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이 글은 27년 전 1997년 있은 첫 세계마당극 큰 잔치의 심포지움 발제문이다(9월 21일, 경기도 과천). ’97 세계공연예술축제, 세계마당극 큰잔치 심포지엄의 큰 주제는 ‘마당극, 그 문명전환의 예감’.
이 글은 ‘이다’, ‘이어야 한다’라는 말처럼 개념규정이나 그 당위성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임직하다’ ‘일 수도 있겠다’ ‘이었으면 좋겠다’ ‘그럴만하다’처럼 가능성과 개연성을 타진하려는 것이다. 가능성 중에서도 될수록 예측가능한 성과를 예감하여 ‘안’을 내는 발의의 것일 뿐이다. 상상력과 구상력을 통해 좋은 아이디어를 개발하도록 자유롭고 생산적인 공론(公論)을 위해 말 그대로 발안하려는 것이었다.
27년이나 지난 오늘 이 발안을 다시 꺼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당시의 문제의식이 오늘 지금도 유효하다는 판단이다. 문명전환을 희구하며 갖가지 노고를 기울일 동안 문명은 갈수록 심각한 위기를 보이지 않는가. 특히 올해는 마당극 60주년의 해이다. 말하자면 올해는 문명전환을 재촉하기 위해 마당극이 그 현장 실천을 새로이 다잡을 것을 결의하는 해이기도 하다. 27년 전 당시 굿, 팔관회, 풍류에서 마당극은 물론이고 (연)극의 혁신적이며 창조적인 판을 구상했었던 그 제안을 다시 꺼내어 함께 되새기려고 한다.
1. 극(劇)의 본연성 회복을 위하여
극의 본질은 무엇인가, 왜 극을 하는가. 새삼스럽지만 이런 질문에서부터 이번 행사의 의의를 찾아보자. 소리, 몸짓, 빛깔, 놀이를 중심으로 한 원초(연)극의 표현매체로부터, 또 한편, 일놀이, 놀이일, 신과의 교류, 자연과의 화합, 사회적응과 조정, 공동체성 등 극의 기능과 내용의 측면에서부터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잘 짜여진 희곡중심의 연극을 지양해온 현대 서구극의 방향전환도 재음미하면서.
짓, 놀음, 판, 굿 등 우리의 연희전통에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풍부한 해답꺼리가 숨어있을 것이다. “극에서 굿으로”의 역설적 회귀도 하나의 화두가 될 터이고. 이번 세계마당극 큰잔치는 극의 본연성 회복을 위한 지구촌의 ‘한마당’임직하다.
2. 지금 여기 ‘있는 자리’에서 출발하여
① 지금은 어느 때인가. 우리는 이제 21세기를 맞이하는 문명전환의 기로에 서 있다. 다음 세기를 어떻게, 무엇으로 예비할 것인가. 문명사적 위기라고 한다. 위기극복은 단위지역이나 개별국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당면한 현실과제이다.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세기말적 사상들, 자본주의로의 세계재편과 강점, 국제역학의 제국주의성, 지배체제의 경직성, 지독한 빈부격차, 개인적 사회적 병리현상들, 자연과 생태계의 우주적 전지구적 파괴, 기후위기, 인권침해와 인종차별주의, 반도덕성 등 여러 갈래의 문명사적 위기상황은 어떻게 대처하고 극복할 것인가.
