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공동체의 춤 신명천지 마당굿 4
〈춤의 세계사〉 서문, 춤생성론의 물음 · 춤생성미학적 접근
채희완_춤미학자

1. 무엇이 춤을 추게 하는가: 춤에 향한 생성론적 물음

무엇이 춤을 추게 하는가. 살아있음입니다.

살아있음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명입니다.

민족음악학자이자 춤인류학자인 쿠르트 작스(Curt Sachs 1881.6.29. 베를린 생 ~ 1959.2.5. 뉴욕 졸)는 그의 책 〈춤의 세계사〉(1937년, 한글번역판 풀빛출판사 1983년; 개정판 지식공작소, 2024) 서문에서 춤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춤은 노동 동기와 관련이 없는 율동적 동작(일상동작의 율동적인 유형화)”이고, “한 단계 고양된 삶일 따름(life on a higher level simply).”

그리고 그보다 앞서 그노시스교 잠언 한 말씀을 책 서문의 첫머리에 인용하고 있습니다. “춤추지 않고서야 어찌 삶의 길을 알리요(Whosoever danceth not, knoweth not the way of life).”

우리는 이를 가지고 고무진신(鼓舞盡神)하여 춤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여 봅니다.

춤은 살아가는 동작을 율동적으로 펼쳐낸 것이고, 이로써 우리는 삶을 제대로 신명나게 사는 삶의 방도를 찾습니다. 춤은 삶의 근원자리에서 비롯된 생명의 활동상(活動相)이어서, ‘삶의 길을 밝혀 이끌어주는 선도자’라는 것입니다.

“율동적인 동작은 인간생활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거의 모든 엑스타시 분위기의 매개체이며 창조자다.”(〈춤의 세계사〉28쪽)

“엑스타시에 빠지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모든 춤의 동작을 장단에 맞춰 행하는데 있다.”(같은 책, 28쪽)라고 합니다.

이를 우리춤 어법으로 하면, “일하는 동작에 장단을 태워 ‘일놀이굿’으로 옮겨낸 것이 춤이라는 것이고, 그러한 춤으로 인간의 삶을 부추겨 신명풀이를 하며 산다”고 옮겨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춤에 대한 생성론적 접근이 이루어집니다.

생명의 세계를 찾아나선 이의 궁리진성(窮理盡性), 고무진신하는 태도와 활동을 통해서 춤의 생성론은 생산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쿠르트 작스의 책 서문에서 그 한 실마리를 찾아나서 보는 것입니다.


2. 사람은 왜 춤을 추는가

1) 사람은 왜 춤을 추는가

이 질문은 사람은 왜 사는가라고 느닷없이 묻는 것처럼 당혹스럽지만 춤에 관한 가장 원초적이고 또 궁극적인 물음입니다.

살아 있기에 춤춘다.

그 물음에 그 답변이랄까, 허름한 듯도 싶지만 그 말 속엔 그 역(逆)으로서 ‘춤을 추기에 살아있다’는 뜻이 깊숙이 깔려있습니다. 그런만큼 사람 사는 것과 춤추는 것 사이엔 서로 적극적으로 필요하고도 또 충분한 교호조건을 이루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제대로’ 살아있도록 하는 생명의 자기충일의 욕구 때문에 춤추는 것입니다. 춤만큼 살아 있음을 스스로 확인시켜 주는 문화 예술 장르가 있겠는가, 라고 쿠르트 작스는 서문에서 말했습니다.

“ 춤은 헌신의 의식이며, 주문이요, 기도요, 예언이 된다.”

“ 춤은 창조자이며, 보호자이고, 안내인이며, 수호자이다.”라고 칭송하였습니다.

페르시아의 회교 승려시인인 루미(Rumi 1207~73)의 싯구처럼 과연“춤의 참 힘을 아는 자는 누구든지 신과 함께 있도다.”입니다.

그러기에 쿠르트 작스는 ‘춤의 역사는 인류에 대한 연구에서 지극히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위의 책 13쪽)이라고 힘주어 말하였습니다.


2) 우리는 때로 ‘새가 노래하고 파도가 춤춘다’라고 말하는가?

