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현대무용단 사포 〈간이역〉
춤이 만들어낸 순간의 신기루, 삶의 진실
권옥희_춤비평가

남원의 ‘서도역’, 아름다운 역사(驛舍)였다. 자신들의 삶을 자신들의 것이라 여기지 않고, 미래에 그들의 진정하고 빛나는 삶이 있다고 믿는 이들이 오고갔을 장소. 그들은 빛나는 삶을 살고 있을까.

시간 속으로 내려 앉은 이 작은 간이역에서 청춘의 약속과 희망은 물론, 그 고뇌까지 춤으로 그려낸 현대무용단 사포의 〈간이역〉(서도역舍, 10월 18일~19일). 미약하고 소소한 마음의 풍경, 한 사건, 한 순간의 마음, 이 마음의 움직임들을 그려낸 춤은 수채화처럼 아름다웠다. 춤은 많은 것을 감춰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어찌보면 〈간이역〉에서의 춤은 기교도 은유랄 것도 없다. 춤으로 그려낸 마음의 움직임, 풍경 몇 컷만 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여생에 파급될, 파급된 것을 어느 순간 자각하게 된다. 그때 약속한 한마디, 공기 속에 묻어나던 그 온도를 생각나게 하는 춤으로 다른 세계가 열린다. 열어 보인다. 보니 이미 나를, 당신을 기다리고 있질 않던가.



현대무용단 사포 〈간이역〉 ⓒ현대무용단 사포/민세기



사포(예술감독 김화숙)의 〈서도역〉은 프롤로그(떠나다)를 시작으로 시간의 기억, 보이지 않는 그곳에, 돌아올 수 있을까. 그리고 에필로그(텅 빈 이곳에!)까지 다섯 씬으로 춤을 풀어놓는다.

석양을 등지고, 역사(驛舍)를 마주하고 앉아 춤을 본다. 프렌치코트를 입은 8명의 여인들이 철길 위를 걸어나온다. 아니 걷는다. 외투 속에다 얼굴을 감추고,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얼굴을 묻는가 하면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지켜야할 무엇을 두고 왔을까. 기억의 시작인 듯.

이미지1. 측백나무 한 그루가 서있는 그 아래 벤치와 자전거 그리고 나무 그루터기. 흰색 칼라를 덧댄 검정색 교복 상의를 입은 세 명(문지수, 박주희, 윤정희)의 소녀(로 분한)들. 순수했던 ‘시간의 기억’같은, 반짝이는 춤으로 그루터기 위를 오르내리다 측백나무를 향해 내달린다. 기억의 파편, 그 은유로 읽히는 측백나무에 걸려있는 흰색 천. 천을 펼쳐 들고 날리며 춤을 춘다. 순결한 춤. 소녀들의 존재 변모의 춤은 시간과 기억 속에 있
다. 잠시 춤을 멈추고 고요히 서있다. 옛날에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 살바퀴가 돌아가는 소리, 지나는 그 바람 소리를 들었을까.



현대무용단 사포 〈간이역〉 ⓒ현대무용단 사포/민세기



이미지2. 경성과 목포 방향이 화살표로 그려져 있는 서도역 이정표. 이정표 위에 걸린 기억의 파편. 등 뒤쪽, 철로 위에 겹겹이 접혀져 놓인 흰색 천이 품고 있는 또 다른 기억이 펼쳐진다. 천을 잡아들고 걷는 김남선. 그녀가 안고 있는 기억의 파편은 어떤 모습일까. 접혀있던 천이 펼쳐지면 시작되는 이야기. 빠른 걸음으로 침목을 건너뛰다가 천으로 얼굴을 감싸고, 뒤로 돌아선다. 채 못다한 이야기에 붙들린 채 부조처럼 서 있다. 정적. Addio Amore(pirmavera en salonico)가 흐른다. 아름다워서 슬프다. 아니 슬퍼서 아름다운가. 다시 자락 끝을 잡고 걷는다. 파편처럼 철길 위에 남는 기억의 흔적. 그 흔적을, (관객의 시선이) 김남선을 쫓는다.​ 상처의 기억을 포함한 모든 기억은 지하 세계에서 구해오는 에우리디케처럼 뒤돌아볼 때 사라진다. 돌아보거나... 부디 뒤돌아보지 말길.


