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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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시
- 2025년 8월 19일(화)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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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소
- 아카데미아인(서울 동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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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석자
- 채희완 윤영옥 김연정
ⓒ춤웹진 |
〈법열곡 2025: 승무,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 (2025. 7. 26., 충남문화예술회관) 공연 소개
1장 혼의 울림
- 종송(鍾頌) - 홍고(홍고) - 거령산(擧靈山)
2장 의례의 몸짓
- 복청게(伏請偈) - 천수(千手): 바라춤 - 도량게(道場偈): 나비춤
- 법고춤 - 거불(擧佛) - 향수나열(香羞羅列)
- 사다라니(四陀羅尼): 바라춤 - 향화게(香花偈): 나비춤
3장 우주행명 순환의 춤
- 완판 승무(僧舞)
4장 궁극의 평화-법열(법열)
- 회향게(廻向偈) - 공덕게(功德偈)
채희완: 한여름 무더위가 예년보다 혹독하게 피부에 와 닿은 지 벌써 두 달이 넘은 듯합니다. 입추가 지나 한풀 꺾일 만도 한데,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땀범벅에 이내 나른해집니다 그럼에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이 자리에 와주셨습니다. 이런 날씨가 우리를 뜨겁게 달구듯, 오늘의 이야기도 어쩌면 이애주 선생의 정염을 이어받아 더 열정적으로 진행될 것 같습니다. 오늘 자리에 함께해 주신 분들을 소개합니다.
이애주한국전통춤회를 이끌고 계시는 윤영옥 선생, 그리고 이애주승무보존회의 대표이신 김연정 선생, 두 분이십니다. 직함에서 알 수 있듯이, 이애주 춤을 앞세워 모임의 활동을 전개하는 대표적인 분들이죠. 오늘 주제도 마찬가지로 이애주 선생과 깊이 관련된 내용입니다.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나신 지 4주년, 오늘 그분이 남기신 뜻과 마음을 다시 새겨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특히 지난 7월 26일, 충남 홍성군 내포시에 있는 충청남도문화예술회관에서 〈법열곡〉 공연이 있었습니다. 이애주문화재단과 한성준춤·소리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해 홍성 군민들과 함께 큰 행사를 치뤘죠. 오늘은 그날의 공연, 〈법열곡〉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나눠보고자 합니다. 공연한 지 한 달 가까이 되는데, 아직도 생생한 흥분이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두 분께 소감부터 듣겠습니다.
<2025 법열곡>, 2025년 7월, 충남문화예술회관 ⓒ김종호/이애주문화재단 |
윤영옥: 이번에는 '법열곡'을 앵콜공연으로 홍성의 충남문화예술회관에 올렸습니다. 세 번째 법열곡 무대이었습니다. 한영숙 선생님에 의해 1971년 초연되었고, 1994년 이애주 선생님께서 '이애주춤 법열곡'을 올리셨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승무를 독무로 추셨고 송암 스님, 구해 스님, 일운 스님, 동희 스님 외 몇분의 스님들이 함께 출연하셨지요.
채: 그게 1994년이면, 벌써 30년 전이네요.
윤: 그 당시 서울 문예회관 대극장(지금의 아르코예술극장)에서 본 공연장 열기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당시 선생님께서 동희스님과 함께 나비춤을 추시고 승무를 완판으로 40여분을 온전히 추셨지요. 그 당시 공연이 약 1시간 40분 정도로 이어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승무는 이애주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숭고한 유작입니다. 선생님의 정신과 예술혼이 고스란히 담긴 춤으로 길이 이어나가야 할 유산으로 제자들이 승무의 정통성을 책임있게 보존하고 지켜나가야겠지요. 선생님께서 소중한 많은 작품을 남겨주셨지만, 우리가 이번에도 작품을 다시 하면서 ''우리가 반드시 이어가야 한다''는 확신을 더 크게 갖게 되었습니다. 승무와의 연관성도 더 깊이 다가왔고요. 지난번에는 9명이 했는데 이번에는 8명이 완판 승무를 추었습니다. 전에보다 8명의 구성이 더 안정적인 느낌이었지요.
윤영옥 이애주한국전통춤회 회장 ⓒ춤웹진 |
채: 30년 전 〈법열곡〉은 윤선생도 직접 출연하신 건가요?
윤: 선생님 혼자 추셨습니다. 스님들과 함께 하셨고, 저는 그때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채: 그렇군요. 그때는 조금 더 거리를 두고 무대를 바라보셨다면, 이번에는 직접 출연하셨잖아요? 느낌이 많이 다르지 않았나요?
윤: 네. 선생님의 춤을 이어서 완판 승무를 추다 보니, 왜 선생님께서 승무를 작법무와 함께 융합하셨을까를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승무가 지닌 고유한 특성이 불교의 내면적 세계와 맞닿아 절묘하게 잘 조화를 이룬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님들이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과 우리가 온몸으로 춤 수련을 통해 깨달아가는 과정이 서로 통한다는 점에서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채: 그러니까 30년 전의 〈법열곡〉은 이애주 선생님의 솔로로 일관되었는데, 이번에는 8명이 함께 했지요?
윤: 네. 8명이요.
채: 한 작품에 구성원의 일원으로 무대에 올랐는데, 꼭 31년 전 이애주 선생이 혼자 추었을 때의 마음, 그 속에 담겼던 무언가가 그대로 오는 느낌은 없으셨나요? 지금은 마치 내가 해놓고 딴 사람 얘기처럼 말씀하시는데, 출연자로서 ‘내가 선생님의 30년 전 춤을 대행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은 안 하셨어요?
윤: 감히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30여년 전이면 선생님이 사십대 중반이었는데 승무를 보면서 소름이 돋았고 그 경이로움에 숨이 멎는 듯했습니다. 과연 누가 선생님의 춤을 그만큼 출 수 있을까. 지금의 우리는 아무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무후무하신 선생님이시지요. 승무를 추면서 선생님 생각을 많이 했고, 감동이 밀려와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생전에 선생님께서도 무대위에서 처음 연주가 시작되면 가끔은 힘겹고 무겁게 몸을 일으키실 때가 있었지요. 공연을 마치시고는 ''한영숙 선생님 생각이 났다''는 말씀을 몇 차례 하셨었지요. 30년 전에도 그러셨을 것 같아요. 저도 무대 위에서 춤추면서 춤을 추신 선생님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채: 혹시 30년 전에 이애주 선생님이 독무로 추었을 때, 그 제목 그대로 ‘법열’의 의미에 부합하는 느낌을 받으셨나요? 이번 공연은 직접 출연하시면서 느끼는 법열과, 객석에서 보며 느낀 법열이 조금 다를 수도 있을 텐데요. 출연자로서 이번에 법열을 감지하였습니까?
윤: 사실 그동안에는 크게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그 느낌을 받은 것 같지요.
채: 그 법열의 느낌이 무엇인가요?
윤: 무아의 경지요
채: 무아지경이요? 보통 ‘엑스터시’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그건 ‘열’에 해당한다면 ‘법열’은 조금 더 생생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무아지경인가요? 나만의 어떤 느낌? 어떤 몸반응? 어떤 세계?
