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중장년층 이상 세대는 리틀앤젤스하면 이미지가 하나쯤 기억날 것이다. 1962년 창단되어 1960, 70년대 냉전시대에 해외에서 빈곤국가 한국이라는 이미지를 씻는 데 이바지했고, 그 활동들은 국내에 널리 보도되곤 하였다. 대한뉴스에도 더러 등장하였다. 보도에는 으레 어린 천사들이 한국을 빛낸다는 찬사가 붙기 마련이었다. 그들의 레퍼토리에는 한국의 민요 같은 음악곡들도 있었고 시각적 스펙터클로서는 단연 활달한 민속춤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중에서도 농악에 등장하는 소고춤은 자반뒤집기, 연풍대 등으로 흔한 말로 화려한 몸놀림을 보여주는 레퍼토리로서 인기를 모았을 것이다.
리틀앤젤스는 당시 해외 공연에 나서면 몇 달씩 장기 순회 공연을 하였었다. 최근에 올수록 해외 순회 공연은 짧아지고 활동도 줄어든 편이다. 리틀앤젤스의 춤들이 신무용적 감성으로 다듬어진 한계도 있을 터이나 해외에 한국의 춤으로 한국을 알리는 역할은 컸었다. 이 점은 1930년대말 창단되어 1950년대 이래 러시아 민속춤을 러시아 바깥 특히 이른바 자유 세계에 전파한 모이세예프무용단의 활약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용이하겠다. 리틀앤젤스의 활동을 K문화, K댄스의 선구로 꼽는 시각도 있다. 근자에 디지털 화면을 휩쓴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범 내려 온다〉를 리틀앤젤스 이후 K댄스의 맥을 잇는 것으로 생각해봄 직하다.
리틀앤젤스, 말 그대로 어린천사들의 소고춤 말고도 농악-풍물에서 특히 소고춤은 백미 중의 백미라 할 만하다. 상모 달린 전립을 쓰고 소고를 두드리는 채상소고에서 기다란 연꼬리를 미친 듯이 돌려대는 순간 보는 사람의 얼이 빠지는 체험은 중독성이 강하다. 농경사회가 퇴조하는 등 사회 대변동은 물론이고 놀이문화가 변신을 거듭하는 와중에도 소고춤은 소고춤이고 그 특유의 매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주변의 변화에 신축성 있게 대응해서 소고춤의 생명력을 강화하는 미적 전략은 필요해 보인다.
고창농악의 소고춤을 무대에 재구성한 이벤트가 올여름에도 있었다. 김영희춤연구소가 기획 주최한 행사 〈소고놀음 4〉로서 올해로 5년째이다(서울남산국악당, 7. 17.). 전북 고창 지역은 농악이 성행한 지역들 중에서도 고깔소고춤이 유별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 또한 사회 변동에서 예외일 수 없었고 지역 농촌에서 소고잽이를 하던 어른들이 돌아가면서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소고춤을 이어나가는 형국을 보인다. 이번 공연에 올려진 것은 모두 9개의 레퍼토리로서, 소고춤을 고깔소고춤이나 채상소고춤 정도로 여기는 상식을 뛰어넘는 면모를 보였다. 소고춤에 담긴 잠재력을 다시 봐야 한다는 것이겠다.
2020년 〈소고놀음 1〉에서 시작하여 올해 〈소고놀음 4〉에 이르기까지 〈소고놀음〉은 해마다 유사한 편성을 보이는 가운데, 고창 이외 다른 지역의 소고춤을 함께 올리기도 하였다. 달구벌입춤, 진주교방굿거리춤, 고성오광대 문둥북춤, 통영오광대 문둥북춤, 권명화류 소고춤, 진주삼천포농악 채상소고, 최종실류 소고춤, 남원농악 채상소고 등이 올려졌다. 민속춤의 속성상 지역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것을 모아들여 소고춤의 세계를 파고든 셈이다.
올해 〈소고놀음 4: 허튼〉의 레퍼토리는 작년과 유사하게 〈고창농악 고깔소고춤〉 〈동동 듀엣〉 〈소고 3채〉 〈가야금산조와 소고 세산조시〉 〈질굿 소고〉 〈아리씨 소고(笑鼓)〉 〈풍장 고깔소고〉 〈아리씨구나~ 풍장소리〉 〈8소고〉이다. 〈8소고〉는 풍물패가 벌이는 놀이판인 판굿에서 펼쳐지는 집단 고깔소고춤으로 판굿을 5방진 가락과 함께 여러 구도로 풍성하게 끌어가는 것을 충실히 보여주었다. 〈아리씨구나~ 풍장소리〉는 집단 소고춤은 없는 집단 풍물놀이이다. 아리씨구나(아리시구나)는 전통사회 여름철 막바지 논농사의 김매기 후 풍년을 기원하는 풍장굿판의 농악 중에서 전남북 지역에서 부른 노동요의 후렴구(되받음 소리) 첫마디이다. 김매기 노동에서 흥을 돋우는 가락에 맞춰 농사 현장 논두렁에서의 풍물놀이가 재연되었다.
