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지구와 예술 – handshaking
퍼포머와 함께 걷기, 새로운 감각과 사유
한석진_무용학자

5월 16~29일 사이 2주간 ‘지구와 예술 – handshaking’ 전시가 서울 용산구 소재 전시·퍼포먼스 공간 윈드밀에서 열렸다. 이 전시는 서울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4개 창작공간(금천예술공장, 서울무용센터, 신당창작아케이드, 잠실창작스튜디오)의 전·현 입주 예술가 14명이 참여한 ‘공동창작 워크숍’의 결과물이었다. 2021년에 3회차를 맞이한 이번 공동창작 워크숍은 지구와의 관계 맺기를 주제로 설정하였으며, 14인의 예술가들은 3개의 팀 움닷(김현진, 문서진, 송주원, 이우주, 장해림, 전보경), 비둘기들(김은설, 김하경, 이민희, 정원, 정혜정), 뷰티풀플랜(김영미, 손상우, 이선근)으로 구성되어 팀별로 주제, 질문, 방향성을 구체화해 작업을 진행하였다.

서로 다른 매체와 주제를 다루는 예술가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장을 제공함으로써 상호교류와 협업을 통해 새로운 창작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기획 의도는 다소 순진한 생각으로 느껴졌는데, 이는 공동의 주제 아래 각자의 작업을 하는데 머무르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와 예술 – handshaking’에서는 실제로 공동의 창작물을 만들어 내거나 다른 장르의 예술가와의 협업과정을 거쳐 자신의 기존 작업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에 도전하고 있는 몇몇의 작업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글은 그렇게 발견한 작업 중 하나로 움닷의 김현진 안무가의 주도 아래 창작된 ‹
잇ㄱ(2022)을 주목해보려고 한다.




‘지구와 예술 – handshaking’ 전시장 내부 모습



문서진&송주원 〈말문이 막힐 때, 옥수수수수수수수수수수수〉




회화, 공예, 설치, 퍼포먼스, 춤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 6명으로 구성된 움닷은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지구에 살고 있는 다른 생명체들을 바라보고 관계 맺기를 시도하고 지구의 주인으로서 인간의 위치에서 벗어나길 종용한다. 김현진 안무가는 수많은 지구 생명체 중에서 이끼에 주목한다. 이끼가 지구에서 살아온 방식을 관찰하고 이를 통해 인간이 세상, 환경, 타인과 마주하는 방식을 성찰하는 과정을 퍼포먼스로 풀어낸다. 김현진 안무가는 그동안 퍼포머, 안무가로서 극장춤을 중심으로 작업을 해왔던 것과는 달리 이번 작업 ‹잇ㄱ›은 퍼포머와 관객이 일대일로 진행되는 산책형 공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시각예술, 영상, 퍼포먼스 기반의 다른 예술가들과의 참여와 피드백 공유를 통해 이 작업을 발전시켰다고 안무가가 밝혔듯, 이러한 협력적 창작과정이 안무가의 새로운 형식에의 도전에 영향을 주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현진 〈읷〉 전시장 내 퍼포먼스 공간




전시가 진행되는 2주간 매일 오후 4시부터 약 1시간 30분~2시간가량 단 1회만 진행되는 일대일 퍼포먼스는 전시장 한 켠에 위치한 돗자리에서 시작되고 끝이 난다. 관객은 작품의 안무가이자 퍼포머인 김현진과 마주 앉아 몸의 센서로서 은유되는 솜털을 깨우는 몸 탐색 시간을 갖고 난 후, 그녀와 함께 전시장 건물 뒤편의 언덕길 걷기를 시작한다. 필자가 관객으로 참여한 3일차 퍼포먼스 당일 아침에는 비가 내린 후 날이 개었던 터라 공기가 매우 쾌청했고 봄 햇살이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주변 자연환경을 온전히 느끼는 혼자만의 시간이 잠시 주어졌고 이후 퍼포머와 함께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곳곳에 숨겨져 있는 이끼를 만나게 되었다. 우연히 만난 이끼 또는 이끼로 착각한 식물들을 휴대용 현미경을 이용해 그 생김새를 관찰했다. 이끼에 분무개로 물을 뿌리면 즉각적으로 물을 흡수하여 색깔이 변하고 반짝거리면서 풍성해지는 과정을 보고 전부 똑같은 이끼로 보이지만 각기 다른 잎 모양을 가진 다양한 종류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퍼포머는 풀과 나무보다 앞서 지구에 존재했고 약 5억 년 동안 지구의 틈새를 메워왔던 이끼의 생태에 대한 이야기를 천천히 시작했다. 습기가 있는 바위, 나무, 작은 식물에 헛뿌리로 몸을 지지해 달라붙어 사는 이끼는 눈에 띠지 않지만 지구에 스며들어 늘 존재해왔다. 식물이 전혀 없는 곳에 맨 먼저 정착하면서 생겨난 부식토로 다른 식물들이 뿌리내릴 수 있게 하고 작은 동물들의 안식처와 음식을 제공하는 등 이끼는 생태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퍼포머는 관객에게 자신이 원하는 곳에 가서 피부를 맞대어 관계를 맺어보길 제안했다. 즉 스스로 이끼가 되어보고 자신이 이 지구상에서 어떤 것들의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길 권했다. 이는 특정한 미션을 주고 이를 시간 내에 달성해야 하는 방식이 아닌 관객이 원하는 곳에 가서 원하는 시간동안 자유롭게 움직이며 사유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한참 동안 퍼포머와 나는 세계, 자연, 타인과 마주하는 방식과 태도에 대한 개인적 이야기를 나누었고 정처 없이 걷다보니 다시 전시실로 돌아왔다. 퍼포머가 제공하는 시원한 차 한잔을 마시면서 소감을 나누고 퍼포먼스는 끝이 났다.