② 20세기 말의 위기를 오히려 문명전환의 호기로 삼아 새로운 세기를 맞이할 채비를 한다. 세계마당극 큰잔치는 전지구적으로 연극인, 놀이꾼, 예술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새로운 문명전환을 함께 모색하고 예비하고 예축하는 세기말의 公論 ‘한마당’이다. 마당판에 올려놓아 말문을 틀 꺼리들은 무엇인가, 최소한의 공유지형은 무엇인가. 문명사적 전환이라는 거시적 시각과 함께 그 문제의식의 뿌리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지금 여기에 ‘있는 삶의 자리’에서 출발하자. 말하자면 동아시아권에서, 좁혀서는 한국적 상황에서, 더 좁게는 행사장인 경기도에서부터 출발하자. 말하자면 거대한 함정같은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감싸들고 있는 경기도민의 삶과 꿈과 현실과제풀이를 입지지점으로 하자. 즉 문명전환에 대한 우리의 문제의식을 대중의 삶과 좀더 밀착된 곳에서 찾아보자는 것. <지구촌→ 동아시아권→ 한국→ 경기도>의 방향이 아니라 그 역(逆)방향에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이는 ‘지역의 자치역량을 토대로 한 세계화’라는 말과도 연관된다. 그러한 방위는 민족극계와 기성연극계, 한국연극과 동아시아 연극, 그리고 세계연극과의 연계고리이기도 할 것.
범지구적 보편성 위에 지역적 특수성으로 개체 삶의 창조력을 계발하는 데 역점을 둔다는 것이고. 이를 위해 민족극의 활동은 그 힘을 비축해왔다고 보아 좋을 터.
줄여본다면 세계마당극 큰잔치의 작품성향은 두 가지. ①세기말적 위기에 적극 대처하여 전문명사적 전환을 예감 ․ 예축하는 연극, 그리고, ②대중의 삶의 자리를 토대로 하여 이들의 삶의 위기와 진실과 미래전망을 스스로의 연희전통 속에서 형상화하는 진보적인 민중극. 그렇다면 왜 마당극인가.
3. 우리의 연희전통 속에서 갈 길을 찾아
마당극은 문명전환의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는가. 마당극은 민중의 삶의 꿈을 실현해줄 세계연극적 대안인가.
마당극이 지닌 정신적 배경과 양식적 특성, 그리고 사회문화적 기능에서 위 물음의 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예술이든 실생활의 시공간과 예술로서 새롭게 구성되는 문화적 시공간 사이의 질적 차이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마당극은 그 두 시공간의 넘나듦이 다른 연극, 다른 예술양태에 비해 매우 자유롭다. 이 점이 마당극의 정신과 양식과 기능을 형성해주는 독특함이라 본다.
두 시공간의 넘나듦이 자유로운 이러한 비분리성이 때로는 예술로서의 품격과 완성도를 질적으로 손상 ․ 저해하기도 하였지만, 또한 이러한 특성에 기반하여 마당극은 발전해왔던 것. 자연적 생활적 시공간과 문화적 예술적 시공간이 자유롭게 유동하는 “열린 틀”이 연행행위와 관극행위를 더없이 직접적이게 한다. 때로는 삶의 실제 양태 자체가 마당극 공연물인 듯 보일 때도 있다. 실제 삶과의 밀착이라는 마당극의 특성은 ‘살풀이’에서 더욱 적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살풀이는 말뜻 그대로 살, 즉 죽음, 억압, 굴레, 재앙, 환란, 생태계 위협 등 온갖 우리를 못살게 구는 ‘죽임’의 세력을 풀어 물리치는 과정이다. 마당판에서는 이러한 살풀이 과정이 실제 상황화된다. 적대세력을 확인하고 (이는 현실인식의 공유화 또는 유기화 과정이다) 이와 대결하여 적대세력을 풀어서 물리치는 과정이 여러 모습으로, 현장적으로, 당사자인 관중과 더불어 마당판으로 구성된다. 그런 만큼 현실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 전형적인 사회극, 또는 진보극으로서 마당극의 기능적 특성을 담지케 했다.
어쩌면 전지구적 문명사적 위기에 대한 연극적 대응이란, 위기현실의 인식과 위기감의 공유를 바탕으로 이를 판 안으로 끌어들여 그 위기를 풀어 물리치는 과정을 실제 상황화함으로써 미리 내다보이는 것, 좋은 해결이 나도록 비는 것(예축)이 될 법하다.
