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1편
제주올레트레킹은 단순히 전체 코스를 완주하는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느끼며 만끽하는 것이다. 올레길의 마스코트인 ‘간세’가 그 의미를 대신 해준다. 간세란 게으름뱅이처럼 느릿하게 움직이는 제주 조랑말을 뜻한다. 느끼며 만끽하며 즐기는 것에는 단연 축제가 제일이다.
제주는 축제의 도시이지만 또렷이 머리에 떠오르는 대표할 만한 축제가 있지는 않는 것 같다. 고무적인 것은 ‘제주로 이주해 온 이주민 40%가 예술인’이란 통계가 있다(2022 제주국제댄스포럼). 무용가들도 상당수인 걸로 알고 있다. 이들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다. 현재 제주 거주 무용가들이 가장 활발히 참여하고 있는 축제는 아마도 ‘제주국제즉흥춤축제’일 것이다. 올해로 이 축제를 7년째 이끌고 있는 장광열 예술감독은 조천읍에 있는 제주돌문화공원과 서귀포 일대에서 주기적으로 행사를 진행해 오고 있다. 초기엔 인프라가 없어서 상당히 고생을 많이 한 걸로 아는데 이젠 제법 체계를 잡아가는 것 같다. 프로그램 구성만 봐도 이 축제가 추구하는 방향을 알 수 있다.
지난 과거 지역축제가 붐을 일으켜 따라 하기 일색으로 난무했지만 거의 실패한 경우가 많았다. 그중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지역예술가와 지역민에 대한 배려가 없었던 것이다. 즉 일회용 행사 같은 축제는 지속성을 갖기 힘들다는 반증이다.
지난 5월에 이은 7월 두 번째 제주국제즉흥춤축제의 서귀포 망장포구 해변가 주변에서 펼쳐진 첫째 날 프로그램을 살펴보니, 스페인 출신 즉흥무용가의 솔로, 제주 무용가의 솔로, 일본 출신 뮤지션과의 콜라보, 제주무용가의 군무, 제주주민이 참여한 커뮤니티 즉흥춤, 서울 춤의학교 팀의 커뮤니티 즉흥춤, 제주 예술가들의 수중 즉흥 공연으로 짜여졌다.
서귀포의 아름다운 반 야외 공연장에서 펼쳐진 둘째날 프로그램은 같은 일본 뮤지션의 즉흥연주, 스페인 출신 무용가의 솔로,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했던 무용가의 솔로, 국내외 5인 아티스트의 컨택즉흥, 서귀포에 소재한 즉흥 그룹의 공연 등등 다채롭게 구성되었다. 지역거주 예술가와 지역주민의 참여와 국내외 예술가들, 모두 함께 공존함을 알 수 있다.
Miguel Cameraro ⓒ정미숙 |
한정수 ⓒ정미숙 |
박연술연무용단 ⓒ정미숙 |
커뮤니티 즉흥그룹 아우라댄스 ⓒ정미숙 |
춤의학교 ⓒ정미숙 |
길 위에 떠있는 제주의 여름태양은 잔인하다. 그간 올레길 피로가 누적되었는지 아침에 일어나기가 무척 힘들어졌다. 더구나 제주국제즉흥춤축제가 시작된 7월 22일 오후 3시 공연을 보기 위해서 코스도 점핑해서 망장포구가 있는 5코스부터 트레킹을 시작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으나 북쪽 제주에서 남쪽 서귀포까지 버스로 이동하다 보니 출발시간이 늦어졌다. 그만큼 뜨거운 태양을 머리에 지고 걸어야 하는 악수인 것이다. 더 고달픈 것은 점심을 챙겨 먹지도 못하고 시간 내 주파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해안을 따라 동백꽃 군락지가 긴 터널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진짜 큰 위안을 준 것은 즉흥공연들이었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망장포구의 안녕을 책임지는 붉은 등대 앞에서 스페인 출신 Miguel Camarero가 세 방향으로 긴 천을 바닥에 늘어놓고 샤먼처럼 가운데에 앉아 시작하는 것이 마치 별신굿 같은 이미지의 즉흥무였다. 마치 지중해와 에게해를 관장하는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잠재우고 이곳 제주 용왕의 보살핌을 기원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연이어 한정수도 등대에서 내려오는 경계선에 하얀천을 횡으로 묶어 놓고선 마치 육계와 영계 공간을 넘나들지 못한 이별의 한을 담아 내는 듯한 진혼 씻김을 연상케 했다. 해녀들의 집합장 같은 곳에서 이어받은 Tamura Ryo의 타악 즉흥연주와 콜라보로 또 다른 유쾌함을 보여준 한정수는 관객들의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의 끼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박연술이 이끄는 해녀들의 휴일은 절벽 아래서 펼쳐진 군무로 존 트래볼타의 토요일 밤의 열기를 연상케 하는 디스코 풍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연이어 사방에서 나타난 제주 커뮤니티 즉흥팀 아우라는 마치 바람에 의해 모였다 흩어지며 감성어린 느낌을 발산하며 또 다른 제주 여인들의 애환을 우아하면서도 역동성을 잃지 않으며 구성지게 진행하며 마지막은 길게 느려진 망부석처럼 자연스럽게 마무리하였다.
