, 예고한 사람도 보류해서 죽이고... ‘살인법’이라는 표현이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과도기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한 겁니다.
두 번째로 보유자들에게 문화재 지정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자꾸 심어주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죽을 때까지 내 것이다’라고 생각했었죠. 연희력이나 전승력이 떨어지면 물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주지시켰어야 했는데 이를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보유자들이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죽어야 다음 사람이 인정된다는 점에서 죄인이 되어버렸어요. 이 또한 사람 죽이는 일이잖아요.
세 번째는 명예보유자 제도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명예보유자에게 보유자보다 더한 예우를 하겠다, 단돈 십만 원이라도 더 드리겠다고 하면 명예보유자가 되실 겁니다. 국악원에 원로사범이 계셨습니다. 김천흥 선생님께서 99세까지 장수하실 수 있었던 것은 원로사범이라는 직함을 드리고 예우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명예를 갖고 국악계에서 지내셨어요. 마찬가지로 문화재보호법에 이런 제도가 있었다면 전승자 분들이 죽기 살기로 내몰려지지 않았어도 됐을 겁니다.
그리고 전수조교가 뭡니까. 학교 조교를 생각해보세요. 무형문화재에서 전수조교는 준인간문화재 급입니다. 이건 제가 십여 년 전부터 주장했던 것인데, 그분들에게도 전승교수라던가 마땅한 직함을 드리는 예우가 필요합니다. 방향성을 고려하고 적합한 명예를 드리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단계적으로 해나갔다면 이런 문제가 파생되지 않았을 텐데 무작정 개방형 제도를 시행하다보니 이런 문제가 생겨났어요. 문화재청에서 대책을 세워 해달라는 것이 토론의 요지였습니다.
김채현: 말씀하신대로 전수조교라는 명칭은 필히 개선되어야한다고 봅니다.
권옥희: 명예보유자 제도는 한 번도 시행된 적이 없었던 건가요?
이병옥: 2000년대 초반에 제도를 만들었었죠. 처음에는 명예보유자 분들에게도 돈을 드렸는데 보유자에게 130만원으로 인상하여 드릴 때에 명예보유자들은 인상하지 않아 100만원에 머물러 결국 차등 삭감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명예로 들어설 때 이수권도 없어지죠. 더 많은 혜택을 드리면서 예우했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장광열: 춤계 전체로 확대해보면 무형문화재보호법은 두 가지 큰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빼어난 전통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학교육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종목만 가르치고 있어요. 주로 승무, 태평무, 살풀이 등 대학교수들 중에 이들 종목의 이수자들이 많다보니 4년 내내 본인들이 이수한 종목의 춤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무용 콩쿠르에 참가하는 학생이나 무용인들도 세 가지 종목만 춥니다. 다른 좋은 전통춤의 자산들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국가의 제도가 막고 있는 셈이지요. 두 번째로는 이수자, 전수조교, 보유자를 둘러싼 금품수수와 비방, 모함 등 파벌을 조장하고 춤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태가 심심치 않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제도 하나가 무용계의 분열을 낳고 있는 요인이 되고 있는 거지요.
이와 관련해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문화재청에서는 나이나 수련 경력이 많다는 것만으로 보유자를 지정하지 않고 전수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보유자로 지정하겠다고 제도를 개정했고 이를 토대로 전문가들의 심사에 의해 전수조교 가운데 가장 연령이 낮은 63세의 양성옥 교수를 지정했는데 일부 무용인들의 항의에 이를 철회함으로써, 결국 본인들이 개정한 제도를 본인들 스스로 파기했어요. 정부에서 정한 기준을 스스로 파기한 것에 대한 행정적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태평무 보유자를 지정하지 않는다 해서 태평무가 사장되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처음 제도를 만들 때에는 사장될지도 모르는 전통을 살리려는 취지였는데 지금은 지정하지 않더라도 전승되는데 전혀 문제가 없어요. 이제는 무형문화재보호법이 사라질 위험성이 없는 종목은 과감하게 보호 종목에서 빼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처럼 사장될지도 모르는 종목을 제도로 보호했다가 그 위험성이 없어지면 더 이상 제도적으로 보호하지 않습니다.
이병옥: 우리나라에서 전통무용을 하는 사람들도 문화재로 지정된 춤만 하다 보니 수많은 종목들을 모릅니다. 학자로서 정병호 교수님과 방방곡곡 돌아다니면서 조사한 것만 봐도 무대에 올릴 수 있고 소재로 쓸 수 있는 우리나라 전통춤이 500종에 달합니다. 수많은 전통춤에 대해 전혀 모르고 관심조차 없습니다. 이게 무형문화재의 역효과죠. 그것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킬 수 있던 것이 지방문화재를 지정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지방문화재 제도 역시 중앙의 제도시행을 그대로 본떠 하다 보니 금품수수 등 똑같은 문제가 파생됐어요. 지방문화재 제도가 해결점은 아니라고 느꼈죠.
