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최희선 선생을 기리는 춤 〈고 최희선, 대구의 푸른 춤을 지키다〉(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11월 20일) 무대가 있었다. 대구문화예술회관 기획공연으로 지난해 10월에 〈권명화의 명무전-대를 잇는 춤의 맥〉에 이어 그 두 번째 무대다. 지역의 춤 자산을 보존 전승하는 것이 곧 대한민국의 춤 자산을 보전 전승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의미에서 좋은 기획이었다.
중국철학에 “달 그림자 온 강에 비치니, 도처가 원만하다”는 유명한 비유가 있다. 최희선을 기리는 ‘대구 춤’은 윤미라의 〈달구벌 입춤〉, 임관규의 〈한량무〉. 장유경의 〈선살풀이춤〉, 최미나의 〈한〉...또 〈입춤〉 등 각기 하나로 의미를 가지고, 이 춤들은 ‘대구의 푸른 춤’으로 모두 일체가 되었다. 말하자면 무용가 개인이 추는 춤이 곧 온전한 하나의 춤으로 완전하였고, 그 춤들은 다시 ‘대구의 푸른 춤’으로 하나가 되는, 진실한 무대였다. 윤미라를 비롯한 춤꾼들이 이 무대를 위해 해온 유대와 연민과 책임감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춤으로.
공연기획자 장승헌의 사회로 최희선 선생이 생전에 추시던 춤 영상과 함께, 그가 기억하는 선생의 춤 역사를 듣는다. 그의 기억으로 구제되는 것은 최희선 선생의 과거만이 아닐 것이다. 자기 마음의 풍경으로 여겼던 춤과 함께한 시간들에 대한 기억일 것이다. 무엇이 되었건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춤(무대)뿐이다. 무대에 오를 춤과 춤꾼들을 소개하는 장승헌의 말에 애정이 묻어났다. 시간이 지나면 춤 무대의 삶과, 그가 춤과 나누었던 우정의 내용은 흩어져 바람이 되겠지만, 춤에 대한 기억의 요소는 다른 무엇이 되어서도 남아 있을 것이다. 단정하게 정리된 기억으로.
윤미라 〈달굿 中〉 ⓒ옥상훈 |
〈무악지선〉ⓒ옥상훈 |
첫 번째, 창작 춤 〈달굿 中〉(윤미라 안무)은 장구의 기본요소만 뽑아 작게 제작한 장구를 메고 민소매의 흰색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정연하게 추는 춤 구성과 깨끗한 춤 선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그리고 권민정, 봉정민 외 10명이 춘〈무악지선〉은 생황과 피리와 요고, 공후를 연주하며 하늘을 날며 춤을 추는 천인(天人)의 모습을 형상화한, 보는 춤이었다.
윤미라 〈달구벌 입춤〉 ⓒ옥상훈 |
윤미라가 홀춤으로 춘 〈달구벌 입춤〉(박지홍제 최희선류)은 홍매화가 그려진 열두 폭 병풍이 펼쳐져 있고, 소고는 무대바닥에 두지 않고 다리가 달린 낮은 대에 올렸다. 스승께 올리는 예(인사)로 보였다. 연둣빛 저고리에 자주고름, 금박 꽃잎이 박힌 푸른 색 치마를 입었다. 화사했다. 맨손으로 춤을 추다가 왼쪽 저고리 소매자락 안에서 명주수건을 빼서 들고 추는 수건 춤, 깨끗했다. 소고춤을 추기 전, 그 수건으로 허리를 질끈 묶으면서 춤의 정서가 확 바뀐다. 매력 있게.
