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2022년 3월 31일, 이날은 내가 처음으로 극장을 대관해서 현대무용 개인발표회를 가진 날이다. 올해로 나는 나이 50살이다. 나는 그간 긴 잠을 잔 듯하다.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의 세월 동안… 내 춤 인생의 시계는 사실상 죽어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들여다보지도 않았던 공연 이력서를 최근 다시 보게 되었다. 나를 다시금 국가 시스템의 기록에 잡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바로, 예술인활동증명서를 재발급받기 위해. 예전에 가까스로 증명서를 발급받아서 공연 관람 때마다 소정의 할인 혜택을 받은 게 다였기에 기대하는 바도 없지만, 그래도 손해 볼 건 없으니 다시 예술인활동증명을 받아보자 싶었다. 내심 점점 희미해져 가는 나의 정체성을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작용했는지 모르겠다.
김태진 영상×김현진 안무 댄스필름 〈Time Capsule Cafe〉(2012) 작업중 ⓒ김현진 |
그러고 보니, 나의 경력은 2018년 지인의 기획공연에 솔로 작품으로 찬조 출연한 게 전부인 채 멈춰 있었다. 그후 어떠한 공모사업에도 지원하지 않았을 뿐더러 창작활동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 탓에 나는 어디에도 잡히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잊어버린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찾아 과거의 공연경력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경력정보시스템의 빈칸에 채워 넣었다. 그리고선 두 달여가 지난 후, 한국예술인복지재단으로부터 나의 예술인 활동증명이 반려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다시 증명자료를 보완해서 가까운 시일 내에 재접수하라는 안내와 함께.
이유가 뭔지, 왜 이리 오래 걸리는지 기관에 문의했다. 그랬더니 과거의 공연경력은 인정되지 않으니 최근 3년간의 안무가로서 혹은 무용가로서의 역할이 확실한 증명자료만 기재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면 재심사 후 결과를 알려주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최소 두 달간의 심사 기간이 또 소요될 거라 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신청에서부터 결과가 나오기까지 거의 반년이 걸린다는 소리다.
이렇게 단순한 이유라면 진작에 예술가들에게 알려서 심사 기간을 단축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이게 몇 달씩이나 걸릴 일인가 싶었다. 워낙 예술활동증명을 하려는 예술가들이 많다 보니 행정처리에 시일이 오래 걸린다는 직원의 한숨 섞인 대답을 들으니 한편으로는 수긍도 됐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행정편의주의적인 처사 아닌가 싶어 화도 났다. 예술 활동을 증명하려는 예술인 수가 이렇게나 많다면 관련 시스템을 보완하고 확충하면 될 일이 아닌가 싶었다.
김현진 RTO 관객참여형공연 〈기괴한 도시〉(2014) ⓒ김현진 |
하지만 일개 개인이 당장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반려된 나의 ‘필요 없는’ 공연 이력을 하나둘씩 삭제 버튼을 눌러 얌전히 지웠다. 그러다 보니 3년 안에 적을 공연 결과물이 거의 없었다. 그간 뼈 빠지게 열정을 다 바쳐, 무용계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며 공연 활동이며 뭐며 닥치는 대로 해왔건만, 그건 다 어디로 사라진 건가. 최근 몇 년을 좀 쉬었기로서니 이렇게 없는 사람 취급해도 되는지, 좀 억울했다. 그럼 난 예술가가 아니란 소린가.
이런 기준이라면, 우리나라의 공연예술가로 혹은 무용가로 존재하려면 어떻게든 매년 꾸준히 공연발표를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3년 동안 빈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매년 어떻게든 공연을 해야 한다. 예술적 영감이 뭐 그리 중요한가, 재정 상태가 뭐 그리 대수인가, 작품의 질을 누가 따지는가, 그저 생산 라인에서 상품 찍어내듯 공연 공장을 주기적으로 가동시키면 된다. 그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이 요구하는 예술가의 의무이자 정의이다.
‘꾸준히’ ‘성실히’ ‘쉼 없이’ 적어도 그렇게만 하면 제도에서 인정하는 각종 크고 작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거기엔 예술가의 예술성, 작품을 하고 싶은 순수한 충동 혹은 작품을 할 수 있는 적절한 타이밍 그리고 작품의 영감 따위는 중요치 않다. 또한, 잠깐의 숨 고르기를 위한 휴식이나 공부 그리고 대체되는 예술 활동도 허용되지 않는다. 반드시 고정된 역할로 한눈팔지 말고 ‘나 여기서 공연하고 있어요, 저는 공연예술가예요~’를 외치며 헐떡이며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 그 생산물이 양품인지 불량품인지는 상관없다. 어차피 그 작품들을 확인할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증명이라는 것을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대부분 예술가, 특히 공연예술가들이 그렇듯이 정부 기관의 문화예술 창작 지원금의 수혜자가 되어야 그 증명이란 게 가능해진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공모사업의 성격에 맞는 기획과 팀을 꾸려 지원서를 내고 심사에 통과하길 기다려야 한다. 여기에서도 첫 번째 관문은 최근 3년간의 공연실적의 여부이다. 그것도 극장의 형태를 갖춘 곳에서의 공연실적 말이다. 제 아무리 훌륭한 예술가라도 최근 3년의 공연실적이 없으면 일단 도루묵이다. 유명하지 않은 예술가들은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이 모든 조건에 들어맞지 않는 나는 그간 서류심사단계에서부터 광속으로 탈락했다. 2018년 이후, 작품 활동을 접은 게 그 이유뿐만은 아니겠지만, 계속된 공모에서의 탈락으로 인해 지친 것은 사실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니 당장 몸은 편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불편했다. 가족들과 지내는 것도 점점 눈치가 보였다. 식구들 눈에도 열심히 하던 애가 집에 들어앉아 가족 돌본다는 핑계로 계속 놀고먹으니 속이 탔을 것이다. 이렇게 버틴 세월이 길어져 어느덧 50세, 나 또한 더 물러설 여지가 없었다.