두 번째, 오디션 식으로 뽑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디션 식이라 함은 전승자의 과거 경력은 심사에서 거의 점수배점에 차이가 없고 실기에 치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날 그 자리에서 연행을 잘한 사람이 절대적인 기준이죠. 30대에서부터 80대에 이르기까지 무대에서 춤을 추면 가장 젊은 30대가 제일 춤을 잘 춥니다. 당연한 논리라고 봐요. 이런 심사법은 잘못된 것이죠. 적어도 무형문화재라는 것은 오랜 공력과 경력을 무시할 수 없는데, 그것은 적게 배점되어있고 실기점수는 높게 책정되어 있어요. 그 심사기준은 문화재청이 정한 것인데요. 폭넓게 자문을 구한 것이 아니라 몇몇 학회의 학자들 의견을 반영하여 만들어 놓은 거죠. 현장의 전승자들 의견 없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어요.
세 번째, 일본의 예를 들어주셨는데 처음 무형문화재 제도를 시행할 때에는 전통이 사라지니까, 소멸되니까 응급조치로 지정한다는 의미가 컸어요. 그 이후로도 계속 지정하는 것은 우리 민족문화의 대표성, 예술성을 띄는 종목이기 때문입니다. 사장될 위기에 처해 지정하는 종목이 있는가하면 우리나라 전통에 있어 대표적인 종목은 지속적으로 지정해야한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태평무, 승무, 살풀이가 당시에는 소멸의 위험이 있어 지정됐으나 지금은 한국 전통춤의 대표성을 띄기 때문에 없앨 수는 없다고 봅니다. 단순히 시급성에 의해 지정된 종목이라면 해제할 수도 있겠지요.
김영희: 보유자 지정 심사에서 심사위원 구성은 10명이 넘었습니다. 당시 실기 위주로 심사했지만 음악에 대한 이해도 봤어요. 춤만 추고 장단을 칠 줄 모르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교수능력, 해당 종목에 대한 지식으로 이론적 배경까지도 심사기준에 들어갔지요.
앞서 언급된 콩쿠르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리자면, 우리나라에 무용콩쿠르가 정말 많습니다. 각 종목, 유파마다 콩쿠르가 있을 정도인데 종목을 지정해서 하는 콩쿨은 결국 자기네 식구를 만들기 위함이거든요. 전통춤의 편향성을 더 강고하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콩쿠르는 원래 새로운 춤, 참신한 인재, 즉 재능을 뽑기 위해서 개최되어야하는 것인데 말이죠. 전통춤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 국무총리상을 수여하는 식으로 레벨을 두고 있는데 문체부에 건의를 하든지 해서 제도를 정비하고 강화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정종목의 콩쿠르에만 몰려서 다른 종목들은 경연대회조차 나가기 어렵습니다.
장광열: 자연스럽게 춤계에서 개혁해야할 과제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콩쿠르 얘기가 나왔는데요. 발레의 경우 이제는 국제 콩쿠르를 학원연합회 같은 곳에서 만들어 개최하고 있어요. 교육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학원수강생들의 관리와 수상자 확보를 위해, 그리고 고액의 작품비를 받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국제 콩쿠르에 출전시킨다고 하면 고액의 작품료나 특별 레슨비 등을 울며 겨자 먹기로 낼 수밖에 없게 되지요.
최근 다시 이슈가 되고 있는 예술검열과 블랙리스트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2010년도에 한국춤비평가협회를 결성한 후 권영빈 전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을 방문해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정책에 대한 문제점과 해결 방안 등을 전한 적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 이후에 어쩐 일인지 춤비협 회원들이 문예위 심사라든지 평가, 자문 등에서 배제가 되었었어요. 지금까지도요.
