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공동체의 춤 신명천지 마당굿 7
탈춤은 어떻게 마당판을 열고 있는가
채희완_춤비평가

현전 탈춤은 대부분 18세기 신흥민중예술 발흥기 이후에 새로 생겨나다시피한 봉건사회 해체기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이전의 것과는 모습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엔 중세적인 것, 원초적인 것이 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달리 보면 포스트 모던한 성격의 것도 엿보입니다. 현전 탈춤은 시대를 달리하고 있는 것들이 쌓여진 적층물인 셈이지요. 독특한 극작술로 민중의식이나 미의식으로 근대적인 면을 강하게 보이는가 하면 굿적이고 놀이적인 세시풍속의 하나로서 축전행사의 면도 동시에 보입니다. 그러기에 강조점에 따라 탈놀이로, 탈놀음으로, 탈굿으로, 탈춤극으로 달리 불립니다.

그처럼 탈춤은 굿적인 것(신성 제의, 생명에너지 교감, 벽사진경), 극적인 것(상황적 진실, 비판적 현실감, 희극적 갈등, 패로디), 놀이적인 것(유희충동, 재판놀음, 일과의 유화, 축전) 등이 혼유되어 있습니다.

탈춤은 앞놀이, 판놀음, 뒤풀이로 큰 틀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이는 무속굿에서 청신, 오신, 송신의 과정과 대비됩니다. 굿에서 오신이 핵심과정인 것처럼 탈춤에서도 판놀음이 중심부입니다.

그렇다면 앞놀이에 해당하는 길놀이나 고사굿은 중심부를 이끌어내는 도입부 정도의 몫일 뿐인가. 지금까지 대부분의 탈춤 논의에서는 길놀이나 고사굿, 뒤풀이는 연극적인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아왔습니다. 더군다나 이를 주술적이고 미신 같은 것이라 하여 아예 소멸되어 마땅한 것으로 보기도 했어요. 과연 그렇게 보아도 좋은가.

지난날 과도한 문명발전관으로 재앙을 맞고 있는 팬데믹 시대에 인간 삶과 문화의 행태에 대한 반성과 전망이 새삼 요망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굿에서 극으로의 발전 과정이 연극의 역사라는 관점을 뒤집어 놓고, ‘극에서 굿으로의 역설적 회귀’라는 시각을 도입해봄 직합니다. 그것은 새롭게 되살아나야 할 의미 깊은 열림 의식(opening ceremony)임이 분명하지요.

우선 길놀이입니다. 길놀이는 행사를 알리는 선전, 홍보 효과를 위해서, 그리고 시가행렬로 세를 과시하기 위해서 합니다. 그리고 마을 터닦기와 추렴의 방식으로 지신밟기의 역할도 맡아 지요. 그러나 길놀이는 이에 머무르지 않고 행사의 중심지로 행렬을 지어 가면서 발 닿는 곳마다 공연 공간이 되고 마는 길굿판입니다. 그래서 길놀이는 일상생활 공간을 공연공간으로 바꾸어냅니다. 이는 일상적인 것과 공연이라는 것, 그리고 사는 것과 예술생활하는 것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과 통합니다. 그리고 중심 공연공간을 둘러쌈으로서 길놀이는 주변부를 중심부 속에 아우르는 포괄적인 흡인력을 내뿜습니다. 이리해서 중심부는 강화되고 주변부는 유기화됩니다.

다음은 고사굿입니다. 본행사에 들어가기 전에 드리는 고사굿도 주변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사굿은 이 행사가 아무 탈없이 무사히 치뤄지도록 안과태평을 비는 소원풀이 대목입니다. 이러한 인사굿은 이 행사를 온 천지에 알리면서 말문을 여는 대목인데, 인간사뿐만 아니라 자연과 우주와 신을 동시에 초청하는 통과의례이기도 하지요. 그러기에 유동하는 공생 에너지를 교류, 교감하는 이런 과정이 있지 않고서는 본행사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도 하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주술적 차원이 아니지요. 우주생명의 기운과 교통하는 그 첫머리가 있지 않고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의 문제는 근원적으로 풀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은연중에 예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우주적 생명력 위에 중심행사는 품기어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 맞이굿 대목이야말로 온갖 연행의 생명력을 품고 있는 포태, 곧 놀이와 춤과 노래의 씨앗을 기르고 낳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신, 자연, 우주, 역사가 하나된 우주적 일체성 위에 인간의 삶을 얹어가며 사회적 영성 속에서 인간과 사회가 질적으로 변화해 가는 것이지요.

