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계소식
한국춤비평가협회(회장 이순열)는 춤비평 문화를 진작하고 춤의 융성 발전을 촉진하기 위하여 2013년 3월 춤비평 등용문인 춤비평 신인상을 제정, 공모 및 심사 과정을 거쳐 2013년 12월 12일 다음과 같이 입선작 및 수상자를 선정했다.
2013 한국 춤비평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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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방희망(37세) |
가작으로 입선한 방희망 춤비평 신인상 수상자에게는 상금 50만원이 수여되며, 이후 비평 활동의 다양한 기회를 제공받는다.
■ 심사평
작품론 ‘화려한 만찬 속에 사라진 굿의 본질’과 시론 ‘전통은 현재진행형이다’ 2편의 글에서 응모자는 춤 작품과 춤계 흐름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접근하며 패기(覇氣)어린 문체로 소화해내어 신인으로서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가운데 작품론은 국립무용단의 2013년 가을 공연 신작 <신들의 만찬>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해당 공연의 주제 의도를 다각적으로 살피고 그에 내재된 오류를 짚어내었다. 응모자는 <신들의 만찬>이 지향한 춤 장르의 융복합을 중심으로 전통 춤유산과 굿의 원형을 근거 있게 되살리면서 춤 작품으로 연출해내어야 한다는 시각을 피력하였다.
시론은 한국 근현대 춤 레퍼토리들을 올린 세 가지 공연 춤판들을 대상으로 해 전통춤을 기반으로 새로운 면모의 창작을 활성화하는데 요구되는 바를 폭넓게 진단하였다. 여기서 응모자는 춤판들이 관객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는 당위성 아래 무엇보다 과거 레퍼토리에 충실한 복원이 이뤄져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환기하였다.
춤비평신인상 가작으로 선정된 응모작은 춤 현장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평가 행위를 펼쳤다. 진지함을 담은 두 편의 글은 해당 비평 논제를 보다 유기적으로 엮었어야 했다는 점에서 향후 응모자의 분발을 기대한다.
■ 수상자 방희망 소감
오롯이 글 쓰는 시간을 벌기 위해 추석에 혼자 자취방에서 열병을 앓으며 견딜 때, 오주석 님의 책에서 읽은 <주역>의 ‘대인호변 기문병야(大人虎變 其文炳也)’란 구절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가을철 털갈이하는 호랑이가 되려고 그리 아팠나 봅니다.
그리고 뜻은 늘 높은 데 두되 자세는 바싹 낮추도록 엄하게 도를 가르친 옛 스승들이 생각납니다. 어린 마음에 혹독한 훈련 속 이유모를 호통 듣고 눈물도 많이 났으나 지금은 그저 고맙습니다. 세상을 관통하는 이치를 보도록 눈을 뜨게 해주신 스승 윤창열님, 삶이란 맥락 없이는 진정한 예술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확신하게 해주신 지휘자 구자범 선생님 두 분께 이 소식이 작은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머뭇거리는 제 손을 잡아끌어 글을 쓰게 독려해주신 김영란 선생님, 무용으론 전공도 경력도 없는 절 지켜보겠다는 관대한 기다림을 선사해주신 평론가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애써 키운 큰딸이 늘 바람과 엇나가는 길을 택하는 걸 노심초사하며 지켜보는 부모님께 깊은 사랑전합니다.
■ <2013 춤비평 신인상> 응모작- 작품론
화려한 만찬 속에 사라진 굿의 본질
국립무용단의 <신들의 만찬>을 보고
국립무용단이 2013-2014 국립레퍼토리시즌의 첫 번째 작품으로 신작 <신들의 만찬>을 올린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던 기대감과 걱정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너도 나도 아무렇지 않게 쓰고는 있지만 명확한 소통을 위해서는 서로의 이해범위가 어디까지인지부터 확인하고 들어가야 하는 ‘신(神)들’이라는 표현과 거기에 결부된 ‘만찬(晩餐)’이라는 단어.
일단 그것이 먹고 마시고 뛰노는 디오니소스적 축제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것은 진오기굿을 소재로 하여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뤄보고자 했다는 보도 내용으로 확인된다. 그렇더라도, 그간 전국의 민속무용단들이 지역의 아픈 역사들을 소재 삼아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들을 달래는 위령제 형태의 무용극들을 꾸준히 만들어왔음을 생각할 때 또 그 방향에서의 상투성은 어떻게 피해갈 것인지가 궁금하다.
그래서일까. 작년 6월에 부임해 취임 1년을 넘긴 윤성주 예술감독은 창단 61년차의 국립무용단의 이번 시즌의 모토 ‘한국 춤의 동시대성’에 대한 해법을 일단 ‘다문화와의 혼합’으로 가닥 잡은 듯하다. 작년 8월 한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1)를 보면 그는 원형 보존을 위한 전통춤 외 창작의 영역에선 현대무용, 발레, 한국무용 등 세분화된 장르의 구분 없이 두루 섭렵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고 무용공연 자체가 전 예술 장르를 두루 아울러 만들어지므로 융복합이라는 말이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이 원론적인 출발은, 분석에 분석을 거듭하여 기어코 종류를 갈라내고 마는 서구식 분류 체계가 예술을 본능적으로 감상하고 쉽게 즐기려는 관객을 피로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눈높이를 낮추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관객에게 여러 예술가들의 치열한 고민의 결과물을 대표로서 책임지고 내놓아야 하는 예술감독은 연출의 명확한 상(想)을 갖고 그 목적에 합당하는 요소들로 구성하고 집합시켜 주제 의식으로 수렴시켜야 한다. 내용과 형식은 합당한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대명제, 정리(定理)에 위배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원본이 무엇이라는 명확한 인식이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해지는 이종교배는 그저 실험삼아 했다하기엔 예측하기 어려운 결과물을 내놓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위험을 안고 있다. 실제로 지금 문화 전반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분열과 융합의 속도는 너무 빠르고, 과잉 생산된 것들은 중간점검을 꼼꼼히 할 새도 없이 유성처럼 금세 나타났다 사라지고 말기도 하는데, 그리하여 자라나는 세대가 중심에서 한참 멀어진 상태에서 변두리만을 관찰하게 되고 그것이 원본인 줄 잘못 알게 되는 일들이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문화적 잡종들이 범람하고 있는 시대에 과연 우리는 원본들의 장점을 잘 살려 간직한 작품을 만들고 또 만나는 행운을 얼마나 누릴 수 있을까?