그리고 문예위에서 아르코예술극장을 운영하는 것도 잘못된 일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지원정책을 담당하는 곳에서 극장을 운영하는 일은 없어요. 극장운영은 전문가 집단의 영역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댄스 하우스나 무용센터를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공공 지원 정책을 시행해 효율성을 높이고 있는 상황에서 생산적인 지원정책을 총괄해야할 문화부나 문화예술위원회가 비효율적으로 지원 정책을 운용하고 있는 점은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해 <춤웹진>에서 정영두 안무가의 예술검열에 항의하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 비중 있게 다룬 적 있습니다. 그 이후부터 어쩐 일인지 춤비협 회원들은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하는 사업의 심사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왔습니다. 언젠가 예술경영지원센터 직원 중 한 사람이 심사위원 풀에 대해 어려운 점을 호소하더군요. 예경은 국제교류 업무가 많잖아요. 국제교류 사업과 관련한 심의, 평가, 자문을 해 줄 수 있는 전문가들이 많지 않다는 거예요.
얼마 전 일간지 기자가 전화를 해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전직 직원이 예술경영지원센터에도 블랙리스트를 내려 보냈다고 하더군요. 비평가들은 공공 지원기관에 심사, 평가, 자문을 하게 되는데 블랙리스트 숫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심사, 평가, 자문에 참여하는 전문가의 수가 줄어들게 되지요. 적임자가 아닌 사람이 들어가게 되면 지원하지 말아야 하는 사람에게 지원금이 돌아가거나 더 많이 주어야 할 사업과 그렇지 않은 사업을 판단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게 되지요. 결국 비효율적인 결과가 파생됩니다. 문화예술계를 진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축시키는 악순환이 되풀이 됩니다. 누구누구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더라가 중요한 게 아니라 블랙리스트로 인한 전문가 집단의 부족이 문화예술계의 퇴보를 야기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종호: 블랙리스트에 저도 들어가 있더군요. 일전에 어떤 기자가 전화를 해서 언제부터 심사에서 배제되었냐고 묻더군요(웃음). 그러고 보니 몇 년 됐어요. 우리가 요 십여 년 사이에 너무 낙후 상태에 빠져버렸어요. 의식수준이 예전보다도 못해요. 이명박 정부 때 아, 이제 문화예술도 공안정국으로 가는구나 하다가 박근혜 정부가 되면서 좀 나아지겠지 했는데, 웬걸요, 가만 보니 더하더라고요. 경악입니다. 군부독재 시대를 제하면 이런 경우는 없었어요. 검열도 그렇고, 블랙리스트도 그렇고... 글자 그대로 잃어버린 십년입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게 다 드러난 이상 빠른 속도의 회복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워낙에 바닥을 치면 올라갈 일밖에 없는데다가 과거에 이미 수준 있는 자유를 누린 기억들이 있으니 다시 회복하는 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저급한 정부에서 억지로 망쳐놓은 것뿐이죠. 물론 공무원이나 문체부 산하기관이 먼저 나서지는 않겠지만 사회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잘 돌아가면 자연스레 회복되리라고 봅니다.
사실 우리가 어느 정도로 한심하냐 하면 제가 지난 2012년 대선 때 민주당 후보 쪽에 문화예술계 멘토로 이름을 올렸었습니다. 따라서 그 이후 저를 민주당 쪽으로 본다 해도 그건 제가 인정하고 책임을 져야죠. 비록 이름만 올렸다 해도 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전부터 제가 민주당 사람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어요. 한 지인이 문체부 관리와 우연히 제 얘기를 했는데 제가 민주당 사람이라고 했다는 거예요. 이유가 정말 웃깁니다. 제가 연합뉴스에서 중역 자리에 있었는데 저를 임명한 당시 사장이 친민주계 인사니까 저도 당연히 민주당 사람이라는 거죠. 명색 중앙부처의 엘리트 공무원들이 그렇게 단순하고 한심한 줄은 몰랐어요. 분류를 하려면 해당 개인의 성향을 제대로 조사하든지, 연합뉴스의 인적 구조를 들여다보든지 해야지, 이게 얼마나 촌스러운 발상인가 싶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심사위원으로 안(못?) 불려간 지 꽤 됐네요. 블랙리스트가 내려왔다는 일 년 전부터가 아니라 이미 그 전부터 말이죠.
또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것과 무관하게 다른 이유도 있더군요. 무용협회 사람들이 문체부에 갈 때마다 하도 제가 나쁜 사람이라고 해놔서 문체부 담당자들이 저를 심사에 부르지 말도록 했다고 믿을만한 분이 귀띔을 해주시더군요. 이건 물론 블랙리스트와는 관계없는 일이죠. 무용협회를 비롯해서 관변단체들은 공무원들을 자주 만나잖아요. 한번은 문체부 고위관리를 만났는데 무용계에서 그런대로 말귀가 통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제 나름 평소에 괜찮게 생각했던 몇몇 사람의 이름을 댔지요. 근데 이게 정반대의 오답이었던 겁니다. 그 고위관리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말했으니 저를 좋아할 리가 없겠지요.