윤: 네. 무아지경인데요. 내가 없어져 사라지는 상태가 되고 춤 자체만 존재하지요.
우리가 여러 해를 보내면서 기운을 맞춰왔으니 서로 느낀 바가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김연정: 사실 소감을 얘기해 보라고 하셨는데, 너무 깊이 이야기가 들어갔네요. 1994년에 선생님의 〈법열곡〉을 봤을 때 저는 대학원 시절에 뒷일을 하면서 봤고, 그때는 사실 ‘법열’이 뭔지 잘 모르고 봤던 것 같아요. 그저 의례가 굉장히 길었다는 기억과, 후반부에 선생님의 승무가 혼자서 무대를 꽉 채우며 나아가시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는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매년 추모 공연을 해 오면서 단순한 추모 공연만이 아니라 선생님의 작품을 다시 돌아보고 함께할 수 있는 공연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법열곡〉을 다시 해보자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불교 작법무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그것을 통해 불교가 종교의 차원을 넘어 우리 기층문화 속에 자리 잡았다는 점, 또 승무 역시 그 영향을 받아 형식과 본질을 갖추게 되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춤회 사람들이 작법무를 공부하며, 승무라는 춤 자체가 지닌 자연의 큰 원리와, 선생님께서 해석해 내신 춤의 본질이 불교의 가르침과 상통한다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40분 동안 이어지는 긴 승무를 추고 난 후에 느껴지는 다 비워낸 듯한 상태, 부처님의 ‘공(空)’과 같은 경지를 몸으로 체험하게 되는데,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내면 깊숙이 비워낸 후에 찾아오는 기쁨과 자유, 깨달음과 함께 오는 환희가 바로 ‘법열’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공연 마지막에도 아무것도 없을 때 느낄 수 있는 자유를 표현하고 싶었고, 그것이 곧 법열의 의미에 다가가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윤: 홍성에서 법열곡 공연을 마치고 눈물을 흘리는 회원들이 많았습니다. 이 숭고한 승무를 남겨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리는 마음과 함께 채워나간 무대에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비워낸 뒤 오는 자유함과 희열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법열곡〉 팜플릿 표지 모음 |
채: 저도 〈법열곡〉을 30년 전, 그리고 지난해 두 차례 서울에서 공연한 것, 올해 경기도 공연 그리고 홍성에서 한 이번 공연까지 지켜보면서 느낀 점이 없지 않았습니다. 1971년도 한영숙 선생의 법열곡 공연은 초창기대학탈꾼 시절의 몇 안되는 춤공연 관람이었는데,마치 상상할 수 없는 큰 붕새를 타고 세상천지를 솟구쳐오르다가 그만하고 길게 쑥 내리떨어지는 고공비상의 흔들림이었습니다. 황금빛의 장엄함이라고 할까. 평소 한영숙선생의 청초하고 대쪽같은 매무새와는 반대편에 있는 세계였습니다. 지도교수이셨던 탈춤반 이두현선생은 우리춤과 음악의 짙고 두텁고 깊은 역사를 한숨에 관통하는 쾌거라고 공연 평문을 쓰셨던 걸 기억합니다.그후 같은 이름의 공연들을 보면서 처음의 그 아득한 황홀경을 되새기지는 못했지만 옛 정취의 흐뭇한 정경만은 고이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 제가 느낀 것과 직접 출연한 분들이 느낀 것이 같을까, 혹은 제가 놓치고 만 어떤 부분이 있지 않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정서적인 차원에서 여쭤본 겁니다. 이를테면 ‘몸의 모든 것이 씻겨 내려가는 듯한 후련함을 느꼈다’ ‘특정 대목에서는 몸이 절여오듯 힘든 감각을 견뎌냈다’와 같은 체험을 출연자로서도 하셨는지 궁금했지요. 그에 대해 덧붙이실 소감은 없으신가요? 이건 우리가 주제로 삼으려는 〈법열곡〉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그것이 관중에게 던지는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의 반응과도 연관된다고 봅니다.
저는 지난해, 올해 〈법열곡〉 공연을 보면서 ‘이것은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하는 것인데, 실제로 법당이나 제의의 장소에서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불교 제의의 방식을 많은 부분 그대로 인용하기도 하고, 그 법칙을 따르고, 마치 재를 올리듯이 제의에 직접 참가한 사람이 그 환경과 함께 불교 의식에 참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지요. 일반 신도나 절집의 재에 참가한 사람들, 즉 관중이든 출연자든 그들이 갖는 마음가짐과 서로 소통되는 어떤 것, 그것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예불 드리고 예배 보고 난 후의 어떤 느낌과 거의 같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예술적 정서나 취향보다 먼저, 종교 의례에 참가한 사람이 갖는 심성에서 오는 종교적 울림이 오히려 더 앞서지 않겠는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술 행위라기보다는 오히려 종교 의례에 참가한 사람의 행위로도 볼 수 있지 않겠나 싶어 말씀드린 겁니다.
김: 그렇지는 않았고요. 공연작품으로 구성한 것이지만 제의에 올려지는 의식이기에 그 부분을 충분히 존중하고 올리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에 하나로 융합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채: 제가 보기엔 장소만 극장이지 법당에서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의에 토대를 둔 것일 뿐 아니라 진행 방식이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런 느낌을 먼저 주었고, 끝까지 그것을 견지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특히 공연한 분으로서는 물론 예술의지의 행위를 한 것이겠지만, 제의의 일부로서 떠맡아 대행하는 것은 아닌가, 기분이나 태도가 어떠하셨는지가 궁금하군요.
윤: 저희가 법열곡을 극장 무대에서 공연하기 전에 법당에서 리허설을 한 적이 있습니다. 법당에서의 분위기가 엄숙하고 부처님이 계시고 제단이 있기 때문인지 제의적인 느낌이 훨씬 강했지요. 반면 극장 무대에서는 좀 더 예술적인 느낌이 강했고 마음가짐도 달랐습니다. 물론 법열곡 안에 제의적 본질이 내재되어 있지만 법당 안에서 느낀 그 강렬한 제의적 분위기와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김: 이애주 선생님의 법열곡 자체가 제의적인 성격을 중요하게 담고 있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형식적인 부분을 불교 의례에서 차용하되, 그대로 재현하는 쪽으로 가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느낌은 존중합니다. 다만 이번에는 영산재 제의의 시작 의식, 그리고 작법무와 관련된 부분들이 승무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연결되어 있는지 엮어보려 했습니다. 스님들이 직접 오셔서 범패를 해주시고 그 안에서 춤을 추었기에 더 불교의례적인 모습으로 보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도는 어디까지나 춤의 형식 속에 그것을 녹여내는 것이었습니다.
공연 초반 종소리로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절에서 새벽을 여는 종소리처럼, 대중의 하루를 열고 의식을 깨우는 방식을 차용해 공연을 열고 닫았습니다. 이것은 불교 의례의 재현이 아니라, 춤의 형식 속에서 표현하려 한 의도였습니다.
채: 지금 말씀의 초점은 제의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제의의 내용을 소재로 삼아 승무라는 응축된 춤이 던지는 메시지를 더 깊이 받쳐주고 확장하도록 구성했다는 점이군요.
