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작년 12월,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은 해마다 진행해오던 〈호두까기인형〉 서울 공연을 취소해야만 했다. 〈호두까기인형〉은 두 발레단 모두 30년 넘게 무대에 올린 작품으로 크리스마스와 송년이라는 시즌 특수도 있지만 검증된 인기로 안정적인 수익 창출이 기대되는, 말하자면 발레단들의 ‘효자상품’이다. 때문에 공연의 전격 취소로 인한 타격은 매우 컸다. 본지에서는 국립발레단과의 서면 인터뷰 기사(춤웹진 2021년 1월호 「〈호두까기인형〉마저 취소해야 했다」, http://koreadance.kr/board/board_view.php?view_id=256&board_name=dance_scene)를 통해 피해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전달한 바 있다. 또, 강도 높은 구조조정으로 인해 연초에는 발레단 내부사정을 전할 수 없었던 유니버설발레단의 소식은 춤웹진 2021년 6월호 기사 「구조조정 속 공동기획 추진」(http://koreadance.kr/board/board_view.php?view_id=261&board_name=dance_scene)으로 게재했었다.
올해 들어 공연장에 대한 거리두기 지침이 보다 유연해지면서 공연계는 비교적 정상적으로 운영되어왔다.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의 〈호두까기인형〉 또한 작년 취소 사태 이후 배가된 기대감을 반영하듯 조기매진 되었다. 이에 2년 만에 재개된 〈호두까기인형〉의 현장을 다녀왔다.
유니버설발레단, 동심을 지켜라
유니버설발레단 〈호두까기인형〉이 열린 세종문화회관 로비 ⓒ유니버설발레단 |
유니버설발레단이 세종문화회관에서 〈호두까기인형〉을 올린 것은 2005년 이후 16년 만이다. 겨울철 코로나 대유행과 작년 취소 경험을 생각하면 다시 한번 대극장 공연을 시도하는 것은 발레단 입장에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터이다. 주말 공연의 경우 오케스트라까지 포함하면 320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되는 프로덕션인지라, 발레단 측은 매주 PCR검사와 자가진단 키트를 병행하는 등 자체적인 방역을 강도 높게 진행해왔다고 한다.
필자가 관람한 18일 오후 2시의 개막공연에서는 지난 6월의 〈돈키호테〉에서 주역으로 첫 선을보인 17세의 김수민이 클라라를 맡았는데 이것은 쉽게 만나기 힘든, 배역의 나이와 실제 나이가 모처럼 행복하게 합치하는 경우일 것이다. 노련한 성인 발레리나들이 10대를 ‘연기’하는 것과 실제 10대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가벼움과 순수함에 있어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왕자 역의 간토지 오콤비얀바의 배려 있는 리드 속에 김수민의 표정과 춤은 동경으로 가득 찬 소녀를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유니버설발레단 〈호두까기인형〉 김수민과 간토지 ⓒ유니버설발레단/Kyoungjin Kim |
유니버설발레단의 버전은 크리스마스를 오롯이 아이들의 것으로 돌려주는 따뜻한 분위기에 강점이 있다. 클라라와 프리츠, 그 친구들의 춤은 윤무를 기본으로 하여 양손을 위로 뻗어 흔들어 경쾌하고 즐거운 풍경을 그려낸다. 총을 든 친구들 무리 앞에서 프리츠는 빗자루 형태의 장난감 말을 타고 앞장서는데 어디까지나 아이다운 범위 내의 단순한 동작들로 이루어져 있다. 좀 더 세밀하고 본격적인 동작이 들어가는 병정들의 춤은 중학생 정도의 그룹이 소화해냈는데, 성인처럼 허벅지 근육이 발달되지 않은 상태의 주니어들이 서로 잘 맞춘 다리 움직임으로 매끈하면서도 또각거리는 목각 인형의 느낌을 근사하게 구현해 낸 것은 또 하나의 볼거리였다. 이렇게 아역이라도 보다 세분화된 연령별 춤을 그것도 매우 단합된 모습으로 선보였다는 점에서 유니버설발레단 산하의 아카데미 학생들이 이 발레단의 든든한 자산임을 짐작하게 된다.