한편 관객의 시선을 파도가 출렁이는 해안 바위 위로 유도하며 춤의학교 커뮤니티 즉흥그룹이 포진하여 망부석이 되었던 여인들이 다시 되살아나 움직이듯이 각자의 사연있는 수 십개의 에피소드가 펼쳐짐에도 그 앙상블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파도가 끝임없이 그들을 유혹하듯 출렁였지만 오히려 마지막은 물장구치는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해방감이었다. 공간적으로 등대에서 시작한 각각의 퍼포먼스는 나선형으로 타고 내려가면서 결국 관객은 어멍(어머니)의 양수와 같은 포구 속으로 초대되어진다.
수중 즉흥공연 ⓒ최혜영 |
수중 즉흥공연 입수 전 퍼포머와 관객들의 모습 ⓒ김정혁 |
이날 하이라이트를 장식한 수중즉흥공연을 보기 위해 스노클링 장비와 안전조끼를 착용하고 양수와 같은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연이은 트레킹으로 지칠 대로 지친 나로서는 이만한 안식처가 따로 없었다. 수면과 수중으로 오가는 여인들의 퍼포먼스는 각자의 무의식의 존재를 건드리는 감춰진 사연을 보는 듯했다.
때론 햄릿이 되어 서서히 물속으로 침잠하는 오필리어의 죽음을 냉정하게 바라보지만 가슴에서는 한없이 애도하며 입술을 깨물게 하는, 한편으로는 죽은 아내를 지상으로 안내하다 그만 하데스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뒤돌아보다 다시 죽음의 강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체를 잡으려 나도 모르게 손을 내뻗는 몰입성에 계속되는 환영을 체험한 최고의 퍼포먼스였다.
출연_배효정 한혜연 홍민아 Kate Bae 수중촬영_허천범 권태완 |
양귀비 빛깔에 홀린 듯 내 걸음은 5코스의 완주를 위한 쇠소깍 다리를 향하다 그 위에서 기로에 서게 된다.
2편
19.4km, 17.6km, 11.3km. 제주올레길 트레킹 시작한지 사흘째 되는 7월 21일 아침, 장광열 선생님으로부터 톡이 하나 날아와 있었다. “호빈~, 제주에 있다면서?” 정확히는 그 전날 밤에 보낸 메시지였지만 트레킹 시작하자마자 이틀 연속 장거리를 걷다 보니 걍 곯아 떨어졌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갑작스런 긴급 상황이 벌어져 23일 컨택즉흥 공연에 참여해 달라는 것이었다. 뭔가 퇴역한 특수요원이 작전투입 명령을 받은 느낌이었다. 이 얼마나 스릴 넘치는 일인가! 요원과 예술가의 공통점은 ‘현장’을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또한 요원이든 예술가든 실전은 경험으로 농축되어 있어 언제든 투입되어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점.
7월 22일 망장포구에서의 그 아름다운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23일, ‘넙빌레‘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숙소(빌레는 제주에서 용암이 흐르면서 비교적 평평하게 쌓인 지형)에서 1박 하고 서귀포 관광극장이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반 야외 극장에서 컨택즉흥춤 공연을 하러 가게 되었다.
