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계소식
이번 역시 621쪽에 이르는 두툼한 책이다. 책을 펼치면 막이 다시금 오르며 지난 20년 간 한국의 춤문화를 수놓았던 기라성 같은 춤꾼들이 그들의 춤을 재현한다. 2011년 11월, 출간된 춤비평집 『한국 춤문화의 변동과 사회 (1990-2011)』(현대미학사)의 저자 김태원의 한국의 춤에 대한 애정과 사명의식은 거의 신앙에 가깝다.
책에는 저자가 한국의 춤예술과 춤사회와 대해 쓴 비평과 논설이 빼곡히 들어 있다. 힘 있는 글은 가히 장강대필(長杠大筆)이다. 저자는 1985년 춤비평을 시작하여 1991년 첫 저서인 『춤문화론』을 상재한 이래 『후기현대춤의 미학과 동향』『예술춤 시대의 진동』『우리 시대의 춤의식과 운동』등, 이번 저서까지 합쳐 모두 11권의 춤비평집을 냈다. 지난 20여 년 간 2년에 한번 꼴로 책을 낸 셈이다.
한국 현대문학의 금자탑이라 일컬어지는 어느 대하소설을 쓴 여류소설가의 경우, 26년에 이르는 집필기간 끝에 5부로 된 21권을 출간했다. 그리곤 세상은 그녀의 공적에, 2개의 기념문학공원과 1개의 문학관을 만들어 답했다. 3개의 대하소설을 써, 모두 합쳐 32권을 세상에 내어놓은 또 다른 소설가에게는 위대한 작가라는 칭송과 함께 생전에 2개의 문학관이 헌정되었다.
김태원의 춤비평집이 보통 500-1,000쪽의 분량이고, 비평집이기에 작은 활자를 사용했음을 감안하면, 그의 책 한 권은 소설 2-3권의 분량에 해당한다. 첫 집필부터 계산하면 26년이란 긴 세월 동안, 소설로 치면 거의 30권에 해당하는 대하소설을 쓴 셈이다. 여류소설가의 대하소설 21권에 600명의 인물이 등장한다지만 그의 11권 책에도 수백 명의 각기 개성이 다른 무용가들이 향연을 펼친다. 창의력과 상상력으로 얼개를 짜야 하는 소설의 창작이 어렵다고 하지만 좋은 평문의 얼개를 짜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춤비평은 더욱 어렵다. 어느 나라에나 창작문학가와 여타의 비평가는 많아도 유독 춤비평가만은 희소함이 그런 사실을 입증한다.
어느 작가는 “글을 쓰는 것은 두뇌노동이지만 한권의 정리된 책을 완성하는 것은 육체노동”이라고 했다. 저자가 보고 경험한 한국의 춤예술에 대해 느끼고 생각한 바를 모조리 글월로 옮겨 활자화한 저력은 춤에 대한 애정과 사명감만 있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저자 특유의 능력과 부지런함, 내공과 뚝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번 저서는 1990-2011년 시기, 한국의 춤문화와 춤사회를 다룬다. ‘현대 예술춤(Contemporary Dance)’에 관한 한 주변(Around)인 우리는 중심(In)과 시차(時差)가 있을 수밖에 없다. 미국의 경우는 마사 그레이엄으로부터 독립해 나온 머스 커닝험이 활발한 실험을 시도하고, 저드슨 그룹(Judson Group)의 춤 운동이 일어나는 1960년대를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작으로 치지만, 김태원은 한국 춤문화의 경우, 1990년까지를 한국적 모더니즘의 1차적 완성기라 보며, 그 이후 현재까지를 포스트 모더니즘의 실제적 이행기로 해석한다. 1990년 이후 춤예술과 문화현상의 다변화가 이루어지면서 그 변화의 양과 폭이 쉽게 예측할 수 없을 만큼 확산·심화되는 것을 ‘포스트 모더니즘 현상’으로 본 것이다.
그러한 예들로 춤과 극이 혼합된 극무용, 상황무용의 전개, 현대무용에서 즉흥의 본격적 도입, 춤의 기법과 장르 상호간의 절충과 융합, 신체적 퍼포먼스성의 증가, 재즈와 힙합 등 대중무용의 융기, 극장기술의 발전에 따른 스펙터클성의 부각, 전통무용의 재부상과 한국창작춤의 컨템포리화 등을 든다. 그러면서 저자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대한 반항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긍정적 측면인 다양성의 추구는 우리 문화의 총체성을 회복시켜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춤예술에 있어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대두는 단절이 아니라, 계속되는 흐름이라고 본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한국 춤예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시기’라고 생각하는 1985-1989년의 춤문화를 다룬 『한국 춤문화사의 현대적 전환』(2010년 간행)의 후편이다. 두 책에 의하면 한국의 춤예술계는 1985년부터 2011년까지 질풍노도의 시기를 달려온 것처럼 느껴진다.