이번 〈법열곡〉 공연의 구성법, 즉 흔히 말하는 서사 구조나 틀거리 구성이 어떤 뼈대를 가졌는지, 또 그것이 기승전결 방식인지, 아니면 각 대목이 독립적이면서도 하나의 큰 맥으로 이어진 연산구조(連山構造)의 것인지,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먼저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실제 안무 구성을 주선하신 김연정 선생이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떤 식으로 구성했고, 그 구성이 어떤 표현을 위한 것이었는지요?
김연정 이애주승무보존회 회장 ⓒ춤웹진 |
김: 잠시 말씀드린 것처럼 이 극장에 그 시간에 들어오신 분들과 그 공간 자체가 어떤 하나의 커다란 법열의 장이 되었으면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공연을 구성했는데 그랬기 때문에 맨 처음에 종의 울림, 북의 울림으로 시작해야겠다 생각을 했었어요. 그러니까 제1장을 ‘혼의 울림’이라 했는데 이렇게 마음을 울림으로 소리로 이 공간을 채우고 오는 사람들도 마음의 울림을 가지고 공연을 볼 준비가 되어가는 그런 상황. 그래서 그 울림이 같이 공명되는 그 상황, 이 법열의 장으로 초대를 하는 거죠. 그 다음에 거기서 이제 모든 참여자가 함께 시작하는 ‘요잡바라’ 이런 것도 같이 들어 왔고요. 그리고 정말 의례의 몸짓이라고 해서 전체 의례에서 추어지는 〈바라춤〉 〈나비춤〉 〈법고춤〉이 쭉 엮이면서 의례에서 추어지는 것도 다 가져온 것이 아니고 대표적인 춤, 그리고 〈천수바라〉와 〈도량게 나비춤〉 그리고 〈법고춤〉, 대표적인 것들을 가지고 구성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스님들과 계속 얘기하면서 그냥 의뢰해서 하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것을 무대에 적합하게, 줄이고 늘이고 등등 많은 의견을 나누면서 구성했습니다. 그러니까 대형이나 이런 것들도 스님들과 함께 다양한 대형으로 각각의 대목들이 뭘 얘기하는지를 같이 얘기하면서 그에 적합한 대형들을 좀 더 말해 보자 하며 나름대로 구성했지요.
채: 그게 2장 의례의 몸짓에 해당되는 것이죠?
김: 네, 일운스님의 범패 소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3장으로 넘어가면서 본격적인 춤, 즉 〈완판 승무〉가 이어집니다. 〈승무〉는 약 40분 동안 이어지며, 이번 공연에서 우리가 전하고자 한 핵심 무대였습니다. 이애주 선생님은 30년 전 혼자서 〈승무〉를 추셨습니다. 한영숙 선생님의 경우는 영상을 보진 못했지만, 프로그램에 따르면 대목을 나눠 여러 명이 분담해 추셨더군요. 그러나 저희는 전체가 함께 추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처음에는 3~4명이 나왔다가, 점차 모두가 함께 군무로 구성했지요. 〈승무〉가 이어진 뒤 마지막 장면에서는, 앞서 추었던 〈나비춤〉과 〈바라춤〉이 함께 들어옵니다. 불교 전통 작법무의 동작들이 〈승무〉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다는 것을 한 장면으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후에는 ‘훑어내는 과정’을 거칩니다. 다 비워낸 뒤에 찾아오는 자유와 희열을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단계입니다. 불교 의식의 ‘회향게’처럼, 발산했던 마음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흐름을 담았습니다. 공연의 시작을 행렬 의식으로 열었다면, 마지막도 행렬 의식으로 정리하며 마무리했지요. 저는 이 과정 하나하나에 모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승무〉 자체도 인간의 일생이 순환하는 과정, 우주 자연이 순환하는 과정을 담은 춤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공연 전체 역시 이런 순환 구조로 짜였습니다. 우리 전통춤과 문화의 원리, 영가무도(詠歌舞蹈)의 방식을 따른 셈입니다. 처음에는 ‘음’으로 영을 울리는 〈혼의 울림〉으로 시작합니다. ‘가’는 범패 소리를 통해 의례를 떠올리게 하고, ‘무’는 〈승무〉로 본격적인 춤을 추는 단계입니다. 마지막 ‘도’에서 최고조로 끌어올린 뒤 다시 고요하게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단계입니다. 저는 이 공연의 구조에서 바로 그런 원리를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채희완 춤비평가 ⓒ춤웹진 |
채: 네. 방금 뒤에 얘기한 ‘영가무도’와 함께 그 소리의 구성 방식이 큰 틀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하셨습니다. 그 부분을 조금더 떨어뜨려서, 다음 단계로 음악과 춤의 관계 설정 문제로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다만 지금은 이 공연 작품이 어떤 틀거리로 이루어졌는가를 먼저 얘기해보는 자리죠. 일반적으로 3박 4일씩 하는 재의 양식을 단순히 축소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 점을 강조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4장의 구성 전체를 보면, ‘1장 혼의 울림’ ‘2장 의례의 몸짓’ ‘3장 우주 생명 순환의 춤 곧 승무’, ‘4장 궁극의 평화’. 제목만 보아도 기승전결의 방식을 취했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내고 달아 매고 푸는 방식이죠. 또 다른 방식이라고 하면, 각 마당이 독자적인 봉우리로 이루어져 전체가 큰 산맥을 이루는 연산구조(連山構造)인데, 이번 공연은 그런 방식과는 다른 구조를 취했습니다. 처음 소리 울림, 종소리로 문을 여는 것이죠. 관객은 음악을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춤은 ‘보는 춤’에서 ‘듣는 춤’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종소리로 문을 열고, 이어서 〈바라춤〉, 〈나비춤〉, 〈법고춤〉 불교 의례에서 나오는 온갖 몸짓을 받아서 그 다음을 연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적인 결집체로서 절정을 〈승무〉 군무로 이루고, 회향게에서 대단원의 화해를 맺습니다. 이 구조는 매우 충실한 기승전결의 삼각 구도입니다. 동양 예술의 기본적이고 공통된 구조이기도 하죠. 마음의 흐름도 비슷합니다. 처음부터 격하게 반응하기보다는 이끌어내 전개 과정을 겪게 하고, 마지막에 절정체로 올린 뒤 다시 차분히 본래 상태로 회귀하는 방식입니다. 이 공연도 그런 구성을 택했습니다. 관객 입장에서는 아주 편안한 구조죠. 메시지가 완만하게 진행되며, 격정적인 전환이나 충격적 정서의 회오리 같은 요소와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저는 여러 차례 공연을 봤기에 이번에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어디서 새로운 시도나 해석이 있을까 기대했습니다. 첫 공연의 기억이 잔존해 있기 때문에, 새롭게 변한 부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편안한 만큼 조금은 안이했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반면 처음 본 사람들은 특히 관중석 반응이 새로웠습니다. 많은 관객이 이런 승무를 주제로 한 대규모 무대 공연은 처음이었을 겁니다. 또 한성준의 춤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이 와서 봤으니, 그들에겐 또 다른 느낌이 있었겠죠. 또 이애주 선생이 홍성에서 20여 년간 쌓아온 공덕과 함께한 분들의 심정에서는 우호적으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호적인 시선 속에서 관객을 찌르는 메시지는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이번 공연은 홍성이라는 본거지에서 이뤄졌기에 의미가 남달랐습니다. 저는 작품을 만든 분들의 속 의도를 솔직히 듣고 싶었습니다. 오늘 모여서 얘기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공연을 꼭 과학적으로 분석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구성과 의미를 한번 따져보려는 것이죠. 이 음악이 단순히 제례 의례에 들어왔기 때문이 아니라, 극적 구성과 함께 의미를 더하기 위해 쓰인 것인지. 불교 유래의 요소들도 많은 의례 내용 중에서 선택하고 의미를 부여한 결과일 겁니다. 저는 불교 의례 전반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기에 작품을 보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몇 차례를 봤지만 여전히 어려웠어요. 그런데도 일부러 어렵게 넣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너무 학구적으로, 근원과 근거를 확실히 제시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점이 이번 공연의 특징이자 장점이면서 동시에 어려움이기도 했다고 느꼈습니다.