삶이 계획대로 되는 것 없이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준비를 잘 해도 즉흥적인 상황이 늘 곁에 함께하지 않는가! 문제는 공연 당일 쉬면서 컨디션 조절을 할 것인가, 공연장이 있는올레길 6코스(약11km)를 걸으며 영감을 얻을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였다. 아침에 바다를 보며 잠시 명상에 들었다가 걷기로 했다. 어차피 오후 5시부터 리허설인데 그 긴 시간을 무기력하게 기다리느니 차라리 힘들더라도 걷자!
이른 아침부터 가마솥 끓듯 한 뙤약볕이지만 쇠소깍의 아름다운 절경과 해안에 길게 늘어진 동백나무 군락지의 긴 터널을 지나고, 바다로 직수 다이빙하는 정방폭포로 맘을 달래며 도착한 서귀포. 이중섭거리를 힘겹게 올라가며 공연장을 옆에 두고 지나쳐버린 채, 여행자센터에서 인증샷 날리고 제공된 숙소에서 짐을 풀고 적당한 휴식을 취한 다음, 곧장 극장으로 향했다.
여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7, 80년대 동시 상영하는 삼류영화관 입구 같은 복고풍의 레트로가 아닌 실제 옛 건물 그 자체. 로비까지도 그런 냄새는 여전, 하지만 한 구석에 전시된 나름 LED 번쩍이는 사슴? 전시물이 나름 지금이 2022년이라는 현시점을 대변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잡스런 인상은 중요치 않다.
계속해서 시선을 안쪽으로 잡아당기는 푸른 넝쿨이 운치를 더하며 무대바닥까지 늘어져 뒷벽 전체를 감싸고 있어서 여기가 안쪽인지 바깥쪽인지 착시를 일으키게 한다. 더구나 지붕은 뻥 뚫려 있어서 푸른 하늘과 구름을 그대로 무대와 객석으로 스미게 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공간은 처음이다. 여기서 공연을 한다고?! 자칫 배경에 치여 관객의 시선을 강탈당하고 무용수들은 오합지졸 나르시시즘에 빠져 “너희가 예술을 알어?”라는 구호만 외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것을 아는지 장광열 예술감독은 미리 신신당부를 했다. 요지는 “관객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주세요…”
서귀포관광극장 Miguel Cameraro ⓒ이보라미 |
컨택즉흥 공연 ⓒ이보라미 |
무용다방의 관객과 함께하는 즉흥공연 ⓒ이보라미 |
컨택즉흥은 어제 이미 익숙해진 음악에 타무라 료, 샤먼 춤을 춘 미겔이란 스페인 친구 그리고 바리나모 팀으로 활약하고 있는 젊은 친구들 김바리와 주나모가 함께 한다. 아, 물론 긴급 투입된 요원 본인을 포함하여 5명이었다. 우린 가볍게 리허설을 하면서 탐색전을 가졌다. 각자 주특기가 뭔지 알아야 그에 부합할 만한 즉흥요소 혹은 결핍요소들을 무의식 속에 옵션으로 깔아 놀 수 있다. 이게 특수요원의 생존전략이다. 수많은 가능성을 교차시키며 함수관계를 늘려가는 것이다. 궁금한 사람은 개인적으로 연락 바란다.
이런 무더위에 비록 천장은 뚫려있지만 에어컨도 없는 이 극장으로 사람들이 올까.., 시간이 가까워지자 관객들로 객석이 서서히 채워지기 시작한다. 트레킹 중에 만난 미국인 친구 웹도 자리하였다. 모두 만석!
공연 오프닝을 담당한 타무라 료. 떨어지는 낙조가 바닷물을 살며시 두드리듯이 잔잔하던 파도를 일으키며 객석을 서서히 끓어오르게 한다. 급기야는 갈매기 떼들이 낙하하며 수면에 떠오른 날치들을 낚아채듯 집중포화하며 두들겨대는데 뒷 벽체에 늘어져 있는 넝쿨에서 작은 열매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듯, 곧이어 급작스런 파고가 높은 밀물이 객석 코앞까지 들어와 관객을 흥분시키기 시작했다.