안무가는 기존 우리가 가져왔던 저승사자와 명부시왕에 대한 이미지가 무섭고 어두운 것이었다고 전제하고, 그 이미지를 비틀어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상’을 살고 있으며 희노애락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우리가 죽음에 대해 가지고 있는 두려움들이 해결될 수 있을 거라 기대한 것 같다. 그러나 그 시도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제대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첫째로, 무속에서 오랜 시간 다른 종교와 융합되면서 구축해 온 다차원적인 신의 체계에서 일부만을 건드리고는 그것으로써 전체를 확대 해석하려고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진오기굿은 우리 굿의 다양한 형태 중에서 죽음을 다루는 특수한 굿일 뿐이다. 농경문화에 바탕을 두어 온 전통 사회에서 추수감사제 내지 농경제 성격을 갖는 천신굿이 기본적으로 중요의례로 다듬어져 왔고, 이 천신굿 기본 구조 안에 망자의 넋을 위한 거리들이 덧붙여 짜여 있으니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진오기에만 국한하여 무와 죽음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을 논하면 잘못된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조흥윤이 지적한 바 있다2). 여러 굿에서 신명이라는 신명은 다 청하여 노는 거리들이 독립된 채로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천지신명’이라는 관념 속에서 그 모두를 유연하게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그 천지신명 중에서 지하세계를 담당하는 저승사자와 명부시왕 만을 유독 희화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전설의 고향> 같은 드라마에서 많이 접하여 그들을 친근하게 여기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영험한 무당이라도 이승에 미련이 남아 붙어있는 영혼을 정리하여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기에 며칠에 걸쳐 굿을 준비하고 망자의 가족들과 함께 밤을 새우기도 하며 시간을 보낼 터이다. 이렇게 기나긴 굿의 과정 속에 무대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몇 장면만을 뚝뚝 떼어 연결해야 한다면, 원래 한 판 크게 벌려 갈등을 조정하고 화해하고자 수고로움을 감내했던 그 정성까지 생략되어선 안 될 것이다. 무당이 온갖 재주로 공을 들여 불러내는 사자거리에서 저승사자의 캐릭터만 추출해 내고는 다시 그것을 귀엽고 친근하고 익살스런 모습으로 바꾸어버리면, 인간이 노력하지 않아도 알아서 인간 사이로 먼저 파고드는 그 모습을 보고 누가 무당이 신과 대화하기 위해 꾸미는 그 많은 의식들의 본래 가치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화려하게 버슬을 늘어뜨린 의상을 입은 저승사자는 단지 망자의 영혼을 데려가기 위해 첫 무대에 등장했다는 용도로만 소비되었을 뿐, 불러내기는 쉬웠어도 자연스럽게 들어가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10신의 캐릭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원래는 저승의 열 대왕 각각 한 분을 지날 때마다 일주일이 걸린다고들 한다. 그중 일곱 번째 대왕을 지날 때 망자의 영혼이 갈 곳이 결정되므로 그때 좋은 결정을 받으라고 후손이 온갖 정성을 올리는 것이 49재인 것이다. 불교의 윤회관에 따라 영혼이 계속하여 돌고 돈다면, 열 분의 대왕을 차례대로 지나는 절차도 영혼의 성장을 위한 하나의 통과의례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긍정하는 자체가 긴 우주의 흐름 안에서 삶도 죽음도 지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통과의례를 주관하는 분을 존중하는 의미로, 무속신앙에서는 시왕전에 잘 차린 상을 대접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통과하는 관문으로서 명부시왕의 의미를 지워버리고 숫자만 세어 10신으로 뭉뚱그렸다. 10신은 갓의 모양과 얼굴분장의 다름만으로 구별할 수 있을 뿐, 각자 맡은 바에 대한 의미는 증발되었다. 명부시왕이 심판의 기능을 가진다는 것은 그저 허공에 대고 각자 맡은 한 문장씩의 대사를 읊는다는 것인데, 이를테면 “윤리, 도덕 없어!” 이런 식이다. 처음 등장했을 때 유쾌한 인도풍의 춤을 추며 ‘우린 그렇게 무겁고 딱딱한 존재들이 아니야’라고 일러주는 듯 잠깐의 유희만을 보여주고 나서는, 10신들은 그저 무대 상층부에 갇혀 점잖게 앉아 내려다보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어 동적인 캐릭터 창출에도 결국 실패했다.
자, 이렇게 되고 보면 팜플렛 도처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신들의 모습’이라는 말은 무엇을 표현하기 위함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인간적이라는 말이 인간만큼 결함을 보인다는 말인지, 인간처럼 희노애락을 가졌다는 것인지 제작하는 입장에서도 스스로 뱉은 말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후자의 경우라고 하기엔 저승사자나 10신이나 표출하는 감정의 스펙트럼이 극히 한정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안타깝게도 정작 그렇게 강조되고 있는 인간 세상의 중심인 아들과, 미련을 버리고 떠나가야 하는 가슴 절절한 이야기의 주인공인 죽은 어머니 역할도 중심을 차지하지 못하고 소외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망자의 영혼이 억울하여 풀어낼 말이 하도 많다고 해서 마련하는 진오기굿인데, 망자는 소품처럼 수동적으로 이동할 뿐이다. 떠돌아다니는 영혼이 저승으로 가기 싫다 저항하고 그를 얼러 달래는 과정에서 묵혀두었던 갖은 감정의 찌꺼기들을 몽땅 토해 놓으면 무당과 후손이 그것을 다 들어주고 정화하면서 비로소 떠날 마음이 들어 굿은 성립하는데, 망자는 처음부터 순리를 따르기로 작정한 양 저승사자가 시키는 대로 눕고 일어나 걸어가기만 한다. 아들 역 송설이 입은 의상은 배냇저고리 같아 몸만 컸지 어머니에게 있어선 영원히 자라지 않는 어린 자식인데, 어머니는 인연을 상징하는 탯줄 같은 동아줄을 퍽 쉽게 놓아버린다.
이렇듯 쉽게 이승과 단절하고 저승과 어울리는 관계인데, 굳이 떠들썩하게 한 판을 벌려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유도 모른 채 세상에 홀로 남겨진 두려움으로 몸부림치고 바닥을 구르며 아픔을 표현하는 자식만, 냉정하게 감정이 탈취된 이 무용극에서 거의 유일하게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 따지고 보면 이별의 고통은 모체와 결별하는 탄생의 순간부터 시작되고 학습되는데, 눈에 보이는 것만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또 망각하는 인간에게는 언젠가 반드시 찾아오게 되는 죽음을 통한 이별만이 절대적인 슬픔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아이러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른 역할들에게 충분히 배분되지 않은 춤의 중심은 왕무녀를 비롯한 박수무당, 무당의 군무에게로 집중되었는데 그래서인지 이것만큼은 윤성주 예술감독이 추구하는 경쾌하고 속도감 있는 춤을 만끽할 수 있는 무대였다. KB 하늘극장의 원형무대를 마치 윷판처럼 둥그렇게 또 X자 모양으로 엇갈리게 효과적으로 장악하여 왕무녀 장현수를 필두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무는 젊은 춤꾼들의 폭발하는 에너지로 변신하고 있는 국립무용단의 현재를 잘 보여주었다. 하지만, 젊음은 춤에 연민과 위로까지 담아내지는 못하였다. 때로는 이 건장하고 어여쁜 무용수들이 이렇게 막힘없이 춤을 추어내는 자신 안에 도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표정에서도 그러했고 박수무당이 추어내는 신칼대신무가 너무나 박력만 넘쳐서이기도 했다.