김: 그전에도 홍성에서는 한성준 선생의 고향이어서, 선생의 춤과 그 후예들의 무대를 꾸준히 볼 수 있었습니다. 이애주한국전통춤회가 오기 전에도 한영숙 선생의 춤, 강선영 선생의 춤 등이 계속 소개되었지요. 그래서 관객들이 춤 자체가 어떤 것인지, 여러 무대들을 통해 접할 기회는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법열곡〉을 홍성에서 굳이 올리고자 했던 이유는, 한성준 선생의 대표작이라 할 〈승무〉를 단순히 “이것이 승무입니다”라고 보여주려는 데 있지는 않았습니다. 〈승무〉라는 춤이 어떤 문화적 바탕 위에서 형성되었는지를 관객들이 조금 더 느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어찌 보면 이번 공연은 〈승무〉를 앞에서 해체했다가, 다시금 전체적으로 조합해 재구성하는 방식으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홍성 관객들에게는 이러한 과정을 차근차근 보여주는 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전에 이애주 선생님께서 홍성에서 꾸준히 공연했을 때도 관객들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몇 년을 계속 같은 공연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만 보시다 보니 조금은 지루하다는 이야기도 들렸습니다. 물론 중요한 작품이고, 한성준 선생의 춤이라는 의의도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다르게 접근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보여드릴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춤회를 홍성으로 옮겨오면서 첫 공연으로 〈법열곡〉을 보여드리는 것이 필요하겠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채: 좋은데요. 같은 제목의 〈법열곡〉, 그러니까 7월 26일에 홍성에서 한 공연과 서울에서 했던 공연 사이에 다른 점이 좀 있었나요?
김: 네, 맨 처음 2024년에 서울에서 했던 공연은 이애주 선생님의 3주기라는 점과, 또 한영숙 선생님이 1971년에 〈법열곡〉을 처음 하시고 1994년에 이애주 선생님이 〈법열곡〉을 재현한 역사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30년 만에 제자들이 다시 〈법열곡〉을 올린 것이니 세 번째 공연이고, 30년 만의 재현이었죠. 그래서 이 두 분께 올리는 헌정의 의미가 훨씬 강했습니다. 첫 번째 공연, 서울남산국악당에서 했을 때는 앞부분에 두 분께 올리는 의례적 의미를 더 담았고, 뒷부분은 그에 이어지는 구성으로 꾸몄습니다.
채: 그런 의도가 너무 잘 드러났어요. 예술 공연이라기보다는 헌정 의례같은 감이 강했고, 그래서 추모식 같은 분위기를 많이 줬거든요.
김: 네, 그 공연은 선생님의 3주기를 기리는 자리였기 때문에 초점을 그에 맞췄습니다. 하지만 올해 다시 공연할 때는 그 지점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앞부분을 새롭게 구성하면서, 공연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하기 위해 아까 말씀드린 ‘기·경·결·해’ 구조를 중심으로 고민하며 짜나갔습니다.
채: 여기서 아까 얘기 나온 〈이애주의 승무〉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환경이나 요인들, 그다음에 매체들이 있었는데, 특히 불교 의식, 불교 음악과 연관시켜서 〈승무〉의 의미를 다시 더 깊게 확인해보자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불교 의례에 해당되는 것이 훨씬 더 강렬하게 어필되도록 짰거든요. 아까 결정적인 대목은 3장에 있다고 했지만, 그 진행의 흐름에 주류는 그런 게 아니었고 제의의 하나로 동원된 각종 게송의 형식들, 그에 맞춘 몸짓들, 그리고 그중 하나로 〈나비춤〉 〈바라춤〉이 있는 것이죠. 춤으로 보기보다는. 그렇게 해서 의례 양식, 그리고 소리·범패 같은 불교음악적 내용을 구성하면서 기승전결(또는 기경결해)의 구조를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각 장마다 어떤 식으로 배합을 했는지 보면, 첫 장에서는 종소리로 문을 열었죠. 그래서 춤이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춤과 연결해서 음악적 배려를 했던 대목도 있었습니다. 그때 음악이 특히 범패가 구조 전개 과정에 어떻게 작동했는지, 어떤 힘을 가지도록 배치했는지, 실제 무대의 시 공간에서는 어떻게 설정했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건 보는 사람에게는 불필요할 수 있지만, 작품을 나중에 분석하거나 역사적 의미로 해석할 때는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팸플릿에 나오는 겉모습의 언표만으로는 알 수 없는 숨은 의도, 음악과 춤, 무대 구성의 배경과 의례 양식이 작품분석의 기초자료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작품론 차원에서, ‘이 작품은 이런 구성요소로 짜진 작품이다’라고 말할 때 핵심이 됩니다. 주제는 분명히 〈법열〉이지만, 구체적으로는 음악·춤·무대가 이러한 구조를 기초로 짜여 있습니다. 직접 출연하면서 ‘나는 이렇게 구상했고, 이런 의도로 이렇게 형상화했다’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작품을 해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윤: 바라춤과 나비춤의 불교의례적 공통점은 공양과 기도 그리고 법열을 담은 행위입니다. 바라는 부당한 것들을 몰아내고 공간을 청청하게 만들어 정화하는 의미가 있다고 하지요. 그 울림이 크고 마음에 닿아 객석에서도 바라소리에 눈물을 흘렸다는 지인분이 있었습니다. 또한 나비는 윤회와 변화를 상징하면서도 동시에 자유로운 해방과 해탈의 의미가 담겨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30년 동안 선생님의 춤을 봐왔는데 선생님의 춤은 기승전결이 뚜렷하면서도 연꽃처럼 고요히 피어나 결국 자유로움과 해탈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마지막에는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겉으로 드러나면서 입술 꼬리가 올라가며 살짝 미소를 지으시는 모습을 보이셨는데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지요. 예술이 완성이 없다고 하듯이 우리는 끝없이 정진하며 노력해야겠지요.