예술검열의 문제도 위정자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주 답답하죠. 지식인들은 글로, 예술가들은 작품으로 권력을 조롱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는 건데, 그래서 카타르시스를 통해 시민들도 불만을 대리해소하곤 하죠. 그러면 시위할 필요 없어집니다. 그러니 위정자들에게도 좋은 거거든요. 그런데 바보처럼 이걸 억누르다보니 더 튀어오르는 거죠. 정치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권력을 향해 정식으로 칼을 겨누고 한 판 붙자고 할 때에는 죽이든 살리든 해야겠지만, 예술인이나 지식인을 통해 스트레스 한번 풀자고 하는 걸 죽이려 하면 민심은 그 순간 달아나지요. 무지하고 속 좁은 사람들이 정치를 하다 보니 우리 사회 전체가 비참해져요. 먹을 게 없어서가 아니라 정신적, 지적, 정서적으로 비참해지고 있어요.
이병옥: 나이가 있다 보니 안 불러주나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어요. 문화재청에서는 공식적으로는 문화재위원들이 최고이지만 거기에서도 해결이 되지 않을 때에는 비공식적으로 자문위원을 찾습니다. 예전에 정병호 교수님도 자문위원을 하셨는데, 왜냐면 전통분야의 원로이시고 가장 객관적으로 전체를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죠. 저도 그전에 종종 자문위원을 했었는데 요즘 같은 때에는 불러주지 않아요. 문화예술위원회나 문화재단 관련 심사도 사라져서 한 번도 불린 적 없습니다. 춤비협 회원들이 블랙리스트가 되어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말이죠. 이명박 정부 때 문화예술에 권력 있는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자기 라인에 있는 사람들만 기용하고 나머지는 다 배제시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봤었어요. 정말 괜찮은 기획, 작품이더라도 자기들이 추천하는 단체가 아니면 지원혜택을 받기 힘들었죠. 그전에는 그래도 그렇게까지는 아니었어요.
김채현: 민족예술인총연합 본부가 2010년에 거의 해체되다시피 했잖아요. 문화예술계 전체로 보면, 민예총의 활동이 상당히 후퇴한 결과 정부의 문화정책에 대해 감시할 기구가 없어졌다고 보는 것이 맞아요.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려면 집단이 되어야하고, 그 집단이라 함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져야 하는데 민예총의 부진으로 인해 예술계에서 비민주적 환경이 득세하는 현상도 초래되었습니다. 지역 민예총은 나름대로의 활동기반을 잡아서 형평성과 민주성에 어울리는 작업을 적극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전국적인 민예총 조직은 활동이 잘 알려져 있지 않지요. 이보다는 더 더욱 2013년 현 정부 들어서는 정부나 권력이 국민의 간을 보는 정도가 아니고 안하무인이 되어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하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검찰도 권력 비리 수사를 국민 우롱하듯 하는 경우마저 없지 않지요. 지금도 수시로 간을 보고 있을 겁니다. .
권옥희: 아르코예술극장은 예술가를 검열하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 작품에도 손을 대나 봅니다. 얼마 전 아르코에서 작품을 봤는데 작품 영상 중에 어떤 특정부분에서 말을 하다 만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예술가 본인이 예민하게 생각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중간에 그 부분만 도려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술가의 의식을 믿는 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글을 썼어요. 나중에 예술가 본인과 연락이 되어 이야기를 나눠보니 극장 측에서 영상의 일부를 빼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하더군요. 그렇다고 누락을 요청한 관계자도 위의 눈치를 본 것일 텐데 해당 직원과 대면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군요. 예술검열이 도를 지나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혹여 예술가에게 피해가 갈까 싶어서 공론화가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김채현: 예술가 개인이 대관심의에서 누락되는 것뿐만 아니라 작품을 염탐하고 있어요.
장광열: 예술검열 때문에 난리가 나고 시국이 흉흉한 때에도 이런 압박이 예술가들에게 가해진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종호: 이명박 정부 때 SIDance를 뺏어 가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건 모르셨지요? 정말 기가 막히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누굴 만나서 얘기했죠. 정부 대 개인으로 한 판 붙자고 전해라. 골리앗과 다윗, 누가 이기나 보자. 한 개인이 그토록 애써서 키워놓은 걸 그냥 빼앗아 가겠다는 게 이 정부의 천박성을 얼마나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인지 보여주겠다. 그랬더니 바로 다음 날 그런 뜻이 아니었다면서 물러나더군요. 그런데 말이죠, 만일 지금 박근혜 정부에게 그런 식으로 대들었다면 아마 진짜로 내가 죽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듭니다. 우리 모두가 천박하다고 경멸했던 MB 때보다 더하네, 그런 생각이 드니 정말 슬픈 거에요.
