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김혜라: 오늘 이 자리는 지난달 초연된 국립무용단의 <제의 CEREMONY 64>(4월 9-11일, 국립극장 해오름) 작품에 대한 평가를 포함에 이모저모에 대해 춤비평가 방희망, 김인아 기자와 함께 얘기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윤성주 예술감독이 부임한 후 2012년 9월부터 시작된 레퍼토리 시즌제는 다양한 시도로 주목을 받았습니다만 그 예술적 성과에 대해서는 그 주목 만큼에 비례하지는 않았습니다. 올 해 첫 시즌 작품인 <제의>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과 공연의 완성도 그리고 국립무용단의 향방까지 진단해 보고자 합니다.
한국춤의 집단무의식성과 정신성의 부재
방희망: 이번 국립무용단의 <제의>는 작년 국립무용단의 공연들과 다른 지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제의>는 역경(주역)을 바탕으로 의식무(儀式舞)를 배열한 작품이었습니다. 한국은 ‘종교 백화점’이라고 불릴 정도로 온갖 세계의 어떤 종교가 들어와도 공존이 가능한 나라이죠. 그만큼 신의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도 층위가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공연에서 유교ㆍ불교ㆍ도교적 사상에서 나온 의식무, 도살풀이춤 같은 무속무 등을 다채롭게 다룬 것은 그런 한국의 상황을 생각할 때 지극히 당연하게도, 진작 나왔어야 하는 컨셉트인 것이지요. 역학의 관점으로 전체를 아우르는 철학적인 접근을 시도했고, 시각적인 요소에만 치중했던 지난해 공연과 다르게 모처럼 한국인의 종교성, 사상의 근저를 건드림으로써 생각해볼 지점이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공연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연출(박이표)과 안무(윤성주, 조안무- 조재혁, 김미애)가 각각 다른 사람이어서인지 연출의 의도가 춤으로 제대로 구성되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년 1월의 국립무용단 컬렉션 중 박이표 씨의 안무작 〈이상증후군〉은 난해한 이상의 작품 세계를 비교적 명쾌하게 시각화하여 재미있게 관람했던 작품입니다. 추상적인 관념을 춤으로 치환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그 당시나 이번 작품에서 받은 인상으로는, 안무가로서 박이표는 적어도 자기 자신은 그런 관념적인 내용들을 이해하고 있다고 보였거든요. 그러나 이번에는 워낙 집어든 주제 자체가 광범위하면서도 난해해서인지 충분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한 듯합니다.
김혜라: 국립무용단이 다년간 보인 레퍼토리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토는 ‘전통의 현대화’였고, 이번 작품 또한 안무가의 동일한 고민이 묻어난 작업입니다. 그러나 공연물은 안무가의 의도와는 달리 현장에서 어떤 결과물로 소통되는지가 중요합니다.
이번 <제의>는 그야말로 한국 전통춤의 유구한 역사적 족적을 무대로 끌어 올리고자 한 야심찬 의도에는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우리 민족의 다양한 종교와 의식적 행위를 품은 한국춤의 집단무의식성이 과연 무대에서 구현되었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전통춤이 오늘의 언어로 변형되어 정서적 공감을 주어야 하기에 다양한 시도는 용인되지만 그 안에 흐르는 정신성은 보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작품에서 의미를 부여한 철학과 사상의 근저가 잘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춤사에서 배웠던 의식무들이 그저 나열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우리 춤의 정신성이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지난 국립무용단의 전작들과 비교해서 생각해 보지요.
방희망: 국립무용단, 국립현대무용단, 국립국악원무용단 등은 지속적으로 ‘전통의 현대화’를 화두로 삼고 있습니다. 작년 4월 국립국악원무용단의 정기공연 <마지막 황태자, 조선의 꿈을 보다>라는 공연에서 처용무ㆍ보상무· 춘앵전· 봉래의 등 궁중연희에 관련된 몇 가지 무용을 볼 수 있었습니다. 현대를 사는 남자 무용가가 창덕궁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수집한 노트를 통해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 우리나라 춤들을 연대순으로 차례차례 만난다는 스토리텔링 전개였는데, 각각의 춤을 평면적으로 나열하기보다 전체를 스토리텔링으로 꿰어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시류를 따라가려는 노력, 계승되어온 춤을 재밌게 전달하려는 시도가 엿보였어요.