춤은 경계 넘어 바닥 없는 이미지의 세계 속으로 수시로 사라졌다가 나타난다. 바흐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에 얹은 박진경의 춤. 그녀가 입은 긴 무채색 상의와 주황빛 바지처럼 붉고 깊다.

이미지3.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학생모를 쓴 남자(김천웅)가 철길 하나를 건너와 플랫폼에 선다. 서성이다 가방과 모자를 벗어던지고 춤을 춘다. 이정표에 손을 얹고 잠시 망설이다 경성쪽 방향으로 뛰어 사라진다. 그때 그 소년(들)은 어떤 모습으로 돌아왔을까. 멀리 철컹철컹 화물열차가 지나가고 있다.

흰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조다수지), 이정표 위에 화환을 건 뒤, 망연자실 서 있다. 기다리는 이는 어디로 갔을까. 그들이 한 약속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이의 길. 길은 항상 매혹된 마음으로 가는 길은 아니다. 때로는 길이라기에 가기도 하고, 이런저런 사연으로 강요를 받아서 가기도 한다. 풀썩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는다.

에필로그.
프렌치코트를 벗어 들고 흔드는가 하면, 뒤집어 쓰고, 아기를 안은 것처럼 뭉쳐서 안아든 채 다른 선로, 철길 위에서 춤을 춘다. 각자의 기억을 안고. 길어진 그림자를 밟고 여자(소다수지)가 돌아서 걷는다. 코트를 안아든 여인(김옥)의 춤은 끝내 안을 수 없었던 것에 보내는 마지막 인사이자 같은 그리움을 가진 사람들에게 보내는 첫 인사로 보인다. 그게 어떤 마음이든 부디 그 마음들을 잘 돌보기를..



현대무용단 사포 〈간이역〉 ⓒ현대무용단 사포/민세기



무용수의 춤들은 여러 삶의 편린으로 분리되고, 그 아름다움과 슬픔은 각각의 춤 속에, 기억 속에 고립된다. 춤들은 때로 슬픔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움으로 완성되지만, 춤을 만드는 그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 모든 고통에 냉정해야 한다고, 예술감독은 요구하였으리라. 그러나 춤추는 이는 마냥 냉정할 수 없으며 그 고통을 연결하여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분리되었던 하나하나의 슬픔은 다른 모든 슬픔을 그 안에 포함하고 다시 삶(춤)을 삼키는 춤으로 증폭되기 때문에.

슬픔을 온전히 유지하면서, 그 슬픔을 성찰하여 그 힘을 이용하고, 마침내 껴안고 거기서 떠나는 방식. 작품 〈간이역〉이 아름다운 이유다. 무용수들의 춤은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정도로 작품속에 녹아 충분히 벼려져 있었다. 다만 벼려지는 과정을 위해 동원되었을 각자의 춤개성들이 서로에게 흔적을 남겨, 그 깊이를 가리고 있다는 아쉬움이...

사포의 예술감독 김화숙은 춤을 떠나지 않음으로서 (춤)삶을 말하는데, 그것은 때로 폭풍처럼 고립된 사건이기도, 외로운 등대로 남기도. 그래도 춤을 만들고 춘다.

춤 〈간이역〉은 기억으로 가득하였다. 억새가 핀 역사, 석양 빛, 그림자가 길어지는 춤 자리마다 슬픔이 가득한, 그래서 아름다운 춤이었다. 예술감독은 그 슬픔이 가져오는 기억에도 불구하고 이성을 지키고, 지혜로움을 감추지 않고, 결코 몽상과 비애에 빠지지도 않는다. 슬퍼서 아름다운, 춤으로 풀려 정화되는 작가 김화숙의 마음은 섬세하고 냉정한 방식의 인내력에서 비롯된 것일 터. 인내는 죽음의 인식에 기초한다. 하여 작가의 작업은 죽음이 생명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춤자리를 배치한다. 절실하고 아름다운 춤 〈간이역〉에서 안무자는 기억의 깊이를, 춤의 기억에 이야기를 주어 그것을 견딘다. 견딘다는 것은 부정하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인정하는 것인지도. 춤은 안무자를 닮았고 그리고 또 삶을 닮았다. 김화숙은 춤으로 자신을 해방하고 있는 중인지도.

춤이 만들어내는 순간의 신기루, 신기루가 거듭 펼쳐지면 삶의 진실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사포의 〈간이역〉이 그런 작품이었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공부했다.​​​​​​​​​

2024. 11.
사진제공_현대무용단 사포, 민세기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