박수무당 역의 조재혁은 이동안이 양식화한 신칼대신무를 응용하여 추었다. 서울·경기지방의 신칼은 부정한 것을 끊어내고 귀신을 쫓아낸다는 목적이 강해 칼이 더 크고 매듭은 손잡이 끝부분에 장식적으로 달려있었다. 그리고 호남지방에서는 넋을 건지는 의미의 지전이 신칼을 겸해 더 많이 쓰였던 듯하다3). 그러던 것을 이동안이 손잡이4) 양 끝에 한지다발을 매닮으로써 넋을 건지고 길을 닦아내는 용도의 무구(舞具)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그런데 그동안 여성무용수들이 신칼대신무를 추어 오면서 이 무구(舞具)는 갈수록 화려해지고 비대해졌다.
지전은 너무 풍성하게 달려있는 것보다 듬성듬성 하더라도 춤과 함께 히드라의 촉수처럼 한 가닥 한 가닥 살아 나풀거릴 때 머리칼을 쭈뼛 서게 하는 감동을 준다. 저것들이 다 무당이 보이지 않는 원혼들을 끄잡아 당기는 손길들이겠거니! 그러나 지금처럼 과하게 부풀어 오른 지전다발은 덩어리져 움직이므로 사뿐한 맛이 없다. 이번에 조재혁이 든 신칼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의 훤칠한 체격조건과 격렬한 움직임에 맞추어 보다 길고 반듯하게 만들어진 그것은 춤꾼의 종횡무진한 동작을 좇아가기에 바빠 무아지경으로 몰아가는 빠르고 격한 장단 속에서 똑같이 미친 듯 뛰노는 역할만 충실히 수행했을 뿐 떠도는 혼을 붙잡지도 못했고 어루만지듯 위로하지도 못했다.
진오기굿을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짚어 보고 싶었다는 의욕은 좋았으나 안무가의 시점이 어디 놓여있었는지 정확하게 짚지 못한 것이 메시지의 전달에 실패하고 감동을 주지 못한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익히 잘 알고 있는 소재라 해도 무용극으로서 구조를 탄탄하게 잡아내는데 어려움이 있을 텐데, 굿판에서 주춧돌 역할을 해온 신명의 체계에 대한 이해 자체를 흔들어 버린 탓이다. 오랜 시간을 거쳐 상징성을 획득한 것들의 가치를 단지 새로운 관점의 질문을 던져 보겠다는 이유로 비틀어버림으로써 스스로를 원점에 세워 놓았으면서도, 기나긴 굿을 압축하면서 그 얼개는 거의 그대로 가져와 완전히 새롭게 출발하지도 못했다는 것이 모순이 되어 연출은 길을 잃고 방황하였다고 본다. 그 간극을 메우려 작품의 구조와 안무 외적인 부분의 실험에 노력을 기울였으나 다른 분야에서조차도 혼란은 가중된 듯 하다. 그 방황은 가장 먼저 음악에서 드러난다.
잠시 화제를 돌려보자. 임사(臨死)체험에 대한 수많은 서술들을 보면 인간이 육신의 껍데기를 벗어나면 생각하는 즉시 원하는 장소로 이동하고, 그 속도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고 한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확실히 3차원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인간의 육신은 세상에 대한 이해와 행동에 한계를 지우는 굴레라고 볼 수도 있다. 파동으로 따지면, 그 육신 때문에 현저하게 느린 진동수를 가진 존재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춤은 인간이 맥박수와 진동수를 높여가며 본래의 한계 없는 자아, 영혼을 되찾아가는 시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허공을 장악하는 스포츠와 춤을 보며 감동을 받는 것은 쉽게 극복되지 않는 중력의 절대적 영향을, 무수한 노력을 통해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마는 인간 의지의 궁극의 자유로움을 확인하기 때문일 것이다.
맥박수를 빠르게 높여주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음악이다. 인체는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으로써 내장된 타악기를 가진 셈이다. 내장된 타악기와 외부의 음악이 공명하기 시작하면서 춤은 터져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음악이 사용되었느냐에 따라 춤의 정체성도 달라지게 될 것이다.
이번 <신들의 만찬>의 음악 감독 박재록은 인도 악기 시타르 연주자로서 한국음악앙상블 『바람곶』의 연주자로 활동해왔고 작년 연말에는 일렉트로닉과 국악의 결합을 표방한 그룹 『앰비언트 월드』의 대표로서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다. 그가 이번 자신의 음악작업에 대해 팜플렛에서 소개한 내용을 살펴보면, 많은 부분 『푸리』와 『바람곶』의 음악들을 기반으로 하여 전개해 나갔다고 한다. 『푸리』의 음반
전통장단보다 몇 배나 더 분절되어 복잡하고 정교해진 리듬을 바탕으로 한 푸리와 바람곶의 음악은 콘서트를 위한 연주용 음악으로 보면 세련된 느낌을 준다. 그야말로 유유히 흘러가는 물살처럼 걸릴 것 없는 흐름을 즐기면 된다. 하지만 무용극을 위한 음악으로 재구성된다면, 전체적으로 유기성을 갖고 이어지면서도 장면의 전환에 따라 맺고 끊음이 확실했으면 좋겠다. 가장 납득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10신의 등장시 사용된 곡 ‘나침반’인데, 여기서는 인도 악기 시타르의 소리가 인상을 지배한다.
물론 원일은 그간 바람곶의 연주회를 통해 인도음악이 우리 음악과 가장 가깝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5). 또 전인평 중앙대 명예교수도 인도 악기와 장단, 우리의 그것과의 연관성에 대해 오랜 시간 연구하여 밝혀오기도 했다. 하지만 시타르는 소리를 내는 금속현의 왕왕 거리는 잔향이 중첩되므로 명주실로 현을 이룬 우리의 거문고나 가야금보다 음색이 도드라지며 숨길 수가 없다. 마치 인도음식의 향미가 진하고 강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같이 섞여있을 때는 우리 악기보다는 인도 악기의 음색이 전반적인 인상을 지배하고 결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장면의 안무는 당연히 누구라도 전형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인도민속풍의 춤- 양팔저울처럼 나란히 올려 빙글빙글 돌리는 손동작, 한쪽 다리를 세워 발가락을 찍고 허리를 비트는 등의 동작으로 짝을 맞추게 되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백번 양보하여 이왕 명부시왕의 개념을 허물었으니 힌두식 다신론으로 치환하려 한 거라고 본다 해도 우리 굿의 맥락 속에 갑자기 튀어나온 인도풍의 음악은 집중력을 해치는 데 한 몫 하였다.
10신들을 그저 ‘엉뚱하다’고 인지하게 된 의상 담당자는 미니멀하게 표현한다면서 무용수들의 몸 윤곽선을 과장되게 잡아 캐릭터의 부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이 장면에 대해 치열한 토론으로 그 상(象)부터 바로잡았으면 좋겠다.