반면 국립무용단의 지난해 작업들은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주로 겉꾸밈에 치중하여 드러냈다는 점에서 아쉬웠습니다. 예를 들어 <묵향>은 ‘사군자’의 정신세계, 기개를 살리기보다 그 자체를 시각의 향연으로 치환시켰지요. 계속 볼거리 위주로 흘러가는 공연에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전통의 현대화’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소재 몇 가지를 가져왔을 뿐, 근저에 흐르는 의식세계에 침투하지 못했고 맛보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공연이었지요.
김혜라: <제의>는 전작들에 비해 연출적인 요소를 절제시켜 춤에 더욱 집중한 작업방식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깊이 있는 의식세계의 춤을 다뤘어야 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의>가 다양한 춤의 이미지와 몸짓들의 향연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그 뒤에 남는 것이 없었어요. “왜! 무엇을 위해 춤을 추었나?”라는 질문에 답이 쉽게 나오질 않아요. 진정한 현대적 제의가 아닌 것이죠. 돌이켜보면 오히려 이전 작품들은 현대무용가나 해외 안무가를 초빙, 출중한 타장르 전문가와 협업을 통해 윤성주 감독 이전의 국립무용단 방향과는 달리 열린 시도를 보여주었다고 재평가하게 됩니다. 다만 시각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정신ㆍ의식세계를 깊이 있게 조망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지요. 그래서 이번 <제의>에 기대감을 갖고 관람했는데..... 아직도 이 부분은 숙제로 남아 있네요. 현장에서 관객들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김인아: 공연 현장에서 객석의 반응을 얻어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무용관계자나 일반 관객에게 작품에 대한 인상이나 공연을 본 소감을 짤막히 여쭈어도 대체로 답을 피하는 분위기였어요. 한국춤을 전공한 무용가 모씨는 “종합선물세트를 보는 기분이었다. 한번 정도 솔로춤이 있어서 복잡한 무대가 정리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특히 살풀이춤에 맞춰 붉은 긴 천으로 추는 장현수의 솔로춤은 느낌이 아주 좋았는데 금방 무용수들이 대거 나와서 느리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즐길 수 없었다. 복잡하고 정신이 없었으나 촌스러움을 벗고 새로운 한국적 현대무용을 시도하려는 실험적인 태도는 좋게 보았다”고 했지만, 한편으로 “그러나 국립무용단의 정체성이 모호해지는 듯하다. 앞으로 국립이 작품방향에 대한 명확한 제시가 논의되어야 할듯하다”는 우려 섞인 제언을 덧붙였습니다.
무용 마니아라는 한 관객은 “무용수의 개인의 춤보다 전체적으로 하나의 흐름과 호흡으로 둥그러진 작품이었다”면서 “일무, 작법, 무무 등 춤의 원형을 알지 못하면 다소 어렵고 난해해서 지루하게 느껴질 것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공연계에 종사한다는 또다른 관객은 “각각의 춤들이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응집력을 발견할 수 없었다. 특히 마지막 춘앵무에서 아이를 품은 임산부가 등장하는 장면은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졌다”고 촌평했습니다.
호평도 있었습니다. 한국무용을 전공했다는 한 관객은 “오랜만에 춤에 집중한 작품을 볼 수 있어 좋았다. 국립무용단원들의 출중한 기량과 한국무용의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다른 관객은 “종묘제례악의 8일무를 40여명의 단원들이 형상화한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회오리>의 비빙부터 이번 <제의>의 박우재 음악감독의 거문고까지 국립무용단이 보여주는 음악은 언제나 탁월해 보인다. 조명ㆍ의상ㆍ음악의 세련된 조화로움 때문에 한국무용에서 현대적 색채를 강렬하게 느꼈다”고 긍정적인 답변을 보여주었어요. 전체적으로 집중된 움직임이나 작품의 제반요소에 호응을 보인 반면, 주제의식이나 안무구성에서는 아쉬움을 느낀 것으로 종합할 수 있습니다.