연희자와 관중이 함께 창조하는 문화적 예술적 시공간이 자연적 생활적 시공간과 비분리된 채 살의 되죽임을 통해 되살림의 생명에너지를 충전시키는 마당극은 바로 그러한 점에서 창조적 생명의 충일인 신명을 불러일으킨다. 신명은 해방기운을 담지하고 있는 생산적 ․ 출산적 정취가 고조화된 상태이다. 공유결합이 가능한 신명은 감성독재의 폐쇄회로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개별적 감정이입의 통로를 어떻게 열어젖혀 개별적 감정이입들 사이를 어떻게 유기화 ․ 심오화할 것인가 하는 예술향수체험의 근원적인 문제에 그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해줄 것이다.
마당극의 연행공간은 삶의 현장이자 유동하는 상황판이다. 속된 것과 거룩함이 넘나드는 마당은 일상적인 것의 거룩함을, 일상의 사소한 것이 구원의 토대이자 출구임을 일러준다. 그런만큼 삶은 마당판에서 영성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마당에서의 연행은 우리들로서는 신성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무기물까지 모두 포함하여 삼라만상 모두가 자기생성활동을 하고 있고 공생 ․ 협동하는 유기적 존재라는 생명사상과 통해 있다.
마당극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터인 ‘마당’을 매개로 하여 거기에 인간의 문제 뿐만 아니라 자연 ․ 신 ․ 우주 ․ 역사 등 온갖 문명사적 문제가 동시에 초청 ․ 결합되는 것으로, 신 ․ 자연 ․ 우주, 역사가 하나가 된 우주적 일체성 위에 인간의 삶을 얹어가며 사회적 영성 속에서 인간과 사회가 질적으로 변화해감을 예시해 준다. 작은 마당판 안에 우주의 全一性이 감싸도는 마당극은, 작은 개체 속에 엄청난 전체성이 유출된다는 신과학사상, 나아가 생명사상의 또 하나 살아있는 예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마당극은 “민중삶과 연관된 기본 모순과 갈등을 공동체적 관심의 표적으로 부각시키고 거기에서 성취된 사회인식을 민중진실로 전환하여 세계사적 미래전망을 예축하는 삶의 축전”이라는 마당굿 정신의 산물이자. 민중생명사상에 토대를 둔 한국의 독특한 극양식으로 개발되어온, 개발되어 갈 현재진행형의 것이라 보아 좋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지역, 종족, 환경의 배경을 달리하면서 빚어낸 세계 각 민족의 다양한 형태의 마당극이 있음을 넉넉히 살펴볼 수 있고,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 세계연극적 성과를 나누어가짐은 이미 그 자체 마당극적이기도 할 것.
4. 세계마당극 큰잔치 연출구상을 위한 메모
① 굿적 발상
우리의 연희를 지칭하는 전대의 말로는 짓, 판, 마당, 굿 등이 있다. 짓은 의사소통을 매개해주는 원초적인 동작이어서 연극의 근원적 의미인 의사소통으로서의 행위를 잘 짚어내주는 말인 동시에 사람으로서 할 노릇 곧 최소한의 도덕적 인본성을 지시해주는 사리분별의 행위이기도 하다. 판은 일정한 틀 속의 짜임새를 뜻하는 동시에 편싸움으로서의 연희현장이기도. 마당은 이러한 짓거리가 한판 벌어지는 역동적 동참의 상황현장이자 여러 국면을 벌여가며 판가름내는 유동적인 짜임새이기도 하다. 이러한 마당은 일상생활공간이라는 뜻과 함게 일상적인 것이 영성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판이기도 하다. 마당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연극적 상상력의 신통함은 ‘보잘 것 없는 삶이 거룩한 삶과 다르지 않다’라는 사실에 있다.
짓과 판과 마당을 아우르면서 큰 한통속을 이루고 있는 굿은 여러 겹의 중층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흔히 굿은 무속의례를 지칭하는 무당굿으로 좁혀보는 수가 많지만 마을굿, 풍물굿, 두레굿, 놀이굿처럼 뜻하는 바가 다양하다. 굿은 놀이적인 연극, 연극적인 놀이를 뭉뚱그린 연희일반을 말하기도 하고 난리굿처럼 집단적인 대동놀음, 또는 집단행위의 난장을 지칭하기도 한다.