과잉되었던 음악과 의상에 비해 무대와 조명은 더 많은 가능성을 담았으면 한다. 신들의 영역으로 구획된 무대 뒤편 상층부의 계단식 기둥들은 망자 소환 장면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곳에서 ‘문’처럼 한 번 쓰이고는, 10신들이 뛰노는 계단에 그쳤다. ‘문’은 외부 세계와 내부를 연결하기도 하고 차단하기도 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많은 문 중에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일주문(一株門) 같은 문은 어떨까. 보통 따로 세워져 있지만 원래는 불이문(不二門)과 같은 개념이다6). 무엇이 둘이 아니며 하나라는 뜻일까. 수많은 해답이 가능하겠지만 결국 원래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했던 삶과 죽음의 주제에도 연계되지 않겠는가. 그 장치를 문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시왕의 관문의 역할도 보탤 수 있으리라고 본다.
위에서 조명을 떨어뜨려 빛으로써 바둑판을 만든 장면은 하늘극장의 뚜껑이 열렸던 장면과 더불어 공간의 수직적인 깊이를 느끼게 해준 좋은 그림이었다. 사실 바둑판이라기 보단 인생에서 수없이 시험에 들어야만 하는 갈림길이 나타났다 지워졌다 하며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게 해 허망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지만, 앞에서 이끌어주는 무당과 따라가는 아들의 모습은 오누이처럼 정겨웠다.
너무 날 세워 비판만 한 것 같지만, 모든 새로운 시도는 누구도 나아가지 않은 길을 연다는 점에서 결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예술감독은 인사말에서 ‘전통의 공감’과 ‘전통의 실험’이라는 두 목표가 어느 정도 실현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밝혔지만 그것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우리 전통춤 영역에서 너무나 익숙해 온 굿이라는 소재에 대해 새롭게 고치는 것을 쉽게 보았거나 아니면 이미 서구화된 눈으로 재단하였거나 그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윤성주 단장이 여러 무대에서 최현의 <비상>을 활달하고 담대한 멋으로 추어 온 저력을 기억하고 기대하고 있다.
국립무용단은 형형색색의 다채로운 요리를 거하게 차려 내놓는 것으로 ‘만찬’을 해석했다. 70여분의 공연 시간 동안 눈과 귀는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이미지들을 받아내느라 그 맛을 음미할 수도 없었고, 강렬한 자극을 주는 향신료에 얼얼할 뿐이다. 마지막에 그려낸 일상의 모습은 우리 전체의 모습이라 하기엔 너무나 세련된 도시의 풍경 아닌가? 아무리 삶과 죽음이 순환하는 자연의 법칙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최선을 다하는 하루가 모여서 만들어진다. 그 하루의 노동에 지친 우리가 정말 대접받고 싶은 만찬은 비싸지 않은 요리라도 부담스럽지 않게 차려 아, 우리가 이리 각박하게 살았구나 싶게 절로 여유를 터주는 소박한 밥상, 마음이 통하는 벗들과 조촐하게 나눌 수 있는 따끈한 밥상일 것이다. 내년 2월에 올려지는 재공연에서는 신들도 망자도 춤꾼도 관객들도 다 두루 대접받고 위로받는 한 상이 차려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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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성주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대중과의 접점 찾을 것”/ 2012. 8. 31 뉴스토마토
2) 조흥윤 <서울 진오기굿>(열화당, 1993) p.89
3) 한국무속학회 <무구의 이해>(민속원,2011), 국립문화재연구소 <인간과 신령을 잇는 상징-무구>(민속원,2005) 참조
4) ‘신칼대신무’ 공연의 해설들을 보면 넋대라고 보는 의견도 있고 신칼이라 보는 의견도 있다.
5) 2011년 1월 6일 방영된 EBS 스페이스 공감 바람곶 편 녹화 당시 그는 이 <신들의 만찬>공연에도 삽입된 ‘나침반’이라는 곡을 설명하면서, 인도 음악은 우리나라 음악과 가장 닮아 있는 음악으로 아이러니 하게도 서로 인접한 한중일 세 나라의 음악은 각기 다른 성향을 보이는 것에 반해 멀리 떨어져 있는 인도와 우리나라의 음악이 비슷한 것이 신기한 점이라고 언급하였다고 한다. 방영분에도 잠시 나오지만 보다 자세한 내용이 언급된 출처: http://rearviewmirror.co.kr/70097117378
6) 강원도 고성의 금강산 건봉사의 일주문은 ‘불이문’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어 그것이 원래 하나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 <2013 춤비평 신인상 > 응모작- 시론
전통은 현재진행형이다
《춤의 귀환》과 《제 3회 한국명작무 대제전》,
《오래된 미래, 내포제 전통가무악의 재발견》을 중심으로
우리 춤판을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한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새내기 감상자의 입장에서 ‘전통’에 대해, 과연 지금 우리에게 우리가 보존하고 계승해야 할 전통이란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야 할지 논한다는 것은 무척 어렵고, 주제를 넘어서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이 분야에 몸담아온 학자들과 춤꾼들 사이에서도 끊임없는 연구와 토론, 공연을 통한 실행을 통해서도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이고, 또 같은 논의는 우리 춤과 가장 많이 관련되어 있는 국악계에서도 많이 이루어져 온 것으로 안다. 하지만 여유가 닿는 한 춤판의 현장을 찾으려고 노력해온 평범한 생활인의 짧은 감상 여정 속에서 의미 있게 다가왔던 선구자들의 꿈과 용기, 또 다른 선구자가 되고자 하는 수많은 춤꾼들의 의지와 열정, 그러나 한편으로 감추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고 마는 춤판의 그늘 등에 대한 이야기를 가감 없이 하고 싶다. 그러한 피드백이 ‘지금·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로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무엇보다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관객’의 존재는 춤이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중요한 ‘충분조건’이기에 부족한 능력을 털어 올해 관람한 공연 중에 특히 중요하다고 느껴졌던 세 번의 행사를 중심으로 쓰고자 한다. 그 세 번의 행사는 근현대춤연구소의 《춤의 귀환》과 한국전통문화연구원의 《제 3회 한국명작무 대제전》, 그리고 심정순 탄생 140 주년기념으로 연낙재가 주최한 《내포제 전통가무악의 재발견》이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러한 우리 춤판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던 선가(禪家)의 이야기 하나, 혜능(慧能)이 스승 오조(五祖) 홍인대사로부터 선불교의 종맥을 잇는 육조가 되던 순간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시작할까 한다.