김혜라: 다양한 반응이 있었네요. 이제는 작품의 안무적인 부분에 대한 의견을 나눠보지요. 전체적인 작품의 구성은 탄생-소멸-재탄생이라는 동양의 순환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춤 형상으로는 종묘제례의 일무에서부터 불교의 작법, 민속춤인 도살풀이춤 그리고 춘앵무를 변형시켜 전개하였죠. 물론 각각이 긴밀히 연결되어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정서가 연결될 수 없는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춤이 연결되는 행간의 개연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 설득력을 잃은 부분이라고 생각되어요. 특히 마지막 춘앵무에서 연출한 생명의 잉태라는 다소 억지스러운 장면은 추상적이던 초중반부와는 달리 서사적 내러티브를 던져주며 신앙, 제의적 요소의 의미를 갖고 제시했던 전 장면들을 무너뜨리는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김인아: 말씀하신 내용은 <국립극장 미르> 5월호에 게재된 문애령 춤비평가의 글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안무 감각의 세대교체, 기량이 출중한 반복 동작 패턴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새로운 작품을 추구한 동시에 완성도 면에서도 균형감을 갖춰 한국무용 창작의 완전한 세대교체를 선언했다"고 하는 긍정적 평가가 전체적으로 강조돼 있지만, 평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종묘제례악 멜로디에 특유의 인사법이 재연되다가 나비춤, 바라춤, 법고 동작이 연속적으로 나열되면 제의에 관한 전통춤 모음 이상이 아님을 파악하게 된다. 자료조사가 철저한 논문 준비 과정 같지만 더 이상의 전개와 발전, 연구자의 주관적 결과물이 나오지 못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여러 의식무의 단순나열을 지양하고 재구성과 융해의 과정을 선보이겠다는 국립무용단의 의지가 <제의>의 구성에서는 제대로 발현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김혜라: 각고의 노력으로 작품을 만들었고, 팸플릿에 게재된 내용이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호평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복잡한 사상이전에 직관적으로 전달되는 춤이 절실
방희망: 팸플릿에 게재된 ‘장면을 이해하는 키워드’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은, 너무 많은 춤을 무리해서 가져왔다는 점과 시대 흐름에 맞지 않게 뒤죽박죽 구성되어있다는 점이었어요. 우주의 계절을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 표현하고 유불선의 전개도 그런 순서에 따라 전개된 양상이 있는데, 왜 굳이 그것을 거스르고 이렇게 배열해놓았는지 의문이었습니다. 박이표 연출자의 연출노트에서 서사구조에 기대지 않기 위해 일부러 거꾸로 배치했다는 설명이 있긴 하지만, 추상적인 춤 작업을 전개하려 한다면 적어도 보는 사람이 너무 많은 내용이 한꺼번에 쏟아지는데 눌리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순차적인 흐름을 제시하는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반부에 어두운 조명 속에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무용수들의 움직임, 그 태동을 서서히 드러내었는데 이 장면은 마치 우주의 시원(始原)과 같았습니다. 음양오행에서는 만물의 시작을 1,6 수(水)로 보고 수는 검은색인데 그런 점에서 깊고 검은 물의 움직임이 연상되는 장면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종묘제례의 일무를 변형한 장면까지가 한 덩어리로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초반의 추상적인 춤과, 근세에 해당하는 조선시대의 8일무가 바로 결합되면서 타임워프가 이뤄지니 그 뒤에 등장한 바라춤 등이 오히려 덜 세련되어 보이는 단점이 있었지요. 차라리 덜 다듬어진 원초적인 춤에서부터 정교하고 세련미 넘치는 춤으로 발전되는 구조를 택하는 것이 관객들이 팸플릿에 나온 복잡한 사상들을 모르더라도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안내하는 방편이 되었을 것입니다.
서사구조에 기대지 않겠다는 이유로 시간대를 거꾸로 뒤엎어버린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분이지요. 처음에는 탄탄한 구조를 구축하기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전개하는 느낌이었으나 강한 색조가 들어간 구체적인 춤들- 바라춤, 도살풀이춤 등으로 들어가면서 깔끔하게 통제하며 갈무리하는 힘을 잃고 무기력하게 방치시킨 듯 했습니다. 한편 후반부에 들어간 춘앵무는 제의와 관련되지도 않은 연희무를 굳이 넣어서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했다는 생각입니다.