장광열: 예전엔 정말 안 그랬어요. 문화부 공무원들은 나름대로 자부심도 있고 문화창달을 위해 기여하고 있다는 의식도 있었거든요.
이종호: 공무원들은 의식이 있다 하더라도 웬만해서는 먼저 나서지 않지요.
김채현: 이명박 정부 때에 억압하는 시스템을 밑자리 깔아놓은 거예요. 2013년 11월에 김종 차관이 임명되었습니다. 유진용 장관이 면직된 게 그 다음해 2014년 7월이고요. 장관 내쫓고 김종 차관이 문화부를 전부 지휘했지요.
장광열: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임용과 관련 1년 6개월이 넘도록 공석으로 방치한 문제도 결국 주무기관인 국립극장의 책임자도, 국립극장을 관리 감독하는 문화부 장관조차도 인선에 대한 권한이 없었다는 것을 입증한 사례라고 봅니다.
이지현: 최근 국립무용단과 관련해 주목해야할 기사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향연> 제작과정에서 정구호 감독과 관련된 예산 지정 및 운용의 문제와 현 예술감독 인사 관련기사(한국일보 https://hankookilbo.com/v/e3f424b11e574cf7836ac7b397664e04)가 있었습니다. 특히 예술감독 관련 기사는 심사과정을 비롯해 인사와 관련된 투명하지 못한 커넥션의 문제에 대한 것이었는데, 마치 제보 내용을 기자가 취재를 하지 않고 쓴 느낌의 기사로 좋은 기사는 아니었지만, 저 역시 상당히 문제 상황이라고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거 같습니다. 국립무용단 감독 자리가 오랜 공석으로 있을 만큼 인선에 쉽지 않은 상황은 이해가 가지만, 지금 상황에서 전혀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기사에도 나왔듯이 예술적 역량에는 관심도 없었던 거 같구요, 예술감독으로서의 행정, 기획 능력을 본 거 같지도 않습니다. 단순히 무용단 경험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빈약한 설명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만약 국립무용단이 그런 정도의 처방이 필요한 단체라면 이번 기회에 쉽게 봉합하지 말고, 누적된 많은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고민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첫 단계일 것입니다.
기사와 관련된 뒷얘기로는 무용협회 선거에서 차기 후보인에 대한 음해성 기사라는 얘기가 있던데 이런 수준 낮은 작태도 이젠 반복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정당한 과정을 거치고 드러나는 결과로 평가하지 못하고, 뒤에서 로비하고, 투서하고 음해하는 식으로 훼방을 놓는 방식은 무용계가 하루빨리 벗어나야 할 습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를 피곤하게 만들고 서로 발전을 저해하지요.
저는 무용계의 구조적 문제를 두 가지로 생각하는데요, 이번 최순실 사태에서도 드러났듯이 대통령과 행정부가 전혀 간격유지를 못하고 있는 상태, 아예 밀착되어서 커넥션이 되어있는 문제입니다. 이는 이번에 블랙리스트 문제로 드러났구요,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선임문제가 그 부정적인 결과를 보여주고 있지요. 현장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행정이 일어나는 것이죠.
또 하나는 무용협회가 시대 흐름을 감지하지 못하고 세력 싸움이나 하면서 무용계 발전에 대한 비전을 갖지 못한 단체로 전락한 문제입니다. 이 두 가지 문제가 때론 크게 때론 소소하게 무용문화를 좀 먹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 최순실 사태에 독립무용가들이 240여명의 시국선언 성명서를 낸 것은 신선한 움직임이었습니다. 젊은 무용인들 중심으로 짧은 시간 안에 SNS를 통해 자발적으로 서명이 이뤄졌는데, 무용계 안에서도 이제 현실인식을 할 줄 아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나 보다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협회가 구태의연한 작태로 서로 싸움만을 일삼고 세대교체 상황에서도 차기 회장에게 새로움을 기대할 수 없다면 협회는 무용계에 대한 대표성을 잃었다고 봅니다. 건강하게 현실인식하면서 무용계를 걱정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움직이는 무용인이 무용계를 위해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종호: 그전에 누가 예술감독이 됐다 했을 때, 누가 시국과 관련해서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저 극장장과 개인 친분이 있나보다 그 정도로만 생각을 했던 것이죠. 문제가 아주 묘하네요. 지금 한국무용협회에서 시국성명을 발표한 것은 대체 어떤 입장인 겁니까?