유니버설발레단 〈호두까기인형〉 ⓒ유니버설발레단/Kyoungjin Kim |
작은 인형으로 된 새끼 쥐를 등에 매단 생쥐왕의 모습은 공포스럽다기 보다는 사랑스러웠으며, 클라라가 생쥐 떼를 한 번 물리치고 난 다음 보장되는 환상의 세계는 복잡한 생각을 잊게 한다. 예술의 가치를 위로보다는 혁신과 선도 쪽에 두는 입장에서는 유니버설 버전의 〈호두까기인형〉이 무척이나 안온한 꿈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달콤한 미덕이 요즘 특히나 더 필요한 것임도 부인할 수 없다.
한편, 근래 세계 각국의 〈호두까기인형〉 개정 동향에 대해 언급한 프로그램북 속 한정호 씨의 기고문은 비록 이번 공연에 반영되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고려해볼 만한 내용이었다. 낭만적이고 자유로운 크리스마스를 표현하고자 하는 지향점이 뚜렷한 1막에 비해, 2막의 디베르티스망은 늑대와 아기양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내용면의 긴밀함이 없어 다소 느슨하게 느껴졌었다. 각 나라 인형들의 춤 원곡에 에스닉한 색채가 강해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다국적 단원이 융화되어 움직이는 유니버설발레단에서라면 보다 동시대의 감각에 맞춘 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장엄한 어른들의 동화, 그리고로비치 버전의 국립발레단
국립발레단은 12월 4일 대구 공연 중 확진자 발생으로 5일의 대구, 10~11일의 전주, 14일~19일의 서울 공연이 취소되는 불운을 겪었다. 나머지 21일부터 26일까지 총 8회차로 진행된 공연 가운데 필자는 25일 2시 심현희(마리)-허서명(왕자) 캐스팅을 관람했다.
2019년엔 〈호두까기인형〉 마지막 공연이 KBS생중계로 송출되기도 했는데, 당시에는 1막에 마리(클라라)와 프리츠, 그 친구들로 다수의 아역이 출연했었다. 국립발레단 측에 따르면 최근 노동부에 허가를 받아야 하는 사항(야간 노동 등)이 많아지고 여러 사정상(아마도 방역 관리 문제가 컸을 거라 짐작된다) 아역들의 출연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고로비치의 원 안무를 보면 아역이 아닌 여성 단원들이 맡는 것으로 되어 있고 춤의 성격, 전체 줄거리 흐름과 연출로 보아도 아역보다는 성인이 맡는 것이 자연스럽다.
칼을 들고 추는 소년 군무는 아역들이 소화하기에 버거워 보이는, 그리고로비치 특유의 강인한 남성적 동작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여성 단원들에게도 상당한 도전이 될 만하다. 어른의 춤을 축약하여 추는 아이들의 모습, 성장(盛裝)한 어른들이 술을 마시고 무도를 즐기는 모습을 보면 이 크리스마스 파티에서는 아이들이 주인이 아니라 잠시 초대된 것처럼- 주요 사건이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대에 일어나는 점을 고려하면 당연할 수도 있다- 보인다.
무엇보다 그리고로비치의 〈호두까기인형〉(1966년)은 〈백조의 호수〉(1969년)의 예고편과도 같다. 그리고로비치 버전의 〈백조〉에서 로트바르트가 왕자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그의 내면의 어두움을 자극하고 조종한다는 해석은 〈호두〉에선 마리(클라라)-드로셀마이어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비록 마리(클라라)가 왕자와 결혼하는 클래식발레의 전형적 결말과 타협하긴 했지만, 드로셀마이어는 소녀 마리(클라라)를 의지를 가진 여성으로 ‘의도적’으로 조종하고 성장시킨다.