김혜라: 오히려 가장 좋았던 것은 초반부였어요. 일무를 재해석한 장면은 전통의 현대화라는 측면에서도 세련됨에서도 극치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장면은 일무를 무대로 성공적으로 해석해 낸 명장면이라고 봅니다. 특히 64열로 비췬 배열에 일조한 신호 조명감독의 선택, 일무의 절제된 틀은 유지하되 각 춤꾼들이 발현해 내는 일체감과 응집력 있는 움직임은 한국춤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고 봅니다. 독자성-개별성-집단적 에너지가 잘 구현되어 춤으로 확장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앞으로 <제의>를 레퍼토리화 한다면 이 장면에 집중해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진행된 바라ㆍ법고ㆍ도살풀이ㆍ춘앵무는 도구를 없애서 몸짓으로 상징화 하거나 살풀이는 수건을 의상으로 변형하려 시도했으나 새로운 해석으로 보기엔 부족했어요. 한 시간 동안 역동적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장면들이 배치되었는데 무용수를 혹사시킨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정중동과 여백의 미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무용수들의 숨 가쁜 움직임이 지속되는 것에서 그 효과를 뚜렷이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은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국립무용단의 실력 있는 단원들은 굳이 주역을 세우지 않아도 눈에 띌 정도인데 이번 작품에서는 그들이 완전히 가려졌어요. 사람이 추는 춤인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마치 무용수들이 물질화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방희망: 의미 없는 춤이 무용수를 혹사시킨다는 데에 동감합니다. 저는 국립무용단의 이전 작품 <묵향>에서 여자무용수들에게 입힌, 둥그런 페티코트 모양의 한복이 다리의 움직임을 모두 가려 어떤 움직임을 열심히 하더라도 종종거리는 발 밖에 볼 수 없을 때 그렇게 무용수를 ‘혹사’ 시킨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이번 <제의>는 절개된 모양새나 겹친 구조가 움직이는 흐름이 잘 보일 수 있는 의상인데다가 사람의 인체가 전체적인 흐름에 녹아들어 보였습니다. 개별적인 무용수로서의 춤을 발현하기보다는 거대한 한 덩어리의 흐름 안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춤 자체는 잘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굉장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 작품이었지만, 애초에 고도의 추상성이 목적이었다면 무용수들이 흐름에 녹아있는 형태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김인아: <제의>는 무용수들의 움직임과 개성이 도드라지지 않은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움직임이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합치되는 구성이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무용수들의 역동성이 과연 그 노고만큼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흥미롭게 생각되었던 관객의 코멘트와 연결지을 수 있을 듯해요. 2층에서 관람했다는 그는 “전체적으로 군무가 맞지 않아 어지럽고 산만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무용을 마치 발레처럼 보는 시각이었어요. 큰 규모의 공간, 그 위에 펼쳐진 대형공연이 관람에 영향을 미친 것이었죠. 우리 춤의 즉흥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대작을 선보이는 것에 급급한 나머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듯 작품이 올라가는 공간의 규모는 관객의 관람하는 자세나 인식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마찬가지로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해오름극장이라는 대규모 공간과 밀접한 연관이 있진 않았을까요?
방희망: 해오름극장은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제대로 드러나기 어려운 무대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앞좌석에서 보아도 무용수가 멀게 느껴지곤 해요. 더욱이 이렇게 큰 극장에서 무언가를 보여주려면 무용수들을 끊임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피곤한 구조이지요. 우리 춤의 작은 움직임과 호흡을 느낄 수 있는 중소규모의 극장에 비해 해오름극장은 너무 큽니다. 국립무용단이 대형작품에 대한 압박감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해오름극장만을 고집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여담이지만 바닥을 들어 올려 여분의 공간을 만들고 후면까지 등퇴장로를 다양하게 쓸 수 있었던 KB 하늘극장도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다시 바닥을 메우는 공사를 했다 들었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가끔은 국립무용단의 작품을 KB하늘극장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 이젠 주로 해오름극장을 이용하지요. 대관일정을 어떻게 잡는지 모르겠지만 그 때문에 점점 큰 규모의 공연을 만들 수밖에 없고 이것이 오히려 작품의 깊이를 떨어뜨리는 요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묵향> 역시 그 큰 무대를 대형 화선지 모양으로 도배해서 원색적인 조명으로 채울 수밖에 없었고요. 이번에 국립창극단에서 만든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보았는데, 넓은 객석을 두고도 무대 위에 단을 쌓아 객석을 올렸고 그러고도 3층 구조의 무대를 만들어낼 수 있을 만큼 해오름극장은 아주 규모가 큰 무대인 것입니다. 국립무용단은 전용처럼 배정되어 있어 편하게 사용하고 있는 해오름극장이 오히려 작품수준에 독이 될 수 있다는 고민을 해야 된다고 봅니다.