김현진 〈읷〉 퍼포먼스 중 만난 이끼 모습




이 작품은 국내에서 다소 생소한 산책형(promenade) 공연 형식을 띠고 있다. 2010년 이래로 유럽을 중심으로 성행한 산책형 공연에서 관객은 퍼포머를 따라 공간을 이동하며 다닌다. 극장 공간보다는 옥외의 특별한 장소 또는 자연 속에서 진행된다는 점에서 장소특정형 공연과 유사하나, 산책형 공연은 걷기라는 행위를 작품의 주된 요소로 포함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산책형 공연에서 걷기는 단순히 장면과 장면을 넘어가기 위한 행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걷기 그 자체는 작품이 창조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을 수행하는데, 관객은 걷기를 통해 다른 감각과 사유로 이끄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잇ㄱ〉에서의 걷기는 프랑스 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Frédéric Gros)가 자신의 저서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2014[2008])에서 말하는 걷기의 철학적 의미를 상기시킨다. 그로가 말하길, 우리는 걷기라는 행위를 통해 자유와 해방을 경험할 수 있다. 걷다보면 풍경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이렇게 풍경과 뒤섞이면서 잠재되어 있는 감각은 깨어나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다른 감각과 사유가 가능해지면서 그동안의 강박, 경쟁,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성지 순례, 정치적 행진과 같은 목적형 걷기뿐 아니라 목적이 없는 산책과 소요와 같은 다양한 걷기의 특징을 분석한 그로는 산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산책한다는 것이 갑작스럽고 단순한 휴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치 걸음을 멈추는 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산책은 오히려 리듬이 달라지게 만든다. 즉, 억압받던 팔다리와 영혼의 능력을 해방시킨다. 산책을 한다는 것, 그것은 우선 억압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나의 여정과 나의 리듬, 나의 표상을 선택할 수 있다.”1)


잇ㄱ〉에서 이끼의 생태에 대한 관찰과 발견은 걷기라는 행위를 통해 주변을 감각하고 일상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몸의 리듬을 인지하며 자유로워지는 과정을 경험하도록 이끈다. 이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객석에서 앉은 상태에서 요구되는 고도의 집중이 아닌 긴장을 풀어 감각을 열어놓은 수용적 상태에서 얻게 되는 해방이자 치유적 경험이다.