그는 글자 하나 모르던 나무꾼이었고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얻기 위해 도량에 들어간 후 8개월여도 오직 행자승으로서 생활했을 뿐이었다. 어느 날 스승 홍인대사가 각자의 깨달음을 글로 표현해보라며 과제를 내 주자 그간 절의 최고 엘리트로서 존경받던 신수스님은 몸과 마음 닦기를 부지런히 하여 늘 깨끗이 하겠다며 수행자로서의 의지를 보인 게송을 내어 놓았고, 군중은 과연 그가 법통을 물려 받을만한 유일한 제자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혜능은 그 단계를 넘어서서 애초에 형적이 없는 몸과 마음이니 어느 곳에 티끌이 일어나겠는가 하고 응수하였다. 홍인대사는 혜능의 큰 그릇을 알아보았으나 그가 공개적으로 선택받을 경우 받게 될 시기와 질투, 음해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깊은 밤 몰래 불러 유언을 남기고 떠나보낸다. 홍인대사가 입적하고 대대로 내려온 신표(信標)인 달마대사의 의발(衣鉢) 역시 혜능과 함께 사라졌다는 것을 안 절 사람들은 그를 잡으러 뛰어나가는데, 결국 혜명이라는 스님이 혜능을 붙잡게 된다. 달마대사의 의발을 내놓으라는 혜명에게, 혜능은 그것이 그저 물건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아무런 아쉬움 없이 내주었다. 깨달음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자기만의 것이고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통해 표출되게 마련이니, ‘이 신표를 가진 자가 나의 법을 정통으로 계승한 자이다’라는 과거의 약속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술이든 예술이든 혹은 학문이든, 개인에게 있어서 궁극적으로 인생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어떤 산봉우리에 오르는 여러 갈래 길 중의 하나를 닦는 행위임을 생각해볼 때, 선가(禪家)에서 내려오는 이 이야기는 지금 우리 춤판에서도 충분히 생각해 볼 거리이다.
이 혜능대사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 불철주야 노력하더라도 따라잡을 수 없는 어떤 근기(根器)를 가진 사람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은 평범한 우리에겐 애달프지만 사실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조차도 절대로 스승 없이 혼자서는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없기에 우리는 스승을 찾아 나서야만 한다. 이름난 스승일수록 스스로를 제자 되겠다고 모여드는 사람은 많지만, 그 중에도 스승의 참뜻을 온전히 이해한 제자는 소수이다. 대다수는 수십 년 노력으로 얻기 힘든 예술의 결정체- 깨달음을 ‘신표’얻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든다. 참된 제자 그마저도 어떤 순간이 되면 스승의 품을 떠나 과감히 배워온 것을 버려야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가 정말로 스승들이 갈구해왔던 불변의 아름다움을 드디어 찾아냈고 확실히 얻었다는 것, 예맥(藝脈)의 계승자라는 것은 무대 위 짤막한 시간 속에서 오롯이 증명할 수 있을 뿐이다.
무형문화재 이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온갖 잡음들 그 민감한 이야기를 여기에 에둘러 빗대었지만, 원론적인 이야기이긴 하나 춤꾼은 살아있음을 춤으로써 증명한다. 나는 그 증거들을 5월 7일, 9-10일에 걸쳐 치러진 근현대춤연구소의 《춤의 귀환》 행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근현대춤연구소는 ‘한국 춤의 역사성이 기록과 춤으로 보전되어야 하는 위기의 시기에, 한국 춤의 전통과 창작에 20여 년 이상의 전공실기와 이론을 지닌 전문성 있는 인재들이 모여 한국 춤을 곧추세우는데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시대의 정신과 미래를 아우르는 춤 전문 단체로서 이 사회에 공헌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라고 한다. 근현대예술가 관련 자료와 공연콘텐츠 개발에 주력하고 있으며 그 교류를 통해 창작활동이 활성화되는데 큰 목적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간의 활동내역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는데, 정동극장과 공동주최로 2010년엔 송범, 2011년엔 최현 추모의 밤을 개최하였고 동일한 예술가를 테마로 《거장의 정동나들이》라는 제목의 공연을 올린 바 있다.
5월 7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에 앞서 열린 학술포럼에선 최정임 이사의 기조발제 ‘근현대춤의 전승과 과제’를 시작으로 이병옥 용인대 명예교수, 유인화 경향신문 논설위원, 성기숙 한예종 교수의 발표와 토론이 진행되었다. 신무용가들을 위한 헌정무대로 기획된 《춤의 귀환》 5월 9일 공연에서는 김문숙류 ‘대궐’, 송범류 ‘황혼’, 조택원류 ‘가사호접’, 김백봉류 ‘부채춤’, 한순옥류 ‘검무’, 은방초류 ‘살풀이’, 이동안류 ‘신칼대신무’, 황무봉류 ‘산조’, 박지홍류 ‘달구벌 덧배기춤’이 무대에 올랐고, 5월 10일의 공연에서는 최승희류 ‘옥적곡’, 조택원류 ‘가사호접’, 최현류 ‘비상’, 한순옥류 ‘검무’, 김진걸류 ‘내 마음의 흐름’, 이동안류 ‘신칼대신무’, 박금슬류 ‘살풀이’, 황무봉류 ‘산조’, 박지홍류 ‘달구벌 덧배기춤’이 올려졌다.
이 공연의 연출을 맡은 이대영은 제의 형식을 갖자, 이 춤들을 한 시간 반 동안 잘 어울리는 드라마로 풀어낼 수 있도록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엮어야겠다, 헌정무대인 만큼 우리 춤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무대에 올려 이 현장을 그대로 기억하고 전수할 수 있도록 하자,는 데 핵심을 두고 구상했다고 밝혔다. 그 뜻은 춤 무대 앞뒤로 흥미로운 장면 몇 가지를 덧붙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격적인 춤 무대가 시작되기 전 유인촌 씨를 무대에 세워 축문을 읽도록 하여 이 공연이 선배 무용가들을 추억하고 헌정하는 자리일 뿐만 아니라 춤을 관장하는 신명에게 잘 보살피고 길을 열어달라는 발원을 올리는 의식이기도 하다는 뜻을 묵직하게 효과적으로 전달하였다. 자칫하면 딱딱해질 수 있는 주제에 대한 무게감은 천진난만하고 발랄한 예원학교 학생 세 명이 무대에 올라 춤에 대한 꿈을 나누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부드럽게 풀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각 무대마다 꿈틀거리는 율동미를 간직한 강병인의 캘리그라피로 ‘춤’이라는 글자가 다양한 버전으로 세로로 길게 걸려, 찰나에 나타났다 사라지고 마는 춤사위의 잔상들을 시각화하여 그 여운을 음미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미 무형문화재 승무, 태평무, 살풀이춤 등을 지정받은 한성준의 작품은 배제하고 대신 그에게 잠깐 전통춤을 배운 것을 독특한 창작무로 승화시킨 조택원과 최승희의 것을 올렸고, 한성준과 동시대에 전통춤의 대가였으나 아직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경기 지역의 이동안과 대구 지역의 박지홍의 작품을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형문화재 선정과 이수를 둘러싼 무용인들의 깊은 고민과 선택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이 공연에서 눈에 띄었던 순서를 몇 가지 꼽으면 먼저 김충한 정동극장 예술감독이 추어보인 조택원의 ‘가사호접’을 들 수 있겠다. 조택원이 1933년1) 제 1회 작품발표회에 올렸던 이 작품의 원 제목은 ‘승무의 인상’이었는데 시인 정지용이 ‘가사호접(袈裟胡蝶)’으로 바꾸어 지어주었다는 일화가 알려져 있다. 그런데 교과서에 실린 ‘승무’의 시인 조지훈이 바로 그 정지용의 추천으로 등단하였다는 것이 공교롭게도 연결되어 흥미롭다. 조지훈은 이 시를 1939년 12월호 《문장》지에 발표하였다.