작품구성에 대해서는 함께 말씀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김: 처음에는 불교의 네 가지 사물(종, 북, 운판, 목어)을 어떻게 무대에 담을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종소리로 시작해 북을 치고, 운판과 목어는 스님의 태징과 목탁으로 대신했습니다. 특히 종은 선생님께서 직접 만드신 오래된 종이었는데, 너무 무겁고 커서 연습실 한쪽에 놓여만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 공연을 통해 다시 무대에서 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것이 의미 있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1장에서는 ‘요잡바라’를 넣었어요. 바라를 단순히 치는 것이 아니라, 출연자들이 스님들과 함께 배운 작법을 바탕으로 도량 자체를 울리는 의미로 맨 앞에 두었습니다. 2장부터는 제의적 몸짓으로 구성했는데, 공연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스님들을 존중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되, 의례와 충돌하지 않도록 스님들과 계속 논의하며 만들어 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30년 전 이애주 선생께서 〈법열곡〉에 넣었던 부분과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작법무는 그대로 유지했지만, 게송 선정이나 표현 방식은 의례보다 춤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쪽에 맞췄습니다. 바라춤으로는 대표적인 ‘천수바라’를 앞에 두었고, 범패 소리와 어울리는 〈도량게 나비춤〉을 했습니다. 쌍으로 나와 추는 형식이었죠. 또 법고춤도 중요했는데, 직접 배우면서 승무 동작이 법고와 당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똑같은 동작은 아니지만 상징하는 움직임이 분명히 이어져 있었어요. 그래서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사다라니 바라〉와 향화게의 〈나비춤〉을 더했습니다. 〈천수바라〉와 〈도량게 나비춤〉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사다라니 바라〉는 부처님의 말씀 속에서 사물이 변화하는 과정을 담아 활달하고 흥미로운 구성이었어요. 그래서 고요한 〈천수바라〉와는 다른 성격으로 넣었습니다. 향화게의 나비춤은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좌립’ 동작이 특징적인데,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나비춤〉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죠. 결국 〈천수바라〉 〈도량게 나비춤〉 〈법고춤〉 〈사다라니 바라〉 〈향화게의 나비〉까지 모두 넣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몸짓을 한 자리에서 보여줌으로써, 단순히 스님들의 의례가 아니라 공연으로서의 의미와 춤의 여러 가능성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몸짓이 승무 동작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채: 오히려 더 명확하게 느낀 건, 이번 무대가 학습무, 그러니까 ‘배우는 춤’을 보여주는 자리였다는 점입니다. 교육적 성격이 지나치게 전면에 드러나서, 공연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학습 과정 자체를 무대화한 것처럼 보였다는 거죠. 승무에 이르기까지 불교 의례, 춤, 음악 같은 요소들을 통해 공연형태로는 교육 효과 이상의 의미를 가져야 하는데, 실제 무대에서는 관객과 호흡하고 감동시키려는 배려보다는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이애주 선생의 학문적·예술적 주장에 충실하다 보니, 그리되었다고 하겠습니다.관객은 다소간 2차적인 위치에 놓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혹독하게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니 음악과 춤이 예술현장에서 주는 생동감이나 유기적 흐름보다는, 부분적으로 나열된 듯한 인상이 짙었습니다. 분명 정서의 굴곡은 있었을 텐데, 고조된 순간에는 어떤 음악을, 차분한 순간에는 또 다른 음악을 배치해 관객이 정서를 고조해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배려가 좀더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란 거죠. 공연의 의미는 말씀대로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현장에 있는 관객 입장에서는 ‘교육받는다’는 느낌보다, 먼저 몸으로 직관적으로 와 닿는 감동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보거든요. 우리 문예 전통에서도 흥비부(興比賦)라고 해서, 감동과 흥미를 먼저 불러일으키고 나서 깨닫게 하는 것이 기본 순서입니다. 모든 예술이 모두가 그런 순서의 것은 결코 아니지만,그런데 이번 무대는 ‘비’, 즉 교술적인 설명이나 알아야 할 내용을 먼저 강조한 방식이었어요.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아는 만큼 보인다”는 식이죠. 물론 그 방식도 의미있는 교양체험이지만, 예술에서는 오히려 별다른 전제 없이도 전체적으로 와 닿는 직관적 인식체험이 먼저 오는 게 아닌가 합니다. 서양에서도 비슷한 논리가 있고, 우리 동학사상에서도 “먼저 모시고 나서 깨닫는다”라는 순서를 강조합니다. 결국 도달하는 지점은 같더라도, 예술은 묘하게도 ‘알아야만 감동한다’가 아니라, ‘느낌이 먼저 오고, 이미지가 먼저 오고 나중에 알고,깨닫게 되는 것’이 더 순리적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번 공연은 이애주 선생의 의도를 너무 순서적으로, 단계별로 충실히 따르다 보니 그런 직관적 감동이 조금은 약화된 것 같아요. 이번 공연 같은 방식이 튼튼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루해 보이기도 한 이유입니다. 이애주 선생이 던지는 메시지에는 늘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힘이 있잖아요? 이번 공연에서도 그런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만, 다만 치고 들어가는 활력이 지나치게 음전하여 자칫 조금 덜 채워진 느낌을 주기도 하였고, 너무 학구적으로 겸손하게 접근한 듯한 대목에선 웅크린 채로 스스로를 가둔 측면도 있겠다는 거지요.
첫 번째 서울 공연은 헌정의 의미가 뚜렷해 추모의 정이 앞섰고, 그래선지 그때 저는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감동이 다소 덜했습니다. 대신 홍성에서 공연한다는 점, 그리고 홍성 사람들이 대거 관객으로 참여해 진지하면서도 신명 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점이 오히려 감동적인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거의 정장차림으로 장날에라도 온 듯이, 명절날 고향에라도 찾은 듯이 마치 속에서 얼씨구 소리가 터져 나올 듯한, 열정과 흥취에 찬 모습이었어요. 관객들의 눈빛, 어깨짓에서도 그 신명과 열의를 느낄 수 있었어요. 그것이 꼭 공연이 던지는〈법열〉의 체험은 아니었더라도, 공연을 통해 분명히 끌어올려진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만든, 이를테면 기획적인 마인드의 성공사례라 해도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공연행위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적 환경적인 요인만이 이번 공연과 같은 그런 흥취감을 주는 것인가? 작품과 관중 사이를 교통케 하는 매체나 언어는 과연 어떠했는가? 과연 작품 속의 소통 언어와 주고는 어떻게 관주으이 감상태도와 기획적인 분위기와 연결되는 것인가?
그래서 다시 작품 자체를 곰곰이 따져보고, 표현 면에서 덜 된 부분은 무엇이었는지 분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창작자로서 자기 작품을 분석하는 시각으로, 나중에라도 세세히 해명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특히 묻고 싶은 건 공간 활용입니다. 무대 공간을 어떻게 설정했는가, 장면마다 어떻게 조명과 배치를 사용했는가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법당처럼 설정해 종을 여기, 악사를 저기 배치하는 식의 의도는 분명 있었을 텐데, 장면마다 어떻게 에너지의 흐름을 만들고자 했는지 궁금합니다. 첫 공연에서는 공간 이동이 자연스럽고 의미도 부여되어 에너지가 농현처럼 파장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동양 음악의 힘처럼, 춤사위 특히 군무가 허공에 형상을 만들며 퍼져가는 에너지와 울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간이 너무 고정적으로 쓰인 듯합니다. 무대를 평면적으로 펼쳐놓은 느낌이 강했어요. 마치 병풍을 딱 세워둔 듯한 인상이랄까요. 병풍도 잘 쓰면 안쪽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활용할 수 있는데, 이번에는 그런 입체감이 부족했습니다.