장광열: 한국무용협회 뿐만 아니라 예총에서도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예총에서 성명서를 내는 상황에서 산하기관격인 무용협회에서 따라서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무용협회 지회까지도 모두 다 성명을 발표했어요.
김채현: 무용협회에서는 일거양득이네요. 시국 따라서 보험하나 들고 걸림돌 상대방도 내치는, 도랑치고 가재잡는 격입니다.
이병옥: 우리나라에서 가장 민주화가 안 되고 장기집권이 이뤄지고 있는 집단이 예총과 무용협회 및 지방 하부조직이라고 생각해요. 지방은 더 심해요. 다른 무용인들은 그 고장에서 돈 한 푼 못 받아요. 지회장들이 예산을 모조리 좌지우지 하죠.
장광열: 현대무용단 사포는 30주년을 맞아 기념공연과 사업에 대한 지원을 신청했으나 지원금을 못 받았다고 하더군요. 한국무용협회 지회에서 지원금을 나누어 가진데 따른 결과라고 들었습니다.
권옥희: 혹시 김화숙 예술감독이 블랙리스트에 들어가 있는 건 아닐까요. 호남쪽은 이번에 문화계 예산문제 때문에 원래 1월에 발표가 나는데 다시 올라가서 3월인가에 늦게 재발표했다더군요. 블랙리스트 가진 사람이 호남에 직접 내려가 재심사를 요구했다고 해요. 김화숙 감독이 광주항쟁을 작품화하고 그래서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오죽하면 한 번도 예산문제를 가지고 팜플렛에 쓴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쓰여 있더라구요.
이지현: 졸지에 독립안무가가 되셨어요.
김채현: 이번에 전반적으로 보면 하야정국 내지는 탄핵정국 이후에 한국의 헌법정신에 부합하는 민주공화국을 만들자, 사회시스템이라든지 관료조직의 개혁 등이 강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무용계에서도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질서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김영희: 올해 제가 우연히 아시아춤 관련 행사에 많이 참관하게 됐어요. 어떤 행사는 외국 민속춤을 초청해 한 번 공연 올리는 것에 그치는 반면, “춤으로 만나는 아시아”같은 행사는 치밀하게 기획을 해서 외국 무용수들을 데리고 몇 개 도시 지역 순회공연을 열정적으로 하더군요. 또 전통민속춤이 아니라 신무용같은 춤을 창작해서 무대에 올리는 공연도 있었어요.
연구 측면에서 봤을 때 외국 민속춤을 다양하게 들여와 보여주는 것은 좋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것을 무용학이나 무용계 역량으로 축적시키고, 문화예술계에 확산시키는가를 볼 때에는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그저 행사용으로 한번 써버린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무용학 내에서 아시아춤이나 세계 민속춤, 민족춤의 연구 역량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에요. 그래도 이런 행사가 나름 연구소를 끼고 하거든요. 국내 비용으로 들여온 성과들이 우리의 내적역량으로 축적되지도 않고 흘려버린다는 점이 안타까워요. 선진국에서는 정책적으로 일부러 돈을 들여 외국 민속문화를 조사해서 자기네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지요. 이런 DB작업이 학문적으로든 정치나 경제적으로 분명히 쓰임새가 있기 때문이죠. 시국선언이나 예술검열, 이런 것에 비하면 시급하지 않은 문제 같지만 한국 무용학의 주체성 측면에서 그리 먼 문제도 아니에요. 무용학 내에서 또는 국가적으로 어떤 계기나 토대를 마련해야하지 않을까 싶어요. 또 쌓아놓기만 하고 학문적으로 어떻게 이용할지를 고민하지 않는 것도 문제라고 봅니다.
이종호: 그 낭비는 굉장히 오래된 것이에요. 제 개인적으로 정부에 건의를 했던 것도 있어요. 지금 말씀하신 세계 각국의 원형문화에 대한 연구소를 설립하자고 했었어요. 이뤄지진 않았죠. 뿐만 아니라 경연대회, 축제 같은 것들도 축적이 되면서 뭔가를 만들어내야 해요. 우리나라에도 대체로 수준미달이긴 하지만 경연대회가 몇 개 있죠. 이걸 그냥 습관성으로 매년 하는 게 아니라 뭔가를 축적해 나아가면서 국제교류의 교두보로 삼는다든지, 국제 트렌드를 이해하는 발판으로 만든다든지 해야죠.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연대회나 축제들은 그냥 행사에 불과한 경우가 많아요. 정말 일회성입니다. 수준이 떨어져서 손가락질은 손가락질대로 받고, 나랏돈은 나랏돈대로 쓰고, 그러면서도 축적된 효과는 아무것도 없는 그런 행사가 한둘이 아니죠.