산책형 공연은 관객으로 하여금 공간을 이동하면서 퍼포먼스를 경험한다는 점에서 이머시브 공연과도 그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머시브 공연에서 관객은 걷기(ambulation) 보다는 탐구(exploration)에 가까운 행위를 한다고 볼 수 있다.2) 예술가에 의해 창조된 극 중 공간 속으로 관객이 실제로 들어가 이야기를 체험하는 이머시브 공연의 대표적인 단체 펀치드렁크(Punchdrunk)의 작품 〈익사자: 할리우드 이야기(The Drowned Man: a Hollywood Fable)(2013)를 필자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 바 있다.3) 공연자를 쫓고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관객은 각자의 방식으로 스토리를 구성하고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참여한다. 이러한 공연 형식은 관객에게 공동저자의 권한을 주어 평등주의와 반권위주의를 실현한다고 볼 수 있으나, 고정된 경쟁 구조 속에서 관객은 이야기 자체를 변형시키거나 통제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주체적인 소비자가 되어 더 만족스러운 개인의 경험을 충족하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산책형 공연으로서 〈
잇ㄱ〉의 걷기가 의미하는 바는 이머시브 공연에서의 걷기와 대조적 성격을 가졌다고도 볼 수 있다. 특별한 집중과 소유를 요구하지 않으며 경쟁과 목적에서 벗어나 그저 감각을 열어두고 지구와 환경과 대화하길 지향하는 작품 〈잇ㄱ〉은 걷기를 넘어 심지어 뛰기를 요구하고 소비와 소유를 독려하는 이머시브 공연의 신자유주의 논리를 철저히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책형 공연과 더불어 〈
잇ㄱ〉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또 다른 특징은 일대일 (One-to-One) 공연 형식이다. 한 명의 관객을 초대하여 공연을 경험하도록 하는 일대일 공연은 일반적으로 5분에서 10분 정도의 공연 상호작용을 만드는 데 반해 〈잇ㄱ〉은 2시간이라는 극대화된 일대일 경험을 제공한다. 퍼포머와의 일대일 상호작용을 통한 공연 경험은 매혹적이지만 공포스러울 수 있으며, 자유롭지만 지루할 수 있고, 친밀하지만 불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대일 퍼포먼스에서 관람객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규정되지 않은 반응적이고 변증법적인 과정을 통해 퍼포머와 공유된 경험을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공연학자 레이첼 제리한(Rachel Zerihan)에 의하면, 일대일 공연은 퍼포머와 관객 모두에게 종종 자발성, 즉흥성, 위험성을 야기하고 신뢰, 약속, 의지를 요구한다.4) 관객에게 책임감이 부여되나 이것이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요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퍼포머 역할의 중요성이 더욱 더 강조된다. 〈
잇ㄱ〉의 공연 시작 무렵 퍼포머는 공연 과정 속에서 나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으나, 답변하길 원치 않으면 안 해도 괜찮다고 안내해주었다. 공연 내내 퍼포머는 과제를 주기 보다는 제안을 했으며, 어떠한 생각도 강요하지도 않았다. 내가 원하는 시간 동안 원하는 곳에 가서 원하는 것을 하도록 열어두었다. 일대일 공연으로서 〈잇ㄱ〉은 관객의 역할이 강화된 수행적 실천을 만들어가지만 관객에게 어떠한 강요된 역할을 부여하기 보다는 관객이 감각을 깨워 환경과 스스로 마주할 수 있는 상태와 신뢰하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공연 말미에 퍼포머와 마주앉아 차를 마시며 공연에 대한 경험을 나누면서 필자는 퍼포머에게 이런 말을 했다. “긴 시간 함께 걷는 동안 퍼포머님은 저에게 이끼처럼 존재하셨던 것 같아요.” 공연 내내 존재하지만 눈에 띄지 않으면서, 나의 걷기에 뒤섞여 들어와 다른 감각과 사유를 열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김현진의 〈
잇ㄱ〉은 지구와 마주하는 몸을 이끼라는 생명체를 빗대어 탐색하기 위해 산책형 일대일 공연이라는 새로운 공연 형식을 시도했다. 이끼가 생태계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발견은 긴 시간동안 걷기라는 행위를 통해 지구와 마주하는 방식에 대한 감각과 사유로 이어졌고, 이는 관객이 지구와 또 다른 관계 맺기를 할 수 있도록 옆에서 이끼의 역할을 수행해준 퍼포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2시간 동안 온전히 한 사람만을 위해 진행되는 공연이 과연 공연예술 시장 속에서 작동 가능한 형태인가, 관객의 자발적 실천과 노력이 필시 요구되는 특성상 공연의 내용과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갖춰져야 할 구성적 요소와 장치가 무엇일까 등에 대한 좀 더 세밀한 고려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잇ㄱ〉은 작품이 추구하는 내용과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식으로써 새로운 공연 형태를 고안하여 시도했다는 점에서 동시대 공연 현장에 시사점을 제공한다.



참고문헌
1) 프레데리크 그로(2014[2008]).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서울: 책세상, p.236.
2) Matt Trueman (2014. 6. 19) Theatre goes walkabout: these shows really move audiences. Guardian. https://www.theguardian.com/stage/2014/jun/19/theatre-goes-walkabout-audiences-get-on-their-feet
3) 한석진(2019). 이머시브 퍼포먼스에서의 관객성에 대한 고찰. 한국예술연구. 23, p.69.
4) Rachel Zerihan(2009). One to One Performance. London: Live Art Development Agency, p.3.

한석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서 무용이론 전공 예술사 과정 후 영국 서리대학교에서 무용학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2022. 6.
사진제공_한석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