윤: 이번에는 무대 조건이 조금 안 좋았어요.
채: 무대 설정 자체를 하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윤: 그렇지는 않았구요. 극장무대 조건이 좋지가 않아 경기아트센터에서 사용했던 것들을 다 활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샤막과 영상 리어스크린 등의 사용이 쉽지 않았습니다. 무대장치와 영상 사용이 원활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극장 기계 자동화 시스템이 충분치 못해서였지요. 그러나 춤꾼들의 열기는 예전보다 뜨거웠어요.
채: 이번 공연의 공간 구성에서 특히 아쉬웠던 점은 군무 장면입니다. 군무가 양적 확대는 있었지만, 세세한 파장이나 치고받는 에너지의 효과가 덜 보였어요. 집단의 힘이 주는 파장은 분명 있었지만, 출렁이는 공간의 확충이 좀 더 강렬하게 드러났으면 했습니다. 또한 무대 공간을 지나치게 고정화한 것도 문제였습니다. 전체 개념이 ‘행렬춤, 행렬의식’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단순히 대열이 나왔다가 퇴장하고, 멈췄다가 다시 들어오는 반복이었습니다. 구조적으로 보면 계절의 흐름처럼 이어져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한 장면이 끝나면 다시 등장해 자리 잡고 또 시작하는 방식이어서 보기에 허술하고 공간의식이 안 보였습니다. 중국 고전춤에서도 ‘작대무’라는 행렬춤 형식이 있습니다. 단순히 줄 맞춰 움직이는 것만이 아니라, 작대무가 힘을 발휘해 웅장한 퍼레이드를 이루기도 하지요. 악기의 이동, 춤꾼들의 다양한 이동이 함께 어우러져야 하는데, 이번 무대에서는 단순한 작대 이동에 그친 느낌이었습니다. 무대 라인을 따라 멈췄다가 퇴장하고, 다시 등장하는 반복이었지요. 8인 군무의 큰 스케일의 작품이라면 더 넓은 시야에서, 큰 품으로 관망할 수 있는 배려가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어쩌면 이런 구성에도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무형식의 형식이라든가 무계획의 계획이라든가 같은.
김: 의도라기보다는, 무대 조건과 예산 문제가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또 무대 구성을 그렇게 세세하게 구현하는 데는 상당한 힘이 필요해서 포기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채: 특히 1장에서 2장으로 넘어갈 때, 공간에 변화를 주며 연출적 무대 구성이 더 활용되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물론 제 희망 사항일 수 있지요. 한성준 선생의 작업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나친 무대화라고 부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저는 오히려 우리춤을 액자무대 공간에 적응시킨 획기적인 한 성과였다고 봅니다. 과거에는 마당, 사랑방, 뜰 앞, 대뜰 등 다양한 공간에서 우리춤이 추어졌습니다. 그러나 서양식 프로시니엄 아치 무대가 들어오면서, 사각 액자무대에 맞추어 우리 춤을 재구성해야 했습니다. 사방을 자유롭게 쓰던 춤을 한쪽 방향으로만 보여줘야 하는 제약이 생긴 것이지요. 그런데 한성준 선생은 이 제약을 오히려 활용했습니다. 뒷모습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금물이지만, 사선으로 보여주거나 옆모습을 활용해 한 면 속에서 다면성을 드러내는 방식을 개발했습니다. 이매방 선생의 〈승무〉와 한성준 선생의 〈승무〉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도 바로 이런 무대 적응방식에서 찾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한성준 선생이나 한영숙 선생의 방식이 우리 춤의 특성을 축소·훼손시킨 것이 아니라, 표현의 강도를 높이고 무대 공간에서도 살아남게 한 탁월한 방식의 하나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아울러 이매방 선생의 “내춤은 사방춤이야”하신 말씀의 무대구성과 활용법도 재삼 논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춤의 특성을 파괴하거나 와해시키는 감성독재의 프로시니엄 무대조건을 결코 방만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 전통춤이 그런 무대에서 힘이 와해되도록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춤이 지닌 에너지와 심성이 제대로 펼쳐지는 새로운 열린 무대공간을 갖는 것은 이미 오래된 전통춤꾼들의 소망이기도 했습니다. 마땅히 그러 해야지요. 동시에 우리춤은 어떤 무대공간에도 에너지를 제대로 발취하는 적응력을 개척하는 것도 우리에게 부여된 중요 과제입니다. 이때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열린 공연 공간으로서의 ‘마당’입니다. 하지만 오늘 여기서 이를 핵심주제로 다룰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춤 모두를 무대용으로 해야만 된다는 얘기도 결코 아닙니다. 방안이나 내뜰에서 추었던 춤을 모두 마당화하자거나 모두 무대화하자는 얘기도 아닙니다.
실제로 어떤 춤은 마당에서 추면 힘이 빠지는 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극장 무대에서 맞게 재구성하면 오히려 힘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한성준 선생은 무대용으로는 무대에 맞게, 마당에서는 마당에 맞게 춤을 달리 구성했을 겁니다. 다양한 공간을 고려하며 개발한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무 같은 장면에서는 공간 활용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번 〈법열곡〉 군무는 다소 단조로웠습니다. 여러 춤꾼이 함께 추는 장면이 공간적으로 더 입체감 있게 짜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훈령무 같은 전통 군무도 그렇지만, 단순히 널널하게 배치하는 대신 공간의 제약 속에서도 에너지를 살리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저는 이애주 선생의 〈달의 노래〉 〈천명〉 같은 공연도 무대 공간 활용의 어려움 때문에 비판할 뻔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프로시니엄 아치 무대가 주는 조건을 무조건 거부하기보다 오히려 어떤 때는 살려내야 할 때도 있다고 봅니다. 마당이라는 개념을 단순히 전통 마당판에만 국한하지 않고, 열린 공간 개념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꽉 막힌 극장 무대도 결국은 또 다른 한 ‘마당’으로 흡수할 수 있습니다. 전통춤이 무대 공간에 들어와 죽지 않게 하려면, 마당의 의미를 확충하고 심화해야 할 뿐만 아니라, 프로시니엄 아치가 가진 무대 공학과 표현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비어 있는 무대 개념, 빈 공간, 열린 공간 개념을 살려내는 것이죠. 그렇게 해야 우리 춤도 입체적으로, 현대 무대에서도 되살아날 수 있습니다.
김: 네. 승무도 평면적인 대형이 아니라, 염불과장에서 기운의 생성과 응축된 힘의 펼침, 타령에서 태극 형상의 움직임과 대형, 성장의 에너지, 굿거리과장에서 삼(셋)으로 풀어지는 핵심과 주변의 교감, 그리고 법고와 당악에서 나비춤과 바라춤이 승무와 함께 만들어내는 총체적인 역동성을 드러내고자 노력했습니다. 고민했던 것보다는 잘 표현되지 못한 한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채: 이런 논의는 다음에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좌담의 후반부는 홍성 지역과 연결됩니다. 홍성에 이애주춤전수관이 설립되고, 앞으로 주요 활동 무대를 그곳에 두겠다는 의견들이 모아져 터를 잡은 셈이지요?