장광열: 이지현 회원께서 지적한 국립무용단의 <향연> 공연과 최근 예술감독 선임과 관련한 것은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향연> 공연은 연말에 갑작스럽게 신작이 공연된 것에 의아해 했는데 최근 들어 이 공연이 비선실세들과 관련이 있었다는 지적과 함께 제작비 배분 내용이 알려지면서 더욱 의혹을 낳고 있습니다. 국립무용단의 일 년 전체 공연 제작비가 7억 원 정도인데 갑자기 문화부에서 한 작품 제작비로 5억8천만 원을 내려 보냈고 국립극장 자체예산 4천만 원을 더해 총 6억2천만 원으로 한 개 작품을 만든 것입니다. 여러 개의 소품을 엮어 만든 작품인데 연출과 의상 무대장치를 정구호씨가 맡고 조흥동 선생이 안무를 맡았고, 그리고 김영숙, 양성옥씨가 각각 한 개의 작품을 맡아 안무했지요. 전체 6억2천만 원의 제작비 중 의상과 무대장치 장신구 제작에 4억2천만 원을 사용했습니다. 정구호에게 연출비로 3천2백만 원이 별도로 지출되었구요. 전체 6억2천만 원 중 4억5천만 원이 넘는 돈이 특정한 사람이 관여한 파트에 지출되었고, 20일 만에 뚝딱 작품 하나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무용이 중심이 되는 작품에서 예술원 회원인 원로 무용가의 안무비가 2천만 원인데 비해 연출가의 사례비가 더 높이 책정된 것도 의아하지만 갑작스럽게 일 년 전체 제작 예산과 거의 맞먹는 돈이 요청도 하지 않았는데 국립무용단에 배정된 것이나 특정한 사람이 관여한 파트에 과다한 제작비가 배정된 것이 의혹을 낳고 있는 것이지요. 특히 정구호씨는 안호상 극장장이 연임을 하는 과정에서 계속 국립무용단의 작업에 관여해 왔던 터라 이와 관련해서도 여러 의혹을 낳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국립극장장이 상명대학교의 겸임교수이고, 그의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가 한양대학교 출신으로 문화부와 체육부의 국정농단 책임자 중 한사람인 전 문화부 차관과 동문으로 친분이 있는 점 등을 들어 국립극장과 국립무용단의 행정에 비선실세들이 관여한 것으로 의혹을 받고 있는 것이지요. 정구호씨의 계속된 국립무용단과의 작업과 이미 이전에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임용에 신청을 했다가 떨어진 무용가가 이번에 다시 선임된 것을 두고 특정한 인맥들의 커넥션이 작용한 인사가 아닌가 하는 의혹이 현장에서 많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지현: 무용계 현안과 시국상황을 이 자리에서 어느 선까지 논의하고 우리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걸을 것인지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지금은 근래에 드물게 온 상황이에요. 앞에 말했듯이 무용인들이 젊은 독립안무가들을 중심으로 240여명 서명한 것은 무용계 초유의 사태가 아닌가 싶어요. 문화예술인들이 섞여서 한 적은 있지만 무용인들이 따로 명단을 만든 것은 처음 있는 일이구요. 한국춤비평가협회가 시국성명을 발표한 지금 전체 상황을 보면 어쨌든 무용계도 변화의 국면을 맞고 있다고 봐요. 여기서 협회가 해야 할 역할이나 감당해야할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적절하게 해내지 못한다면 저희 시국선언문의 효과도 굉장히 약해질 것이라고 봐요. 우리 나름대로는 한 발 앞선 성명이었지만 건의내용이 무용인들이 공감할 만큼 우선 디테일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지금 하는 이야기들을 과연 누구한테 할 것인가. 정책 담당자들에게 할 것인지 아니면 행사 주체에게 할 것인지 선별해서 건의하고 구체적으로 행동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가 무용가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움직이려는 무용인들과 단합된 에너지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변화의 상황에서 춤비협은 세대교체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장광열: 이지현 회원의 말에 공감합니다. 범 무용가들과 무용 관계자들이 힘을 모아 잘못된 것에 대해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춤계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필요한 사안들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채널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종호: 처음에 시국선언문을 발표할 적에 정치에 관한 것이냐, 무용계 현안을 갖고 얘기할 것인가를 여쭌 적이 있었습니다. 1차로 나간 것은 무용 위주가 아니라 시국선언이었어요. 그리고 오늘 나온 이야기들을 토대로 성명서를 만들거나 건의를 하는 등의 적극적인 행보를 보여야 합니다. 다만 춤웹진에 실릴 때에는 시국과 관계없는 얘기도 두루 실어야겠지요. 무용인들과 얘기를 나누고 정부에 건의하는 것은 따로 좀 더 정리할 필요가 있어요.
