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연재 | 나의 현장 상상 5
서울무용센터는 무용 생태계를 위한 플랫폼일까?
김현진_안무가

담았던 소속을 벗어나 홀로서기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설레고도 두려운 일일 것이다. 해마다 많은 수의 예술전공자들이 졸업과 동시에 홀로서기를 해야 하고 또 그렇게 배출된 많은 수의 예술가가 이미 홀로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다. 그간 나를 지탱해줬던 탯줄이 끊어지고 이 세상에 벌거벗겨진 채로 태어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하지만 보호자도 일정 기간 양육환경도 보장되지 않는다면, 이 홀로서기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언젠가 이런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세계적인 명 배우 로버트 드니로(Robert De Niro, 1943~)가 2015년 뉴욕 티쉬스쿨(NYU Tisch School of the Arts)졸업식에서 했던 축사 영상이었다. 그는 첫마디에, 졸업생들에게 “You are fucked up”(망했다 정도로 해석하겠다). 나는 그의 말에 망치를 맞은 듯했다.
그간 왜 저런 말을 해준 누군가가 없었나 싶었다. 이제 와서 누굴 원망해 본들 소용이 없기에, 충격적이고도 시선을 끄는 그의 축사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신인 예술가들이 겪을 냉혹한 현실을 이 한 마디로 압축하며, 연설을 이어갔다. 다른 전공 졸업자들보다 보장된 미래도 직장도 없이 실업자가 되어야 하는 예술전공자들의 냉혹한 현실, 일상이 될 오디션에서의 탈락, 고군분투해야 하지만 협업을 통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예술가의 숙명, 그에 따른 협업자의 자세, 기다림, 끝없는 도전, 역할에 충실한 최선의 노력 그리고 주어지는 다음의 기회 등, 자신의 인생을 녹여낸 현실적이고도 따뜻한 조언을 약 17분간의 축사에 녹여냈다. 그는 비록 티쉬스쿨 졸업생들에게 축하를 하고 있지만 정작 대학을 다니진 않았다. 그러기에, 그가 현재의 명성이 있기까지 학연과 인맥도 없는 대도시 뉴욕 한복판에서 이름 없는 신인으로서  얼마나 많은 노력과 기다림 그리고 고난을 견뎌냈을지 그의 짧은 연설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 현역 배우로서 미래의 연출가가 될 졸업생들에게 자신의 프로필을 알리러 왔다며 겸손하면서도 재치있게 축사를 마무리했다. 그는 배우로서도 멋졌지만, 인생 선배로서도 정말 멋졌다.


자, 다시 현실로 돌아오자면, 여기는 한국, 지금은 2022년이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의 대한민국 예술계는 어떠할지.

나는 어느 순간부터 사회가 정한 시간의 질서대로 살지 않은 듯하다. 뒤늦게 유학을 다녀와서, 잠시 시간과 공간의 혼돈 속에, 나의 시간을 다시 정렬해야만 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그간의 나의 시간은 잠시 덮어두고, 40대부터 이름 모를 신인 예술가로 다시 시작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 목적으로 작은 작업부터 무엇이든 해보려고 했었다. 이런 마음가짐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막상 예술을 하려고 하니 모든 게 너무나 막막하고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내가 예술가가 맞는지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어디서부터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어떻게 협업자를 구해야 할지, 연습 장소는 어디로 어떻게 정해야 할지부터 백지상태였다.

그러다 우연히 주변 연극인으로부터 이런 플랫폼 알게 되었다. 그가 연극인이었기에, 그와 작업을 하면서 그가 주로 이용하는 연극인의 플랫폼인 서울연극센터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다. 당시 장르가 다양한 예술가들과 모여 회의와 워크숍도 하고 작은 쇼케이스도 했기에 서울연극센터 세미나실과 연습실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활동 거점이 되어주었다. 그 장소가 익숙해지다 보니 나는 홀로 종종 그곳을 이용하게 되었다. 약속 장소를 그곳으로 정하기도 하고, 공연이 있을 시에 잠시 로비에서 휴식을 취하며 비치된 공연 관련 자료를 훑어보며 유용한 정보를 얻기도 했다.

