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슬픔과 남은 것들에 대한 외로움 때문일까? 누군가의 삶과 죽음에 대한 애환이었을까? 자동차 뒷문 뒤에 붙어있는 작은 창문인 벤트글라스를 얼굴에 들고 관객을 바라보는 한 소녀가 저 멀리 지하주차장에서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야’ 곡소리를 울리며 등장하고 곡소리를 더하는 또 다른 무리의 무용수들이 그녀를 따라 행렬을 이룬다. 관객들은 무용수들을 따라 우르르 이동하며 허겁지겁 휴대폰 카메라를 들어보지만 주어진 관람동선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휴대폰을 내리고 고개를 기웃 기웃해보니, 주차된 트럭들과, 쌓인 자동차 부품들 사이로 무용수들의 모습이 보인다. 마치 영화가 시작될 때 도입샷을 보여주는 듯, 주인공의 얼굴을 곧바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풍경과 분위기,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피사체의 그림자만을 흐릿하게 보여주며 관람객에게 인물들이 어디에 있으며 어디에서 이 행위가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준다. 이리저리 헤매며 공연의 시작장소를 겨우 찾아온 관객들은 그제서야 회색빛의 낡은 건물을 두리번거리며 깨닫는다.
이 공연의 무대는 장안평 자동차부품상가 다동이고, 무대장치들은 커다랗고 낳은 회색 건물들과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만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 모르는 자동차부품들이다. 무대와 관객 사이의 경계가 무너진 어색한 상황 속 무심한 듯 적응을 해 보는 수밖에 없다. 장소특정적 퍼포먼스만의 짜릿한 순간이다.
일일댄스프로젝트 〈풍정.각(風情.刻) 장안평〉 ⓒ이운식 |
도시공간들을 주제로 장소특정적 퍼포먼스를 하며 영상기록을 남기고 있는 송주원 안무가의 일일댄스프로젝트는 2019년 10월 19일 오후 다섯시, 열 한번째 〈풍정.각(風情.刻) 장안평〉 공연으로 1970년대 이래 중고차 매매와 자동차부품생산의 메카로 기능해 온 자동차산업의 거점도시 ‘장안평’에 주목했다.
시간이 누적된 도시의 장소에서 무용수들의 삶의 서사를 몸짓으로 중첩하고, 지역의 특수성과 가치, 도시개발과 재생이슈로 변화하는 장안평의 모습을 장소특정적 퍼포먼스이자 산책형 공연으로 담아냈다. 소셜미디어와 곳곳의 온라인게시판을 통해서만 알려온 모호한 장소안내를 보고도 약 80명의 관객이 장안평 자동차부품상가를 찾았고 문을 닫은 고요한 상가의 주말이 60분동안 전새미 의상디자이너의 컬러풀한 80년대 의상을 걸친 열여섯 명의 전문무용수와 비무용수들의 움직임, 소리예술가 김보라와 조은희의 엠비언스로 울림이 가득했다.
지난 2월부터 장안평도시지원센터와 서울시의 후원으로 〈장안평을 춤으로: 댄스필름 마후라〉의 촬영과 연계워크숍이 시작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송주원안무가와 일일댄스프로젝트의 참여자들은 장안평 지역에 대한 리서치를 해왔으며 공공예술분야 독립기획을 하고 있는 이경미 기획자의 협업으로 10월의 맑은 가을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공간을 몸으로 느끼는 순간들이었다.
일일댄스프로젝트 〈풍정.각(風情.刻) 장안평〉 ⓒ이운식 |
공연은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던 2월의 장안평자동차부품상가를 움직임으로 기록한 댄스필름을 상영하며 시작되었고, 무용수들의 곡소리를 따라 공연의 도입부를 선보인 후, 관객들은 소리예술가 김보라의 피리소리와 목소리에 이끌려 공간을 따라나섰다. 건물 가운데 직사각형 모양으로 크게 뚫려있는 중정 주차장에서는 상가의 부품들이 하모니를 이루는 듯한 조은희 음악감독의 엠비언스에 김윤하, 김호연, 임정하 무용수가 부품들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은 천진난만하게 보이는 동네 꼬마들이 부품을 가지고 소꿉놀이를 하듯 장난스런 움직임과 컨택을 선보였고 곧 관객들은 건물 안으로 초대되었다.
다시 소리예술가 김보라의 종소리에 이끌려 들어간 건물 안에서 상자와 재료들이 가득 쌓여진 좁은 복도를 지나는데 한 가게의 사장님이 문을 슬쩍 열고 관객들을 스윽 바라보더니 다시 쾅 닫고는 탁탁 잠궈버린다. 퍼포먼스였을까? 굳게 닫힌 문을 지나니 차가운 콘크리트 계단에, 그리고 소화전 뒤에 무용수들이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올라간 곳은 네모난 중정이 내려다보이는 복도공간이고 이번에는 반대쪽 복도에서 부품들과 움직이고 있는 무용수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멀리 보인다.