한성준이 승무를 정리하여 무대예술화 했을 당시에 사찰에서는 ‘승무’라는 춤이 없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실상 승무란 민간에서 기방이나 재인들에 의해 추어지고 발전된 춤인 것이다. 월전 장우성이 ‘승무도’(1937)라는 그림을 그렸을 때도 모델로 여승이 아닌 권번의 기생을 썼다고 술회했으니 조지훈 역시 실제 승려가 추는 ‘승무’를 보았을 가능성은 희박한 셈이다. 그런데도 시의 이미지는 워낙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한성준류나 이동안류, 김숙자류의 승무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으레 시에서 전달하였던 번뇌와 그 승화를 기대하기 마련인데, 막상 그 승무들에서는 춤꾼의 개성적인 자아는 탈색된 채 의식에 대한 경건함과 초월에의 의지만이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 번뇌를 읽은 것은 시인의 눈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상을 통해 자신의 번뇌를 빗대고자 하는 시인의 자아가 더 큰 셈인데, 같은 맥락에서 조택원의 ‘가사호접’을 읽을 수 있다고 본다. 조택원의 ‘가사호접’에는 억누르는 시대 환경 속에서 독립된 예술가로서 자아를 자유분방하게 표출하고 싶었던 신무용가의 고민과 욕구가 엿보인다. 정련된 의식의 일원이 되는 것보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 그대로를 전달하여 관객으로부터도 같은 반응을 이끌어내고자 자아의 표현에 우선순위를 두었던 입장은 조지훈이 시어를 선택한 방식과 상통한다. 그러하기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조택원의 ‘가사호접’이 무형문화재로서의 승무보다 시와 함께 관객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혹여나 조지훈이 조택원의 ‘가사호접’을 보고 그 시를 쓴 것은 아니었을지 질문해봄직도 한 일이다.
김충한은 잘 단련된 근육의 완급조절을 통해 터져 나올 듯한 격정, 주저하고 망설이지만 결국 절제로 나아가는 그 일련의 변화들을 의미심장하게 표현하였다. 춤의 전승자는 남성 위주인데 춤꾼에 여성이 많다보니 곱고 예쁜 색깔로만 변해가는 춤판에서 남성미를 보탤 수 있는 춤꾼의 존재는 소중하다. 국수호가 ‘가사호접’을 올릴 때 옛날 축음기에서 나는 것처럼 불분명한 음정의 녹음 반주를 고수하는 것과 달리 세련되고 깔끔한 반주를 사용하였는데, 그것과는 별개의 매력으로 확실히 현대적이고 건강한 분위기가 있다. 다시 말해 번뇌가 더 이상 번뇌이지만은 않게 결론지어질 것 같은 긍정의 여유로움이 반주에서부터 묻어난다.
한편 최정임이 춘 최승희의 ‘옥적곡’이나 서영님이 춘 은방초의 ‘살풀이’를 보면, 최승희나 은방초와 같은 선배 예술가들은 우리 춤의 전통을 조선시대에 국한시키지 않고 더 먼 원류를 찾아 거슬러 올라갔음을 알 수 있다. 의상의 실루엣들은 고구려 고분벽화 속에서 걸어 나온 듯 하고, 춤사위에는 인간 세계를 넘어 저 멀리 천상의 신선 세계의 풍류를 담아낸 듯한 멋이 배어 나온다. 삼국시대 우리 땅에 유(儒)·불(佛)·도(道)가 다 들어와 있었고 신라시대에는 화랑으로 대표되는 풍류도(風流道)가 있었음을 생각할 때2), 이러한 원류 찾기는 우리의 전통에 대한 논의를 보다 풍부하게 해 줄 것이다. 실제로 드라마나 영화 영역에서 사극은 이미 고증 불가능한 범위까지의 역사로 상상력을 덧붙여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현상을 보면, 최승희나 은방초 같은 무용가들의 감각이 앞서 있었음을 깨닫게 한다.
새로운 형식을 고민하면서 의상에 변화를 꾀하고자 한 경우로는 고(古)김진걸을 빼놓을 수 없는데, 그는 여러 스승에게 배운 다양한 춤사위들-승무·탈춤·무속춤-을 함축하여 만들고 또 새로운 산조를 시도하고 싶어 의상을 비로도로 만들고 버선 대신 발레슈즈를 신고 추었다고 했다3). 《춤의 귀환》 포럼 토론 시간에 유인화 논설위원이 이런 선구자들의 노력을 추억하며 그 정신을 칭송했고, 4월 13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열린 《한국춤 백년화》 무대에서 김진걸의 ‘내 마음의 흐름’을 추었던 제자 김숙자는 저고리 고름 가장자리에 촘촘히 박힌 큐빅 장식을 두고 스승님이 손수 만들어주신 것이라고 애틋한 그리움을 전하기도 했는데 모두 다 아름다운 모습들이다. 다만, 김진걸이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발레 <백조의 호수>에서 왕족들이 비로도(벨벳) 의상을 입은 것처럼 한국춤의 격조와 품위를 강조하기 위해 비로도를 사용했다는 의도와는 별개로, 같은 작품을 여성 무용수들이 출 때 그처럼 벨벳으로 된 저고리와 치마를 착용할 경우에는 춤선이 잘 살아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벨벳이라는 천은 밀도가 높고 무거운 편에 속하는 데다 빛을 머금는 성질이 있어서 특히나 치마를 착용하여 하체의 움직임이 감춰지는 경우에는 무용수가 배경에 파묻히고 만다. 김진걸이 예로 든 경우도 그렇지만, 서구의 무대의상에서도 주로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적은 토르소 부분이나 망토 등에 사용되는 이유는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조명이나 무대 뒤 배경을 섬세하게 고려하더라도 무엇보다 춤을 추는 사람의 동작이 뚜렷하게 돋보이도록 벨벳 의상에 대해서는 따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보인다.