이지현: 그런데 웹진이 이미 매체가 되었기 때문에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게 비협에 대한 기대도 있구요. 춤웹진에서 문제를 공유하고 알리는 역할을 한다면 생각 있는 무용인들과 함께 할 수 있을 거예요. 국립무용단 등 외적인 문제와 더불어 구태의연한 작태들에 대한 무용인의 의식변화 역시 필요합니다.
김채현: 저는 ‘국회 국정조사 촉구 춤계 국정 현안’과 ‘춤계 주요 현안 공론’으로 다음과 같은 대책을 추천하니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춤계 국정 현안으로 △문화예술행정의 전면적 반성·재검토와 혁신방안 요구 여론,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작성 유포 및 표현의 자유 억압 진상 조사, △문예진흥기금 운용의 불합리한 집행 진상 조사, △문체부 관료(장관 및 차관) 비리 진상 조사, △한국문화예술위의 운영 실태 및 직권 남용 진상 조사, △한국문화예술위원장 임명 경위 및 비리 진상 조사, △문화융성위원회 운영 실태 진상 조사, △한국콘텐츠진흥원장 임명 경위 및 비리 진상 조사, △예술경영지원센터 대표 임명 경위 및 의혹 진상 조사, △예술감독 장기공석 등 국립무용단 파행에 따른 국립극장장 의혹 진상 조사, △문화재청장과 문화재위원의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 의혹 진상 조사를 국회 국정조사에 촉구합니다.
춤계 주요 현안으로는 △공공무용단 쇄신 여론 수렴, △공공 무용제전 쇄신 여론 수렴, △공공 지원금 지원 항목, △공공 지원금 심사 구조(심사위원 블랙리스트 포함), △무형문화재 보유자 지정 제도 여론 수렴, △춤계 자립 대책(춤 경쟁력 강화, 청년 창작 활동 후원), △21세기 춤 진흥 공동협의체의 필요성을 공론의 내용으로 삼고 이밖에도 주요 현안을 추가로 논의해야 합니다. 특히 춤 진흥 공동협의체 설립을 강조하고 싶어요. 2-30대 젊은 무용인들 환경이 제대로 조성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합니다.
장광열: 구체적인 내용들이 제안되었으니 춤계의 의견을 수렴해 주요 현안들을 한번 더 걸러내고 각종 부조리와 잘못된 악습과 관행 등을 근절하고 건강한 춤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는 후속 조치들이 이어진다면 최근의 개탄스러운 정국으로 인해 상처받은 전 국민들의 상실감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종호: 공유된 자료에 항목이 많긴 한데요. 이를 의논해서 웹진에 좌담회 내용을 간략히 넣고 박스를 넣어서 아예 웹진에서 발표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무용인들과 만나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죠. 최고의 경우는 새로운 협의체를 만들 수도 있는 거예요. 의식이 바로잡힌 무용가들과 함께 가는 거죠. 젊은 무용가들 중에는 블랙리스트에 9천명이나 있는데 무용인은 거의 없다면서 창피하다는 사람들도 많아요. 이럴 때마다 항상 거론되었던 것이 새로운 협의체였죠. 예전에는 정치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무용계 자체문제 때문에 협의체 구성을 논하는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그것을 넘어선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잖아요. 새로운 협회나 협의체를 만들어도 될, 아니 만들어야 할 시기가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지현: 이번에 서명했던 독립무용인들을 포함해서 연구소, 기획사, 무용계 안에서 활동하는 단체들을 모아 시대 상황에 반응하는 협의 테이블을 시도하고, 가능한 한 문제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해요. 함께 고민하고 행동하면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채현: 같이 단체 또는 함께 단체를 만드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느슨한 협의체라도 만들었으면 합니다. 만약 서울무용제 심사위원, 문예진흥기금 심사위원을 추천을 받는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기관에 의뢰를 하기도 하죠. 무용가들과 함께 느슨한 협의체라도 꼭 가져야 해요. 무용협회 이외 마땅한 단체가 없다는 식은 더 이상 안 돼요. 대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지현: 그런데 이런 협의체를 만들면 우리는 바로 ‘블랙리스트 협의체’가 되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