드로셀마이어가 착용한 새부리마스크와 날갯짓, 특히 크리스마스 트리를 키우고 성인 마리(클라라)가 깨어나면서 부터의 2인무는 〈백조〉 1막 후반부 왕자-로트바르트의 2인무와 놀랍도록 닮았다. 갑자기 어른이 된 마리가 느끼는 두려움과 혼돈은, 격렬하게 에너지를 분출하는 꾸뻬 쥬떼 연속동작 후 소파에 뛰어들어 흐느끼는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드로셀마이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생쥐떼와 호두병정들을 불러 모아 전투판을 펼쳐 지켜보게 한 다음, 망설이는 마리에게 촛대까지 쥐어주면서 두려움을 이겨내고 실행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리고로비치는 고약하게도(!) 여기서 그치지 않고 1막의 피날레에서 생쥐 왕과 드로셀마이어가 커텐에 매달려 인사하게 함으로써 존재감을 유지시키고 2막 크리스마스 랜드에서도 쥐떼가 쫓아오게 하는 설정으로 인생의 어두움, 위협적인 무리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충고를 건넨다.
국립발레단 〈호두까기인형〉 ⓒ국립발레단/손자일 |
아이가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은 단순한 마음으로 용기를 내 쥐떼를 물리친 후 어른들의 보호 속에 행복을 누리는 유니버설의 바이노넨 버전과 비교하면 이 그리고로비치 버전은 크리스마스를 가장한 성년식의 냉엄한 통과의례를 담고 있는 셈이다. 대신 그 보상은 더욱 달콤하다. 단순한 장식 내지 소유물이었던 인형들이 진정한 친구가 되며(1막의 소품과 2막의 캐릭터를 긴밀하게 연결한 안무가의 혜안이 돋보인다) 결혼식은 더욱 장엄하게 펼쳐진다. 물론 여기에 유럽과 아시아를 모두 호령하고 속국으로 삼던 제국주의-소비에트 체제의 시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국립발레단 〈호두까기인형〉 ⓒ국립발레단/손자일 |
국립발레단의 공연은 화려한 의상과 세트, 눈부신 조명과 함께 겉으로는 흠잡을 데 없이 펼쳐졌다. 다만 위대한 안무가의 철학이 그다지 고려되지 않은 채 소비되는 느낌이 있다. 별로 중요한 사항이 아닌 것 같지만 그간 이 작품의 주역 마리-클라라의 이름이 상황에 따라 여러 차례 바뀌었다는 것은 그만큼 관람자가 동일시, 투사하는 효과를 의식한 것임을 생각해보자. 적어도 이 버전은 ‘금발의 왕자님’(그리고로비치 버전은 분장과 염색 등을 동원하여 항상 금발의 왕자로 등장시킨다)을 구원할 평범한 소녀가 성인의 세계로 들어설 때의 ‘성장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볼쇼이의 80년대 영상물에서 호두까기 인형조차 성인 여성무용수가 담당한 것을 보면, 안무가는 이 〈호두까기인형〉을 완전한 어른들만의 동화로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국립발레단 〈호두까기인형〉 ⓒ국립발레단/손자일 |
〈호두까기인형〉은 분명 차이코프스키의 아름다운 음악, 꿈꾸는 듯 환상적인 볼거리의 집합체, 연말의 선물 같은 작품이다. 연례행사처럼 치러질 때는 미처 몰랐던, 2년 만에 맛볼 수 있던 행복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쉽사리 끝나지 않는 팬데믹 속에 확인하고 싶은 것은 표면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예술가다운 메시지를 보낼 수 있게 잘 벼려진 정신들이다. 그 헛헛함에 국립발레단의 공연들을 보고와도 좀처럼 포만감이 들지 않는 안타까움이 있다.
방희망
2013년 제1회 한국춤비평가협회 춤비평신인상을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현장 비평가로 다양한 춤 공연에 대한 비평작업을 하고 있으며, 한국춤비평가협회 정회원, <춤웹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