이렇듯 한 무대에서 우리 춤의 과거·현재·미래를 한꺼번에 살피고 긍정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게 한 《춤의 귀환》 행사는, 현장에서 한창 활약하고 있는 중견 춤꾼들과 그들이 협업을 이루어내고 있는 다른 영역의 예술가들의 건강한 의지와 춤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올 상반기의 가장 의미 있는 행사였다고 본다. 전통춤이 담보하고 있는 정신세계가 너무나 깊고, 특히나 ‘구전심수(口傳心授)’의 방식을 고집한다 하여 가르치는 입장이나 배우는 입장이나 소통의 어려움을 겪을 때, 자아의 표현을 위주로 하여 전통춤의 요소를 받아들였던 신무용가들의 발자취는 주눅들어 있는 우리 춤 전공자들에게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편, 한국전통문화연구원 인남순 원장이 세 해째 의욕적으로 개최하고 있는 《한국명작무 대제전》은 그가 같은 길을 걸어온 동반자들에게 제대로 된 무대를 마련해 보리라는 보은의 뜻으로 시작한 것이다. 올해는 6월 1일과 2일 이틀에 걸쳐 국립극장 KB하늘극장에서 각기 다른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3부 공연으로 올려졌다. 지난 제1회, 제 2회 공연에 비해서 프로그램 수도 줄고 그에 따라 6부, 4부 공연이 3부로 축소된 점은 있지만, 별다른 특징이 없이 묶였던 이전 공연과 달리 이번에는 1부에서 3부로 갈수록 전통춤에서 신무용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경향으로 묶어 조금씩 질서를 잡아나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부에서는 궁중무용 ‘보상무’, 김천흥류 ‘살풀이’, 김수악류 ‘진주교방굿거리춤’, 김숙자류의 ‘부정놀이춤’, 김보남류 ‘수건춤’, 박금슬류 ‘장고춤’, 김진홍의 ‘동래한량무’, 한영숙류 ‘태평춤’이 올려졌고, 2부에서는 이매방류 ‘살풀이’, 김말애 안무의 ‘한국의 인상’, 김은이 안무의 ‘산조춤’, 지희영 안무의 ‘영서살풀이춤’, 김취홍류 ‘12체장고춤’, 채상묵 안무의 ‘한량무’, 한명옥이 재구성한 ‘소고춤’, 강선영 안무의 ‘무당춤’이 올려졌다. 마지막 3부에서는 최현류 ‘비상’, 배명균류 ‘혼령’, 은방초류 ‘장고춤’, 김진걸류 ‘내 마음의 흐름’, 송범 안무의 ‘참회’, 황무봉 안무의 ‘산조춤’, 조택원류 ‘가사호접’, 국수호 안무의 ‘북의 대합주’ 등이 올려졌다. 전년도 공연들의 프로그램과 되도록 중복되지 않는 것으로 구성하여 다양성을 꾀한 기획이 돋보인다.
염려스러운 점은, 그간 무대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 보였을 지방의 춤들까지도 끌어 모아 방대한 박물관 전시실처럼 꾸미려고 한 기획이 단지 모으는 데서 끝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한정된 대관 시간 동안 24개의 무대가 올려 지느라 진행은 숨 가빠 보였다. 참여하러 온 춤꾼들도 무대에 미처 적응되지 못한 채 순서 맞춰 올라왔다 내려가는 듯한 기색이 역력하였고, 이 행사의 취지에 충분히 사전교감을 나누는 작업은 생략되었던 양 전체적인 꾸밈새가 어색하였다. 인남순 원장 개인의 의욕과 열정이 앞서 나가 꾸려지는 행사라면, 주최하는 입장에서나 참여하는 입장에서나 불만과 피로가 누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공연의 질적인 측면에서도, 전통춤판의 원로 스승들이 지적하고 있고 관객들도 실망하여 외면하는 이유들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우리 춤은 더 이상 고졸한 멋으로 승부를 보려 하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꾸밈들이 덧대어져 원래 우리만이 가진 특장점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사라져 버렸다. 우리 조상들과 과거 예인들의 고달픈 생애가 점철되어 이루어져 온 정서이므로 반복적으로 표출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우리 문화의 중요한 특질인 흥과 신명을 가리고 이것만이 전부라고 이미지를 규정짓고 마는 ‘한(恨)’의 정서는 춤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유행처럼 반주에 들어가는 구음에서 잘 나타난다. 구음 또는 단가의 삽입은 춤꾼이 본질을 풀어내기도 전에 관객으로 하여금 상투적인 감상을 갖도록 성급하게 강요하는 것 같고, 실제로도 우리 춤을 보고 난 많은 사람들이 ‘구슬프고 청승맞은 살풀이’라는 한 종류로 인식하게 만든다고 하면 지나친 주장일까? ‘적당한 감춤’이 미학인 한국 전통춤에서 춤꾼들이 왜 반주에 구음을 넣어 구체적으로 춤을 ‘설명’(그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하려고 들면서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해치고 있을까? 구음과 단가의 삽입은 현대무용에서 무용수들이 직접 입을 열어 대사를 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극히 제한적으로 쓰여야만 효과가 있기에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과잉은 의상에서도 드러난다. 무대에서 아름다워 보이고 싶은 욕심까지 말릴 수는 없지만, 춤꾼의 힘의 배분과 그로 인한 장삼의 체공 시간의 합(合)이 생명인 승무 계열의 춤에서 보들보들한 실크가 호방한 기개를 다 죽여 버리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반지르르한 진주빛 광택은 춤추는 주인공의 신분에 대한 설정을 인지하기엔 기름진 느낌이다. 지나친 자수의 화려한 의상도 시선을 춤꾼의 얼굴에 머물게 하는 게 아니라 무늬에만 주목시킨다. 늘어지고 휘감기고 밟히는 고급 옷감을 동작으로써 통제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빼 버리길 권한다. 결국 모든 것이 무대에서 돋보이기 위함이라면, 춤을 더 잘 추어보이고 춤꾼의 재산인 아름다운 몸과 다양한 표정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방향으로 선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이 공연에서만 드러난 문제가 아니다. 단지 한 자리에 모아놨기에 더 극명하게 보였을 뿐이니 우리 춤을 사랑하고자 하는 관객의 고언으로 받아들여주기 바란다.
무대에 올려진 춤들 중에 미학적으로나 민속학적으로나 채 검증되지 않은 작품들도 섞여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것은 이렇게 더 많은 작품을 선보이고 다루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걸러지고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라고 보고 이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겠다. 쉽지 않은 큰 행사를 3년째 지속하고 있는 인남순 선생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내년과 그 이후의 공연도 기대한다.