일일댄스프로젝트 〈풍정.각(風情.刻) 장안평〉 ⓒ이운식 |
관객과 무용수들 간의 거리를 좁혔다 넓히는 것이 혼란스럽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한 듯 관객들은 서서히 공연의 일부가 되어가며 건물의 온도를 느낀다. 윗층에서 보이는 풍경은 무용수들의 움직임 뿐 아니라 옥상에서 고개를 빼꼼 내미는 상인의 표정, 생전 처음 보는 현대무용을 휴대폰 카메라로 재미있게 찍고 계시지만 계속해서 걱정하는 눈빛을 보내는 경비아저씨의 눈빛, 반대편으로 보이는 또 다른 관람자들의 혼란스러운 움직임들이다. 그리고 무용수들은 이들의 움직임과 체온에 반응하는 듯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이번 작업을 안무한 송주원, 손나예 안무가들은 즉흥적인 상황들에 분주하게 다음 장면들을 준비하는 듯 앞서 나가며 계산되지 않은 상황을 계산 중이다. 그렇게 2층, 3층까지의 능동적, 선택적 동선이 이어지고 복도 끝 창가를 배경으로 나연우 무용수의 솔로가 이어진다. 종이상자와 구부러진 강철막대기들 사이에서 무뚝뚝하게 움직이는 나연우 무용수의 움직임은 바쁘게 장소를 탐색하던 관객들을 잠시 멈추고 외로운 장안평 자동차부품상가를 바라보게 한다.
사실 서울시는 2015년 장안평 일대를 도시재생활성화지역으로 선정하고 자동차 관련산업을 중심으로 도시재생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하기 시작했고, 2018년 본격적으로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기반형 도시재생 사업추진방안을 마련했다. 그 때문인지 무용수의 움직임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도시에서 외로이 옛 공간들을 기억해내는 듯 침착하고 무덤덤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풍정.각(風情.刻)〉 작업은 공연을 위해 장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가 작품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제공해 왔고, 이번 장안평의 공간들에서도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통해 작은 부품들과 공간들을 상기시켰다.
일일댄스프로젝트 〈풍정.각(風情.刻) 장안평〉 ⓒ이운식 |
마지막으로 관객들이 이끌린 곳은 신축개발된 높은 아파트들과 낡은 상가들 사이로 저녁 여섯시, 공연이 시작한 지 한 시간 지났을 때 노을이 뉘엿뉘엿 지고 있는 옥상 공간이다. 무용수들의 움직임도 그렇지만 10월의 공기와 장안평의 낯선 분위기가 무엇보다 돋보이는 공간이다.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던 관객들이 갑자기 이미 어두워진 건물의 건너편 1층 지하 주차장입구로 시선을 돌린다. 어두운 건물의 그림자 사이로 어느새 내려간 무용수들이 쓰레기통 옆 주차장 입구에 몸을 눕히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여운이 가득한 채 신비하게도 자연의 암전이 이어지고 공연이 마무리된다.
시간의 축척으로 변형되고 사라진 듯 현존하는 실제의 장소에서 전문 무용수와 비전문무용수의 몸짓으로 말하고 쓰고 그리는 일일댄스프로젝트의 공감각적 신체의 언어는 ‘소통’의 제한적 공유방식을 새롭게 전환해 관객들로 하여금 정서적, 동시대적인 교감을 유도하며 잊힌 공간을 새롭게 해석했다. 무용예술과 퍼포먼스아트, 공공예술의 경계에 있는 모호한 프로젝트이기에 앞으로의 행보를 예상할 수 없지만 어쩌면 도시공간의 아카이빙 역할을 적극적으로 해 내고 있는 일일댄스프로젝트의 작업은 무용이라는 장르를 떠나 사회문화적으로 기억될만한 자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장수혜
독립기획자. 동국대 공연예술학부와 동 대학 영어통번역학과 졸업. 시애틀대학교 예술경영 및 리더십 석사. 2008년부터 연극, 뮤지컬, 음악, 무용 분야에서 제작 및 기획업무를 해왔고 최근 서울세계무용축제 국제교류팀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현재 비영리 예술 및 독서교육단체 책누나프로젝트를 운영하며 공연예술 국제 코디네이터 및 독립기획자로서 공연예술의 국제교류, 각 장르 간의 협업, 예술과 사회의 관계형성에 관심을 두어 연구하고 있다.