무속굿만 하더라도 원초적인 종교심성이 연행의 모습으로 구현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거꾸로 연행방식을 통해 원초적인 종교심성을 담아낸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후자, 곧 놀이를 놂으로써 신과 자연과 우주와 인간이 교감한다는 것은 지극한 연극적 발상이다. 또 두레굿은 공동협업의 노동형태와 깊이 맺어있어 공동노작의 일자체를 굿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이러한 두레굿, 놀이굿, 굿노동에서 연극의 단초가 마련되었고,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연극의 기원이 이러한 것에 있음은 널리 공인되어 온 바이다. 현대연극의 새로운 물줄기도 이러한 원초연극성의 회복에 있지 않나 싶다. 굿에서 극으로 진전되어온 연극사의 진행방위가 역설적이게도 다시 극에서 굿으로 의식적으로 원시반본하는 데에서 새로운 시대의 연극을 위한 의미지평이 열린다. 마당굿은 한마디로 공동문제의 사회적 공유를 위한 문화적 대응방식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마당굿은 민속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고 현대사회에서도 유효한 연극적 틀일 수 있겠다. 마당굿을 세계미래전망을 향한 삶의 축전이란 언급도 이런 맥락 속에 있다. 8, 90년 집단적인 민중연희의 정형으로서 마당굿은 여러 양태로 실현된 바 있다.
여러 인접장르가 상호교류하여 분담과 병진을 통해 단순집합이 아니라 유기적 총체연행물로 행사된 노래판굿도 그 중 하나다. 이는 시가악무극일체로서, 전래의 악가무일체 전통, 산악백희전통을 현대적 개념으로 집체화한 것이다.
큰 행사, 큰 굿판을 벌이자면 어떤 계기에 의해서 행해지는가, 동기부여가 중요하고 동기부여를 실제물로 구현시키는 기획의 측면이 중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곧 어떤 기획적 마인드, 마음 층층이 속에서 역할을 분담하고 분업화할 것인가.
그러한 준비과정자체는 연행행위가 아니지만 굿에서는 그것이 곧 굿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첫출발점이기도 하다. 대회장, 집행위원장, 사무요원 등 행사의 중핵인사를 뽑는 일에서부터 터를 잡는 일까지 이런 사전 준비작업부터 이미 굿은 시작된 것.
예술로서의 연극은 막이 오르면서 작품이 시작된 것으로 보지만 굿은 준비단계에서부터 이미 연행행위로 본다는 것인데 그런 만큼 이벤트성이 강하다고 하겠다. 한 건을 올리는 것, 그리고 담당자는 목욕재계하고 하듯 일상의 금기사항을 지켜 일정기간을 두고 잉태의 고통을 거치듯 몸과 마음으로 어둠의 터널을 지나가게 하는 거기에서부터 굿은 시작된 것이다.
또 굿에서는 전야굿, 개막굿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말하자면 굿의 일반구조인 청신 ․ 오신 ․ 송신의 첫머리인 청신, 곧 신맞이를 위한 터닦기, 열림굿이다. 이는 중심부 행사인 오신을 위해 부차적으로 배치해놓는 절차가 아니다. 중심행사의 중심테마를 위해 그 주변을 둘러싸주고 있는 것. 중심부를 가능케하고 강화 ․ 확장하기 위해, 터에 모인 정기를 새롭게 개변시키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굿판이 이루어질 수 없기에 이는 단순히 주변부 행사에 머무르지 않는다. 전야굿, 열림굿이 잘되어야 정작 중심행사도 잘된다. 개막식의 중요성이 그러하다. 이들은 주종관계를 넘어서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한통속의 것. 중심부의 강화와 주변부의 유기화가 큰 굿판의 핵심적 과제이다. 앞놀이, 길놀이도 마찬가지. 길굿, 마을길닦기, 지신밟기 등의 원천적 의미를 지니면서 길놀이는 시가행렬로서 선전홍보효과나 세를 과시하기 위해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 삶의 공간을 되짚어가는 길놀이는 행사자체가 실제 삶의 공간 속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일러주고, 나아가 발닿는 곳마다 공연공간이 되고 마는 공연공간의 확대이면서, 중심지역(준비된 공연물 공연공간)을 주변부로 감싸안으면서 또한 주변부를 중심체제로 아우르고자 하는 포괄적인 흡인력을 방출하는 것. 마을전체를, 도시전체를 공연공간으로 한다는 점에서만이라도 길놀이, 앞놀이의 의미는 강조되어 마땅할 것이다.