무엇보다 좋은 건, 연습공간에 목말라 있던 내게 서울연극센터는 개인 연습실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이다. 물론 공식적인 공간대여의 자격요건은 연극단체로 제한됐지만, 연극 장르의 성격상 홀로 대본 연습이나 오디션을 준비하는 연극인이 많았기 때문에, 개인 연습을 위한 민간이 운영하는 연습실 정보를 서울연극센터 홈페이지에서 공유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 덕분에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서울연극센터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링크된 민간 연습실을 구해 개인 연습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오디션 정보도 공유되고 있었기에, 그 정보를 통해 향후 나의 작업의 청사진을 그려볼 수 있었다. 이 경험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현재 서울연극센터는 보수공사 중으로 2023년 재개관을 앞두고 있어, 세미나실이나 단체를 위한 연습실 대관 등의 일부 대관사업은 중지된 듯하다. 무용과 연극 간 서로 장르는 다르지만, 나는 공연예술이라는 공통점을 근거로 또 이제 막 홀로서기를 시작한 서울에 거주하는 독립 예술가라는 자격으로 한동안 서울연극센터를 활동 거점으로 삼으며 작은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




〈몸으로, 자연으로〉 리허설 중 서울무용센터 연습실에서 ⓒ김현진




그리고 2011년에 설립된 홍은예술창작센터가 2016년부터 무용 장르로 특화된 서울무용센터로 거듭나며, 무용인들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 처음으로 무용전문 센터가 생긴다는 소식에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드디어 무용인들에게도 활동의 근거지가 생기는구나 싶었다. 나는 이 기관을 통해 내가 필요한 것을 얻을 수도 또 활동할 기반을 다질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밑도 끝도 없는 이런 믿음은 어디서 왔을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아마 서울연극센터에서의 경험에 기반할 것이고, 두 번째는 ‘무용 전용 공간’ 또는 “무용 장르 특화 공간”이라는 그 정체성에 대한 무용인으로서 거는 기대, 그리고 함께 운영하는 웹진 〈춤:in〉이라는 ‘인터넷 공간’이 갖는 개방성, 정보 접근성, 자발성 등 순기능에 대한 기대감에서 기인할 것이다. 서울무용센터는 자신들의 기능과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서울무용센터는 국내 유일한 무용 전용 레지던시 공간으로 무용 예술 창작활동을 위한 인프라를 지원하고 무용 예술의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하는 공간이 되고자 합니다.”




  

〈몸으로, 자연으로〉 리허설 중 서울무용센터 연습실에서 ⓒ김현진




혜화역 4번 출구 바로 앞에 위치한 서울연극센터 비해 서울무용센터는 입지 조건이 그리 좋지 않다. 그곳에 방문하려면 서울 시내에서도 버스를 한두 번은 갈아타고, 또 내려서 한동안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한다. 그 때문인지 2개의 스튜디오, 4개의 무용 연습실, 6개의 호스텔 등의 공간은 주로 한동안 머물며 창작에 집중하는 무용 레지던시 작가와 공연을 앞둔 무용인들을 위해 주로 쓰인다. 무용 전용 공간인만큼 전문 무용수들의 움직임과 작업에 최적화된 무용실은 무용인들에게 매력적인 장소일 수밖에 없다. 접근성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도 말이다.

그러기에 오히려 속세를 떠나 채광 좋고 조용한 무용실에서 틀어박혀 나만의 작업에 몰두하기에 적합 장소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비교적 저렴한 대관 비용(4시간에 1만 5천 원~2만 원)도 매력적인 요소이다. 그래서 월 단위로 사전 공모를 통해 승인되는 체제로 운영되는 대관사업은 공연을 앞둔 단체나 개인 무용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매년 모집하는 상하반기 국내외 무용 아티스트 레지던지 사업도 실험적인 작업을 펼치고픈 작업자들로 채워진다. 레지던시 무용가들이 작업 중 과정을 예술가 그리고 시민과 공유하는 워크숍, 세미나, 좌담, 무용인들을 위한 플리 마켓 등을 운영 중이다. 그밖에, 서울무용센터에서 운영하는 주요 사업은 레지던시와 대관사업 외에, 랩(Lab) 시리즈, 국내외 교류, 웹진 〈춤:in〉이 있다. 특히 〈춤:in〉 좌담에서 생성되는 동시대의 흥미로운 담론들은 홀로 작업을 하는 내게 예술적 영감과 자극을 준다. 이러한 점은 무용 전문 매체의 유용하고도 바람직한 순기능으로 본다. 그간 무용 전문 센터는 공공기관으로서의 조금씩 정체성의 변화를 겪으며 나름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왔다고 할 수 있겠다.