탈춤의 첫머리에는 으레 벽사진경(辟邪進慶)의 의식이 있기 마련입니다. 벽사의식이란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예축의 의례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놀이를 놀 판을 정갈히 하여 부정한 것을 거두어내 말끔히 씻어내는 ‘판씻음’으로 놀이판을 엽니다. 무당굿에서 ‘부정거리’ ‘청신맞이’가 바로 그러하지요. 세속적 공간을 판닦음이라는 행위를 통해 신성한 공간으로 바꾸어 놓고 거기다가 놀이를 붙입니다. 이때 노는 놀이는 그 내용이 아무리 보잘 것 없고 미천해도 거룩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못 견디고 험악하고 분통터지는 짓거리도 내놓고 풀어헤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탈춤의 공연 공간은 성속이 넘나드는 성긴 틈서리입니다. 근사한 말로는 비판적 초월의 신명풀이이지요.

그렇다면 이런 마당 공간에서는 어떻게 판을 열고 있는가.

탈춤은 놀이꾼과 구경꾼이 어울려 판을 짠다. 탈판은 연행자와 관중을 동시에 초청한다. 구경꾼이 탈판을 기웃거리다가 “한거리 놀고 갑세”하면 판 안에 나와 제 흥에 겨워 한 자리 놀다 들어간다. 제 사는 일이 제 책임이라는 자아의식이 팔자타령과 함께 제 얘기 남 얘기하듯 남 얘기 제 얘기인 듯 3인칭 화자의 눈으로 자기를 객관화하고 또 동시에 전지적 시각으로 집단자아화한다.

탈춤은 집단자아화한 사람들이 탈 많은 세상살이를 놓고 탈잡아 신명을 돋구는 희극적 갈등구조를 담은 한풀이자 신명나눔입니다. 그래서 탈판은 현대 민중삶의 해방공간일 수 있습니다.

봉산탈춤에서 보면 등장인물들이 하나 같이 놀이판을 찾아 나옵니다. 풍류정을 만나 아니 놀 수 없는 8먹중, 인물 병풍이 둘러친 곳에 장돌뱅이로 나온 신장수, 과거길 행차로 숙소 찾는 양반과 마부, 떵쿵하기에 굿판인 줄 알고 나온 미얄할미, 난리 통에 헤어진 할미 찾아나온 영감 등 놀기 좋아하는 뜨내기 구경꾼입니다. 이런 구경꾼이 등장인물로 전환되는 과정이 이미 극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관중에서 극중인물로 변화되고 있음을 연극적 약속으로 구경꾼이 동의함으로써 관중과 연행자는 작품 창작과 향수에 공동 기획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문화복합공간 속에 집단자아의 변화를 이벤트하고자 하는 현대 열린 연극의 새로운 지향점(open air theatre)에 적지 않게 상상력을 던져주는 독특한 극작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을 향해서 탈판은 그렇게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현대 탈춤의 창조를 위해서도 이를 유익한 발상법으로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또다시 덮쳐오는 팬데믹 시대에 맞서 각종 테마가 있는 마당굿판(축전)은 탈춤이나 마당극에 담긴 공생공락하는 민중삶의 방식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할 수 있습니다. 이런 때에 어떻게 마당굿 한마당의 판을 열 것인가 하는 과제에 이 극작술은 신선한 발상의 전환을 마련해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채희완
부산대 명예교수, 〈(사)민족미학연구소〉 소장,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이사, 〈창작탈춤패 지기금지〉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 『한국의 민중극』(엮음), 『탈춤』, 『한국춤의 정신은 무엇인가』(엮음), 『춤 탈 마당 몸 미학 공부집』(엮음), 『지극한 기운이 이곳에 이르렀으니』 등을 펴냈고, 그밖에 춤, 탈춤, 마당극, 민족미학에 관련된 논문과 춤 비평문이 있다.​​​​​​
2024. 9.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