새가 그저 지저귈 뿐이고 물결칠 뿐인데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거기에 움직여서 그것을 그렇게 그려내도록 만든 주관적 정서가 어리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엔 사물의 모습을 의인태로 보는 관습적 이성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주객 분리에 따른 일방적인 접근이 아니라 사물이나 현상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고, 대상 자체의 자기생성활동과 인식 주체의 자기생성활동을 일치시켜 동시적인 상호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물결치다’와 ‘춤추다’ ‘지저귀다’와 ‘노래하다’ 사이를 가르고 이동시키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물결치다’와 ‘춤추다’는 ‘움직이다’ 라는 공통성이 있지만 그 질적 의미는 아주 다르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움직이는 그 이상의 어떤 유동적인 기운(氣韻)에 품기우고 감싸여 살아 생동하고 있을 때 우리는 ‘물결치다’라는 말로는 미흡하여 ‘춤추다’라고 하는 것이지요. ‘움직이다’와 ‘춤추다’, 그리고 ‘그냥 살다’와 ‘살아 생동하다’는 무엇이 그 구별을 짓게 하는가?

그렇다면 춤추고 노래하는 원천동기인 ‘살아 있다’라는 것은 무엇인가,부터 묻게 됩니다. 이는 철학적 인간학 또는 생태학적 인문학의 한 질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3) 한층 고양된 삶이란?

쿠르트 작스는 그의 책 〈춤의 세계사〉서문에서 춤춘다는 것은 “한 단계 고양된 삶일 따름”이라고 했습니다. 삶은 삶인데 그저 밋밋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한층 고양된 삶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개체적 삶이 ‘제대로’, ‘저 나름대로’, 더 나아가서 ‘살맛 나는’, ‘제멋대로’ 사는 삶이란 뜻이어서 일차적으로는 삶이 본래의 제자리를 잡는 것이고, 개체의 본연적 자기정위(定位)가 바로 춤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춤은 이미 존재 이전의 생성이고, 존재의 자기실현이고, 자기창출, 자기향유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곧 신명난 삶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는 그의 책 서문의 첫머리에서 “춤추지 않고서야 어찌 인생의 길(the way of life)을 알리요”라는 옛 잠언을 인용하고 있지요. 이 말은 거꾸로 하면 춤추는 사람이어야만, 춤을 추어야만 인생의 길, 인생의 맛과 멋, 그리고 의미와 깊이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춤은 그만큼 삶의 끝없는 도정(道程)이고 또 제대로 사는 살길을 찾아 궁극에 도달하려는 구도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3. ‘살아있음’이란 무엇?

“살아 있기에 춤춘다”는 말에서 ‘살아 있음’이란 세 가지 뜻을 두루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 살아있음은 먹고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물적 토대를 기초로 한 존재의 일차 규정으로서, ‘생존’(生存)을 말합니다. 개체보존과 종족 보존이라는 생체적 본능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사람은 춤추어 왔습니다. 특히 원시시대의 춤은 삶의 필요불가결한 존재였고. 살기 위해 춤추었고 춤을 추기에 살 수 있었습니다. 인체의 기관으로 치면 하단전 또는 회음혈의 활동에 유비된다 할 것입니다.

둘째, 살아있음은 존재의 활동규정으로서 존재의 역동적 활성화, 활력, 활기인 ‘생활’(生活)을 뜻합니다. 여기에서 사람은 자연 본능적 존재를 넘어서 노동가치를 창출함으로써 더욱 인간화된 존재활동이 마침내 추구해마지 않는 진선미성(眞善美聖)의 가치를 실현해내지요. 그리고 나아가 자유, 민주, 평등, 박애, 복지라는 사회적 가치를 성취해내고 이에서 역사와 문화의 특질을 얻게 됩니다. 이를 위해 사람은 또 춤을 추어왔습니다. 특히 역사변혁의 도도한 물결은 마치 거대한 축전의 현장인 양 역사의 광장에 운집한 이들이 떼춤(군무)을 이루는 춤마당판으로 자주 묘사되어 왔던 터입니다. 이는 인체의 기관으로서는 중단전 또는 중공(中空)의 활동상에 유비됩니다.

마지막으로 살아있음은 ‘생명’(生命)입니다.