김혜라: 맞습니다. 또 하나 국립이 다양한 레퍼토리 확보라는 행보를 걷고 있으나 꼭 일 년에 몇 편씩 대형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 작품보다는 한 작품에 심혈을 기울이고 부족하더라고 완성된 작품을 다시 보완해서 발전시켰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작품을 위해 극장이 존재하는 것인지, 극장의 상황에 맞게 작품을 맞추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작품이더라도 해오름극장과 하늘극장에서 공연할 때에 느낌은 다릅니다. 작년 테로 사리넨을 안무가로 초빙했던 <회오리>의 경우 공간 활용이 굉장히 뛰어났어요. 극장이 갖고 있는 깊이와 폭을 고려하여 무용수들의 배치와 등퇴장 등을 자연스럽게 살려냈었죠. 그러나 <제의>는 해오름극장을 깊이 있게 고려하지 못한 작품이었습니다. 무대 측면과 후면에 ㄷ자로 높은 벽을 올려 큰 무대를 막았죠. 인간세상과 그 바깥의 사이-중간 단계를 뜻하고 벽에 난 문과 틈이 세상으로 통하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담았다지만 답답하다는 느낌은 떨칠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초점을 바꿔보죠. 근간 국립 예술단체들이 홍보마케팅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국립 무용단체들, 기존 레퍼토리의 보완과 활용도 중요
방희망: 국립무용단은 요즘 블로그나 SNS등을 통해 굉장히 공격적인 홍보를 해오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래도 관객층이 어느 정도 탄탄하게 형성되어 있는 발레에 비해 우리 춤의 보루 역할을 하는 국립무용단이 더 알려지고 새로운 관객층을 흡수하여 더욱 많은 인기를 얻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피상적인 칭찬 일색, 단편적인 감상에 기댄 홍보는 길게 갈 수 있는 전술은 못 된다고 봅니다. 결국 작품에 대해 ‘선택과 집중’을 잘해주었으면 합니다.
어렵게 만든 신작들을 거듭 재공연하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정말 전달하고 싶은 중요한 내용들이 무엇인지 걸러낸 다음, 그것에 집중하여 보여주고, 이외 부분은 욕심을 내려놓으면 좋겠어요.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는 것은,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직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스스로 정돈할 능력이 안 되기 때문에 무작정 늘어놓고 관객들보고 알아서 흡수하라는 뜻이 되거든요. 과도한 관념어로 도배된 프로그램북도 그런 의미에서 개선되어야겠지요. 이건 국립현대무용단의 경우에 더욱 많이 느껴집니다만, 아카데미 팀에서 아무리 많은 내용을 끌어다 놓아도 실제 무대 위에서 구현된 것이 그런 현란한 수사들을 부끄럽게 만들 만큼 빈약한 모습이 된다면 관객은 계속 기만당하는 기분이 들겠지요.
김혜라: 동감합니다. 과도한 이론적 접근으로 팸플렛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춤계가 지적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몸의 언어만으로도 당당히 출사표를 던지는 작품으로 승부수를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제의>작품에 대한 여러 기대와 우려의 의견을 나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춤으로 풀어낸 이번 작품은 이전 작업들에서 지적되었던 춤의 부재라는 부분을 개선하는 시도로서 또 다른 단계로 방향을 틀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예술 감독 임기 마지막 해에 선보인 이번 작품에서 질적으로 완성도를 갖추면서도 정신성과 의식세계를 한번쯤은 여실히 보여주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긴 시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