워크숍 중 서울무용센터 연습실에서 ⓒ김현진




하지만 개인 창작자로서 내가 느끼는 서울무용센터와 나와의 거리감은 아직까지 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왜 그간 그 공간을 자주 이용해 보지 못했을까. 나의 개인적인 성향과 기관과 맞지 않은 탓인가? 아니면 나이? 나의 단절된 이력? 개인적 조건 탓인가? 여러 생각을 하다 보니 결국 원인을 ‘나’로 돌리고 있었다.

서울무용센터는 서울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공공재이다.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개방되고 더 많은 무용인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접근하기 어려운 공간이라면 공공의 목적과 기능에 반하는 것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선 그 원인을 찾고 대안과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 나는 나의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서울무용센터에 조금 더 욕심을 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애정을 담아. 부디 지금처럼 다양한 담론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비전과 통찰을 제시해주되, 좀 더 확장된 시각으로 다양한 계층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무용인들을 아우르는 기관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울무용센터가 무용 전문센터로서의 유일성에 지키느라 혹시 놓치는 것이 없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았으면 한다.

먼저, 매년 서울무용센터를 통해 선발되는 레지던시 아티스트와 매월 선발되는 (주로 무용 공연을 앞둔) 무용가들에게만 한정된 ‘전문성’과 ‘유일성’이 아니었으면 한다. 선발된 특정 우수한 무용인들이 무용을 대표할 수는 없다. 매년 쏟아져나오는 아직까지 경력이 일천할 수밖에 없는 신인 무용가들에게 또 흩어진 여러 형태로 조용히 예술활동을 이어가는 무수한 개인에게도 열린 공간이었으면 한다. 그들에게도 창작공간이자 담론의 장으로 또한 휴식의 공간이자 창작의 거점으로 수시로 개방되고 기회가 주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무용예술가들은 생각보다 많고 창작의 기회는 생각보다 적다. 세상의 변화한 만큼 창작의 방향성과 방법들도 달라졌다. 공모를 통해 걸러진 단체와 개인이 또 공모를 거쳐야만 이용할 수 있는 제한된 그들만의 공간이 아닌, 예측할 수 없는 기회라도 얻으려 항상 활동 공간에 목말라 있고 심리적으로 고립된 무수한 창작자들에게도 눈을 돌려 초대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공간의 대여도 대다수의 독립 창작자득에게 선별의 방실이 아닌, 간단한 기본 정보 입력 후 누구나 이용할 수 있고 대여할 수 있도록 수시대관의 형태로도 열려야 한다.

또한, 웹진 〈춤:in〉도 인터넷 플랫폼으로서 새로운 주제와 질문을 제시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좀 더 많은 양의 양질의 학술적, 실용적 내용의 데이터와 아카이브 구축이 필요한 듯 보인다. 그와 동시에 무용 창작 환경 조성을 위해, 진정으로 무용 창작자들이 창작 과정과 제작에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여 그들이 이 웹 공간을 통해 스스로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도록 플랫폼이 되어주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춤:in〉을 찾는 이용자들이 양질의 다양한 정보를 통해 스스로 학습하고 실험하고 길을 찾아가기를, 그곳에서 무용창작자들간에 자발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되기를. 그래서 담론과 활발한 논쟁 그리고 창작의 주체와 역동이 대다수의 시민인 무용 창작자들에게 조금씩 옮겨가기를, 그럼으로써 기관과 창작자 그리고 시민 모두가 균형을 이루는 공공의 장소가 되길 기대한다.

따뜻한 거점이자 활동의 기반이자 실험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놀이터이자 인적 지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장터로서 기능하기를 절절히 꿈꿔본다.

김현진

‘김현진의 춤공방’ 대표. 서울예고와 이화여자대학교 학부 그리고 대학원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하고, 영국 The University of Surrey에서 ‘무용문화와 역사 그리고 실제’ 분야의 석사를 마쳤다. 컨템퍼러리무용단 ‘탐’에서 무용수 활동을 거쳐, 독립 안무가로 지내며 〈나의 이야기〉(2022), 〈몸으로 자연으로〉(2016), 〈몸의 부호들〉(2015), 〈기괴한 도시〉(2014), 〈Nothing There〉(2004), 〈Discothéque〉(2003), 〈벗겨진...〉(2001) 등을 발표했다. 월간 「춤」에서 춤기행문과 「댄스포럼」에서 춤에세이를 연재기고한 바 있다. ​​​​

2022. 11.
사진제공_김현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