생명은 존재의 가치활동을 본원적으로 가능케 하는 에너지원으로서 생존, 생활 등 살아있음의 여러 의미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생명이란 인간을 포함하여 삼라만상 모두가 세계사적 존재로서 공생, 협동하는 유기적 생체에너지의 전일체(全一體)라고 하겠습니다. 인체의 기관으로는 우주와 회통하는 상단전을 비롯하여 회음혈, 하단전, 중단전 모두의 활동상의 이러한 매 단계마다 춤은 깊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만큼 춤이란 삶과 직결되어 있으면서 단순한 생존적 차원만이 아니라 삶의 길이 마침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인 단계로의 무한한 도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 삶이 궁극에 도달하고자 했을 때에야 거기서 비로소 열리는 무극대도(無極大道)의 시원(始源)과 통합니다. 그러기에 춤은 ‘활동하는 무(無)’이고 ‘움직이는 도(道)’인 것입니다.1) 처음과 마지막이 끝내 물고 물리며 돌아가는 궁궁을을(弓弓乙乙)의 무궁한 시간 속에서 춤은 보이지 않는 질서의 드러남입니다.

그처럼 춤은 원초 생명의 자기확인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러한 생명의 자기확인이란, 하나의 생성적 존재라는 것이 개체적인 존재자일 뿐 아니라 다른 무엇과 유기적인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협동적인 존재자임을 스스로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돌덩이 하나에도 그 자체 영성적인 마음이 있어 유동하는 한 생명체로서 사람과 서로 교류하면서 우주진화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가이거 가설’이나 네오 휴매니즘과 연관됩니다. 이는 풍류도의 접화군생의 현대적 해석과 그대로 통합니다. 그러한 신령함의 자기생성활동인 춤이기에 춤추는 것만큼 거룩하고 풍요로운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싶은 것이지요.


4. 춤의 어원과 신명

dance의 어원인 산스크리트어 ‘Tanha’의 뜻이 또한 그러합니다. 원래 dance는 뛰는 춤, 도약의 춤, 환희의 춤만을 지칭했는데 어느새 춤 일반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Tanha’의 원래 뜻은 ‘환희용약’(歡喜踊躍) ‘생명력의 충일’이라고 합니다. 공동체적 생명에너지의 충일이자 자기확장인 ‘Tanha’의 어원 자체가 이미 춤과 생명의 관계를 잘 예시해 주고 있습니다. 춤은 생명기운의 극치입니다.

춤은 생명력이 흘러 넘치는 살아 생동하는 것이어서 언제나 죽음이나 죽임의 상황에 대결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만큼 적극적이고 쟁투적인 삶입니다. 춤은 온갖 반(反) 생명에 대해 대항해 왔습니다. 우리는 춤출 수 없도록 사회체제를 몰고간 중세(中世)시기에 춤추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춤추다가, 죽어서야 춤이 그치는 ‘죽음의 춤’과 ‘무도병’2)의 역설적 사회병리현상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춤출 수 없게끔 만드는 죽음, 죽임의 세력에 대항하는 춤이야말로 춤의 가장 강력한 주제가 될 것입니다. 반생명을 척결하고 살아있음에 겨워 신령스러움의 생성활동인 엑스타시를 체험하는 여기에서 우리의 독특한 신명론이 제기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죽임인 살을 풀어 헤쳐 물리치는 ‘살풀이’ 과정에서의 극점이 바로 ‘신명’3)입니다.

자연 생태계가 사람에 의해 파괴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춤추지 않는 바다를 대신하여 춤추고,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 새들을 대신하여 노래하는 신성한 의무를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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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지하 시인 특유의 표현으로 〈민중문학의 형식문제〉(〈남녘땅 뱃노래〉, 두레출판사, 1985.)에서 처음 언급되었고 나중 그의 말이나 글에서 심도있게 논구되어 왔다. 이들 용어는 ‘텅빈 자유’ 또는 ‘초월적인 것이 창조적으로 활동하는 자유’라고도 일컫는다. 이때 無나 道는 ‘늘 시원이 되는 그 곳’으로서 자유 해탈의 제공처가 된다. 이러한 ‘활동하는 무’가 창조적 진화를 추진한다.
2) Hans Holbein, The Dance of Death〉, Dover Pub. 1972 참조.
3) 졸고, 〈집단연희의 예술체험으로서의 신명〉, 예술평론, 1985년 봄호.

채희완

부산대 명예교수, 〈(사)민족미학연구소〉 소장,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이사, 〈창작탈춤패 지기금지〉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 『한국의 민중극』(엮음), 『탈춤』, 『한국춤의 정신은 무엇인가』(엮음), 『춤 탈 마당 몸 미학 공부집』(엮음), 『지극한 기운이 이곳에 이르렀으니』 등을 펴냈고, 그밖에 춤, 탈춤, 마당극, 민족미학에 관련된 논문과 춤 비평문이 있다.​​​

2024. 6.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