또한 길놀이, 앞놀이의 행렬패는 이 행사의 당사자가 누구인가를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동학 100주년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벌어진 역사맞이굿의 길놀이는 역사현장과 공연공간의 결합이었기에 거기에 참여하는 관중의 태도는 관람자, 사건목격자, 증시자의 태도에 머무르지 않고 사건의 당사자, 공연의 출연자, 기획요원의 한사람이라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 강렬한 반응과 적극적 참여로서 행사의 주인이 되고만 것이었다.
고사굿을 지내는 것도 마찬가지. 고사야말로 아무탈 없이 행사를 치루도록 안과태형을 비는 소원풀이의 대목일 뿐 아니라, 사람사는 땅을 매개로 하여 사람과 자연, 우주, 신이 동시에 초청되는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이러한 열림판굿으로서 유동하는 공생에너지를 교감 ․ 교류하는 것이어서, 이러한 생명력 위에 중심행사는 품기어 있는 것. 요약한다면 이런 대목들은 중심행사의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 행사를 가능케 해주는 연행적 생명력의 포태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막행사는 연행공간을 판닦음, 판씻음하여 정갈히 하는 것인 동시에 천지사방에 행사를 고지하면서 전체판의 말문을 여는 메시지의 선언자리이기도 하다. 축전의 중핵 메시지가 연행으로 공포되면서 이러한 씨앗이 뒤따른 연행되는 공연물의 내재적 주제로 분산배치된다.
이번 큰잔치의 핵심메세지를 무엇으로 잡을 것인가. 개막식, 열림굿의 구체적인 형상은 어떠한 마당판적 구도에서 잡혀질 것인가. 굿도 보고 떡도 먹는 푸짐한 볼거리, 먹을거리, 빌거리는 어떠한 기획마인드에서 제공될 것인가.
② 팔관회(八關會)적 발상
상고대 제천의식에서부터 내려온 집단가무의 전통은 신라 ․ 고려에 와서 8관회와 연등회로 이어졌다. 연등회가 불교적 행사라면 8관회는 토속신에 대한 행사로서 민 ․ 관 ․ 군 ․ 합동의 전국가적 제전이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조선조에 이르러 이러한 대규모 국민화합행사는 축소되거나 소멸되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민간인들과 함께 행정당국, 기업체, 교육기관, 사회문화단체를 비롯하여 온 국민의 동참 속에 거행되었다고 하겠다.
이번 행사는 경기도 자치단체의 배경 아래 이루어지는 전경기도민, 나아가 한국민, 더 나아가 세계마당극 관계자와의 연합기획 속에 수행될 예정으로 되어 있다.
또 토속신에 대한 제사는 단순한 종교의례차원을 넘어서 자연공경의 뜻과 함께 인간과 더불어 관계 맺고 있는 모든 만물에 대한 공경심도 포함되었음직하고 이들과 더불어 만들어낸 생산물에 대한 섬김과 나눔의 큰마당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팔관회를 벌이는 이유 즉 동기부여는 단순한 국가통치적 공동체성 강조에만 머무르지 않았을 터이고 그때그때마다 현실적인 과제 해결을 주요동기로 큰 주제 속에 몇 가지 세부주제가 분산배치 되었을 것이다.