김태진×김현진 영상전시와 렉쳐퍼포먼스 〈몸의 부호들〉(2015) ⓒ김현진 |
그간 너무나 오래 쉬었으니 한국의 예술가로 다시 진입해, 나를 입증할 무대가 될지 마지막 무대가 될지 실험해 보기로 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도 재촉하는 사람도 없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지체하지 말고 올해 상반기에 공연을 해보자 싶었다. 이제는 나라의 시스템에서 인정하는 보편적 기준의 공연 틀을 갖춰보기로 했다. 일단 공연장을 알아봤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어도 공연장 대관은 꽉꽉 들어차 있었다. 겨우 한 자리가 난 곳이 서울 한복판의 대극장, 그동안 서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큰 무대였다. 걱정 반 기대 반,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계약을 맺었다. 저 무대를 내가 어떻게 채울지 벌써 걱정이 앞섰다. 한편으로는 그간 대안공간이나 홀, 그리고 일상공간 등을 전전하며 활동을 이어온 터라 오랜만에 대극장에도 서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 나이 돼서야 처음 가져보는 개인 공연을 위해 대극장과 대관 계약을 맺다니, 감회가 새롭기도 하고 겁도 났다.
공연 날짜까지 주어진 시간은 약 두 달 남짓, 그때부터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무엇을 어떻게 누구와 해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나는 자칭 타칭 ‘독립 안무가 혹은 독립 무용가’로 불렸는데, 막상 공연을 준비하려니 난 전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가진 것도 없고 공연을 위한 준비도 전혀 안 되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카톡의 친구 리스트를 뒤져서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활동 휴지기가 길었던 탓에 공연관계자들과도 연락이 뜸했던 터라 오랜만에 공연 소식을 전하며 이런저런 설명을 하자니 좀 어색했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다. 다들 부족한 나의 예산과 빠듯한 시간 조건을 듣고 함께 작업하기를 꺼렸다. 어떤 이는 나의 기획을 듣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잠수를 탔고, 어떤 연출가는 나의 도움 요청에 화를 내며 전화를 끊기도 하였다. 아, 내가 또 이러고 있다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트라우마가 되살아난 것 같았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채로 공연을 올린다는 것, 그 과정에서 오는 많은 무리수와 보이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들.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나는 시간을 되돌린 듯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이제는 공연자금도 문제였다. 긴 백수 생활 동안 마련해 둔 비상금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가족에게 손을 내밀어야 했다. 온갖 타박을 들으며 오빠에게 겨우 돈을 빌렸다. 이 예산 안에서 무조건 해내야 한다는 각오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 주변 사람들의 인맥을 동원해 극장 기술감독팀과 스태프, 그리고 창작 예술가와 무용수들을 꾸렸다.
극적으로 팀이 꾸려지고 나니, 이제 빠듯하게 남은 시간이 문제였다. 공연일까지 남은 시간은 딱 한 달, 이 시간 안에 공연을 완성해야 한다. 앞뒤 잴 시간도 없이 숨 가쁘게 나와 주변을 몰아붙이며 한 달 만에 공연을 완성했다. 때론 울고 웃으며, 때론 화를 내거나 엄살을 부리기도 하고, 어쩔 땐 사기를 쳐가며 그렇게 무용수들과 공연관계자들과 함께 얼기설기 나의 최초, 대극장에서의 현대무용 개인발표회를 마쳤다.
김현진 워크숍공연 〈원본의재구성〉(2015) 진행중 ⓒ김현진 |
공연을 끝내고 나니 진이 빠지고 허탈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언제까지 이렇게 할 것인가라는 회의감과 피로감에 한동안 멍하게 지냈다. 그래도 공연을 함께 준비했던 분들과 만나 그간의 소회를 밝히며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뒤풀이 시간을 가졌다. 모두 기꺼이 그 시간을 즐겨주셨다. 감사했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숨을 돌려 이번 작품의 브로슈어를 다시 훑어본다. 거기에는 작품을 위해 모였던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보였다. 기꺼이 자신의 재능과 시간 그리고 열정을 쏟아준 수많은 사람들.
이 시점에 다시 되새겨 보려 한다. 과연 나는 독립 안무가인가? 독립 안무가는 어떻게 정의되는가? 나는 아직도 한참 미약하고 어쩔 수 없이 때에 따라 뻔뻔하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한다. 언젠가 당당하게 나의 작업에 함께하는 창작자들에게 그들의 능력에 맞는 페이를 기꺼이 지급할 날을 꿈꾸는, 그리고 매 순간 나의 경력을 증명해야 하는 ‘오래 오래된’ 신인 무용가 ‘김현진’일 뿐이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떠올리며….
김현진
'김현진의 춤공방' 대표. 예고와 학부 그리고 대학원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하고, 영국에서 '무용문화와 실기과정' 석사를 마쳤다. 컨템퍼러리무용단 ‘탐’에서의 무용수 활동 이후, 독립 안무가로 지내며 〈나의 이야기〉(2022), 〈몸으로 자연으로〉(2016), 〈몸의 부호들〉(2015), 〈기괴한 도시〉(2014), 〈Nothing There〉(2004), 〈Discothéque〉(2003), 〈벗겨진...〉(2001) 등을 발표했다. 월간 「춤」, 「댄스포럼」에 춤기행문과 춤에세이를 연재기고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