이어 객석 한켠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 셔츠와 팬츠의 미겔 카메라로. 다시금 정적을 기다리며 자신의 시간을 요리하고 있다. 마치 그의 시선으로 한쪽 켠의 넝쿨을 커튼 제끼듯이 벽돌의 운치를 드러내는 듯 서서히 걸어가 세 개의 면이 만나는 꼭지점 코너에서 날개를 펼치듯 두 손으로 부드럽게 벽을 집는다. 그 순간, 마치 어느 이름 모를 가문의 백작이 사는 성안으로 관객은 초대된다. 잃어버린 연인에 대한 차가운 연민을 감미롭게 흐르는 선율에 의해 절제된 움직임과 감정 선을 집중시키며 급기야 무대 한 가운데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 드라큐라 백작처럼 익살스런 악마의 모습으로 180도 탈바꿈한다. 정말 능청스럽고 효율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심플했지만 인상 깊게 각인된 감각적인 작품이었다.
연이은 세 번째 순서는 조명희. 리허설을 살짝 훔쳐봤을 때 물 흐르듯이 끊김 없이 연결되는 세련된 움직임으로 시선을 붙잡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는데 공연 때 역시 노련했다. 이미지보다는 움직임의 수려함. 돌발변수가 많은 계곡보다는 구조적으로 완벽하게 시공된 상수관을 타고 매끄럽게 흐르는 춤에 가까웠다. 어디든 자유롭게 유영하듯.
이어달린 문제의 5인의 컨택즉흥. 염려가 숨겨진 예술감독의 긴 해설. 아랑곳없는 퍼포머들의 시작 없이 진행된 퍼포먼스. 바닥에 흩어져 있는 넝쿨열매를 밀레의 이삭줍기처럼 이미 삽화 하나가 무대 위에 던져진다.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객석과 무대의 공간은 서로 무너진 지 오래다.
무대 위에서의 에너지 변화는 다양했다. 바리와 나모는 리프트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상하운동 에너지의 변화를 주도하고, 수평으로 공간 이동으로 자주하는 본인과의 이음새 역할의 몫은 리겔이었다. 때론 움직임의 축이 되어주고 때론 빈 공간을 점유함으로써 역동적인 에너지가 자칫 한쪽 쏠림으로 과도해질 때 밸런스를 잡아주기도 한다.
급기야 타무라 료가 관악기를 연주하며 적극적으로 무용수와의 컨택을 감행함으로써 관객의 탄성을 자아내며 모두 칠머리당 영등굿 연물 치듯 반 접신에 걸려 멈출 줄 모르고 무대를 광란으로 치닫는 순간, 그나마 정신줄 잡고 있는 본인이 징채를 움켜잡고 장렬하게 내리쳐 기적 같은 우연으로 주어진 25분을 작두 타듯이 끝냈다.
이미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관객은 마지막 고삐가 풀린 커뮤니티 즉흥그룹 ‘무용다방’에 의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무대 위로 뛰어들어 하나 둘 점령하기 시작한다. 바르라는 썬크림은 안 바르고 〈한 여름 밤의 꿈〉 속의 사랑 꽃의 약을 바르고 온 것처럼 달빛 아래에서 큐피드의 화살을 맞은 냥 계속 히죽거리며 춤추는 사람 반, 깔깔거리며 춤추는 사람 반. 통통 튀는 풍선과 함께 밤하늘의 별처럼 그들의 눈빛은 반짝였다. 그렇게 극장의 지붕은 밤하늘의 영롱한 별들로 가득 메워져 간다.
제주 한 달 살기의 막바지 무렵. 불볕 더위를 머리에 이고 제주올레길을 걷는 동안 일사병에 걸려 어느 날은 백일몽을 꾸듯 눈의 초점을 잃어버린 채 바람을 찾아 나무 그늘에 주저앉는 순간, 서귀포 극장에서의 그 뜨거웠던 사람들의 살인 미소의 잔상은 짙은 향수로 내 주변을 감돌고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여기서 작전완료. 다시 홀로 걷는 이 길이 또 다른 인연을 만들어 내듯이 자연무위(自然無爲) 하듯, 발 가는 대로 마지막 발길을 돌린 곳은 제주돌문화공원이었다.
박호빈
안무가. 댄스컴퍼니 조박, 댄스씨어터 까두로 거듭 나면서 나름 체계적인 제작시스템을 구축하였으나 운영난으로 2여년 휴식기 끝에 결국 폐업, 전문무용수와 안무가의 권익보호와 복지개선을 위해 노력해오고 있다. 새로운 공연예술미학과 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제로포인트모션(Zero Point Motion)-영점운동을 전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