윤: 1997년부터 이애주 선생님께서 홍성에서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이해 11월 '한성준춤 기념예술제'를 홍주문화회관에서 열고 다음 해에 '한성준 춤ㆍ소리 예술제'로 두 번째 막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도 12월 '한성준 춤ㆍ소리예술제'를
홍성환경농업교육관에서 홍성군민들을 모시고 공연을 했지요. 그 당시에 저도 함께 공연을 했습니다. 2004~2005년까지 한성준 춤ㆍ소리 예술제는 이어졌습니다.
채: 그러니까 ‘한성준 춤소리 예술제’가 1997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거군요.
윤: 네. 하지만 2000년대 초반에 중단되었다가, 한성준 선생님 탄생 140주년 기념공연이 홍주문화회관을 비롯해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열렸습니다.
그리고 4년 전 이애주 선생님께서 별세하시고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지난해 7월 '한성준 선생 탄생 150주년 기념 한성준 춤ㆍ소리예술제'를 다시금 이어 나가고자 홍성문화원에서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습니다.
한성준 선생님 작품들로 구성해 여러 단체와 함께 공연을 올렸지요. 이애주한국전통춤회의 학춤, 이광수 선생님의 비나리, 정재만류 정용진팀의 살풀이춤, 강선영 선생님 제자 이순림 선생과 박성호 선생의 태평무, 송재영 명창의 단가, 월륜춤보전회의 한량무 김정학, 윤혜정, 김태훈 선생 외 그리고 마지막 승무까지 다채로운 무대가 유인상 선생의 반주 팀으로 현지에서는 보기 드문 작품이라 하며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올해는 법열곡 앵콜공연으로 한성준 선생님을 기리는 공연을 올렸습니다.
채: 쭉 이어진 게 아니라 1997년에 시작했다가 중단된 거군요.
윤: 이애주 선생님께서 한영숙 선생님의 조부이신 전통춤의 대부 한성준 선생님의 위업을 기리고자 사비로 2만여 평의 임야를 매입해 한성준 선생님의 묘소를 이장하여 모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한성준 춤학교'를 일찍이 개설하였고 이곳 홍성을 '한국전통춤의 성지'로 만들고 세계인을 위한 '춤학교'를 세우고자 설계도까지 준비해 두신 것이 남아있습니다. 선생님의 크신 뜻을 받들어 이애주문화재단과 저희 제자들과 홍성군민 그리고 충청남도와 홍성군이 함께 이루어 나가야 할 과제입니다.
채: 직접 이장을 하셨군요.
윤: 네. 그 과정을 모두 손수 하셨습니다.
김: 당시 묘소는 거의 버려진 상태였고, 산 주인과도 문제가 있어서 빨리 이장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사재를 털어 땅을 구입하고, 지역 인사들과 함께 이장을 추진한 겁니다. 이후 선생님은 그 산 아래에 춤학교를 세우려 했고, 홍성을 춤의 땅으로 만들겠다는 뜻을 갖고 계셨습니다. 세계인이 와서 춤을 배울 수 있는 학교를 세우려 했던 거죠.
채: 결국 20여 년간 터를 닦아 놓은 셈이군요. 당시 기록들이 다 남아 있겠지요?
나중에 그 사실들을 정리해서 소개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김: 이애주 선생님은 일찍부터 한성준 선생님을 자신의 뿌리로 인식하셨습니다. 하지만 무용계에서는 90년대까지도 한성준 선생에 대한 언급이 드물었지요. 선생님은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곧바로 홍성에서 다시 한성준을 기리는 작업을 시작하셨습니다. 한성준 춤소리 예술제도 그 일환이었고, 춤학교를 통해 지역 주민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2024년 한성준 선생 탄생 150주년에 이애주문화재단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한성준 춤소리 예술제’를 다시 부활시킨 겁니다.
채: 홍성군에서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겠군요. 이번 〈법열곡〉 공연 팸플릿을 보니, 충남도지사, 충남도의회 의장, 홍성군수, 홍성군의회 의장, 지역 국회의원 등 주요 인사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글을 주셨더군요. 단순히 이름만 올린 게 아니라 협력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있어 든든한 배경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수회관을 세우기까지 과정에서 역사적 의미나 결정적 계기, 혹은 어려움 같은 게 없지 않았을 테지요? 이애주 선생 사후 후속 작업을 진행하면서, 과천의 근거지를 옮기고 홍성에 모든 것을 집중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윤: 선생의 뜻을 받들어 앞으로 그 일을 계속해야겠다는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채: 뜻을 이어가는 방법은 과천을 유지하면서도 가능했을 텐데, 왜 모두 홍성에 모으게 된 것인지요?
김: 재단에서는 과천을 지키려고 무척 애썼습니다. 과천 땅을 시에 기부해 공공화하려 했지만, 법률적, 행정적 문제로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과천을 지키고 싶어 했지만 재정적인 어려움이 컸습니다.
채: 이애주 춤 하면 먼저 과천이 떠오르지요. 사는 곳도 과천이었고요. 풍수적으로는 홍성과 한맥을 이루는 것도 의미 있지만, 모든 걸 모아놓으면 힘이 결집되면서도 한편으로는 폐쇄적인 구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윤: 저희도 아쉬움이 있습니다. 과천에서 공공화가 이루어졌다면 재단 운영도 더 안정됐을 겁니다. 하지만 과정이 순조롭지 않았고, 다른 예술인들과의 관계도 복잡했습니다. 땅만 내놓는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유품을 안전하게 보존할 공간이 필요했고, 가평에도 이애주춤마당집을 마련했습니다. 홍성은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이기에 홍성에 집중할 필요가 있어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채: 앞으로의 계획은 두고 듣기로 하구요, 홍성이라는 터와 문화적 배경을 어떻게 살릴 지도 고민해야겠군요. 이애주 선생 묘소가 민주열사묘 옆에 자리해 이애주삶의 의미를 강화했던 것처럼, 홍성도 김좌진 장군 등 수많은 애국지사·독립투사들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춤의 성지로 자리매김한다면 더 큰 의미가 생길 겁니다. 또 한 가지, 지금은 한성준 선생에 집중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한영숙 선생에 대한 기림은 소홀해질 수 있습니다. 물론 핏줄을 나눈 제자로서 한성준 선생님과 직접 연결되지만, 한영숙 선생 역시 이애주 선생의 기림 사업의 핵심대상이셨으니 이를 어떻게 이어갈지 고민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한성준 선생께 집중하다 보니, 자칫 한영숙 선생이 멀어질 수 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정재만 선생 제자들과도 관계가 멀어져서는 안 되겠지요. 오히려 이번 기회가 더 가까워질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 하나, 한영숙춤보존회는 있는데 한성준춤보존회는 없나요?
윤: 한성준춤보존회는 없고 한성준춤·소리연구소가 있습니다.
