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벚꽃 피는 순서대로’ 지방대가 문을 닫는다는 그 순서에 대구가톨릭대 무용학과가 들었다. 재학생(졸업생)들의 반발이 있었다. 시위도, 소란도 없이 소통을 통한 이들의 외곬이 ‘생활무용트랙’이라는 또 다른 춤 환경을 학교로부터 받아들었다. 이 환경은 시대(현실)에 따라 또 부침하겠지만 춤을 추고자 하는 학생들은 주어진 환경이 어떤 것이건 그 틈 속에 춤이 자리 잡을 자리를 마련할 것이다.
오레지나(대구가톨릭대 교수)무용단의 〈대구로(路)-춤으로 푸는 대구 이야기〉(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5월23일) 공연이 있었다. 지금 서 있는 자리(존재)의 불안함과 춤을 추고 있다는 충만함의 대립과 갈등. 다시 말하면 존재의 불안이 춤을 삼켰다가 다시 춤이 존재의 불안을 삼키는 시간을 고통스럽게 견디며 춤을 무대에 올린 힘은 뭘까? 총 5장으로 구성된 춤의 주제가 공교롭게 ‘대구로(路)’다. 오레지나에게 대구의 모든 ‘길(路)’은 춤으로 ‘인연’을 맺고 춤이 ‘기회’가 되어 춤으로 ‘희망’을 꿈꾸는 ‘공간’이었고 나침반이었을 것이다.
오레지나무용단 〈대구로(路)-춤으로 푸는 대구 이야기〉 ⓒ오레지나무용단 |
1장 ‘안심로’는 대구 동구 안심지역으로, 다르게는 ‘반야월’이라 불린다. ‘왕건이 후백제 견헌의 추격을 피해’ 이 지역에 이르렀을 때 하늘에 반달이 떠서 도주로를 비춰주었고, 이곳에서 비로소 ‘안심(安心)’하게 되었다는, 지명의 유래를 이야기를 들려주듯 춤으로 쉽게 풀어낸다. 이야기는 논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진실과 허위를 막론하고 감정에 물질적 구체성을 부여함으로써 움직일 수 없는 사물처럼 된다. 하늘에 ‘반달이 떠서 도주로를 비춰’ 주었다는 이야기는 부정할 수 없는 축적된 경험과 진실을 담고 있기에 이야기를 옮겨놓은 춤은 춤으로써 힘을 얻게 된다. 두 그룹으로 나뉜 군무진의 춤, 그 가운데로 왕건(신정민)이 쫓기듯 뛰어들어 춤 뒤에 몸을 숨기는가 하면, 군무진에 스며들어 같이 춤을 추고 다시 뛰쳐나가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같이 달(반달)을 바라보는 것으로 정리되는 춤. 왕건(신정민)의 불안정한 춤과 표정, 그 불안정함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되었다.
오레지나무용단 〈대구로(路)-춤으로 푸는 대구 이야기〉 ⓒ오레지나무용단 |
2장, 근대로. 대구에서 발단된 국채보상운동(1907), 개화기 근대문화와 선현들의 충절을 춤으로 풀어낸 장. 대구에는 이상화 고택과 ‘국채보상로’ 길이 있다. 비수를 품듯, 손에 작은 기(旗) 를 말아 쥐고 고름이 없는 짧은 길이의 얇은 흰색 천 두루마기를 입은 무용수들. 여리지만 맑고, 올곧은 정신을 그려내는 기교 없는 담백하게 추는 춤과 의상이 조화가 좋았다. 건, 곤, 감, 리가 그려진 기를 가슴에 품고 추는 춤이 태극을 든 솔로(엄선민)와 합해지며 무대는 건곤감리와 태극이 풀어진 춤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선현들의 흑백 초상을 배경으로 마무리 되는 춤, 다소 허전하게 느껴진다. 춤이 모호해서도, 이해하는 데 크게 무리가 있어서도 아니다. 선현들의 치열한 정신. 그 치열함이 춤에 채 담기지 않아서다. 기교가 걷힌 엄선민(솔로)의 춤, 단정하고 의젓했다.
오레지나무용단 〈대구로(路)-춤으로 푸는 대구 이야기〉 ⓒ오레지나무용단 |
이어 대구지하철 참사(2003년)가 있었던 ‘중앙로’를 위무의 춤으로 풀어낸 3장. 천장의 조명 프레임이 무대 한가운데 내려 와있다. 기억을 소환하려는 듯, 불이 이는 어두운 지하철 역사를 보여주는 영상. 무대는 무겁고, 어둡고, 좁고, 답답하다. 불이 한차례 지나간 듯한 색의 자줏빛 의상, 흰색 가는 끈이 두 가닥 등 쪽에 달렸다. 가야금 소리에 얹은 춤, 가느다란 흰색 끈이 마치 살풀이 수건처럼 춤을 따라 이리저리 날린다. 이미지가 많고 섬세한 춤이다. 말하고자 하는 이미지로서의 춤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자리(길)를 기억한다는 것, 그리고 아직도 그 자리(길)가 감옥인, 남아있는 이들을 위해 춤을 춘다는 것, 또 다른 춤적 실천이다.
오레지나무용단 〈대구로(路)-춤으로 푸는 대구 이야기〉 ⓒ오레지나무용단 |
4장 ‘동성로’, 대구의 중심번화가이자 젊은이들의 광장이기도 한 거리(길)다. 모두 컬러 마스크를 썼다. ‘컬러풀 대구’를 상징하는 색이 번졌다 사라지는 영상을 배경으로 빠른 회전과 튀어 오르는 춤으로 시작, 춤이 이어진다. 젊은이들의 무모한 시도와 열정, 드러내거나 감추고 있는 욕망, 기성사회로부터의 고의적 소외 등 좀 더 복잡하고 다양한 자기들 문화의 독립성이 있을 것이다. 이를 고민한 흔적이 담겼어야 했다. 현재, ‘동성로’의 이미지와 맞지 않은 의상도 한 역할을 했다. 마지막, 마스크를 벗어 들고 추는 춤은 코로나가 없었던 길, 혹은 사라질 날을 기다린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로 읽힌다. 그리고 5장, 커튼콜 형식으로 풀어낸 ‘대구로’는 무거웠다.
매순간 늘 독창적일 수는 없다. 우리가 가는 모든 길이 우리를 둘러싼 저 사회적 조건들과의 싸움처럼 춤도 마찬가지다. 이 싸움에서 늘 비명을 지르고 쓰러지게 마련이다. 오레지나 무용단의 역사와 예술적 성격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 모든 조건이 제거된 춤 세계를 상상해보는 것, 거기에 눈부신 춤의 얼굴이 있을 것이다.
오레지나무용단 〈대구로(路)-춤으로 푸는 대구 이야기〉 ⓒ오레지나무용단 |
폐과라는 이번 사태를 겪으며 그 종류와 깊이는 다르지만 모두 조금씩 상처들을 입었다. 그러나 상처는 고정된 상태로 치유를 기다리는 고통의 자리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춤추기의 뿌리일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이며, 그 결과가 될 것이니까. 그리고 어떤 법칙이건 법칙을 만들어 가졌다고 해서 반항이 끝났다고 해서도 안 될 것 같다. 다르게 생각하면 어떤 법칙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든 반항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순응하는 방식으로 그 반항의 형식을 넓히는 것 말이다. 춤추는 이들이 춤으로 반항하는 것, 누구도 제지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것이 반항의 형이상학이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