김영희춤연구소 ‘소고놀음 4’ 〈소고 3채〉 ⓒ김채현 |
그리고 고창 풍물패와 대거리하며 날렵한 자태로 고깔소고춤의 멋과 맛을 표출한 〈고창농악 고깔소고춤〉, 마을 길에서 추는 〈질굿 소고〉, 김매기 후 풍장굿판에서 구름소리에 맞춰 추는 〈풍장 고깔소고〉, 콩농사 노동 사이 노동의 고됨과 해방을 활달하게 표현하는 〈아리씨 소고〉는 홀춤으로 진행되었고, 세 사람이 개성을 발휘하며 어울려 추는 〈소고 3채〉는 3인무이다.
김영희춤연구소 ‘소고놀음 4’ 〈동동 듀엣〉 ⓒ김채현 |
이번 현장에서 이채로웠던 것은 〈동동 듀엣〉과 〈가야금산조와 소고 세산조시〉이다. 〈동동 듀엣〉은 설장구와 소고가 대거리하는 춤으로 소고가 설장구와 호흡을 맞추는 가운데 각자의 개성과 기분을 번갈아 발휘하도록 한다. 여기에 농악 소리가 가세해서 반주로 떠받쳐주니 분위기에 열이 나고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과정에서 오묘한 경쟁의 순간들을 덧붙인다. 관객의 추임새를 유도하려는 심산으로 각자 또는 서로 함께 하는 어름새가 수시로 개입해서 춤판을 고조시켜가는 연출 안목이 중요한 레퍼토리이다. 어울림과 시합을 함께 내지르는 놀이의 재미가 두드러진다. 그러려면 출연 연희자의 기량이 그만큼 출중해야 한다. 설장구의 권지혜, 소고춤의 박혜진, 두 사람은 무복(舞服) 뒷자락을 허공에 멋스럽게 휘날리며 순발력과 속도감으로 판을 펼치는 듀엣으로서 안성맞춤이었다.
김영희춤연구소 ‘소고놀음 4’ 〈가야금산조〉ⓒ김채현 |
〈가야금산조와 소고 세산조시〉에서 소고춤은 가야금산조 가락과 어울린다. 고창농악 고깔소고춤을 바탕으로 윤명화가 안무한 소품이다. 여기서 세산조시는 가야금산조 명인 김죽파가 지은 산조의 장단과 선율을 말하는데, 경쾌한 선율이 빠르게 휘몰아가듯 흐르는 가락이 축을 이룬다. 가야금산조가 먼저 분위기를 잡으면 소고꾼이 소고를 어른 후 춤에 나선다. 소고를 집어들어 몸을 급하게 회전하면서 무대를 연신 휘젓는 춤에 이어 비로소 소고를 친다. 소고를 힘주어 쳐서 내는 둔탁한 소리가 가야금의 청랑한 음색과 대조를 이룬다. 다시 소고를 바닥에 놓으며 앉은 춤과 선 춤으로 소고를 어르다 소고를 집어들어 재빠른 동작과 더불어 소고를 다시 쳐나가는 춤을 되풀이한다. 소고를 놓았다가 어르다가 집어들어 치는 과정을 가야금 선율에 따라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는 춤이다. 소고춤을 일테면 론도 형식으로 풀어내며 춤 재료로 활용한 것이 눈길을 끈다.
김영희춤연구소 ‘소고놀음 4’ ⓒ김채현 |
리틀앤젤스의 농악 레퍼토리에 이색적으로 고깔쌍소고춤이 나온다. 소고 2개를 허리춤에 단단히 묶어 2개의 북채로 치는 집단무이다. 이와 함께 1개의 소고로 진행하는 집단 소고춤이 같은 무대에 나온다. 30명 남짓 등장하는 농악에서 고깔쌍소고춤꾼이 10명쯤 되고 그 외는 모두 고깔소고춤이나 채상소고춤을 추는 모습이다. 이 사실은 리틀앤젤스가 소고춤을 개발하는 데 꽤 많은 관심을 기울였음을 말해준다. 소고춤을 솔로, 듀엣, 트리오... 수십 명의 집단무 어느 쪽으로 개발하든 소고춤은 활용도가 낮지 않을 것이다. 소고춤을 벗어난 소고춤도 〈가야금산조와 소고 세산조시〉에서 예시되었다. 소고춤을 어린애들의 춤 정도로 여긴다면 소고춤은 관심사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함께 이루는 재미와 활기찬 기운, 그리고 형상미를 두루 갖춘 면에서 소고춤은 탁월하며, 그 외 어떤 춤이 소고춤과 그렇게 겨룰 수 있을까. 디지털 시대에 놀이가 컴퓨터 모니터에서나 존재하는 기현상에 대응하려면 모니터 바깥에 실제 몸을 관통하는 재미와 기운이 넘치는 놀이가 잦아야 할 것이다. 소고춤도 엄연히 춤이고 강점이 있으며 심지어는 한국을 상징하는 춤이라는 인식마저 실제로 요청된다. 가령 〈호두까기 인형〉 과자왕국에서 소고춤이 등장하는 새 버전을 누군가가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뿐이겠는가. 디지털 AI 시대에 소고춤 이미지들을 영상화하는 것마저 상상할 때 소고춤도 말을 걸어올 것이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