채: 한영숙춤보존회에는 박재희, 정승희, 김숙자, 김매자 선생 같은 원로들이 계시지요. 이분들과도 유대를 강화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이애주 선생과 전통춤의사촌 관계였지만, 지금은 한성준으로 물줄기를 올렸으니 오히려 더 긴밀히 이어질 수 있습니다. 소원하기보다 밀착될 가능성이 더 커졌다고 봅니다.
김: 네. 그래서 저희도 한영숙춤보존회 활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함께 활동하며, 한영숙 선생님으로부터 한 세대 넘어간 제자들이지만 같은 우산 아래 모여 있습니다. 저는 부회장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채: 작년에 ‘한맥의 춤’ 공연도 함께 했지요. 여러 유파가 모여 한 무대를 만든 건 의미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윤: 네. 청주, 천안 등지에서도 한영숙 선생님의 후예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 후예들이 서로 교류하며, 무용사적으로 한영숙 선생님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채: 제가 개인적으로 궁금한 건 단체 이름입니다. 이애주한국전통춤회, 이애주승무보존회, 이애주문화재단이 있는데, 모두 성격이 조금씩 달라 보입니다. 문화재단은 타 장르와 문화사회 등과 교류하는 총괄적 역할을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전통춤회와 승무보존회는 활동내용이나 성격 상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요?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집안, 같은 뿌리 아닙니까?
김: 맞습니다. 이애주승무보존회는 이애주한국전통춤회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채: 그렇다면 왜 굳이 단체를 나눌 필요가 있었을까요?
윤: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명칭을 두고 많이 고민했습니다. 보존회로 갈지, 새로운 이름을 만들지 논의했지요. 하지만 1990년대부터 이어온 한국전통춤회의 역사성을 이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이름을 유지하고, 앞에 ‘이애주’를 붙이기로 했습니다. 또 선생님 활동 시절에도 이애주승무보존회라는 이름을 함께 쓰셨습니다. 승무가 중심이었고, 그 춤을 보존하는 성격도 강했기 때문에 두 이름을 병기하는 게 필요하다고 본 겁니다. 결국, 두 단체는 성격이 다른 게 아니라 하나의 흐름을 두 가지 이름으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채: 또 뭐 다른 사유가 있을까요? 나는 오히려 한국전통춤회 산하에 승무보존회가 따로 있다면, 전통춤회라는 큰 틀 안에서 여러 활동의 구체성을 담은 조직이 영역별로 생겨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승무보존회뿐만 아니라 다른 전통춤보존회나, 전통춤회에서 담당하는 다양한 춤 사업들이 있었으니 그것을 전담하는 팀이 각각 있으면 어떠하냐는 것이지요.
김: 확장된다면 그렇게도 갈 수 있겠다는 이야기를 나눈 바도 있습니다. 이애주한국전통춤회는 이애주 선생님의 춤을 큰 틀에서 다 담고 가는 것이고, 또 보존회의 성격으로 전통춤을 이어가는 것이 필요한데 선생님께서 〈승무〉 보유자셨기에, 보존의 중심은 〈승무〉에 두고 한국전통춤회가 전체를 아우르는 틀로 가자고 결정한 겁니다. 보유 종목인 〈승무〉에 방점을 두는 것도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채: 이제 마무리 삼아 개인적이거나 단체 차원의 당면 과제, 앞으로의 계획이나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윤: 저희는 이제 홍성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서울에서 홍성까지 내려오는 게 힘들다는 분들도 있고, 이수자 중에도 자주 못 오는 분들이 있어요. 그래서 서울에서 한 달에 한두 번이라도 모여서 하고, 또 홍성에서 따로 하자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결국에는 홍성에 확실하게 기반을 잡는 게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서울·경기도 쪽에서 병행하면 분산될 수 있기 때문에, 홍성으로 확실히 내려가기로 결정했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홍성에서 어린이, 일반인, 학생, 군민, 전공자까지 폭넓게 강습하고, 이애주 선생님의 춤, 한성준·한영숙·이애주로 이어지는 맥을 잘 잇는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학술대회나 개인 발표회 같은 무대도 열고, 지역 예술인들과 접촉하며 협력할 예정입니다.
김: 저희는 지금 ‘한성준춤학교’를 계획 중입니다. 단순히 홍성으로 갔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공연도 적극적으로 이어갈 계획이고요. 사실 지금은 아무 기반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라, 지역과 어떻게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을지가 관건입니다. 홍성은 역사적 인물이 많은 도시인데, 그 여섯 분 중 묘소가 실제로 홍성에 있는 분은 한성준 선생님뿐입니다. 하지만 아직 기념관도 없어요. 저희가 이곳에서 활동을 이어가면 춤계 전체에도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기념관 같은 사업을 현실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겁니다. 묘소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교육·공연이 가능한 공간이 조성되길 꿈꾸고 있습니다. 홍성은 독립운동·동학운동 인물도 많고, 생태문화의 발원지라는 점도 문화적으로 큰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에서 춤을 오래 해 오신 분들과도 관계를 맺어 서로 도와가며 기반을 다질 계획입니다.
윤: 전수관도 마련돼 있어서 지역 예술인들에게도 공간을 개방하려고 합니다. 다른 예술인들이 공간 부족으로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저희가 장소를 나눠 쓰도록 할 생각이에요. 9월부터는 어린이·일반인·전공자를 대상으로 주중 강습을 풀로 진행할 예정이고, 주말에는 저희 연습 시간을 확보했습니다. 앞으로 이 문화 사업을 어떻게 잘 펼쳐 나가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채: 홍성에 발 디딤을 했으니 힘은 전보다 막강해졌습니다. 다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데 치중하면, 내림에 해당하는 부분이 약화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겝니다. 여러 유파를 포용하며 더 튼튼하게 가야 하는데, 한쪽으로만 쏠릴 위험이 있다는 거죠. 예를 들어 한성준 선생의 춤을 기린다면 〈승무〉에만 국한되지 말고 〈학춤〉 〈태평무〉 〈살풀이춤〉 등 다양한 작품도 함께 다뤄야 합니다. 한성준선생의 것으로 확인된 것만도 60여 작품이 있습니다. 이름만 전해지지 실체는 거의 밝혀지지 않았으니, 이를 찾아내야 할 때입니다. 어쩌면 한성준 선생의 한 살매를 발굴, 탐사하는 것이 제 일차 과제로 떠오릅니다. 그분의 삶과 예술은 우리 근현대문화예술사의 첫 출발지점이기도 하기에 그렇습니다. 특히 한성준 선생의 동학 활동은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도 않았습니다. 스무 살 전후로 동학군 활동을 했다는 기록이 일부 있고, 이후 협률사·원각사 무대에서도 알게 모게 동학활동을 했지요. 이 동학사상이 그분의 춤 세계에 어떻게 발현됐는지를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직업춤을 비롯한 다양한 제목에서 ‘만인 평등’의 동학사상이 드러난다고 보거든요. 〈승무〉의 기조에도 그 사상이 깔려 있다고 봅니다.
김: 네, 특히 〈태평무〉에도 일월성신과 만민평등사상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가 해 나가야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채: 맞습니다. 오늘 평소 못 했던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반갑고 뜻 깊었습니다. 긴 시간 말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