세계마당극 큰잔치도 마찬가지로 포괄적인 캐치프레이즈 속에 여러 가지 다양한 주제가 병렬, 중층배치될 법하다. 이를 우리는 통일의 다양화라 칭할 수 있을 터. 통일적인 것이 다양한 갈래로 각기 새로운 개체를 형성한다는 것은 한가지로 통일된 것이 자기전개하는 과정이되, 이 과정이 개체의 창의적 자주성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개체는 자주적이되 타자와의 연관 속에 유기화되어 있다. 다양의 통일과 통일의 다양화는 단순한 순차적 단계이론일 수 없고 그것은 한 가지로 열두 가지를 말하는 부분과 전체의 연산화(連山化)이자, 민중생명관의 극구조이기도 하다.
8개의 개별적인 큰 가설무대를 설치하고 가무백희, 산악백희로서 온갖 연행물을 동시다발적으로, 때로는 시차제로 연행하면서 이를 이동산대로, 이동통로무대로 연결시켰음을 새로운 공연공간 구성에 대한 연행적 상상력의 수원지로 삼아봄직도 하다.
세계마당극 큰잔치에 동원되는 모든 행사(부대행사 포함)와 연행물은 그 자체가 한판 큰굿으로서 하나의 연행작품이다. 전체로서의 한 작품 속에 개별단위행사와 연행물은 부분의 독자성으로 개별화되면서 부분과 부분의 유기적 관계 속에 전체를 대표한다.
현지의 지형지물, 지세를 토대로 자연친화적 관계를 근간으로 두고, ‘열린틀’로서의 공연공간도 야외 노천, 체육관, 프로시니엄 무대 등을 모두 활용한다.
요약하면 이번 세계마당극 큰잔치의 연출적 구상력은 8관회적 흐름의 현대마당굿적 변용이라 하겠다.
③ 풍류(風流)적 발상
풍류는 동양의 유 ․ 불 ․ 선을 아우르는 외에 기독교 및 여타 외래종교들, 그리고 사양의 과학과 철학의 깊은 뜻마저 융합할 수 있는 우리의 오랜 지혜의 표현이다. 풍류는 또한 氣와 몸으로 집약되고, 멋, 삶, 신명으로 요약된다. 그러기에 풍류는 인간의 우주적 정체성과 인간과 생명계를 아울러 이롭게 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근원적인 화쟁(和諍)의 사상이다. 풍류의 핵심은 접화군생(接化群生)에 있다. 삼라만상 뭇 생명체가 서로 마주치며 서로 변화하고 진화하면서 드디어 서로 감화해나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풍류사상이란 인간 스스로 자기가 우주적 총체임을 깨닫기 위해 몸과 마음과 도리를 연마하고 자연의 산천을 찾아들며 물질과 생명 속에서 왕래하는 뭇신령과 대화하는 살림의 사상이다. 갈등 속 깊은 화해와 생태계의 질서회복으로 나아가게 하는 새로운 현대사상의 대안이다. 이러한 풍류사상이 오랜 역사 속에서 그 진실한 뜻이 왜곡, 굴절, 퇴색되어 왔다. 유한계층의 악가무를 통한 미적 취향의 향유를 넘어, 풍류사상이 인간의 자기발견, 이웃과의 친교, 특히 자연과의 화해, 나아가 전 우주 삼라만상과 사회구성체의 ‘생명과 평화’라는 동아시아 지혜로서 현시대에 창조적으로 부활하는 일이 절실히 요청된다.
풍류의 핵심은 관계와 관계를 맑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우주와 깨끗하고도 유화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마당극과 마당굿은 나와 사회와 지구와 우주의 관계를 맑게 한다는 데 지극한 현대문명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
채희완
부산대 명예교수, 〈(사)민족미학연구소〉 소장,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이사, 〈창작탈춤패 지기금지〉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 『한국의 민중극』(엮음), 『탈춤』, 『한국춤의 정신은 무엇인가』(엮음), 『춤 탈 마당 몸 미학 공부집』(엮음), 『지극한 기운이 이곳에 이르렀으니』 등을 펴냈고, 그밖에 춤, 탈춤, 마당극, 민족미학에 관련된 논문과 춤 비평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