이 시기, 수많은 무용가들이 제각각 무대에 올라 각자 나름의 실험성 짙은 작품을 선보인다. 현대무용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향해 가쁜 숨을 몰아쉬고, 한국무용은 창작춤이라는 새 장르를 굳히면서 그 둘은 다시 컨템포러리 댄스라는 큰 도가니 속에 어우러진다. 발레 역시 현대발레의 흐름을 좇고, 전통무용은 전통무용대로 자리매김하며 지위를 굳힌다. 1990년 이후 우리 춤의 이와 같은 일련의 흐름은 이 저서의 축약본이라 할 수 있는 서문 「포스트모던적 변화와 춤제도의 불안」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런 과정에 춤예술의 외연에 있어서도 실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의식 있는 독립 안무가 층의 대두, 춤의 직업화, 국제화, 지방화와 지역춤의 위상 상승, 레퍼토리제의 정착, 소극장 춤미학의 심화가 이루어진 것을 두드러진 변화로 꼽는다.
『한국 춤문화의 변동과 사회』는 춤비평집이지만 책 안에는 춤비평 이외에 저자가 1990년 이후 현재까지 춤을 둘러싼 여러 문화현상과 춤문화 정책, 제도, 예술정책 전반에 대해 무용인들, 춤 관계자들, 인접문화 분야의 지성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가한 비판과 그가 제시한 대안 및 방향이 들어 있다.
저자의 주장들은 그때그때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마치 예언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2010년대인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놀랍게도 거의 모두가 현실화되거나 실현되었다. 우리 공연예술문화의 선진국 수준으로의 도약을 위한 예술감독제, 지방 공연 공간의 확충과 기술 시스템 및 인력의 확보, 종합예술자료실의 설치와 무용제 후의 종합보고서 작성 등이 그 예이다. 더 구체적인 예로 그가 강조했던 전통무용 전용공연장의 필요성은 오늘날 국립국악원의 예악당과 우면당, 서울 중구 한옥마을 내 남산국악당, 강남 삼성동 소재의 코우스(KOUS) 설립으로 현실화 되었다.
책은 ‘1부 포스트모던의 확산과 춤문화의 변화’, ‘2부 제도 안의 춤과 그 바깥의 춤문화’, ‘3부 참조 기사 및 저자 저서에 대한 서평’으로 나누어지는데, 3부에선 한국의 춤문화를 위해 중요하거나 역사성이 있는 자료라고 여겨지는 다른 춤비평가들의 글과 한국 춤단체들의 외국공연에 대한 현지 평자들의 글, 서울과 지방의 일간지 기자들이 쓴 기사, 무용인들의 좌담, 심포지엄, 저자의 기존 춤비평집들에 대한 서평들까지 수록해 후일을 위해 가치 있는 증언과 기록물이 되게 했다. 또 320쪽과 321쪽 사이 쪽수를 매기지 않은 16면에 걸쳐 춤 관련 중요한 저서와 잡지들, 논문집들, 학술대회 발표문집들, 프로그램의 표지, 포스터, 사진 자료들을 원색화보로 실어, 책은 지난 20년을 증언하는 한국 춤문화의 실질적인 역사서 역할을 한다.
저자 스스로 자신을 도시에서만 나고 자란 시티보이(City Boy)라고 칭하고, 그의 관심이 오늘날의 현대춤에 치중하고 있지만, 그가 전통춤에 대해 쓴 리뷰를 보면 우리 전통춤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철학과 미학, 나아가 춤사위의 디테일한 면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책에는 질박한 가운데 독자에게 감동과 읽는 보람을 주는 유려한 글들이 적잖이 끼어 있다. 강선영 선생을 쓴 「마지막 남은 우리춤의 큰 집」, 조사(弔詞)인 「초개(草芥) 김영태 선생님을 생각하며」, 진옥섭의 저서 『노름마치』(전2권)에 대한 서평인 「전통 속의 인물, 그 예술적 인생에 대한 글쓰기」 등이 그 예이다.
이미 일제강점기에 춤비평을 쓴 이도 있고, 광복 이후 선배 평론가로 그와 비슷한 권수의 비평집을 낸 이도 있으며, 또 현재 각자 개성적인 춤비평 활동을 하는 이들이 물론 있다. 하지만 기존의 인상비평이나 관념적 비평을 벗어나 학문적 춤이론에 입각하여 또한 주변 공연예술과 아우르는 미학적 관점에서 분석적인 춤비평을 펼친 이는 그가 아마 처음일지도 모른다. 공연예술 비평가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춤 공연 현장을 많이 지킨 현장비평가이며, 춤을 위해 오랜 세월 전국으로 발품을 팔았다. 한국춤비평가협회의 각자 자기의 독특한 역할을 하는 돌올한 회원들 가운데에서도 유독 비평활동에 가장 충실한 비평가이다.