춤 자료관인 연낙재(硏駱齋)는 충남 서산 출신 국악명인 심정순 탄생 140주년을 맞아 학술세미나와 공연을 기획하였다. 우리 춤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전무했던 필자로서는 이 행사를 통해 연낙재의 존재를 처음 알았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지면광고와 포스터를 보고 찾아간 9월 6일의 학술세미나 <근현대 전통예인 심정순가(家)의 공연예술사적 업적 재조명>에서 국악계의 원로 선생님들의 발표와 회고담 등을 통해, 역사 속에 묻힐 뻔한 명인의 생애를 재조명하고 복원하려는 그간의 보이지 않는 무수한 노력을 감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9월 8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올려진 <오래된 미래, 내포제 전통가무악의 재발견>은 그 연장선상에서 감동을 배가하는 공연이었다. 심화영 선생의 외손녀로서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 27호 승무 전수조교인 이애리 씨의 승무가 포함된 서산 공연을 관람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차후에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9월 8일의 공연에 올려진 춤 작품만을 거론하자면 예능보유자 이흥구가 복원한 ‘학춤’, 한영숙류의 ‘태평무’,‘살풀이춤’, 조택원의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가사호접’ 등이었는데 이것은 심정순 일가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예술적 동지였던 한성준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한성준이 궁중학무가 사라지는 것을 애석히 여겨 직접 학의 생태를 관찰하여 만들었다는 ‘학춤’은 복원과 보존에 중점을 둔 무형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사물에게서 인간으로서 지켜나가야 할 덕목과 현세적인 욕구를 함께 투영해서 보고 그림이나 글의 소재로 즐겨 삼았던 선조들은, 학을 고고한 선비와도 같이 여겼다. 고려와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집에서 평상시에 착용했던 의복인 ‘학창의(鶴氅衣)’가 학이 날개를 편 듯 희고 넓은 소매 가장자리를 흑색으로 꾸민 것이었던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래전부터 학춤을 만들었을 때도, 단순히 동물의 동작을 흉내내어 따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선비들이 되고자 하는 이상형-선학(仙鶴)이나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는 표현들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을 구현하는 한 방법으로 택했을 거라 본다. 현재의 학춤을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대한 탈을 착용한 상태에서 추는 춤에 그 의미를 다 담아내기는 어려우리라 여겨지는데, 그러므로 이 학춤이나 동래학춤과는 별개로 새로운 창작춤이 탄생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영숙류 태평무는 개인적으로 강선영류 태평무보다 더 알려져야 한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어 확고하게 군림해온 강선영류 태평무에 감히 딴지를 거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중간에 상궁이 들어와 옷을 받아들고 나가는 그 설정은 아무리 보아도 서구의 무대양식화된 춤 어법이다. 이를테면 발레 <백조의 호수>나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의 고전 형식 그랑 빠 드 되에서 중간에 보이는 것처럼, 무용수가 무대 위 군무들까지 관객으로 두고 자신의 춤을 뽐낼 때 무대를 반 바퀴 정도 돌아 시작점을 자리 잡는 것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그러므로 원래 우리 춤의 양식에 해당되어 보이지 않는 요소가 첨가된 채로 완성된 강선영류 태평무가 전통춤으로서 우위를 가지고 평가되어 온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조택원의 ‘신노심불로’는 이동안의 ‘신노심불로’보다 ‘불로’의 정서가 더 짙게 배어나와 유쾌하다. 신체의 노쇠함을 보여주는 마임 등을 덜어내었고, 환상 속에서의 춤에는 인생의 각 고비를 두루 거쳐 두려울 것이 없는 노년의 지혜가 거침없이 활달한 춤사위로 표현된다. 조택원이 초연했을 당시에도 외국에서 유명세를 얻어 타이티 태생의 흑인무용가 장 레옹 디스티네가 아프리카 판으로 개작하여 주목받았다고 하는데, 나이 들어서도 출 수 있고 또 그랬을 때 더 깊은 멋이 배어나오는 우리 춤의 특질과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우리 사회의 현실이 함께 맞물리면 더 많은 공감대를 이끌어 내고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춤이라 생각한다. 무대에서 더욱 자주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우리 춤이 어렵다고들 하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서들을 가장 순수한 몸짓으로 표현하는 것이 춤이므로 이해하는데 한계는 있을 수 없다. 다만, 시대가 많이 변하고 주류를 이루고 있는 문화의 색깔이 크게 바뀌었으므로 알려나가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관점을 조금 달리 하여, 전통을 ‘옛 것’이라고 놓는 공식에서 벗어나보면 어떨까. 인류의 기나긴 춤의 역사 속에서 현재의 우리 눈앞에 드러나 전통춤이라 이름하고 있는 것들도 기껏해야 100여년의 시간을 지나왔을 뿐이다. 우리는 이제 막 전통을 만들어가기 시작하였으므로 얼마 드러나지 않은 소수의 작품들을 다루면서 원형보존이니 파괴니 한다면 어불성설일 것이다.
스포츠나 서양 클래식 음악에서 세계인과 경쟁하면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한국인의 저력은 같을진대, 더군다나 그 토양에서 더 많은 양분을 흡수하고 있는 전통문화 영역의 종사자들이 먼저 입을 모아 더 이상은 과거의 기라성 같은 명인들이 나오기 힘들다고 선언해버린다면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전통춤을 기반으로 하여 더 많은 창작춤이 쏟아져 나와야 하며, 더 많이 관객에게 다가가야 한다.
현재 많은 춤꾼들의 의상이나 음악에 대한 과한 ‘덧붙임’이 춤꾼들이 직접 관객을 만나 말로써 설명할 기회가 적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춤에 대한 설명은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공연 중간중간 우리 춤의 멋을 차근차근 풀어줄 줄 아는 배려 깊은 해설자의 설명으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혹은 발레 쪽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시도하고 또 저변인구확대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는 ‘해설이 있는’ 시리즈를 참조해 봄직도 하다. 춤을 직접 배울 기회가 없이 감상 만으로라도 즐기고픈 관객의 입장에서 기본적인 지식, 예를 들어 장단과 춤사위의 어울림 그 조합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등등의 지식은 매우 궁금하지만 달리 해결할 도리가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동작을 끊어서 시범을 보여주고 그에 맞는 음악을 들려주는 식의 해설도 필요하지만 우리 춤의 바탕에 깔려있는 상징들, 정신 문화와 관련된 것들에도 다른 학문분야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많은 공을 들여 알려나가야 한다.
《춤의 귀환》과 《제 3회 한국명작무 대제전》, 《오래된 미래, 내포제 전통가무악의 재발견》 등은 현재 전통춤의 영역에서 애쓰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느낄 수 있는 귀한 자리였다. 물론 각각의 공연에서 불가피하게 노출된 아쉬운 점들도 있지만, 위에서도 서술했듯 우리는 이제 막 전통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하였으므로 부족한 점은 개선하여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춤을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기고, 일상에서 풍부한 이야깃거리로 삼을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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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댄스포럼에서 발간한 <춤의 선구자 조택원> 연보에는 이 작품의 첫 발표가 1933년으로 되어 있는데 포털 사이트의 무용사 사전에는 1935년으로 되어 있어 확인 후 수정이 요청된다.
2) 이에 대한 논의는 국문학, 역사학, 동양철학 등 다양한 범주에서 이루어져 왔는데 전통음악과의 관련성을 강조한 한흥섭 <우리 음악의 멋, 풍류도>(책세상,2003)에 정리되어 있다. 그는 선(仙)이 최치원이 말하는 풍류 개념의 바탕을 이룬다는 가능성으로 ‘바탕 풍류도’라고 구분하기도 했다.
3) <춤의 귀환> 포럼 자료집 p.17, 유인화 <춤의 근대화를 일군 전환기 무용가들>에서 인용
문의_한국춤비평가협회 (02-3674-2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