임관규 〈한량무〉 ⓒ옥상훈 |
임관규의 〈한량무〉는 멋스러움과 호방함보다 마치 춤도 삶도 애써 꾸며 추고, 걱정으로 살 일만은 아니더라는, 담담하고 담백한 춤이었다. 심심할 정도로 단순하게 맺고 푸는 춤사위에서 마음을 경계하는 조심스러움, 서투름이 (춤기량과는 다른) 보이나, 그 서투름은 메마르고 적막하게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활력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장유경 〈선扇살풀이춤〉 ⓒ옥상훈 |
장유경의 〈선扇살풀이춤〉, 음악과 함께 (장유경이) 흰빛으로 무대를 가르며 등장, 고요하게 뒤 돌아 서있다. 한국춤이 가진 미적원리와 정신, 감정과 표현을 현대적 미감으로 풀어낸 춤으로, 춤 태가 아름답고 서늘했다. 깃털을 꽂은 흰색모자와 의상, 검정부챗살의 흰색부채에 흰색 명주천을 달았다. 모두 하늘을 향해 열려진 빈 마음, 흰빛이다. 가는 춤 몸집이 비(飛)를 나타내는 흰색과 잘 어울렸다.
전통 살풀이춤의, 몸 안쪽에서 태극을 그리면서 감아 채는 동작 등에서 볼 수 있는 감칠맛은 덜 하나 춤 선이 담백하고 섬섬한 미가 돋보였다. 극히 정제된, 전통춤 호흡에도 억지가 없다.
장유경의 춤에 연주자(남자)의 구음이 얹히자 춤의 정서가 달라진다. 전통춤은 같은 춤을 추어도 추는 이에 따라 춤도 다르고 흥취 또한 다르다. 이 춤 또한 춤판에 따라 변하면서 또 다른 춤 길을 낼 것이다. 한(恨)보다 신명과 흥을 아우르며 승화하는 내적 구조를 가진 춤이었다. 나이를 먹고 연륜이 쌓인, 이제야 추는 자신의 살풀이춤이다. 춤으로 일가를 이룬 것이다.
최미나 〈한恨〉ⓒ옥상훈 |
최희선선생의 조카인 최미나의 〈한恨〉, 살풀이 수건에 긴 살풀이수건을 겹쳐 들고 춤을 추다가, 긴 살풀이수건을 바닥에 둔 채 짧은 살풀이 수건만 들고 춤을 추었다. 생전 최희선선생이 ‘살풀이춤’이라 하지 않고 〈한〉이라 춤제목을 붙인 이유를 긴 살풀이 수건으로 짐작한다. 짧은 살풀이 수건에는 다 담아내지 못할 만큼, 삶의 애환이 크고 깊었던 것이리라. 추모 영상에서 본 고 최희선 선생의 춤태와 많이 닮았다.
〈입춤〉 ⓒ옥상훈 |
홀춤을 군무로 재구성한 18명이 춘 〈입춤〉(박지홍제 최희선류-윤미라 재구성)은 춤을 보는 맛이 있었다. 이은영의 춤이 돋보였다. 춤이 분명하고 단단하고, 야무졌다. 작은 춤 몸집에서, 춤을 향한 고집과 공부가 드러났다. 가슴 아래로 주름을 넓게 눌러 내려잡은 치마는 과하게 부풀려지지 않아, 동작이 잘 드러나 보였다. 군무진이 입은 의상의 색 조합이 모두 고아하고 아름다웠다.
무대는 ‘덧배기 춤’ ‘수건춤’이라고도 하는 〈달구벌 입춤〉이 얼굴이었다. 춤은 그 구조와 형식이 세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웠다. 이 춤을 ‘달성권번의 박지홍에서 최희선으로’ 그리고 지금, 윤미라가 추고 있다.
윤미라가 선생의 10주기를 기리기 위해 그의 제자들과 생전 최희선 선생과 춤 인연이 있었던 이들이 함께 고향인 대구에서 만든 이 무대는 어쩌면 자기 안에 간직한 춤들을 완성하려는 마음에서 비롯한 것일지도. 그리고 스승의 춤 그늘, 그것이 한때 자신의 춤 형식이고 철학이었음을 알고, 그 춤을 기억 속에서 단단하게 추상해냄으로써 춤 실천의 가치를 지니고자 함이었는지도. 윤미라가 춤으로 밝히는 자신의 춤 성장이력은 다시 실핏줄이 되어 누군가의 춤 성장 이력이 될 것이다. 대구 한국춤의 계보를 톺아볼 수 있는 의미 있는 무대였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