그는 1991년 3월, 부인의 명의로 ‘현대미학사’라는 출판사를 설립·운영하면서 자신의 춤비평집 이외에 본인의 이름으로 엮거나 공동 편집한 책이 7권이며, 본인이 직접 책을 선정, 편집·감수하여 현대 미학이론, 현대문화이론, 연극, 뮤지컬, 춤, 영화, 미술에 관한 책들을 합쳐 260여권 냈다. 그런 수의 책이란 제목만 읽기에도 벅찬 방대한 양이다. 그중에는 우리 문화계의 발전을 위해 기여한 책들이 상당수 있다.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한 본격 문화이론서의 영역을 국내에서 선구적으로 개척했고, 연극·무용·영화이론과 그 관련한 비평의 영역에서 중요한 해외의 현대적 고전들을 다수 거의 처음으로 국내에 번역·소개시켰다. 이러한 점은 언젠가는 반드시 조명을 받아야 할 문화적 사실이다.
또 그는 1994년 12월, 연극, 춤, 영화의 심층적인 평을 다루는 『공연과 리뷰』라는 계간지를 창간하여 편집인으로서 직접 기획하면서, 지금까지 17년간 76권(2012년 3월 현재)을 발간, 한국의 공연예술과 영화예술을 지적으로 성장시키는 일을 도모했다. 비평가들을 독려하고 마음껏 평론을 펼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어 공연예술비평이 독자적인 영역의 문학임을 보여준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 원고를 청탁함에 있어 내용과 분량을 지정하지 않고 필자에게 자유재량을 주는 특유의 방식이 여러 필자들로 하여금 좋은 평문들을 집필케 했다. 그간 여러 명의 새로운 비평가들과 필자를 배출시키고 숨겨져 있던 공연예술에 관한 귀중한 자료들을 발굴한 것도 지나칠 수 없는 공(功)이다. 또한 잡지사와 그가 속해 있는 단체의 이름으로 많은 상을 제정, 수여하여 현장의 예술가들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했다.
저자는 1970년대 초, 경기고를 졸업하고는 영화의 미학과 그 제작에 매우 강한 호기심과 충동감을 느껴 한때 하길종 감독의 시나리오 작업을 돕기도 했고, 몇 편의 시나리오도 썼다. 이후 20대 중반에는 연극에 빠져 당시 신촌에 ‘76극장’이라는 소극장을 개관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몇 편의 연극 연출도 했다. 그 후,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대학과 대학원에 가서는 영화이론과 비평을 공부했다. 그런 그의 관심이 마지막에 무용으로 옮겨져 춤비평을 하게 되면서, 결국 무용과 교수로 부산 동아대학교에서 13년 간 봉직한다. 소극장공연 미학에 깊이 매료되어 1988년 ‘제1회 서울소극장춤페스티벌’, 이어 서울의 공간사랑에서 전문위원으로 ‘안무와 즉흥 시리즈(1989-90)’를 기획한 이래 20년 넘게 현재까지도 춤전문 소극장(강남의 춤전용 M극장) 중심의 전문적 춤기획과 자문 활동을 하고 있다.
세상은 사명감을 갖고 미친 사람들에 의해 발전한다. 그가 인생편력 후반부에 춤과 인연을 맺은 것이 한국의 춤문화와 춤사회에는 복이 되었다. 미국 현대무용의 발전과 마사 그레이엄의 도약이 비평가 존 마틴이 있어 가능했듯, 1985년 이후 한국의 춤예술이 지금과 같은 수준에 이른 것은, 상당 부분, 김태원이 있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한국의 현존하는 무용가든, 앞으로 나올 무용가든,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 저자의 11권의 춤비평집은 다음과 같다. 9권까지는 ‘평론집’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나머지 2권에는 ‘춤비평집’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모든 책 뒤에 ‘인명’, ‘단체명’, ‘주제어 중심’의 색인 작업이 되어 있어 무용사전의 역할을 한다.
1)『춤문화론』(1991), 2)『문화와 춤의 전망』(1992), 3)『후기현대춤의 미학과 동향』(1992), 4)『예술춤시대의 탐색』(1995), 5)『예술춤시대의 진동』(1997), 6)『예술춤의 중심과 주변』(2001), 7)『예술춤의 위기와 전망』(2004), 8)『우리시대의 춤의식과 운동』(2007), 9)『우리시대의 춤의식과 운동 2』(2011), 10)『한국춤문화사의 현대적 전환』(2010), 11)『한국 춤문화의 변동과 사회』(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